"1892년 태어난 셋째 아들(벤야민) 역시 불안의 형상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결정/결단의 형식 속에서 살았다는 점에서 아버지와 두 형을 닮았다. 그러나 결정/결단을 위해 사용한 방법이 소망이나 믿음이 아닌 사랑이었다는 점에서 그는 유별나다."
"결정/결단을 위해 사랑을 사용"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아마도 그건 저자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인공 뮈시킨 공작에 빗대 이야기하는 벤야민적 태도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정신적 삶의 이상에 복무하는 자가 마땅히 취해야 할 자세로서 '경건한 마음'과 '겸손'의 태도, 삶이 곧 죽음에 직면해 있음을 아는 피조물적 자세"다. 이 세계를 "근본적으로 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축복받지 못한 피조물의 세계, 몰락의 세계로 파악하는 바울-마르키온적 신학"에 근거하는 이 태도는, "죽음을 삶의 일부로서, 삶과 동일한 것으로서 맞아 들이"면서, "위험한 죽음에 맞서 (…)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그 위험에 몸을 내맡기는" "수줍음" 혹은 "삶 한가운데에서의 완전한 수동성"으로 특징 지워진다. 삶 한가운데에서 "관계를 위해 전적으로 헌신"함으로써 "모든 관계의 건드려질 수 없는 중심을 사는 것", 그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존재론적 중력"을 통해 "세상의 모든 일과 사람을 그에게로 끌어당기는" "성스럽고 냉철한" 태도가 바로 그것이다.
| ▲ <부서진 이름(들)-발터 벤야민의 글상자>(조효원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
슈미트에게 '예외상황'이 결단/결정을 통해 질서를 세우는 주권자적 행위의 출발점이라면, 벤야민은 기존 규범과 질서의 유효성이 유예됨으로써 생겨나는 이 권력과 질서의 공백상태를 '상례화'시키려 했다. "처절한 결단의 파토스로 불안과 싸우고자" 했던 슈미트가 비결정성에 맞서 질서를 지키고자 했다면, 벤야민은 바로 그 비결정성을 통해 기존 질서를 중단시키고 유예하며, 그 우연적 성격을 가시화시키면서 신적 폭력, 메시아적 결정/결단이 도래할 때를 기다리고자 했다.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심판하지 않고", "다만 이 세계에 머물 동안 '인용'과 '지우기'를 통해 조용히 다가올 '최후의 심판'을 준비하며 기다리는" 태도, "메시아의 왕국으로 하여금 '지극히 조용하게 다가오게 만드는", "초월적 심판으로서의 기다림"의 태도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이런 태도를 "결정/결단을 위해 사랑을 사용하는" 것이라 규정하는 저자는, 벤야민과 슈미트를, 내가 보기에 부당하게 근친관계로 만든다. 이로부터 이 책의 논지를 불안하게 하는 내적 긴장이 생긴다. 예를 들어 아래 인용문에서 저자는 슈미트의 낭만주의 비판에 크게 공감하는 듯하다.
"그(슈미트)는 낭만주의자들을 '기연주의자 Occasionalist'라고 불렀는데 (…) 기연주의란 항상 가능과 미래를 현실과 현재의 우위에 두는 것을 뜻한다. 기연주의자들이 그렇게 하는 까닭은 자아를 우주와 같아질 정도로까지 확장하고 싶은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슈미트는 이렇게 썼다. "그들은 영원한 생성과 결코 완성될 수 없는 가능성의 상태를 구체적인 현실의 제약성보다 앞서 선택했다. 왜냐하면 실현된다는 것은 언제나 무수한 가능성 가운데 하나일 따름이며 실현의 순간에는 다른 무한한 가능성은 모두 배제되고 하나의 세계가 좁은 현실로 인하여 파괴되며, '수많은 아이디어'가 보잘것없는 결정으로 말미암아 희생되기 때문이다." 자아가 우주와 같아져야 하므로, 우주의 작은 일부분에 불과한 현실이 자아를 제약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기연주의자들은 심지어 우주와 같아진 뒤에도 여전히 더 큰 우주, 우주의 초월을 꿈꿀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거대하고 엄청난 사상적 원리에 기반해 있음에도 기연주의자들, 그러니까 낭만주의자들의 실제 행동은 기회주의자들의 그것과 별다르지 않았다. 적어도 슈미트가 보기에는 그랬다. 그들은 결코 결정/결단하지 않고 다만 무엇에든, 누구에게든 항상 '업혀갈/묻어갈' 뿐이다. 모든 결단을 이렇게 멈추게 하는 데서, 다시 말하면 모든 비합리적 태도 속에서도 유보하고 있는 합리주의의 잔재에서 낭만주의적 아이러니의 원천을 찾을 수 있다."
"결코 결정/결단하지 않고", "모든 결단을 멈추게 하는 것", 저자의 후원에 힘입어 슈미트가 비판하는 이런 태도야말로 위에서 말한 벤야민의 비결정성의 태도와 닿아있지 않은가? 이 책의 다른 본문에서와는 다르게, 여기에서 저자는 슈미트와 더불어 벤야민의 이런 '낭만주의적' 태도에 비판적인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벤야민 역시 "결정/결단의 형식 속에서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저자의 말처럼 슈미트와 벤야민의 아버지가 같다면, 그들은 배 다른 형제임이 분명하다.
이 책의 글쓰기 스타일에 대해 한마디 해야겠다. 저자는 벤야민을 수많은 '이름들'과 함께 부른다. '무수히 불리고, 불리고 또 불리는' 그 이름들이 곳곳에서 출몰해, 책 전체를 관통하며 횡단한다. 타우베스, 아감벤, 블르멘베르크, 슈미트, 하마허는 저자가 호출하는 그 많은 이름들 중 일부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이름들은 "일러지기" 전에 "부서져" 있다. 그 이름들의 파편 속에서 정작 벤야민의 이름을 "이르며" 우리에게 들려야 할 저자의 목소리는 지뢰처럼 숨겨져 있다. 벤야민을 만나고 싶어 하는 독자를 친절히 이끌어주는 안내자라기보다는, 독자를 붙들고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 이름의 주인들은 이 책의 독서를 힘겹고 부담스럽게 만든다.
예를 들어 6장은 '발레리'의 인용문에서 시작, 그를 "단번의 비약을 통해" '말라르메'와 관련시킨다. 발레리가 말한 '언어 속의 언어'가 단어가 아니라 '이름'임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벤야민의 "몸" 개념을 도입하기 위해 '푸시킨'의 시가 등장하더니, 이어 소환된 '블루멘베르크'가 세계를 철자적 질서와 대응시키는 탈무드적 세계관을 말해주고는 사라진다. 곧이어 "이름이 세계의 몸"이라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저자의 테제와 "상통하는" 진술을 한 '슈미트'가 불려나와 "이름과 노모스 사이에 존재하는 근원적 친연성"을 암시한다. "여기서 몸은 (…) '벌거벗은 생명'을 뜻한다"라는 문장으로 이제는 벤야민에게 돌아가는가 싶던 여정은 다시 '카프카'로 향하는데, 카프카의 이름이 체코어로 '까마귀'라는 사실을 알게 된 독자는 다시 "야콥 타우베스와 쟈크 데리다에게서 사사한 독일의 문학이론가이자 철학자 베르너 하마허"의 카프카의 이름에 대한 설명을 들어야 한다.
'은어 Jargon'에 대한 카프카의 인용문이 이어지고 난 후 드디어, 지금까지 등장한 개념들을 서로 묶어주기 위해, 지금까지 호출된 이름들이 한꺼번에 등장하지만, 그 방식이 기묘하다.
"카프카가 '은어'라고 부른 이 언어는 (…) 심층적인 차원에서는 블루멘베르크의 근본명제에 (…) 등장하는 '난파한 자의 바다'이다. (…) 이것은 또한 발레리가 말한 '신의 언어'와 다름없다. (…) 그리고 이 이상한 언어는 다름 아닌 방언이다."
설득되기보다는 뭔가 강매당한 듯한 찝찝함을 가지고 계속 책을 읽는 독자는 글의 여정이 카프카에게서 '사도 바울'을 향하더니, '비트겐슈타인'을 거쳐 다시 '아감벤'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잠깐 등장한 '셰익스피어'가 문헌학이란 "이미 쓴 것을 다시 쓰는", "낡은 이름을 새롭게 부르는 것"이라고 속삭이고 사라진 자리에 '하마허'가 나타나 장장 세 페이지에 걸친 '문헌학 선언문'을 발표한다. 이 길고 에두른 여정을 정리하지도, 맺어주지도 않은 채 6장이 끝나버렸을 때 독자에게 남는 건 수많은 '부서진 이름들'과 모호한 개념들뿐이다.
벤야민의 <휠덜린의 시 두 편>을 다루는 3장도 사정은 비슷하다. 여기서 독자는 먼저 "미국의 벤야민 연구가 피터 펜브스"를 만나 "후설"을 소개받는다. 후설의 '세계무화' 개념이 '칸트적 실천이성의 우위'에 대해 '환상의 우위'를 대비시키려는 철학적 시도라는 어려운 말을 참아낸 독자는, 펜브스가 소환된 이유가 "후설 현상학의 의의를 칸트 철학에 대비"시킨 그의 견해가 벤야민 해석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는 이유였음을 알게 되지만, 정작 어떤 시사점을 주었는지는 좀처럼 제공받지 못한다. 벤야민의 언어철학을 소개하는 5장은 어떤가. "매체 medium" 개념이 등장한 벤야민의 인용문에 이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위에 인용된 단락은 벤야민의 언어철학적 사유의 핵심을 서술하고 있다. 즉 그가 상정한 언어는 일종의 공간이며, 그것도 마법적 공간인 것이다. 이것은 에른스트 블로흐가 쿠자누스의 신비주의 신학을 설명하면서 '수축되는 무엇으로서 고유한 의지를 지니고 있으며, 그 자체 모든 사물을 수렴하는 무엇'이라고 부른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 마법적 공간의 특징이 바로 직접성과 무한성이다. 그리고 벤야민이 자신의 마법적 언어-공간의 특징으로 꼽은 직접성과 무한성은 의심할 여지없이 수학의 영역에서 차용한 것이다."
벤야민의 개념을 풀어 '설명'해주는 대신, 그 개념의 영향사를 '소개'해주는 문장, 벤야민의 언어철학을 이해하려면 '블로흐'에 의해 소개된 "바로 그" '쿠자누스'의 신비주의 신학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 문장은, 그렇지 않아도 힘겨운 책읽기를 도와주지 않는다. 뒤이어 또 하나의 커다란 이름 '칸토어'와 그의 '집합이론'이 등장하면 독자는 마지막 남은 인내심을 잃어버린다.
이런 글쓰기 스타일은, 내가 보기에는, 아카데미가 요구하는 학문적 글쓰기와 평론가의 비평적 글쓰기 사이에서 태어난 이종교배의 산물 같다. 한국 사회에서 독문학 박사논문을 쓰며 동시에 평론 활동을 하는 저자의 실존적 상황, 그 상황을 크게 규정하는 한국 사회 인문학의 기괴한 모순들, 예를 들어 CEO 인문학 강좌의 호황과 대학 인문학 연구의 불황 사이의 간극이 반영된 것일 수도 있겠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 없는 어떤 기묘한 '지워짐'에 대해. 9장 "인용하는 작가와 지우는 작가"에는 역사의 개념에 대한 벤야민의 유명한 테제가 인용되어 있다.
"그 천사는 눈을 크게 뜨고 있고, 입은 벌어져 있으며 또 날개는 펼쳐져 있다. 역사의 천사도 바로 이렇게 보일 것임이 틀림없다. 우리 앞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전개되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그는, 잔해 위에 또 잔해를 쉼 없이 쌓이게 하고 또 이 잔해를 우리들 발 앞에 내팽개치는 단 하나의 파국만을 본다."
그런데 위 둘째와 셋째 문장 사이에는 중요한 한 문장이 삭제되어 있다. "그는 얼굴을 과거를 향하고 있다 Er hat das Antlitz der Vergangenheit zugewendet"는 문장이다. 역사의 천사가 얼굴을 '미래'가 아닌 '과거'로 항하고 있다는 것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수단으로 만드는 역사 목적론을 비판하고, 과거를 구제하려는 벤야민의 역사철학적 입장과 관련해 매우 중요한 문장이다. 그런데, 지극히 징후적으로 여겨지는 어떤 우연을 통해 이 문장은, 벤야민의 이 글을 처음 국내에 번역 소개한 반성완 선생의 번역본(<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민음사 펴냄))에도, 그 이후 출간된 최성만 선생의 번역본(<역사의 개념에 대하여>(길 펴냄))에도 다 '지워져' 있다. 그러니까 국내에서 인용되는 벤야민의 이 9번 테제는 늘 '지워진 인용'인 셈이다. 이 책의 저자 조효원 역시, 아는지 모르는지, 이 '지워진 인용'에 참여하였다. 그렇게 그는 '인용하면서 지우는 작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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