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오랑캐가 중국 문명에 감화될 것이니…"
"서양 오랑캐가 중국 문명에 감화될 것이니…"
[망국 100년] 주자학의 덫에 걸린 東道西器論
2010.04.09 13:54:00
"서양 오랑캐가 중국 문명에 감화될 것이니…"
개화 사상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박규수(1807~1877)는 1848년 관직에 나아간 이래 1854년 경상좌도 암행어사, 1861년 중국 사행, 1862년 진주민란 안핵사 등 특이한 임무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보이고 이후 10여 년간 조선의 정책, 특히 대외 정책의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맡은 인물이다.

마침 그의 활동 전모를 잘 보여주는 김명호의 <환재 박규수 연구>(창비 펴냄)가 나와 있으므로 그의 활동을 통해 19세기 중엽 조선의 상황을 살펴본다. 별도로 표시하지 않는 자료는 모두 이 책에서 재인용하는 것이다. 진주 안핵사로 있을 때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박규수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 하나를 우선 옮겨놓는다.

지금의 군자들은 항상 말하기를 "기강이 서 있지 않다"고 한다. 무릇 기강이란 천하에서 가장 허약하고 취약한 물건이다. 스스로 설 수 없으며, 반드시 충실히 길러주고 뿌리박게 도와야만 겨우 설 수 있다. 예의와 염치로 충실히 길러주고, 충후와 은신으로 뿌리박게 도우며, 상벌과 호오(好惡)로써 채찍질하고 격려한 뒤라야 겨우 일어서서 수백 보를 갈 수 있지만, 그래도 그중 한 가지라도 빠져 기우뚱거리고 자빠질 우환이 금세 닥칠까 두려운 것이다. 그런데 지금 충실히 길러주고 뿌리박게 도와주는 것들을 모조리 제거하고, 기강에 대해 오로지 "서 있지 않다"고만 나무라니, 가강에게 입이 있다면 "아아 억울하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이들은 우리 역대 임금님들이 고생하며 길러낸 적자(赤子)이다. 지금은 제대로 입히고 먹이지 못할 뿐더러 가르치지도 못해서, 마침내 예의 법도를 알지 못하게 되어 웃어른에게 성을 냈으니, 그 죄는 매질해야 마땅하나 측은한 생각이 드는 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도륙하라'고 말한단 말인가?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어질지 못하므로 지혜롭지도 못한' 자일 따름이다. 지금 도(道) 전체가 모두 동요하고 이웃 도 역시 동요하는데, 이는 무슨 까닭일까? '도륙' 두 자로 처리해버리고자 한다면 아마 어려울 것이다. '말 한 마디가 나라를 망친다'는 것은 이 경우를 말한 것이로다! 한심하고 한심하다! 어쩌면 좋을까, 어쩌면 좋을까!


형제 간에 마음을 털어놓은 이 글 한 대목만 보더라도 예의 법도의 원리를 생각하며 당시 관료층의 편의주의적 폐단을 걱정한 정대한 자세를 알아볼 수 있다. 19세기 초·중반 조선의 상황을 거울삼아 비춰보기에 적합한 인물로 생각된다.

그런데 바로 이 안핵 사명을 둘러싼 시비에서 박규수의 또 한 가지 측면이 나타난다. 그가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민란에서 양반층의 역할에 깊은 우려를 가지고 이웃 여러 고을에 보낸 관문(關文)에도 이를 표명했는데, 이것이 영남 사림에 대한 모욕으로 많은 지탄을 받았다. 그의 파당성에 대한 비판이었다.

1854년 암행어사로 경상도에 갔을 때 박규수 자신이 이런 비판의 소지를 심어놓았었다. 그가 감사 조석우를 탄핵한 한 가지 이유는 자기 고조할아버지 조하망(1682~1747)의 문집을 공금으로 간행했다는 것이었고, 특히 그 문집 중에 소론 영수 윤증을 기리는 글에 송시열을 비난한 내용이 들어 있다는 점을 적시했다.

이를 계기로 조석우에 대한 규탄이 널리 일어나 조석우는 유배에 처해지고 조하망의 관직까지 추탈되었다. 또 박규수가 이 때 건의한 주요 조치 하나가 무신란(1628) 진압에 공을 세운 감사 황선의 사당 복구와 사액(賜額)이었다. 영남 사림, 특히 소론 계열에게는 '공공의 적'으로 찍힐 만한 행적이었다. (무신란은 경종 독살설에 의거해 소론 세력 중심으로 일으킨 내란이었다.)

암행어사로서 민생과 관련된 박규수의 문제 파악과 대책 제시는 훌륭한 것이었다. 그리고 절친한 벗 서승보의 아버지 밀양 부사 서유여를 봉고 파직함으로써 절교까지 당한 데서는 편파성을 피하려는 노력을 분명히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실무 차원에서는 엄정했지만 이념 차원에서는 파당성을 넘어서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암행어사로 나가기 전 조선조 마지막 예송이라 할 수 있는 천묘(遷廟) 논쟁에서도 그는 여지없는 당색을 보여준 바 있다.

여기서 박규수의 파당성을 지적하는 것은 이것을 그의 개인적 인격보다 당시의 정치적 환경 문제로 보기 때문이다. 그의 출사(出仕)가 늦은 이유에서부터 알아볼 수 있는 문제다. 그가 젊었을 때 효명세자(지난 회에 "소명세자"로 잘못 올린 것을 여기서 바로잡는다.)의 지우를 입었고, 세자의 때 이른 죽음으로 실의에 빠져 출사를 단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가 마침내 출사한 때가 효명세자 대리 청정기 이후 처음으로 안동 김 씨 세력이 퇴조한 때였으며, 그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가 풍양 조 씨 조종영이었다는 사실로 볼 때, 그의 진퇴는 당파의 출입에 맞춰졌던 것으로 이해된다. 효명세자와의 개인적 의리보다 관직에서 뜻을 펼 수 있는 여건에 따라 출사를 결정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당대의 큰 인재로 널리 알려진 인물도 당파의 지원 없이 출사할 엄두를 내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가학(家學)에 대한 그의 집착에서도 사사로운 기준으로 입지를 마련해야 했던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지금 사람들은 그가 박지원의 손자라는 점은 크게 인식하지만, 그가 할아버지 박지원 못지않게 7대조 박미(1592~1645)를 내세운 사실은 소홀히 생각한다. 일세의 문장가였던 박미를 자랑스러운 조상으로 여기기도 했겠지만, 송시열에게 묘비명을 받았던 그를 기회 있을 때마다 내세운 데는 당파에 대한 충성심을 확인하는 뜻이 있었을 것이다.

▲ 1873년 박규수가 우의정에 임명될 때 그 아버지 박종채에게는 영의정, 할아버지 박지원에게는 좌찬성이 추증되었으니 조상의 뒤를 이은 면이 있기는 있다. 그러나 그가 박지원의 북학을 이어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형이상학적 정통론에 사로잡혀 외국군에게 유린당한 북경에 가서도 사교 활동에만 몰두하던 손자의 모습을 그 할아버지가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프레시안
그의 파당성을 인식하는 것은 그의 정세 인식을 이해하는 데도 필요한 일 같다. 그는 관직에 나서기 전부터 <해국도지> 등 당시의 첨단 정보를 가지고 정세 변화 파악에 애쓰고 있었다. 그 정세 인식의 결과인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에 그의 파당적 성향이 개재된 것은 아니었을까?

박규수가 관직에 나설 무렵 윤종의의 <벽위신편>에 붙인 글 "벽위신편 평어"에 그 시점에서 그의 세계 정세 인식이 나타나 있다. 대부분의 새로운 팩트(fact)는 <해국도지>에서 습득한 것인데, 팩트를 넘어선 해석에 그의 의견이 나타나는 것이 있다.

첫째는 서양의 정교한 기술이 원래 중국에서 발원한 것이라 하는 '서학중원설(西學中源說')이다. 주나라 말의 혼란기에 주인(疇人, 기술자)의 자손들이 흩어진 한 줄기가 서양 문명의 원류가 되었다고 하는 이 전설 같은 이야기는 청나라 역산학자들이 서양 기술 채용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놓은 것이었다.

둘째는 영국인과 미국인 선교사들이 말라카와 싱가포르에 만든 중국 연구기관의 존재를 중시하여, 서양인들이 언제고 중국 문명의 큰 이치를 깨달아 감화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벽위신편 평어"의 마지막 대목은 이런 내용이다.

중국의 서적이 해외의 싱가포르와 말라카로 날로 수출되어, 이를 번역하고 교습하는 중국인과 서양인이 노상 수천, 수만에 이른다. 지금 저 서양인들의 사서(邪書)를 탈취했다가 수백 년이 지난 뒤 다시 그들의 사서와 대조해보면, 그때의 사설이 필시 오늘날의 사설보다 한층 교묘해져 있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혹시 저 서양인들이 중국의 유가 서적을 오래도록 열심히 학습하다 보면 홀연히 한 걸출한 인물이 출현하여 문득 크게 깨닫고 하루아침에 올바른 길로 돌아올는지도 알 수 없다. 이러한 몇 가지 일은 훗날을 느긋하게 기다렸다가 그것이 적중할지 아니할지를 살펴보아야만 할 것이다.

두 의견 다 유가 사상의 우월성에 대한 독단적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독단적"이라 함은 그 우월성에 대해 "왜?"도 "얼마나?"도 묻지 않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십여 년 후 영국과 프랑스 군대가 북경을 유린한 시점에서(1861) 박규수가 문안사 사행에 참여한 것은 정세를 직접 살피기 위해서였다. 그때도 그의 독단적 믿음은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북경에 체류하며 비변사에 보낸 장계를 보면 그는 상황을 최대한 낙관하고 있었다.

서양 오랑캐는 그 의도가 토지에 있지 않으며, 통상과 포교에 전력할 따름이다. 북경에 들어온 후 친왕의 궁정을 점거한다거나 주민의 집을 산다거나 하여, 사는 집을 넓히는 것이 마치 영구히 안주할 계책인 것 같다. 식구를 거느리고 가구를 운반하여 오는 자들이 날마다 줄을 잇고 있다. 그러나 우선은 침탈로 인한 소요를 일으키는 폐단은 없다. (…) 소위 양교(洋敎)는 비록 교관(敎館)을 세우고 해금이 되었어도 호응하는 자가 없다. 오직 건달 무뢰배 중에서 남녀의 구별이 없음을 즐기고 재물을 대주는 것을 탐하여, 몰래 학습하는 자가 간혹 있을 뿐이라고 한다.

귀국 직후 친척 박원양에게 보낸 편지(7월 9일자)에 적힌 낙관론은 조금 심했다. 황제가 외국 군대를 피해 북경을 도망친 것을 관례적 피서행에 갖다 댄 것은 봉대침소라 할까?

서양 오랑캐가 요구하는 바는 곧 배상금 독촉과 시장 개방 등의 일에 불과했다. 그러나 허락을 받지 못하자 군사를 일으켰고, 전쟁이 계속된 지 오래다 보니 주화와 주전의 양론이 일어나는 것은 자고로 그런 법이다. (…) 군주란 멀리 도피해서는 안 되는 법이지만 어쩔 수 없이 주화파에게 이끌려 잠시 그 예봉을 피하면서, 한편으로 화의를 허락하고 조약 체결을 허락한 것이다. 그러자 오랑캐가 곧 철군하여 모두 떠나가고, 남아 있는 자들은 약간의 상인 무리이다.

황제가 이미 열하에 도착했는데, 그곳 또한 생소한 지역은 아니다. 풀이 푸르면 떠났다가 풀이 시들면 돌아오니, 강희(康熙) 이래 다 그렇게 했다. (…) 황제가 떠난 것은 미상불 서양 오랑캐의 소요에 지나치게 겁을 먹은 것이었지만, 그가 잠시 열하에 머물고 있는 것은 반드시 이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문안사(問安使)는 원래 함풍제가 피신해 있던 열하를 향한 것이었는데, 황제가 열하까지 올 필요가 없다고 하여 북경에 오래 머물었고, 부사 신분의 박규수는 그 동안 중국 인사들과의 교류에 공을 들였다. 이 때 중국 인사들과 나눈 글 속에서도 정도(正道)의 승리에 대한 그의 믿음은 확고하다.

그의 북경 체류에서 또 하나 두드러진 특징이 명나라 고적 방문에 중점을 둔 것으로, 그의 존명(尊明) 의식을 드러낸 것이라고 김명호가 지적했다. 이 존명 의식과 그의 친청적 자세 사이의 '모순'을 김명호는 문화 중심적 화이관에 따른 현실적 대청관이라고 해명했는데, 내가 보기에는 박규수의 화이관에 별개의 두 층위가 정리되지 않은 채 병존했다고 설명하는 편이 더 명쾌할 것 같다. 그 하나는 박지원에게 이어받은 현실적 대청관이고, 또 하나는 노론 정통론에 따르는 소중화주의다. 본인에게 굳이 물었다면 명나라의 정통성이 조선과 청나라를 포괄하는 동아시아 문명권으로 이어졌다고 대답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청나라 지도부는 북경 함락의 충격으로 인해 '동치 중흥'이라 불리는 양무 운동을 시작했다. 양무 운동이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나 30여 년 후의 변법 운동에 비해 피상적 수준에 그쳤다는 비판도 있지만, 당시의 중국으로서는 획기적인 태도 변화였다. 이에 비해 박규수는 공적 문서에서도 사적 문서에서도 훨씬 더 낙관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와 그의 문인 김윤식이 양무 운동에 호응하는 정책을 나중에 조선에서 추진하기는 했지만, 중국에서 먼저 진행된 양무 운동을 따라가는 소극적 태도를 넘어서지 않은 것 같다.

박규수는 같은 시기 조선 지식인 가운데 세계 정세의 변화에 가장 큰 관심을 보이고 가장 첨단 정보를 검토한 사람의 하나였다. 그리고 변화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해서 개화파의 선구로 지목되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양무 운동이 터져 나올 정도로 큰 충격을 받고 있던 북경 현장에 가서도, 서울에 돌아와서도 동시대 중국의 주류 지식인들만큼 강한 위기의식을 보여주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일까?

형이상학적 담론에 매몰된 조선 후기 주류 성리학의 폐쇄성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박규수가 일찍 <황조경세문편>을 구해보고 "고염무에서 위원으로 이어지는 청조 경세학의 성과에 접함으로써, 은둔 초기의 복고적인 예학 연구로부터 서세동점의 세계사적 격변에 대처하기 위한 경세학으로 점차 학문적 방향 전환을 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김명호는 말한다. 그러나 그가 노론이 매달려 온 주류 성리학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다.

박규수가 뛰어난 재능과 빼어난 덕성의 소유자였다는 사실은 김명호의 책에서 여러 모로 확인된다. 문제는 그런 인물조차 넘어설 수 없었던 정치적·사상적 장벽의 존재다. 조선 후기 성리학이 소홀히 한 경세학은 실무를 처리하는 기술이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주자를 제쳐놓고라도 현실의 요구에 부응하는 길을 찾는 것이 경세학의 자세였다.

김명호 교수 책의 독후감 비슷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19세기 중엽 상황을 비춰보기 좋도록 잘 정리해 놓은 김 교수에게 감사합니다. 다음 회에는 고종 즉위와 대원군 집권 시점의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필자의 블로그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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