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히로부미의 마지막 한마디 "어리석도다!"
이토 히로부미의 마지막 한마디 "어리석도다!"
[망국 100년·40] 죽음의 품격
2010.06.04 11:19:00
이토 히로부미의 마지막 한마디 "어리석도다!"
커 오면서 일본인의 '침략성' 얘기를 많이 들었다. 임진왜란과 식민 지배의 경험 때문에, 그리고 대동아전쟁을 일본이 일으킨 사실 때문에 우리 사회에는 일본의 침략성이 크게 각인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역사를 차분히 들여다보면 특정 시점에서 문화적 조건 때문에 공격성이 크게 나타나는 상황이 이해되면서 민족성 자체의 편향성을 생각할 필요는 줄어든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친 일본의 조선 침략을 봐도 그런 생각이 든다.

제국주의 시대는 약육강식의 정글이었다. 모든 국가가 먹느냐 먹히느냐 양단 간 선택을 강요받는 시대였다. 메이지유신으로 근대국가를 이룩한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팽창 없는 근대화의 길은 새로 근대화를 시작하는 국가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19세기 말의 전 세계 열강들에게 최대의 침략 대상은 중국이었다. 일본이 짧은 시간 내에 열강의 대열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중국 대륙을 침략하는 데 유리한 위치 덕분이었다. 중국 침략은 일본이 제국주의 국가로 자라나기 위해 필연의 길이었다. 그리고 그 길에 한국이 있었다. 한국을 어떤 식으로든 끌어들여 놓는 것이 대륙 침략에 유리한 위치를 제대로 살리기 위해 일본에게 꼭 필요한 일이었다.

한국을 무력으로 병탄하자는 주장은 충분한 무력을 갖추기 전부터 일어나 합방이 실현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보다 온건한 주장이 합방 직전까지 이에 맞서 펼쳐졌다. 어느 사회에나 존재하는 무단(武斷)파와 문치(文治)파의 갈등으로도 볼 수 있는 일이다.

초기의 갈등은 무단파의 거두 사이고 다카모리가 서남전쟁(1877)으로 몰락하면서 일단락되었다. 당시 문치파는 정한(征韓)의 필요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대외적 침략에 앞서 내부 정비가 먼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전까지 일본이 치른 대외 전쟁은 1894년의 청일전쟁과 1904년의 러일전쟁 두 차례뿐이었다. 당시의 열강치고는 전쟁을 덜 치른 편이다. 내실을 중시하는 문치파 노선이 대체로 관철된 셈이다.

한국을 어떻게든 일본에 유리한 자세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그 기간 내내 문치파도 인정한 과제였다. 조선 정부를 메이지유신과 같은 길로 이끌어 일본과 협력하는 관계를 맺자는 온건 노선에서부터 조선을 정벌해 속국으로 만들자는 강경 노선까지 여러 노선이 엇갈렸다. 결국 합방은 강경 노선에 가까운 귀착이었지만, 문치파 주장도 가미된 타협적 노선이라 할 수 있다.

청일전쟁을 계기로 조선에 대해 압도적인 영향력을 확보했을 때 갑오경장을 유도한 것은 일단 온건 노선이었다. 그 과정에서 왕비 살해 사건이 일어난 것은 무단파의 불만이 분출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아관파천이 촉발되어 영향력의 지속적 행사가 막힌 것을 계기로 강경 노선의 문제점이 부각되었다. 그 결과 일본의 대 조선 정책은 당분간 문치파의 온건 노선을 기조로 하게 되었다. 이 온건 노선을 대표한 것이 이토 히로부미였다.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은 아관파천 이래의 교착 상태를 벗어나 한국에 대한 전면적인 영향력을 다시 확보했다. 이때의 온건 노선은 보호국화 정책이었다. 갑오경장을 통해 조선을 근대국가로 육성하려던 계획은 '광무개혁'으로 인해 무위로 돌아갔다. 진도가 너무 처진 조선을 일본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는 아무리 온건 노선이라 하더라도 10년 전보다 강압적인 방법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광무개혁'이라고 따옴표를 쓰는 것은 전혀 '개혁' 같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몇 가지 개혁적 요소를 가리키며 '광무개혁'의 개혁성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본질을 갖춘 개혁이 아니다. 실용적 목적을 위해 피상적 변화 몇 가지를 체계성도 없이 진행시킨 것일 뿐, 시대적 요구에 대한 투철한 인식이 보이지 않는다.

대한제국의 반동성은 무엇보다 황제권의 전제화에 나타난다. 일본의 온건 노선이 조선 왕권의 제도화를 위해 노력한 측면에는 평가할 만한 의미가 있다. 권력 사유화는 대외 관계에 앞서 조선 국내의 체제 문제로서 극복해야 할 과제였다. 이 문제의 극복에 일본이 노력한 것은 조선의 향후 진로를 조선 자신이 자발적으로 나아가도록 하려는 목적이었다. 군주권의 축소가 침략의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무조건 침략을 하려면 이런 노력을 할 필요 없이 더 쉬운 길이 많이 있었다. 아직 일본이 군국주의에 빠져들기 전의 일이었다.

온건 노선이건 강경 노선이건 한국을 일본 마음대로 움직이게 하는 데 목적이 있는 이상 똑같은 침략 노선으로 보자는 주장은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만을 보는 태도다. 물리적 힘으로 강제하는 강경 노선과 한국 쪽의 자발성을 가능한 한 키워내려는 온건 노선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상황에서 한국의 진로는 일본의 존재와 의지를 고려하지 않고 결정될 수 없었다. 개항기 이전까지 중국의 의지를, 그리고 해방 이후 미국의 의지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강대국의 의지를 고려하더라도 주동적 판단에 따른 자발적 대응이라면 이쪽 사회의 발전을 위한 선택의 기회를 스스로 찾을 여지가 있다.

절제 없는 자유가 개인에게 주어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절대적 '민족자결'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어느 국가라도 주어진 여건 속에서 제한된 선택의 범위를 가진다. 한국은 수백 년 동안 중국의 힘을 주어진 여건으로 받아들여 왔다. 청일전쟁으로 중국의 힘이 무너진 상황에서 새로운 국제 질서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리고 한국을 둘러싼 국제 질서에서는 일본의 힘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다.

갑오경장 당시의 '친일' 내각은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성립되었다. 일본의 영향력을 어느 정도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 받아들이는 방법과 범위를 조정해 나가야 할 형편이었다. 그런데 고종과 민비는 러시아와 미국에 의지해 일본의 영향력을 거부하려 했고, 이에 대한 반발로 을미사변이, 다시 이에 대한 반발로 아관파천이 일어났다. 러시아의 견제로 일본의 영향력이 봉쇄된 데 고종은 만족하고 권력의 사유화에만 일로매진해서 대한제국을 세웠다.

러일전쟁을 통해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다시 확보하면서 일본은 10년 전 갑오경장 때의 '지도' 방식에 비해 강압적인 '통제' 방식으로 기울지 않을 수 없었다. 1904년 8월의 제1차 한일협약으로 고문(顧問) 정치의 방식을 시도했다. 그러나 고종이 겉으로만 이에 응하는 시늉을 하면서 일본의 통제를 피하려고 온갖 획책을 했기 때문에 외교권을 공식적으로 박탈하는 을사조약과 더욱 강압적인 통감(統監)정치를 추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겉으로만 보면 일본의 통제를 피하려는 고종의 노력에 주권 수호의 뜻이 있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주권 수호를 하더라도 합당한 방법이 있고 그렇지 못한 방법이 있다. 전형적인 고종의 수법 한 가지는 의정부 대신들을 자주 갈아치우는 것이었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정책 결정이 황제 아닌 의정부에서 공개적으로 이뤄질 것을 요구했다. 고종은 대신을 자주 바꿈으로써 의정부의 활동이 연속성을 가지지 못하게 하고 대신들이 자기 눈치를 보게 만들었다. 이것은 무엇을 위해서라도 합당한 방법이 아니다.

대한제국을 운영하는 동안 고종은 방대한 비자금을 조성했다. 그 규모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전공자가 아닌 나로서 판단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돈과 관계되는 사업이라면 가리지 않고 궁내부로 끌어들인 것을 보면 비자금 조성에 그야말로 전력을 기울인 것 같다. 이 비자금으로 밀사들을 움직여 열강들, 특히 러시아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 고종에게는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하는 최선의 방책으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이권으로 유혹하면 열강을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환상을 그는 끝까지 버리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을 위해 천황의 특사 자격으로 한국에 왔던 이토 히로부미는 이듬해 3월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다. 그가 1909년 6월 통감 직을 그만둘 때는 합방 정책이 구체화되고 있을 때였다. 조선 통감 자리는 그 한 사람을 위한 것이었던 셈이다.

합방 후의 조선 총독은 대신 급과 총리 급 사이에서 임명되었다. 총리급을 넘어 국가 최고 원로인 이토가 총독보다 가벼운 통감 자리를 맡은 것은 특이한 일이었다. 온건 노선을 대표하는 이토가 무력 합방을 피하거나 늦추려는 마지막 노력을 기울이기 위해서였다. 통감 자리를 떠난 몇 달 후 하얼빈에서 자신을 저격한 것이 조선 청년이라는 말을 듣고 "어리석도다." 말했다는 데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한국이 변화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일 기회를 최대한 만들어주기 위해 통감 자리에서 강경 노선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그가 인생의 마지막 몇 해를 바친 일이었다.

▲ 저격한 사람이 조선의 애국 청년이란 말을 들은 이토 히로부미의 "어리석도다" 한 마디가 전해진다.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 대신 보호국으로 지키는 것이 이토가 마지막 몇 년을 바친 일이었다. 그가 조선의 황제와 대신들에게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만 한 경륜을 접한 일이 있었을까? '동양평화론'이 육혈포 탄환의 형태로밖에 나타나지 못한 것이 안중근에게도, 이토에게도, 그리고 모든 조선인과 일본인에게도 비극이었다. ⓒ프레시안

지난 회에 을사오적 중 이근택이 단순한 변절을 한 것이 아니라 고종의 밀명에 따른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적었는데, 그 후에 이근택의 행적을 다룬 관계 연구를 더 읽어보면서 아무래도 내가 지나친 상상을 한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용익과 경쟁하며 권력을 추구하는 비열한 모습이 많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럴 리는 절대 없다, 하고 명쾌한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너무나 많은 음모가 난무하기 때문에 무엇이 진심이고 무엇이 가식이었는지 판단하기 어려운 대목이 많다.

고종이 "술수와 책략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임금"이라고 적었었다. 그렇다. 들여다볼수록 고종이 편집증 같은 정신질환을 가졌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한국의 정치인들 중에도 꼭 안 해도 될 거짓말을 그저 거짓말 하는 보람 때문에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고종은 무슨 일에건 드러난 거래관계에 만족하지 못하고 뭐든 이면계약을 맺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민비가 살해당한 닷새 후에 엄 상궁을 불러들인 일을 놓고 황현은 "양심도 없는 사람"이란 극단적 표현을 썼다. 아무리 '야록'이라지만 선비의 몸으로 그런 표현을 임금에게 쓴다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다. 1907년 7월 퇴위 압력 아래 박영효를 궁내부대신에 임명하는 장면에 대한 황현이 뭐라 했을지, 그에 관한 논평을 찾아볼 수 없어 아쉽다.

박영효는 갑신정변 때 일본에 망명했고, 10년 후 갑오경장 때 일본 등에 업혀 돌아와 총리대신에까지 올랐으나 민비 암살 음모 혐의로 다시 일본에 망명했다. 일본에 있으면서도 추종자들을 통해 독립협회의 움직임을 조종했고, 1900년에는 고종 폐위 음모가 발각되어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고종이 그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겨 절대 용납하지 않으려 한 것은 온 나라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헤이그 밀사 사건이 터져 안팎의 양위 압박에 몰리자 고종은 박영효를 궁내부대신에 임명했다. 자기 황제 자리를 지켜주려는 세력이 아무도 없는 상황이 되자 일본에 연줄이 많은 박영효에게 매달린 것이다. 박영효는 그 한 달 전 일본 당국이 모르는 채로 입국했는데, 그것부터 고종의 밀명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박영효 또한 황제와의 협력을 통해 지위를 확보할 뜻이 있었던 듯, 그가 궁내부대신을 맡은 며칠 후 그가 관련된 쿠데타 첩보에 따른 군사행동이 있었다. 양위식 전날이었다.

고종 양위의 직접 원인은 헤이그 밀사 사건이었다. 그러나 고종을 황제 자리에 두고는 언제 어떤 짓을 저지를지 아무도 마음을 놓을 수 없을 만큼 불신이 쌓여 있었기 때문에 그의 황제 자리를 지켜주려는 사람이 없었다. 고종의 은혜를 누구보다 많이 받은 외국인 알렌도 고종에 대해 "나는 그가 어떤 짓이라도 가리지 않고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체념한지 오래되었다"고 일기에 적은 일이 있었다.

일본이 1905년 11월 강압을 통해 을사조약을 맺은 것은 나쁜 짓이었다. 1907년 7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제3차 한일협약, 즉 정미 7조약을 맺은 것도 나쁜 짓이었다. 그런데 두 가지 일 모두 일본 측에서는 저지르지 않으려고 상당히 애를 쓴 사실이 있었다. 그런 짓까지 않고도 일본의 국익을 확보하려고 이토 히로부미는 노력했다.

이토는 가급적이면 덜 강압적인 방법을 찾아내려고 여러 단계에서 노력했다. 일본 내에는 그의 온건 노선을 비판하는 세력이 있었고, 고종은 그들에게 계속 이토 노선을 공격할 꼬투리를 만들어줬다. 이토도 물론 조선보다 일본의 국익을 생각하는 사람이었지만, 가능한 한 온건한 방법을 취하는 쪽이 장기적 효과가 좋다고 믿었다. 할 수만 있다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보다 보호국으로 관리하는 쪽을 그는 택했을 것이다.

하나의 왕조로서 조선은 망해가고 있었다. 국가가 망하는 가장 뚜렷한 지표의 하나가 권력 사유화다. 하나의 국가 체제가 노쇠 현상을 일으킬 때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위협은 쇄신을 촉구하기도 하고 파탄을 촉진하기도 한다. 개항기 이후 조선에 대한 외부의 위협을 대표한 것은 일본의 야욕이었다. 이 위협을 이겨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 노력이 주효했다면 일본에서도 온건 노선이 득세할 많은 계기가 있었다. 그런데 고종은 그 와중에도 극단적 권력 사유화에만 매진하며 뜻있는 사람들의 노력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조선 말기의 방문자 중 최고의 지성인으로 꼽히는 영국의 비숍 여사는 조선 각지를 돌아다닌 끝에 연해주에 가서 그곳에 정착한 조선인들의 당당한 모습을 보고 탄복했다. 서로 도와가며 질서를 지키고 생업을 키워나가는 그 모습이 국내 조선인들의 비참한 모습과 너무나 대비되어 같은 민족인 줄 알아보기가 힘들다고 했다.

고종보다 훨씬 뛰어난 인물이 왕으로 있어서 훨씬 더 대응을 잘했다고 하더라도 19세기 말 조선에 닥친 시련을 완벽하게 막아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죽음에도 숭고하고 비천한 품격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한 국가의 멸망에서도 그 사회의 격조가 나타난다. 의로운 죽음에는 미래를 위한 밀알의 가치가 있다. 조선 왕조 멸망의 책임을 고종 한 사람에게 물을 일은 아니지만, 왕조 멸망에 임해 민족사회를 비참한 상태에 몰아넣은 책임은 그가 회피할 수 없을 것이다.

연초에 연재를 시작할 때는 5월 말까지 마무리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6월로 들어오고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직 꽤 남았네요. 그러나 주 2회 정기 연재는 이번 회로 일단 끝내겠습니다. 몇 주일 생각을 가다듬은 뒤에 남은 이야기는 다음 달에 더 잘 정리해서 내놓도록 하겠습니다. (☞필자의 블로그 바로 가기)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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