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버스 정거장에서 친모와의 만남을 꿈꾸다
서울의 버스 정거장에서 친모와의 만남을 꿈꾸다
[해외입양인, 말걸기] 한국계 미국입양인은 왜 친모 찾기를 포기했나
서울의 버스 정거장에서 친모와의 만남을 꿈꾸다
친모와의 재회 시도…심신이 무너지는 경험

지난 5월 31일, 나는 출생 후 엄마에게서 떨어진 이후 엄마와 가장 가깝게 있을 기회를 갖게 됐다. 그러나 나의 귀향은 한국방송(KBS)에서 방영되는 프로그램이 보여주는 것처럼 기쁜 재회가 아니었다. 나는 엄마와 포옹할 수 없었다. 대신, 재회실 내 옆자리에는 엄마의 이름과 주소가 적힌 서류철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날 나는 내 눈을 그 노란 서류철에서 뗄 수 없었다. 마침내, 사회복지사는 내 엄마에게 '전보'를 보냈는데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고 내게 반복해서 말했다. 그 사회복지사는 엄마에게 접촉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 없다면서 나를 쳐다보며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당신 친모에게 접촉할지 제안해 줄래요?"

나는 그 사회복지사에게 "왜 내 엄마 집에 직접 가면 안 되나요?"라고 쏘아붙였다. 그녀는 웃으며 직원이 없어서 갈 수 없다고 말했다. 회의가 끝난 후, 나는 회의실을 나오며 쏟아지는 뜨거운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지난 3년 동안 친가족을 찾다가 이런 상황에 다다랐을 때마다 심신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2010년 8월, 나는 내가 태어난 지 3개월 후 떠나야 했던 한국의 서울로 이사 오기 위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의 편안한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한국에 이사 온 후, 나는 한국영주권과 더불어 내가 해외입양 보내졌다는 확인서가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나를 입양 보낸 홀트 입양기관을 방문했다. 홀트에서 나는 내 입양 후 서비스 담당자인 A 씨를 만났다. 그녀는 내 친부모 찾기에 대해 수많은 질문을 퍼부었다. 그녀의 폭탄 같은 질문세례에 당황한 나는 친부모 찾기에 나서겠다고 동의했다.

그 후 8개월 동안, 나는 홀트의 A 씨에게 아무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 동안, 나는 그녀에게 이 메일을 3번 보냈지만 아무런 답장을 듣지 못했다. 나는 기다리는 동안 이 문제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나는 그 후 버스정거장에서 중년 여성들을 보면 그중 한 분이 내 친모가 아닐까 하고 유심히 쳐다보는 적이 많았다.

마침내 A 씨는 내 친모를 찾을 수 없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내왔다. 80대 여인이 가짜 주민등록번호를 넣는 것은 흔한 일이고 내 사정이 참 안 됐다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내게 행운을 빈다고 했다. 나는 실망했지만 A 씨의 말을 믿고 한동안 친부모 찾기를 중단했다.

매년 100여 명 입양…출생기록 볼 수 없다?

대부분 입양기관들은 홀트처럼 입양인들이 자신들의 출생기록을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출생기록 분실이나 기록의 부정확이다. 혹은 기록보존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로, 최소 16만 명 이상의 아동이 해외입양 보내졌다. 아동 1000여 명이 매년 한국에서 해외로 입양 보내지고 있다.

이 숫자는 관리할 만한 입양인 규모의 숫자다. 특별히 한국은 조선 시대부터 역사기록과 족보를 꼼꼼하게 보존하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심을 내세우는 나라다. 그러나 입양기관들이 기록보존에 문제가 있다는 핑계를 내세울 때, 많은 입양인은 희망을 잃고 친가족 찾기를 중단 할 수밖에 없다.

기록 부족에도 불구하고 나는 친가족 찾기를 중단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한국에 사는 다른 많은 해외입양인을 만났다. 나는 그들로부터, 입양기관들이 입양인들에 대한 기록을 주지 않고 있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을 들었다. 한 입양인은 내게 입양기관을 방문할 때 빠트린 것이 있는지 꼼꼼하게 확인해 보라고 제안했다.

그래서 지난해 6월, 나는 홀트를 다시 방문하여 내 파일을 다시 검토 해 달라고 요청했다. A 씨는 홀트가 내 친모를 발견했고 전보를 보냈는데 답장이 없으므로 내 파일을 다시 검토해서는 안 된다고 답변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우리가 마지막으로 나눈 이야기 내용에서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나는 의구심을 품고 기분이 상한 채로 홀트를 떠났다. 나는 초조해졌다. 홀트에서의 일을 생각할 때마다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해외입양인 활동가 제인 정 트랜카 씨는 한국의 부실한 입양 후 서비스에 대해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제인은 다른 해외입양인들과 함께, 한국 보건복지부의 입양특례법 개정을 위해 싸웠다. 그리고 2011년, 입양특례법을 개정했다. 그리고 지난해 8월, 이 개정입양특례법이 시행되었다. 이 입양특례법의 두 가지 목적 중 하나는 정부에서 지원한 기관인 중앙입양원(전 중앙입양정보원)을 통해 입양인들이 친가족을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이 뜻은, 중앙입양원의 요청 시 입양기관들은 입양인들의 출생 관련 기록을 중앙입양원에 넘겨주어야 할 법적 의무가 있다는 말이다. 그 후 중앙입양원은 입양인을 위해 친부모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친가족을 찾기 시작한 지 2년째 되었을 때 이 법이 시행됐다. 나는 중앙입양원에서 메일을 받았다. 홀트가 이미 내 가족 찾기에 실패했으므로 나에 관한 기록을 중앙입양원에 제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수백만 달러를 가진 홀트 입양기관에 의해 한국정부기관인 중앙입양원이 조정되고 입양특례법은 제구실을 못한다고 느꼈다. 구석에 몰린 기분이었다.

입양기관은 아동을 생명보다는 상품으로 취급하고 있다. 만약 아동이 친부모에 의해서 정말로 입양 보내지거나 혹은 입양기관에 의해 강제로 입양 보내진다면 윤리가 망가지는 것이다. 입양기관은 "회사"로서 그 주요 수출 품목은 아동이며, 그래서 입양기관은 그 공급 수출 품목인 아동에 대한 정보를 보호하고 감춰야 한다. 그러므로 입양기관은 아동과 친모간의 성공적인 재회를 원치 않는다.

그로부터 한 달 후인 지난해 9월, 중앙입양원은 내게 전화를 걸어 홀트와의 격전 끝에 내 입양 관련 서류를 확보했다고 통보해 왔다. 나는 의기양양해졌다. 나는 가까운 입양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마침내 내 친엄마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2년이 지난 후 모든 일이 열매를 맺는 듯이 보였다.

그 후 몇 달이 지났다. 나는 친모와의 재회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 후 곧 2013년이 되었다. 중앙입양원 직원은 내게 전화를 걸어 그동안 친모에게 "전보"를 보냈는데 응답이 없다고 말했다. 나는 그 전보를 내게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그녀는 망설이다가 그 전보를 내게 보냈는데 받아보니 대부분 주요 부분이 다 지워져 있어서 그 전보내용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 후 3개월 동안 나는 중앙입양원과 아무런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

친모 찾기, 희망을 포기한 이유

혼자 싸우는 것에 피곤함과 분개를 느끼던 중,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논의하기 위해 제인 정 트랜카를 만났다. 나는 같은 해외입양인으로서 제인을 좋아했고 입양 관련 법에 정통한 그녀를 신뢰하게 됐다. 내 친가족 찾기에 진전이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중앙입양원의 역할에 대해 문의하기 위해 중앙입양원 직원들도 함께 만나기로 마음먹었다.

우리는 내 부모 찾기가 진전되게 하기 위한 규약을 만들기 원했다. 지난 5월 31일, 우리는 다른 2명의 해외입양인과 함께 중앙입양원을 방문했다. 내 친모를 접촉할 방법에 대하여 몇 시간 동안 중앙입양원 직원과 힘들게 논의했다. 나는 중앙입양원 직원에게 2009년부터 내 가슴에 종양이 발견되었으며 유방암의 우려 때문에 내 병이 유전인지 등에 관한 가족력을 알고 싶어서 친모를 신속하게 찾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애원했다.

개정입양특례법엔 만약 입양인이 의사 진단서로 증명되는 생명을 위협하는 병에 걸렸다면, 중앙입양원은 친부모에 대한 정보를 그 입양인에게 제공해 주기로 되어있다. 맞는 골수제공자를 기다리다가 사망한 한국계 미국입양인에 대한 기사가 얼마 전 언론에 보도된 적이 있었다. 골수가 맞는 가족구성원을 찾아서 골수를 기증받을 수 있었다면 그 입양인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중앙입양원 직원은 친모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부분 친모들은 재혼하여 새로운 가족을 가진다고 강조하였다. 한국은 성평등 지수에서 세계 108위(2012년 기준)를 차지하고 있다. 매일, 한국여성들은 성차별에 직면해 있다. 미혼모가 되는 것은 한국에서 사회적 낙인이 찍히는 것뿐만 아니라 경제적 어려움을 수반한다.

한국정부는 현재 미혼모에게, 한달 최대 7만 원의 지원금을 주고 있다. 이 지원금으로는 미혼모가 자기가 낳은 아동과 살 수 없다. 입양기관들은 문화적 낙인을 미혼모들에게 찍는 역할을 하는 성향이 있고, 입양을 원하는 부모에게는 재정적 부담을 준다.

내가 처음 홀트를 방문했을 때, A 씨는 내 친모가 너무 가난했고 그래서 내가 부유한 나라 미국에서 성장한 것에 대해서 행복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가난에 찌든 친모를 찾는 것에 대해 죄책감과 부끄럼을 느꼈다. 다시 중앙입양원의 직원이 친모의 권리에 대해 내게 이야기했을 때, 나는 친모의 뿌리를 뽑는 것 같아 친모에게 죄를 짓는 것같이 느꼈다. 입양인들이 자신의 친가족을 찾는 중에 죄책감, 부끄럼, 우울증을 느끼는 것은 흔한 일이다. 최근 미국 미네소타 대학교에서 연구한 자료에 의하면 10대 시절 입양인들은 비 입양인들보다 자살 시도를 할 확률이 4배 이상 높다고 나왔다.

지금 2013년이 저물어 간다. 그사이 나는 한 번 더 중앙입양원 직원을 만났고 이메일로 접촉했다. 나는 중앙입양원 직원에게 내 가족 찾기와 다른 입양인들의 가족 찾기에 대해 진전된 것이 있는지 문의했다. 중앙입양원 직원은 다른 입양인들의 가족 찾기에 대한 계획이 여전히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화가 난 중앙입양원 직원은 지금 자신이 아주 바쁘다고 말했다.

현재 중앙입양원의 업무 우선순위는, 한국의 입양 제도를 고치는 일이다. 아동보호법에 관심이 있는 국제사회에서 정부 간 법적 조직인 '국제 아동납치의 민사적 측면에 관한 협약(헤이그 국제아동탈취협약)'의 협력국이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앙입양원 직원은 내 친부모 찾기에 집중할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나는 그 후 두 달 동안 그 중앙입양원 직원으로부터 아무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나는 친모를 찾는 문제로 더 이상 울지 않는다. 나는 더 이상 친모 찾기에 희망을 두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나는 매일 서울에서 지하철을 탄다. 나는 주변에서 딸 손을 잡고 있는 엄마들을 보고 아들의 머리를 빗겨주는 엄마들을 본다. 그때 마다 나는 그 아이들이 나 자신이고 그 어린아이들을 돌보아 주는 아줌마들이 내 엄마이기를 꿈꾼다.

모든 부모와 자녀 간 재회가 다 기쁘지 않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단지 입양인들의 친부모 찾기를 위해 계속하여 싸우면서 내 경험을 나눌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언젠가는 나와 다른 입양인들은, 우리의 잃어버린 과거를 연결 해 줄 수 있는 어떤 좋은 분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랄 뿐이다.

(번역: 김성수 <함석헌평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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