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의 '루저'들에게
페이스북의 '루저'들에게
[시민정치시평] '일베'에 점령된 개방형 사회관계망을 탈환하자
페이스북의 '루저'들에게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은 타인과 '소통'하고자 한다. 이런 관계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인간은 집단에 귀속되고자 한다. 소통함으로써 인간은 고독을 이겨내지만 자신의 정치적, 도덕적 의지를 관철시킬 수도 있다. 설득하고 공감을 이끌어냄으로써 다수를 형성하여 세력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힘이 있으면 의지도 관철된다.

이런 결과를 가져다주는 소통은 기술적 조건에 좌우된다. 인간이 '소통 기술'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다.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만 기술을 활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배, 자동차, 항공기 등 교통 기술이 발전하자 소통이 활발해졌다. 전화와 전보 등 통신 기술의 발전은 소통 비용을 급감시켜 소통은 훨씬 원활하게 되었다. 그 결과 소통의 범위는 확대되고 소통 속도도 빨라졌다. 특히 후자는 생각의 소통, 곧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확대시켰다.

인터넷만큼 의사소통의 혁신을 가져온 기술도 없을 것이다. 전자메일은 의사소통의 속도는 물론 그 양을 크게 증가시켰다. 하지만 블로그, 카페 등 '사회관계망 기술'은 의사소통을 사회적 차원으로 끌어 올렸다. 양자적 소통이 '다자적' 소통으로 진화한 것이다. 사회관계망은 개방되어 있었기 때문에 의사소통 과정에 대한 참여는 거의 무제한적으로 보장되었다. 이러한 '개방형 사회관계망'과 더불어 집단 지성을 통한 사회 진보의 가능성도 크게 높아지게 되었다. 기술은 민주주의와 진보를 가져올 것이다!

하지만 기술이 현실에 적용되는 과정에서 이런 기술 낙관주의는 점차 의심을 받기 시작하였다. 제도와 사용자들의 문화가 문제가 된 것이다. 먼저, 개방형 사회관계망 기술은 익명성이라는 제도를 요구하였다. 익명성은 표현과 주장의 진정성을 극대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익명성의 제도는 내면에 잠재해있던 인간의 야수성마저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게 해주었다. 몇 가지 다른 요인들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첫째, 베블런과 진화 심리학자들이 밝힌 바처럼 인간의 진화 과정에서 한 가지의 본성만 선택된 것이 아니다. 이기적 본성은 물론 이타적 본성, 호기심 본능, 제작 본능, 모방 본능 등 다양한 본성들이 선택되었다. 하지만 지난 반세기 수구적 언론과 비인간적 교육 체제는 한국인들의 이타적 본성을 억압하는 대신 이기적 본성을 '함양'시켜 주었다. 둘째, 분단 상황과 살인적 입시 제도는 관용과 청취를 불허하는 적대적 문화를 강화하였다. 셋째, 고속 성장과 권위주의적 문화는 민주적 소통훈련과 의사소통 기술의 연마를 불허하였다.

이러한 국가 특수적 맥락(state-specific context)과 맞물려 익명성의 제도는 예기치 못한 상황을 야기하였다. '네티즌'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시대의 시민들은 '닉네임'의 가면무도회를 질펀하고 방탕하게 즐겼다. '디오니소스적 카니발'에 도취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토론은 언쟁으로, 언쟁은 전투로 진화하였다. 토론을 통해 사실과 진실을 규명하기보다 전투에서 상대를 제압함으로써 '승리'하는 것이 최종 목표로 둔갑하였다. 이기기 위해 극단적 언어폭력과 비방, 모함이 동원되었다. 승자는 패자를 조롱하고 패자는 승자를 혐오하였다. 피투성이가 된 패자는 분노와 좌절로 인해 스스로 고립을 선택하였다. 많은 네티즌이 '자폐'하거나 사회관계망을 떠나게 되었다. 살아남은 승자는 대화를 포기하고 독백과 방백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아무도 참여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도 듣지 않는다. 그 결과 의사소통은 멈춘다. 민주주의의 행진도 멈추게 되었다. 블로그와 카페 등 개방형 사회관계망 기술의 현주소다!

이러한 아픈 경험은 최근 또 다른 새로운 기술을 탄생시켰다. 사회관계망 기술이 '페이스북'과 '밴드'로 진화한 것이다. 개방형 사회관계망에 실망한 자폐아와 전투에서 패배한 수많은 '루저'(?)들이 페이스북으로 몰려들었다. 그것도 싫은 사람들은 네이버의 '밴드'로 둥지를 틀기 시작하였다. 블로그와 카페의 경우, 이웃과 회원이라는 폐쇄적 절차가 마련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운영자는 그 절차를 활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블로그와 카페는 기본적으로 개방되어 있다. 그리고 광활한 인터넷 공간에서 검색에 노출되어 있다.

아무나 접근할 수 있는 블로그와 카페와 달리 페이스북과 밴드는 훨씬 폐쇄적이다. 이러한 '폐쇄형 사회관계망 기술'은 개방형 기술이 노정해 온 단점들을 일단 보완해 주는 것처럼 보였다. 페이스북은 이른바 '페친'으로 불리는 '친구'들의 공동체다. 친구가 되자면 익명성이 포기되어야 한다. 안면 트고 얘기 나누게 되니 디오니소스적 카니발은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다. 조롱과 악담이 사라지는 대신 예의가 준수되고 배려가 존중되었다. 인간적 대접을 받게 되니 참여도 활발해지고 공유될 수 있는 정보와 지식의 양도 증가하였다. 강한 연대감도 형성되었다. 이제 '아폴론적 로고스'를 전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늑한 사랑방 안에서 친구들은 서로의 신념을 재확인하였다. 더 나아가 그것을 굳혀 나갔다. 그 과정에서 자기를 향한 비판, 곧 성찰은 면제되었다. 오류는 더 이상 수정되지 않았다. 안면 밝히니 얼굴 붉히며 논쟁하기가 꺼려진다. '좋아요'와 공유는 있지만 토론과 확산은 사라져 버렸다. '서로를 연결하는 강한 끈'이 '눈을 가리는 띠'로 둔갑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성찰이 면제되는 대신 타인에 대한 비판은 강화되었다. 비판이 도를 넘어도 아무도 제동 걸지 않았다. 나아가 비판은 혐오로 진화하였다. '적'에 대한 비이성적 표현은 물론 비상식적 표현과 조롱도 허용되었다. 그 누구의 지적도 받지 않고 향유되었다. 급기야 그것은 집단의 공식적 언어로 승화되었다.

비판 받지 않은 명제와 걸러지지 않은 언어들이 개방 공간으로 용감하게 진출하였다. "박근혜 후보 떨어트리려 출마하였다!" 내겐 속 시원하겠지만 이런 언어들이 평범한 대중의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것은 자명하다. 속말 다하고 살지 못한다. 공감을 얻지 못하니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게 되고,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아폴론적 로고스'는 고사하고 민주주의도 물 건너 가 버렸다. 폐쇄형 사회관계망 기술이 낳은 슬픈 결과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적지 않은 기술이 인간의 물질적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 주며 민주주의와 시민의 덕성을 함양시켜 주는 속성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속성이 저절로 발현되는 건 아니다. 그 결과도 예정되어 있지 않다. 해당 기술에 제도와 행위자의 문화, 의지가 개입하기 때문이며 그 과정에서 기술이 진화하기 때문이다.

사회관계망 기술도 그렇다. 그것이 의사소통의 범위를 확장하고 그 속도를 제고함으로써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줄 잠재력은 결코 작지 않다. 하지만 그 결과는 예정되어 있지 않다. 그것이 최근의 폐쇄형으로 구속되어 민주주의의 전망을 어둡게 할지 개방형으로 복귀하여 디오니소스적 카니발로 끝날지 알 수 없다. 둘 다 민주주의와 좋은 사회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

페친들이여, 진정 우리 사회가 진보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페이스북의 루저'로 퇴각하지 말고 더 넓은 인터넷 공간으로 다시 진출하자. 페이스북의 학습 결과를 그곳에서 검증 받고 성찰하자. 그 결과를 대중에게 민주적 방식으로, 그리고 인내를 가지고 설득하자! 그리하여 '일베' 루저들에게 점령된 개방형 사회관계망을 탈환하자. 폐쇄형과 개방형 사회관계망 기술 모두를 포기하지 않고 활용하는 노력이야 말로 민주주의가 승리하는 길이다. 실천해 보면 그거 쉽지 않다. 민주주의가 쉽지 않은 것과 똑같다.

※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기획·연재합니다.
naeori@pressian.com 다른 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