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은 에로틱하다
비밀은 에로틱하다
[몸의 일기 ⑦] "그 몸에게 '겁먹지 마' 한다"
2015.09.01 13:35:21
다른 사람의 일기를 훔쳐보기. 타인의 은밀한 기록이 눈앞에 펼쳐질 때의 기분은 상상만 해도 짜릿합니다. 그래서 기회만 온다면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임에도) 대부분의 사람은 유혹에 넘어가기 마련이죠. 그런데 여기 자신의 일기를 통째로 공개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 일기에는 열두 살 때부터 여든일곱 살까지 그 남자의 내밀한 기록으로 빼곡합니다.

그 남자의 첫 몽정(13세), 첫 섹스(23세), 첫사랑(26세), 첫아기(28세). 그의 첫 외과 수술, 즉 코 막힘과 코골이의 원인이 되는 코 안의 용종 제거 수술(27세), 오른팔 안쪽에 생긴 첫 검버섯(44세), 노안에 난생 처음 쓰게 된 안경(45세), 처음으로 본 손자(53세), 신용카드 비밀번호를 처음으로 망각한 일(62세).

이뿐만이 아닙니다. 49세 때 갑자기 찾아온 이명과 친구 되기, 60세가 넘어서면서 평생을 갈 것 같았던 아내와의 욕망이 사그라진 현상. 알츠하이머에 대한 공포, 손자의 동성애를 접한 70대 할아버지의 당혹스러움, 오랜 친구들과의 이별 그리고 갑작스런 손자의 때 이른 죽음. 그리고 시간 앞에 허물어져가는 자신의 육체. 마지막으로 세상과의 이별을 준비하기.

그렇습니다. 이 남자의 일기는 보통의 일기와 다릅니다. 우리가 그간 엿보았던 대부분의 일기는 내면의 정신 상태를 기록한 것이죠. 그런데 이 일기는 표면적으로는 철저히 '몸'에 초점을 맞춥니다. 우리는 그 몸의 일기를 읽으며 비로소 알게 되죠. 그 남자의 몸에는 사랑, 갈등, 관계, 과학, 역사 등 세상의 온갖 것들이 가로지르고 있다는 사실을요.

우리는 그 남자의 몸의 일기를 엿보면서 한 남자의 자아를 찾아가는 긴 여정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얽히고설킨 온갖 등장인물의 이야기는 덤이고요. 이 특별한 일기를 프랑스 작가 다니엘 페나크가 <몸의 일기>(조현실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로 펴냈습니다. 페나크가 누구냐고요?

페나크는 '말로센 시리즈', 어린이 책 '까모 시리즈', <소설처럼>, <학교의 슬픔> 같은 소설, 에세이 등을 통해서 프랑스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적지 않은 팬을 가지고 있는 작가입니다. 이 페나크가 일기 형식을 빌려서 '소설인 든 소설 아닌 소설처럼' 써내려간 작품이 바로 <몸의 일기>입니다.

<프레시안>과 문학과지성사는 이 <몸의 일기>를 먼저 읽은 여덟 명의 독후감을 매주 화요일, 금요일 두 차례씩 연재합니다. 20대의 젊은 작가, 40대의 의사, 60대 70대의 노(老)작가까지 다채로운 빛깔의 독후감이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일곱 번째 독후감의 주인공은 60대 후반의 소설가 오정희 작가입니다.

▲ <몸의 일기>(다니엘 페나크 지음, 조현실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한 소년이 태어난 지 12년 11개월 18일째부터 쓰기 시작한, 자신의 몸에 대한 관찰과 기록인 일기는 죽음을 눈앞에 둔 87세 19일이 되는 날 75년의 긴 여정을 마친다.

몸으로 겪은 극심한 공포를 극복하고자,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일기를 시작하는 소년의 결의나, 마지막에 이르러 지치고 노쇠한 몸을 향한 "이젠 가야 할 때가 된 것 같구나. 겁먹지 마"라는 격려의 다독거림이 한편으로 안쓰럽고 애처로운 것은 생명과 함께 죽음을 품고 태어난 인간으로서 필연적으로 맞게 되는 물리적 변화, 종말에 대한 공포에 깊이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유쾌하고 신랄하고 재기발랄한 작가 다니엘 페나크로서도 몸에 대한, 솔직하고 적나라한 진술을 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몸이란 누구와도 다르지 않으나 또한 어느 누구와도 같지 않은, 가장 내밀한 사적 영역이 아닌가. 내 경우 몸에 대한 별다른 자각이 없던 유년기를 지나 여성으로서의 성징이 나타나면서부터 몸은 오직 나만의 비밀한 영토, 영역이었다.

몸은 수치스럽고 감추어야 할 대상이고 자유로운 영혼의 감옥이라는, 젊은 날의 강고한 금욕주의에서 벗어나면서부터, 나는 자기 검열도 자의식도 발표할 의도도 없는, 오직 자신만을 위한 이야기로서 몸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한갓 몽상이었을까, 하릴없이 청춘과 중년과 장년을 보내버리고 명백히 노년기에 이른 이즈음, 거울을 보면 익히 알고 있는 내가 아닌 내 어머니가 보인다. 신생아들의 얼굴이 구별하기 어렵게 비슷한 것처럼, 혈족이 아니더라도 늙어가는 얼굴들과 노쇠의 과정은 대개 비슷하다. 그 평등함이 때때로 위안이 되기도 한다.

늙어가는 몸은 무겁고 우울하다. 여기저기 고장을 일으키면서 불편함과 통증으로 '내가 여기 있다, 내 존재는 이렇게 엄연하다'고 당당히 얼굴을 내민다. 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몸의 고통 앞에서 난감해하며 나는 자신을 몸이라는 숙주에 붙어 기생하는 보잘것없는 헛것, 잉여로 느끼기도 한다.

다니엘 페나크가 일기 형식을 빌린 이 장편 소설을 발표한 것은 그의 나이 68세 때이다. 구상을 하거나 쓰기 시작한 것은 훨씬 더 전일 것이다. 일기라고 능청을 부리며 작가는 87세 죽음까지 다 당겨 살아버렸다. 67세를 살고 있는 나는 주인공이 살아가는 67세의 나날에 내 몸의 일상을 포개며 읽는다. 그리고 같은 나이를 살고 있는 우리(?)는 똑같이 놀라운 탄성을 내뱉는다. "―그런데도 이 변치 않는 감정은 어찌된 것일까. 몸 구석구석이 다 퇴화하고 있는데도 삶의 환희는 변함없이 남아 있으니—."

그러나 이러한 삶에의 기쁨과 애착 그리고 질병과 고독과 죽음으로 가는 여정에의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60대로 접어들면서 느끼던 안도감을 기억한다. 어쨌거나 치러냈다는, 저만치 결승점이 보이는 듯한. 일종의 해방감이나 자유로움이기도 할 것이다.

그의 흉내를 내어 일기의 첫머리에 67세 9개월 20일, 이라고 표기해놓고 보니 이 생이라는 시간과 공간 속의 어느 지점에 와 있는 내 존재가 모눈종이 위의 좌표처럼 보인다. 목적지와 방향을 스스로 알아 찾아가는 것은 머리도 마음도 아닌 몸일 것이니 그 몸을 향해 나 또한 '겁먹지 마'라고 말한다.

몸을 이루고 있는 세포들은 일정 주기로 죽고 새로이 생성되기 때문에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라고 하지만 내 몸에는 살아온 시간의 나이테가, 몸의 기억이 새겨져 있을 것이다. 탯줄이 이어졌던 자국, 지난 시간의 증거와 흔적으로서의 숱한 작은 상처들, 초경과 임신과 출산과 수유의 흔적들. 기다림과 열망과 기쁨과 좌절—바로 내 몸으로 살아온 삶이. 작가가 자 신의 몸에 대해 "나의 비밀정원"이라고 하듯이 내게도 몸은 끝내 나의 마지막 신비이자 비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정은숙 시인의 시구를 살짝 빌리자면 '비밀은 에로틱하다.'

(60대 후반의 여성인 오정희 소설가는 196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완구점 여인'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습니다.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오영수문학상, 불교문학상, 동서문학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2003년에는 독일에서 번역 출간된 <새>로 독일의 주요 문학상 중 하나인 리베라투르 상을 수상했는데, 이는 해외에서 한국인이 문학상을 받은 최초의 사례로 한국 문학사의 의미 깊은 사건입니다. 지은 책으로 <불의 강> <유년의 뜰> <바람의 넋> <불꽃놀이> 등의 소설집과 <새> 등의 장편이 있습니다.)
다니엘 페나크(Daniel Pennac)는…

▲ 다니엘 페나크. ⓒCatherine Hélie/Editions Gallimard

본명은 다니엘 페나키오니. 1944년 모로코 카사블랑카에서 태어나,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등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학창 시절에는 열등생이었으나, 그 시기에 독서에 남다른 흥미를 갖게 되었다. 프랑스 니스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고 26여 년간 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73년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했는데, '말로센 시리즈'와 어린이 책 '까모 시리즈'에서 보여준 기발한 상상력과 재치 넘치는 표현으로 대중성과 문학성을 두루 인정받으며 작가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밖에 강압적인 독서 교육을 비판하고 책 읽기의 즐거움을 깨우치는 <소설처럼>(문학과지성사 펴냄), 열등생이었던 어린 시절의 자전적 경험을 담은 <학교의 슬픔>(문학동네 펴냄) 등의 에세이와 소설, 시나리오를 발표했으며, 한 남자가 10대부터 80대까지 몸에 관해 쓴 일기 형식의 소설 <몸의 일기>는 2012년에 발표되자마자 독자들을 사로잡으며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1995년부터 교직에서 물러나 집필 활동에 전념하고 있지만, 정기적으로 교실을 찾아다니며 학생들을 만나고 있다. 미스터리 비평상(1988년), 리브르앵테르 상(1990년), 르노도 상(2007년)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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