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까지 잡아먹었지만, 결국 굶어 죽었다!"
"쥐까지 잡아먹었지만, 결국 굶어 죽었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북도 순창 ⑦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고통

조선대학교 정문 건너 편(광주 동구 서석동)에서부터 전남대학교병원(광주 동구 학동)까지 길게 늘어선 광주 포로수용소(남광주 수용소)에는 빨치산 패잔병으로 넘쳐났다. 나무 널빤지와 천막을 올려 엉성하게 늘어뜨린 막사에는 김창근을 비롯해 수많은 포로들이 곧 있을 죽음을 기다렸다.


차가운 맨바닥을 고른 뒤 그 위에 짚을 깔고, 다시 모포 한 장을 얹은 것이 이들 잠자리의 전부였다. 바닥에서 올라온 냉기는 물론 천막 곳곳에서 새나온 삭풍은 뼈 속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빨치산의 수감 생활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고통 가운데 하나다. 구타와 고문은 말할 것도 없고, 배고픔과 추위 역시 산속 생활에 뒤지지 않는다. 더욱이 삶에 대한 희망이 사라진 것은 이들을 특히나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수용소에서 살아서 나온 것이 용할 정도로 많이 맞았다. 이동할 때는 동료들에 의해 부축을 받고 이동할 만큼 몸에 성한 구석이 없었다. 늘 질질 끌려 다녔을 정도다. 잦은 구타와 고문으로 피똥을 싸기도 일쑤였다. 그렇게 맞아서인지, 아니면 어떤 스트레스 때문인지 몰라도 빨치산 활동에 대한 상당한 기억을 잃어버렸다. 지금도 그때 기억이 듬성듬성 끊겨있다."

김창근 씨는 포로수용소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장기 구금이 계속되면서 이들은 뼈와 가죽만 남았다. 조금이라도 씹을 것이 생기면 입 안에 넣기 바빴고, 이 때문에 수용소에 난 잡풀은 물론 쥐까지도 잡아먹었다. 굶주림은 이처럼 사람을 이성 잃은 동물로 만들었다.


▲ 거제 포로수용소에 이송돼 막사 배치를 기다라는 빨치산 포로들의 모습.


전주 사단본부와 남원의 군단본부를 거쳐 광주 포로수용소로 옮겨온 임방규도 수감번호 3125번을 배정받고 막사 한 곳에 수용됐다.

빨치산 포로들은 수용소 도착 첫날 발가벗겨진 채 머리에서 발끝까지 DDT(Dichloro Diphenyl Trichloroethane, 유기염소 계열의 살충제이자 농약) 분말 소독약을 뒤집어썼다. 훗날 '환경운동의 어머니'로 평가받는 미국의 해양생물학자 레이첼 카슨(Rachel L. Carson)은 1962년 <침묵의 봄(Silent Spring)>이란 자신의 저서에서 DDT 사용에 대한 환경적인 해악과 신체에 끼치는 악영향을 지적한 바 있다.


하지만 이전까지만 해도 DDT는 박테리아나 유해 바이러스를 위한 최고의 살충제로 인식돼왔다. 사람 몸에 달라붙은 이도 마찬가지였다. 줄곧 산에서 생활하던 빨치산의 경우 입던 옷을 장작불에 털면 쏟아져 나온 이들이 '투두둑' 거리며 불꽃을 태울 정도로 많은 이가 기생했다.


온 몸을 하얀 살충제로 소독한 이후에는 'PW(Prisoner of War·전쟁 포로)'라고 써진 군복을 입었다. 하지만 사이즈는 제각각이다. 어떤 이는 소매가 칠부가 됐고, 어떤 이는 허리가 커서 바지를 돌돌 말아 입었다. 앳된 얼굴의 소년 빨치산들은 몇 사이즈나 큰 헐렁한 군복 탓에 마치 허수아비 같았다. 그럴 때면 포로들끼리 군복을 바꿔 입기도 했다.


포로들은 질병과 굶주림으로 반항할 기력조차 없었다. 뼈만 남은 이들은 뻐쩍 될 새도 없이 죽어나갔고, 잠든 상태에서 그대로 눈을 감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여기 둘" "여기 셋" 이런 식이다. 몇몇이 들것에 실려 버려졌고, 하루 저녁에 30명 이상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비타민C 부족으로 인한 괴혈병은 이들에게 특히 무서운 존재였다. 임방규 씨는 수용소 내 괴혈병을 이렇게 기억했다.


"일단 밥이 너무 적고 부실했다. 밥 한 덩이를 네 명이서 나눠먹었고, 소금에 절인 시래기나 곰팡이가 파랗게 피어있는 고등어 구이를 찬으로 먹었다. 수용소 내에서 가장 많이 죽는 게 괴혈병이었는데, 비타민C가 부족하면 혈관이 터져서 온 몸이 푸릇푸릇해지고, 잇몸도 파랗게 염증이 생긴다. 거짓말 같은 얘긴데, 혀로 이빨을 누르면 치아가 45도 각도로 누울 정도로 흔들거렸다. 그리고는 몸이 붓고, 목이 부어 물도 안 넘어간다. 그러다 결국 맥도 못 추고 죽는 것이다."


온갖 장염도 이들을 괴롭혔다. 괄약근이 제 역할을 못해 변이 줄줄 새기도 했다. 특히, 잠자리에 변이 흘러 모포를 더럽히는 경우가 많아 장염이 심한 환자는 막사 입구 쪽에서 재웠다. 변을 보면 창자가 녹아내려 질게 빠졌고, 혈뇨와 혈변을 누는 것도 일상이었다.


서무과에 있던 임방규의 한 동무는 "모두 1600여 명이 사망했다"고 귀띔해줬다. 병단에서 함께 활동한 그는 서무과에 배치돼 수용소 내 행정 업무를 도맡았다. 결과적으로 4000~5000여 명이 수감된 이곳에서 30~40% 가량이 재판을 받기도 전에 목숨을 잃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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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소개
신념이 담긴 글은 울림을 주며, 울림은 다시 여론이 됩니다. 글을 쓰는 궁극적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을 연재 중이며, 오늘도 순응과 저항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