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당 집 자손이라서? "나는 결국 총살을 피했다!"
명당 집 자손이라서? "나는 결국 총살을 피했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북도 순창 ⑨

총살 집행 현장과 美고문의 확인 사살

빨치산 사형수들에게는 수정(手錠)을 채웠다. 대부분 앞 수정을 찬 것과 달리 일부는 뒤 수정을 찬 채 꽤나 불편하게 움직였다. 아마도 감방 내에서 사고를 친 모양이었다. 다행히도 임방규는 뒤늦게 광주교도소로 이감된 터라 수정이 부족해 손목을 채우지 않았다. 사형수들은 취침 시에도 수정을 찬 채 잠을 잤다. 이 때문에 조금이라도 돌아누울 때면 쇳소리가 잘그락거렸다. 그 모습이 마치 올무에 걸린 짐승처럼 느껴졌다.


수감 생활도 어느덧 일상이 됐고, 군피(군인 및 경찰 피고인)와도 스스럼없이 지낼 정도로 가까워졌다. 하루는 빨치산 포로들과 사형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사형 집행은 한 달에 서너 번, 한 번에 네다섯 명씩 이뤄졌다. 재판받은 순서대로 집행이 이뤄졌기 때문에 번호가 호명되면 그 다음 차례를 미리 알았다.

군피 중 친하게 지낸 김 상사(군피들은 대부분 이름 대신 군대 있을 때 계급으로 불림)가 말을 건넸다.

"총살 현장에 가봤습니다."

모두들 깜짝 놀랐다. 말하기를 주저하던 김 상사가 임방규의 재촉에 입을 열었다. 그는 유치장에 있을 때 사형장으로 몇 차례 사역을 나갔다고 했다. 군피 가운데 비교적 온순하고 죄질이 크게 나쁘지 않은 수감자가 사역 대상자였다.


'오늘 야마가 있다'는 헌병대 말에 유치장은 웅성거렸다. '야마'는 일본말로 산(山)이란 뜻인데, 감옥이나 유치장에 먹을 것이 비교적 많을 때 쓰는 은어다. 즉, 야마가 있다고 하면 유치장 밖 사역('야마'란 뜻에서 알 수 있듯 주로 산)을 나감과 동시에 먹을 것이 풍족하게 제공된다는 의미다.

사형장으로 사역을 나갈 때는 삽과 곡괭이를 차량에 싣고 이동했다. 어딘지 모를 산기슭에 도착한 뒤 헌병이 지정해놓은 장소에 한 사람이 들어갈 정도의 구덩이를 파고 그 앞에 말뚝을 박았다.


그 시각 사형수가 탄 트럭이 헌병 지프차의 차량 통행 안내를 받으며 광주 시내를 빠르게 빠져나갔다. 작업이 끝나갈 무렵 지프차를 선두로 사형수가 탄 트럭이 들어왔고, 사형 집행관과 미(美) 고문의 차가 그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사형수들의 표정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입에는 재갈이 물려있고, 눈은 흰 천으로 가려있으며, 양팔은 뒤로 묶인 채 엄지손가락을 또 한 번 철사로 비틀어 감긴 사형수들이 포승줄에 줄줄이 묶인 채 트럭에서 내렸다.

두꺼운 포승줄이 풀리고 이내 한 사람씩 말뚝에 묶이기 시작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일부 사형수들은 몸을 떤 채 흐느꼈다. 지난날을 돌이켜볼 틈도 없이 찰나의 시간이 지나가고, 다섯 명의 군인이 이들로부터 열댓 발자국 떨어진 곳에 배치돼 집행관의 구령을 기다렸다.

"지금부터 ○○○, ○○○, ○○○…. 총살을 집행한다. 장탄! 사격!"

말뚝에 묶인 사형수들이 피투성이가 된 채 순식간에 축 늘어졌다. 총살은 M1소총의 탄창(8발 들이)을 모두 비운 뒤에야 멈췄다. 한 헌병이 말뚝의 밧줄을 끊고 팔다리가 축 늘어진 시체를 반듯하게 뉘였다.

그다음 사형 집행을 감시하던 미 고문이 다가와 시체의 턱 밑에 대고 또 한 번 권총을 갈겼다. 확인 사살이다. 콜트 총에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구겨졌다. 그리고 구덩이에 버려졌다.

▲ 1950년 9월 미군이 인민군 포로들을 발가벗긴 채 수색하고 있다.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위 사진은 한국전쟁 직후 보도연맹원 총살 장면으로 미국이 기밀 해제로 분류돼 공개된 사진이다.

헌병들은 가끔 믿을 만한 군피에게 총을 건네기도 했다. 김 상사는 "우리도 사형수를 쏘는 게 싫지만 헌병들이 시키는데 어쩌겠느냐"며 미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미리 파둔 구덩이에 시체를 묻고 조그맣게 봉분을 만들면 이날 사역은 끝난다. 헌병들은 작업을 마친 이들에게 막걸리 한잔씩과 고구마, 빵 등을 나눠줬다.

훗날 임방규는 사형 장소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다만, 광주교도소가 동명동(광주 동구)에 위치한 점을 감안할 때 교통편이 비교적 유리한 화순이나 담양, 또는 광주법원 뒤편인 지산동이나 산수동 인근의 무등산 기슭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하지만 확실치는 않다.

1953년 정전 협정과 고등법원 재심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되면서 감방 내 분위기도 전과는 달라졌다. 수감자끼리의 자유로운 대화는 물론 적잖은 양의 사식도 허용됐다. 간수들의 태도 역시 달라지면서 살아나갈 수 있다는 희망까지 생겼다. 실제 정전 조인 후 두 달 동안은 사형 집행이 이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호사로운(?)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추분(秋分)이 지난 9월 말이었다. 한꺼번에 40~50명의 사형수가 불려나갔다. 50명이 끌려 나간 뒤 또 다시 50여 명이 처형됐다. 특히, 수번에 따라 집행되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무작위로 호명됐다. 2356번! 1352번! 1895번!…. 순서가 없었다.


명적계(인명부) 직원이 손에 쥔 명단을 보고 아무렇게나 불러댔고, 호명된 사형수들은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돌이 됐다. 어떤 이는 사색이 된 채 남겨진 자의 손을 부여잡기도 했다. '먼저 간다'는 인사였다. 불과 40일 동안 160여 명의 사형수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수번(사형수) 호명은 보통 오전 11시경 이뤄진다. 이 때문에 10시쯤 되면 대화가 사라지고, 시간이 좀 더 지나면 감방 안은 초긴장 상태가 된다. 11시가 넘어야 하루의 시간이 더 주어진 이들은 비로소 긴장을 풀고 일과를 시작했다. 이런 날이 매일 반복됐고, 그렇게 긴장 속에 하루하루를 넘겼다.


▲ 1950년 8월 임시 포로 수용소에서 포로들의 신상 명세서를 만들고 있다.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그런데 언제부턴가 집행이 이뤄지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는 동안에도 불려나간 사형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1954년을 이틀 앞둔 12월 30일, 조식 후 네 명의 이름이 호명됐다. 명적계 직원이 아닌 계호과 간수가 찾아온 터라 내심 안심하며 사방을 나섰다.

잠시 후 네 명이 들어오고, 또 다른 네 명이 불려나갔다. 분위기가 어수선하더니 앞서 호명된 사형수가 재심을 한다는 얘기를 들려줬다. 재심? 순간 주위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2175번! 임방규 차례가 돌아왔다. 사동을 수리한 두 개 감방이 임시법정으로 쓰였다. 고법판사와 서기가 앉아있고, 포로수용소에서 모진 구타와 함께 작성된-지난날의 죄목이 기록된-누런 서류뭉치가 '사형수' 임방규를 기다렸다.

"고등법원에서 재심하려 나왔으니, 범죄 사실과 서류에 기록된 내용이 다르면 부인해도 좋다."


인상이 단정한 50대 중년의 판사가 임방규를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그런 뒤 곧바로 심사가 시작됐다.


"언제 입산했지?"
"1950년 10월 1일 전북 임실군 성수면 성수산에서 입산했습니다"
"서류에는 전북도당 산하 407연대 소속으로 되어있는데?"
"맞습니다."
"쌍치 돌고개 전투에 참가했나?"
"예, 하지만 전투요원은 아니었습니다. 열병을 앓고 회복기에 있었기 때문에 경환자들과 함께 식량을 구하러 나갔습니다."
"기차 습격 작전에 참가한 사실은?"
"당시 오른팔에 큰 부상을 입어 전투에는 참가하지 못하고 대신 부대원들의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임방규는 판사에게 오른팔을 걷어 보이며 흉터를 가리켰다. 판사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취조한 내용을 기록한 서기가 서류를 내보이며 확인 뒤 서명하라고 지시했다. 임방규는 서류에 한자로 '林芳圭'라고 서명했다.

판사가 임방규의 글씨를 보더니 "글씨를 참 잘 쓰네, 학교는 어디를 다녔냐?"라고 물었다. 심문 때와는 분위기가 달라보였다. "전주공업학교(현 전주공업고등학교)에 다녔습니다"라고 답하자,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잘 될 거다"라며 안심시켰다. 임방규는 훗날 그 판사에 대해 "아마도 내 또래의 아들이 있어서 그렇게 측은하게 날 대했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재심은 그렇게 20여분 동안 짧게 이뤄진 뒤 끝났다.


1953년의 끝자락이 서서히 저물어갔다. 한반도에 펼쳐진 동족상진의 비극이 막을 내림과 동시에 민족 분단의 슬픔이 시작되는 역사 한가운데를 관통한 임방규는 콱 막힌 사방에서 차디찬 시찰구 너머를 응시했다. 200명 이상의 사형수 가운데 마지막 37명만(무기수 일부 포함)이 이곳에 남아 생과 사가 판가름 날 새해를 맞이했다.

▲ 1953년 7월 27일 오전 판문점에서 열린 정전 협정 조인식에서 유엔군과 북한군이 각각 서명하고 있다.


12명의 무기수, 그리고 마지막 총살 집행

2월28일 오전 10시, 25명이 한꺼번에 호명됐다. 여기에는 무기수도 포함돼 있었다. 소지품을 갖고 나오라는 간수 말에 이감을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남아있는 12명도 5명의 무기수가 함께 있어 그리 불안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25명 모두는 이날 계호과에 끌려가 총살당했다. 살아서 광주교도소 사동을 나갈 것이란 기대감은 이내 상실감으로 바뀌었다. 남은 이들이 우두커니 앉아 앞서 간 25명을 떠올렸다. 밤이 됐지만 이 밤이 생전 마지막 밤이 될 것 같아 쉽게 잠을 이를 수 없었다. 적막감 속에 뒤척이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시간이 지나 어느덧 2주가량이 흘렀다. 3월12일 오후, 전방 준비를 하라는 간수 지시에 식기와 모포 등을 챙겨들었다. 하지만 겁부터 났다. 앞서 간 동지들도 이런 식으로 불려갔다. 체념한 듯 사방을 나와 긴 복도를 따라 걸었다. 모든 방의 문이 열린 채 텅 비어있었다. 그 많은 동지들 가운데 12명만이 남았다. 여기에는 5명의 무기수와 7명의 사형수가 포함돼 있다. 사동 건물을 뒤돌아보니 마치 괴물처럼 느껴졌다.

간수의 안내를 받아 3사동으로 갔다. 그리고 이날 저녁 한 간수가 "명당 집 자손들"이라며 사형수 전원이 무기로 감형됐다는 소식을 전해줬다. 200명 이상의 사형수 가운데 마지막까지 생존한 7명이 재심을 통해 무기수로 감형된 것이다. 여기에 임방규도 있었다. 어안이 벙벙한 이들은 한참동안 서로를 번갈아가며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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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소개
신념이 담긴 글은 울림을 주며, 울림은 다시 여론이 됩니다. 글을 쓰는 궁극적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을 연재 중이며, 오늘도 순응과 저항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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