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시장 개척!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시장 개척!
[최성흠의 문화로 읽는 중국 정치] 종교 전파의 경제적 동인과 함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영화가 있다. 노승과 젊은 스님, 그리고 동자승을 통해 삶과 죽음의 의미를 성찰하고 그 해탈의 경지를 탐구하는 것이 영화의 테마다. 물론 영화의 테마도 좋았지만, 나에게 더 큰 흥미를 유발한 것은 그 영화의 제목이었다.

"달마는 왜 동쪽으로 갔을까?"

불교는 B.C. 6세기 무렵 인도에서 발생했지만 브라만교가 확고부동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번성하지 못했다. 그러다 300여 년이 지난 후 인도를 통일한 아쇼카 왕이 전폭적으로 불교를 지원하면서 인도 전역에 널리 퍼질 수 있었다. 그러나 불교의 번성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쇼카 왕이 죽자 힌두교에 밀려 불교는 다시 쇠퇴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부터 약 300년이 지난 후 한나라 말기에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됐으며, 다시 500여 년 후 위진남북조 시대에 달마 대사가 중국에 왔다.

'종교'라는 것을 경제적 관점에서 본다면 '영혼의 위안'이라는 상품을 파는 서비스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상품의 특징은 소비자가 이것을 구매하면 저것은 구매하지 않고, 심지어는 똑같은 제품도 이곳에서 구매하면 저곳에서는 구매하지 않겠다는 제품에 대한 특별한 충성심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업을 하는 기업은 여느 기업과 마찬가지로 시장을 잃기 시작하면 신상품을 만들어 내거나 해외 시장 개척에 나서야 한다. 이도 저도 아니면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소규모의 사업을 할 수밖에 없다.

이런 불경스런 비유를 한 이유는 달마 대사가 상업적 목적으로 중국으로 넘어 왔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며 종교의 본질을 폄훼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한 종교가 지속하기 위해서는 그 종교를 수호하는 교단이 있어야 하고, 교단이 존속하기 위해서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요즘은 새로운 교리의 신상품을 마구 만들어내며 마케팅에만 열을 올리는 일부 종교 교단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외래 종교와 사상의 전파가 인류 의식의 지평을 확장하는 역할을 하는 면이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불교는 아쇼카 왕 사후에 인도에서 세력을 잃고 동남아로 전파된 후에 대승 불교라는 이름으로 중국에 들어 왔다. 처음에는 사치품처럼 지배층에게 받아들여졌던 것이 달마가 들여온 선종이라는 신상품이 대중들에게 유통되기 시작하면서 중국 문화와 융합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소비자들은 이미 도교라는 유사한 제품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교를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에 따라 불교는 도교와 지속적으로 시장 경쟁을 벌이며 중국인들의 생활 속에 파고들었으며 유교는 이들의 교리를 흡수하여 성리학과 양명학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렇게 불교는 외래 사상이 아니라 중국 문화, 그리고 우리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지 약 1000년 쯤 지나서 그보다 더 서쪽에서 또 한 사람이 찾아 왔다. 유럽이 종교 개혁의 열풍에 휩싸여 있을 때 스페인에서 새롭게 등장한 예수회의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명나라를 찾은 것이다. 불교가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명나라의 지배층은 그가 가져온 서구 문물에 호기심을 느끼며 마테오 리치에게 호의적이었다.

마테오 리치 본인의 성품이 학구적인데다가 온화하기도 했지만 예수회의 전도 방식이 현지 친화적인 전략을 구사했기 때문에 명나라 지배층은 기독교에 대해 거부감을 갖지 않았다. 예를 들어, 예수회는 공자의 제사를 인정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전례(典禮) 문제로 예수회는 해산됐고, 뒤이어 들어온 선교사들은 엄격한 교리를 고집했다. 결국 청나라 초기에 기독교 포교가 금지되면서 기독교는 중국의 백성들과 소통할 기회를 상실하고 말았다.

종교 전파의 경제적 동인과 함의


중국에 기독교를 전파한 교단은 예수회가 처음은 아니다. 당나라 때 경교라고 불리는 네스토리우스 교파가 들어와 원나라 때 잠시 번성한 적이 있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 교파는 중국 전파 이전에 이미 유럽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교파이고, 예수회도 정통 가톨릭의 주류는 아니었다. 다시 말해 시장 개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교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지 친화적인 전략을 쓰기는 했지만 너무나 다른 세계관과 문화적 차이는 극복할 수 없었다. 특히, 삶과 죽음에 대한 관점이나 선과 악에 대한 관점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영화를 예로 들자면 <엑소시스트> 혹은 <오멘> 같은 서양의 고전적인 공포 영화에 등장하는 악령은 동양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악령은 악마 그 자체이므로 물리치거나 제거해야할 대상이지 화해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악은 그렇게 악마에게 속한 것이며 기독교 세계에서 죽음이란 신에 속할지 악마에 속할지 결정되는 순간이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귀신은 서양의 악령과는 전혀 다르다. 대부분 이승에 한(恨)이 남거나 객지에서 횡사하여 장사를 치르지 못하면 귀신이 된다. 한을 풀어주고 장사를 지내주면 귀신은 고맙다는 인사까지 하며 사라지는 것으로 묘사된다. 귀신은 악마가 아니라 억울하게 죽은 인간인 것이다. 죽음이란 불교에서는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하는 윤회의 과정이고, 유가에서는 귀신혼백(鬼神魂魄)이 흩어지는 음양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렇게 동서양의 세계관은 융합하기 어려울 정도로 달랐다.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서 생을 마감하고 북경에 안장된 지 약 200년 후에 다시 유럽인들이 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전과 다르게 군대를 이끌고 왔다. 청나라는 제2차 아편 전쟁 이후에 다시 기독교 포교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의 목적은 거기에 있지 않았다. 진정한 목적은 경제적 이익이었다. 당시의 중국인들은 국가의 권익이 하나씩 넘어가는 것을 보면서 세계관의 차이를 극복할 겨를이 없었다.

▲ 마테오 리치의 묘. 베이징 시청구 베이징행정학원 교내에 자리하고 있다. ⓒwikimedia.org


처음에는 그들의 군대를 부러워했고, 그 군대를 유지할 수 있는 경제적 역량을 동경했다. 그 다음은 그런 경제적 역량을 갖추게 하는 정치 체제와 사회 제도를 배우고자 했다. 그런 과정을 우리는 근대화라 부른다. 근대화가 시작된 지 아직 200년도 안됐다. 불교가 그랬던 것처럼 그것이 완전히 융화되어 우리의 것으로 정착되려면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우선 너무도 다른 세계와 신에 대한 인식론의 차이를 극복하고 포괄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의 지평이 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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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소개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중국 문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대륙연구소, 북방권교류협의회, 한림대학교 학술원 등에서 연구원을 역임했다. 중국의 관료 체제에 관한 연구로 국립대만사범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중국의 정치 문화에 대한 연구로 건국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 권으로 읽는 유교> 등의 번역서와 <중국 인민의 근대성 비판> 등 다수의 연구 논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