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틀리다'가 아니라 '다르다'일까?
정말 '틀리다'가 아니라 '다르다'일까?
[독서통] <일상적인 것들의 철학>
2016.06.29 12:44:37
온 세계가 브렉시트(Brexit) 충격의 여파에 휘말린 듯합니다. 가장 큰 당혹감은 세계의 이성을 수백 년 동안 선도한 영국 시민이 얼핏 보기에 가장 어리석은 판단을 내렸다는 데서 오겠죠. 더구나 우리가 직접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여기는 국민 투표로 이와 같은 판단을 내렸기 때문에 그 충격이 더한 것 같습니다. 

여기서 누군가는 '중우 정치'라는 말을 떠올릴지 모르겠습니다. 대중은 어리석다는 비웃음 말이죠. 여기서 흥분을 조금 가라앉힙시다. 민주주의는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라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민주주의의 주체인 시민이 '생각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프레시안>과 <시사통>이 함께 진행하는 '독서통'은 이참에 철학 책 한 권을 뽑았습니다. 어렵지 않느냐고요? 아닙니다. 발음도 어려운 철학자의 이름과 알쏭달쏭한 철학 이론이 장황하게 나열된 책이 아닙니다. 우리가 매일 마주치는 '일상적인 것'을 다시 한 번 따져보는 책입니다.

철학자 이성민 박사의 <일상적인 것들의 철학>(바다출판사 펴냄)은 부모 양성 쓰기 운동에 관한 생각, '틀리다'와 '다르다'를 엄격히 구분하는 것이 간과한 문제점, 한국에서 왜 공적 토론이 이토록 안 되는지에 관한 궁금증을 풉니다. 심지어 왜 우리의 담배 이름 대부분이 외국어인지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어쩌면 당연하다 여기고 넘어가는 일, 조금 불편하거나 이상하지만 고민해 보지 않고 넘어가는 일을 저자는 깊숙이 파고들어가 독자를 설득합니다. 27일 서교동 시사통 스튜디오에서 이어진 흥미로운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 철학자 이성민 박사. ⓒ프레시안(최형락)


생각보다 쉬운 대중 철학책

김종배 : 독서통 시간입니다. 이번 주의 책은 무엇입니까? 

강양구 : 브렉시트(Brexit)가 세계적 화두입니다. 특히 대의 민주주의에 직접 민주주의적인 요소를 보완하고자 마련된 국민 투표로 이런 결정이 이뤄진 데 당혹감을 느끼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 민주주의는 그런 의사 결정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오류를 줄이려고 노력하는 긴 여정이기도 합니다.

그 여정 속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시민 하나하나가 '생각하는 시민'이 되는 것이죠. 그런 생각하는 시민이 많아질수록 민주주의도 바로 설 것이고요. 그런데 마침 생각하는 시민이 되려는 독자를 위한 가이드북이 나왔습니다. <일상적인 것들의 철학>. '쉽게 대답할 수 없지만 묻지 않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라는 부제가 이 책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김종배 : 지은이 소개를 해주시죠.

강양구 : 철학자 이성민 박사입니다. 현대 철학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이성민 박사의 이름은 들어보셨을 거예요. 이 분이 처음 번역한 책이 1990년대 중반에 나온 마이클 하트의 <들뢰즈의 철학 사상>(갈무리 펴냄)입니다. 마이클 하트는 나중에 이탈리아 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와 <제국>을 공저한 그 학자죠.

최근의 인문 독자라면 슬라보예 지젝 책의 역자로 이성민 박사를 만나봤을 거예요. 지젝의 책을 포함해, 지젝이 포함된 슬로베니아 학파에서 생산한 책 여러 권을 이성민 박사께서 번역하셨습니다. 이 책에서도 중요하게 언급하는 줄리엣 미첼의 <동기간>(b 펴냄) 같은 저작이요.

그런데 <일상적인 것들의 철학>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어요. 이성민 박사께서 번역하신 책들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펼친 지 두 시간 정도 만에 독파했어요.

김종배 : 이성민 박사, 나오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이성민 : 안녕하세요.

김종배 : 책이 생각보다 읽기 쉬워요. 이 책을 쓰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이성민 : 제가 속한 라캉학회에서 한 매체에 한국에서 일어나는 여러 증상에 관해 연재하기로 했어요. 그 가운데 제가 맡은 게 한국 사람의 인간관계입니다. '왜 한국 사람은 수평적 인간관계를 만들지 못하는가'라는 주제로 글을 한 편 썼죠. 그 전에 저는 주로 학술 논문을 썼는데, 이 글은 대중을 상대로 마음먹고 쉽게 써봤어요.

마침 그 글을 바다출판사 여미숙 편집장께서 보시고 연락하셨습니다. "딱 이 정도의 글만 모아서 책으로 내자"고 하셨죠. 덕분에 이 책이 나왔습니다.

우리는 한국말로 생각하지 못한다?

김종배 : 목차를 읽어드리면 이 책이 다루는 주제가 쉽게 이해되실 거예요.

"왜 우리는 타인을 미워하는가" "붕괴된 학교는 복원될 수 있을까" "정말 '틀리다'가 아니라 '다르다'일까" "부모의 성을 모두 쓴다고 평등해질까." 모두 의문형으로 끝납니다. 우리의 고정관념에 관한 도발로 이해됩니다. 특히 "왜 담배 이름은 서양어인가"라는 질문이 눈에 들어옵니다. (웃음) 왜 서양어입니까?

이성민 : 이 책에 실린 이야기는 대부분 책 제목처럼 소재도 작고, 주제도 작은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서는 큰 이야기를 해보았어요. 바로 문명의 문제입니다. 예전에 운전하다가 <왕상한의 세계는 우리는>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들었어요. '다나스'라는 태풍이 한국에 상륙하기 직전이었습니다.

진행자께서 기상 전문가를 모셔 다나스에 관해 얘기하는데, 맨 처음 다나스의 뜻을 이야기하더라고요. 필리핀에서 작명한 이름이었는데 '경험'이라는 뜻이었어요. 이 이름에 관해 기상 전문가가 "형이상학적 이름"이라고 했는데, 왕상한 교수께서 동의하셨어요. 순간 '여기에 무슨 형이상학이 있지?'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웃음)

알다시피, 한국에서 제출한 태풍 이름은 우리한테 익숙한 단어입니다. 동물 이름이나 곤충 이름이죠. '경험'은 구체적 대상을 지칭하지 않는 보편적 말이지만, 그렇다고 형이상학적 단어는 아닙니다. 그 대화를 들으며 '한국 사람은 한국어로 보편적 사유를 하는 데 문제를 가진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강양구 : 그런 문제의식이 담배 이름과도 연동이 되었죠?

이성민 : 맞습니다. 담배 이름 가운데 부담 없는 뜻의 단어는 다 한국어로 짓습니다. 장미, 거북선, 은하수와 같은 단어죠. 반면 서양어로 지은 이름은 전부 관념어죠. 디스(this)는 '이것'이라는 뜻이고, 에쎄(esse)는 '본질'이라는 뜻이죠. 레종(raison)은 '이성'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보편적 사유를 할 때는 한국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드는 대목이죠.

'경험', '존재' 같은 단어는 사실 형이상학적 단어가 아니고, 어려운 말도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관념어를 쓰면 '어렵다'고 생각해요. 단지, 보편적 단어일 뿐인데도 말이죠.

김종배 : 우리가 학교 다닐 때 이런 개념어로 토론하고, 연상을 거듭하며 파고들어가는 훈련을 받아본 기억이 없습니다. 이런 데서 비롯된 문제 아닐까요?

이성민 : 저는 이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풀어보고자 했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퐁티가 모티프를 줬습니다. 메를로-퐁티의 설명을 듣기에 앞서서 전제할 것이 있습니다. 서양 철학자가 '문명', '문화'를 얘기하면, 반드시 '유럽 문명', '유럽 문화'를 뜻한다는 걸 알아두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메를로-퐁티는 "문화를 통해 보편성이 탄생한다"는 말을 했어요. 그렇다면, 우리가 보편적 사유를 하지 못한다는 말은 한국 문화가 없다는 뜻이어야 합니다. 문명이 없다는 뜻이죠.

가만히 생각해 보면, 유럽인은 유럽 문화 혹은 유럽 문명의 산물로 공유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플라톤의 철학이 그렇고, 쇼팽의 음악도 그렇죠. 그런데 한국사람, 더 나아가서 한-중-일 동아시아 사람이 동아시아 문화 혹은 동아시아 문명의 산물이라고 공유하는 것은 없어요. 우리에게 보편적인 사유는 어떻게 가능할지, 이런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습니다.

▲ 담배 이름은 외국어다. ⓒKT&G


양부모 성 쓰기의 극복 대상은 이미 사라졌다?

김종배 : 저는 '부모의 성을 모두 쓴다고 평등해질까' 챕터를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요즘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을 병기하는 분이 많으십니다, 이에 관해 전혀 새로운 관점을 제기하셨어요.

강양구 : 예를 들어, <프레시안>에는 전홍기혜 편집국장이 있습니다. 책에서 언급한 조한혜정 연세대학교 명예교수도 있고요. 여전히 아버지, 어머니 양성을 쓰는 이들에 관한 사회의 시선은 따갑습니다. 일상생활에서 불편함을 감수해야 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노골적인 비아냥거림의 대상이 되곤 하죠.

김종배 : 일단, 부모 성을 병기하는 움직임은 어디서 비롯한 거죠? 

이성민 : 사람 이름은 사물 이름과 달리 독특한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성과 명으로 나뉘죠. '성(姓)'은 그 사람이 속한 공동체를 가리키는 말이고, 공동체 안의 그 사람이 가진 개별성을 가리키는 말이 '명(名)'입니다. 그간 우리나라에서 '성'은 가부장제의 상징이었죠. 아버지, 어머니 양성을 다 쓰는 이들은 가부장제 거부를 실천했죠.

저는 이런 실천의 의미를 폄하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상황이 달라진 것 같아요. 아버지 성이든 어머니 성이든, 성이 더는 특정한 공동체(가계)를 지시하지 못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어요. 이제 성은 그냥 아버지, 어머니 개인의 것일 뿐이죠. 이런 상황에서 양성을 쓰는 것이 과연 그분들이 애초 의도했던 가부장제 거부와 같은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요?

강양구 : 요즘에도 어르신 가운데는 그런 분이 계십니다만, 예전에 성을 얘기하면, '어느 강 씨의 무슨 파지? 몇 대 손이지? 그러니 너와 나는 몇 촌 관계지?' 이런 질문이 이어질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성을 놓고서 이런 걸 따지지 않습니다. 성이 더는 공동체(가계)를 상징하지 못하게 되어 버린 거죠.

이성민 : 맞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친족 구조가 해체되는 중이죠.

강양구 : 이런 상황에서 아버지 성과 어머니 성을 따서 양성을 쓰는 게 과연 의미 있는 실천인지를 물어보신 거로 이해해도 될까요?

이성민 : 네. 양성을 쓰면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할 일이 분명히 있겠죠. 그런데 그런 불이익을 감수하는 실천으로 과연 애초 의도한 바를 성취할 수 있을지 토론해 보고 싶었던 거예요. 양성 사용의 목표는 양성 평등일 텐데, 친족 구조 자체가 해체되는 상황에서 과연 양성 사용이 양성 평등으로 이어질 수 있겠느냐는 거죠.

강양구 : 제가 아는 어떤 시민 단체에서는 회원끼리 서로 이름 대신 별명을 부릅니다. 성도, 이름도 부르지 않습니다. 스스로 선택한 별명을 호칭처럼 부르죠.

이성민 : 그 단체에서 별명을 사용하는 분이 다른 단체에 가서도 별명을 사용하나요?

강양구 : 그러긴 어렵겠죠.

이성민 : 아마도 자신이 속한 단체에서만 사용할 수 있겠죠. 단체 밖으로 나가면 "저는 어느 단체에서 온 누구입니다"라고 말해야 할 겁니다. 그때 '어느 단체'가 바로 성의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이미 새로운 성명 체계를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누구를 만났을 때 "저는 어느 회사에 다니는 누구입니다"라고 하는데, 이때 '어느 회사'가 성이죠.

제가 이 글에서 제기한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장 확실했던 성명 구조가 해체된다고 볼 때, 이는 개인의 정체성 위기와 밀접하게 연동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족 혹은 친족 구조가 주는 정체성이 해체되고 있어요. 그간 인류에 가족이나 친족만큼 개인의 정체성을 좌지우지하는 막강한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았죠.

양성 쓰기는 기존의 공동체를 해체하는 신호이되, 새로운 공동체를 지향하는 실천으로는 부족한 것 같습니다. 딱 이 지점에서 질문을 던져본 것이죠.

'다르다'를 가르치지 말자?

김종배 : 우리 대부분이 '다르다'와 '틀리다'의 용법이 언제 쓰이는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에 관해 문제 제기를 하셨어요.

이성민 : 우리는 흔히 '다르다'고 써야 할 때 '틀리다'고 쓰면 잘못이라고 하죠. 특히 최근 이런 경향이 늘어난다고 봅니다.

강양구 : 인권 감수성이 예민해지면서 더 그렇죠.

이성민 : 네. "너는 왜 피부색이 틀려?" 하면 안 되고, "너는 왜 피부색이 달라?"라고 해야 한다는 식이죠.

그런데, 아이의 세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이는 "틀리다"는 말을 상당히 많이 씁니다. "쟤는 왜 옷 색깔이 틀리지?"라고 합니다. 어느 순간부터 이를 두고 '과연 인권 문제로 접근하는 게 옳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이에게 처음부터 '다름'이 '틀림'으로 주어진다면, 이는 어찌 할 건가, 이런 의문이 든 거죠.

김종배 : 다른 어떤 것을 처음 접할 때, 그 다름은 이질적인 것입니다. 나아가 미지의 것이고요. 일반적으로 공포가 따라오고, 경계는 그 다음에 따라 오죠.

강양구 : 내가 처음부터 알고 있던 게 아니라면, 그것은 원초적으로 틀린 것이죠.

이성민 : 그렇죠. 어린아이에게 처음에 다른 것은 무조건 틀린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아이는 틀림을 '다양성'으로 번역하는 과제를 안게 되죠. 그런데 기존 인권 담론은 틀림이 무조건 잘못됐다고 접근합니다. 아이에게 고유하게 주어진 통과 의례로서의 문화적 과제를 무시하고, '그렇게 쓰면 안 돼' 하고 이야기할 뿐이죠.

물론 인권 감수성을 키우는 건 중요합니다. 하지만 아이에게 주어진 과제인 틀림은 다양성의 원석과도 같습니다. 아이에게 차이는 우선적으로 틀림으로 인식됩니다. 아이는 크고 작은 틀림들을 세공해 다양성으로 바꾸는 법을 (스스로) 깨우쳐야 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아이가 속한 공동체의 교사나 부모는 아이가 틀림을 스스로 다양하게 세공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강양구 :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 가운데도 틀림을 다양성으로 연결하지 못하는 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분들은 어떻게 교육해야 합니까? (웃음)

이성민 : 사실 어른에 관해서는 별 대안이 없습니다. (웃음) 희망은 아이에게 있습니다.

한국에는 언론 자유가 없다?

강양구 : 이 책을 읽으면서 뜨끔한 대목이 있었습니다. 오바마가 G20 정상 회담 참석차 한국에 와서 기자회견에 참석했는데, 한국 기자에게 먼저 질문을 하라고 했어요. 그런데 한국 기자들이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부끄러운 장면인데, 이성민 박사께서 이 장면을 언급하며 '우리에겐 말의 자유가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셨어요.

이성민 : 저는 이 대목을 언론의 자유로 풀었습니다. '언론 자유'라고 하면, 흔히 한국 사람은 언론과 출판의 자유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영어에서 언론 자유는 '프리덤 오브 스피치(freedom of speech)'입니다. '말할 자유'라는 뜻이죠. 서양에서는 공공장소에서 자기 의견을 표현하지 못하면 성인이 아니라고 봅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라면 공적 공간에서 자기 의견을 표현 못하는 사람을 보고 '야만인(savage)'으로 생각해요. 문명인이 아니라는 거죠. 시민이 아니라고 보는 거죠.

이런 맥락에서 보면 언론의 자유는 '공적 공간에서 말을 자유롭게 할 자유'입니다. 그러니 오바마 대통령 기자회견이 우리에게 보여준 건 '한국인에게 언론 자유가 부족하다'는 거예요.

이 글을 쓸 때 최봉영 한국항공대학교 교수의 글을 참고했습니다. 최봉영 교수는 이 문제에 관해 한국인의 언어 체계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전 세계에 존댓말과 반말을 사용하는 나라가 한국과 일본뿐입니다. 최봉영 교수는 이를 학술적 의미에서 '존비어 체계'라고 부르는데, 존비어 체계를 따르는 한국과 일본에 유독 토론 문화가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존비어 체계는 한국어의 유전자에 가깝습니다. 이를 없앨 수 있느냐에 관해서 회의적이죠.

김종배 : 우리에게 토론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 우리가 여럿 앞에서 자기 의견을 떳떳하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말의 체계 때문이다?

강양구 :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상당히 그럴 듯 했습니다. 한국 사람은 대체로 외국에 나가서도 토론을 잘 못해요. 영어를 배우고, 독일어를 배우고, 프랑스어를 배워도 말이죠.

이성민 : <논어>를 읽어보면, 공자와 자공이 나옵니다. 그런데 '자왈(子曰)'을 두고 한국어는 '공자님이 말씀하셨다'라고 번역하죠. 반면, '자공 왈'은 '자공이 말했다'로 번역합니다.

강양구 : 중국어에는 존댓말, 반말 개념이 없는데도.

이성민 : 그렇죠. 한국어의 특수성이죠.

<성경> 해석도 우리의 언어 체계 때문에 달라집니다. 성경은 평등사상을 전파한 예수의 가르침을 담은 책입니다. 영어로 'Jesus said'는 '예수가 말했다'로 이해되겠죠. 그런데 우리나라 <성경>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로 번역하죠. 왜 기독교가 유독 한국에서 부작용을 일으키느냐를 생각해볼 때, 언어 체계가 큰 영향을 미쳤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김종배 : 언어 체계의 문제도 있고, 토론을 학습하지 못한 교육의 문제도 있겠죠. 경험적으로 분명한 사실은, 그나마 토론을 진행하려 해도 존대와 반말의 대상이 갈리는 순간 어렵다는 겁니다. 나이 많은 사람이, 혹은 지위가 높은 사람이 "어디다 대고 눈을 치켜뜨느냐"며 나와 버리면 토론은 불가능하죠.

우리가 일상에서 놓치기 쉬운, 하지만 관점을 조금만 달리 하면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몇 가지 주제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강양구 : 아무래도 일반 독자 입장에서는 쉽게 풀어 쓴 철학책에 손이 갑니다. 그런데 독자로서의 불만은, 쉽게 풀어썼다손 치더라도 결국 철학자의 이름을 나열하거나, 철학자의 사상을 나열하는 경우가 잦다는 겁니다. 그러니 책을 읽고 나면 철학자의 이름이나 철학자의 개념은 머리에 맴돌지만, 이를 자기 삶과 연결하는 건 버겁더군요.

그런데 이 책은 우리가 일상에서 부딪히는 여러 문제에 관해 깊이 생각해 보는 가이드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어요. 그래서 재미있었고요.

철학의 본질은 교육

"철학의 소임은 빛을 잃어 가는 것들에 다시 빛을 장착하는 것이다."

이솔 : 머리말의 저 말이 인상적이었어요. 철학자 이성민이 이 책을 낸 집필 동기가 저 말에 담긴 것 같습니다.


▲ <일상적인 것들의 철학>(이성민 지음, 바다출판사 펴냄). ⓒ바다출판사

이성민 : 플라톤을 읽어보신 분은 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이념 가운데 사람을 가장 잘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 '아름다움'입니다. 다른 이념은 무색무취한데, 아름다움은 홀로 빛을 발하므로 사람이 끌리죠. 일단 아름다움에 끌린 후 사람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플라톤은 '아름다움' 이념에 교육의 가치를 부여합니다.

저는 이 책 머리말에 '어떻게 하면 빛을 재분배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문을 넣었습니다. 이 글의 '빛'의 의미가 플라톤의 말과 같습니다. 이 책을 쓸 때, 저는 제가 다루는 소재가 가능한 한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가게끔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의 매력은 사람들이 이성을 가졌기에 느끼는 매력이어야 하죠. 이에 주안점을 갖고 글을 썼습니다.

강양구 : 마지막으로 독자 입장에서 한 마디만 덧붙일까요. 인문 독자들이 좋아하는 외국 철학자(?) 가운데 알랭드 보통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보통의 책이 그렇게 많이 읽힐 정도로 대단한 것인지에 회의가 있습니다. 과대평가 혹은 과대 포장되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은 자신의 철학을 '치유의 철학'이라고 말하죠. 철학의 목적이 '치유'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에 빗대어 이성민 박사의 철학을 '배움의 철학'이라고 부르고 싶어요. 철학의 목적이 배움으로써 이성을 찾는 것에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저는 보통의 책보다 이성민 박사의 이 책이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성민 : 보통 이상은 된다고 하니 듣기 좋습니다. (웃음)

김종배 : 오늘 독서통은 <일상적인 것들의 철학>이라는 책을 쓴 이성민 박사를 모시고 진행했습니다. 철학자 이성민 박사님,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성민 : 네, 고맙습니다.
이대희 기자 eday@pressian.com 구독하기 최근 글 보기
기자가 되면 거지부터 왕까지 누구나 만난다고 들었다. 거지한테 혼나고 왕은 안 만나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