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휘소는 '핵폭탄 메이커' 아닌 '노벨상 메이커'
이휘소는 '핵폭탄 메이커' 아닌 '노벨상 메이커'
[월요일의 '과학 고전 50'] <이휘소 평전>
2016.08.15 09:11:47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왜 그리 노벨상에 연연하는지 말이다. 받으면 좋겠지만, 받을 만한 상황인지부터 톺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상황이 열악하다면 제대로 지원해 개선해야 할 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일본만큼만 하면 되지 않겠는가. 뻔히 답이 보이는데도 못하는구먼, 자꾸 김칫국부터 마시지 말고, 우물에서 숭늉 찾지 말아야 한다.

또 모를 일이 있다. 박정희 정권 때 핵무기를 개발하려다 미국과 갈등을 벌인 사실은 이제는 두루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프로젝트와 상관없는 재미 물리학자를 굳이 애국자로 둔갑시켜 박진감 넘치는 소설거리로 만드는 이유를 말이다. 가족이나 제자들이 사실과 다르다고 암만 호소해도 씨알도 안 먹힌다.

그 사람은 조국을 위해 미국에서 암약하다 마침내 의문의 죽임을 당하고 만 것이 되어야만 한다. 물론,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우리에게 무엇이 집단 콤플렉스인지 알 수 있는 일이니 말이다. 경제 규모에 맞게 세계를 이끄는 민족으로 이름이 났으면 좋겠고, 미국의 군사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성을 확보했으면 하는 바람이지 않겠는가.

<이휘소 평전>(강주상 지음, 럭스미디어 펴냄)은 이휘소를 희생양 삼아 벌인 거짓말잔치를 단박에 깬다. 한 소설에서 이르기를 "60년대 중반에 이미 노벨상을 주어야 했다" "내 밑에 아인슈타인도 있었지만 이휘소가 더 뛰어났다"라고 말했는데, 평전을 쓴 강주상은 단호하게 그렇게 "평할 정도로 학문 업적을 쌓은 것은 아니다.

그의 학문적 공헌은 1970년대에 집중되었는데 이들을 감안하더라도 이러한 표현들은 "상당히 과장된 것"이라고 말했다. 강주상은 스토니브룩 대학교 물리학과에서 이휘소에게 박사 논문을 지도받았으니, 두 사람은 사제지간이다.

▲ <이휘소 평전>(강주상 지음, 럭스미디어 펴냄). ⓒ럭스미디어

관심이 집중될 핵무기 개발과 관련한 사항을 보면 이렇다. 다른 무엇보다 전공이 다르다. 이휘소는 핵물리학자가 아니라 입자 물리학자다. 아마 이휘소가 활동했던 연구소와 관련해 오해와 억측이 빚어진 모양이다. 이휘소는 공교롭게도 핵무기 개발 책임자였던 오펜하이머가 원장으로 있던 프린스턴 고등연구원과 최초로 핵연쇄 반응에 성공한 페르미를 기념한 페르미 연구소에 근무했다.

강주상은 두 기관이 핵무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연구소임을 여러 차례 강조하면서 "이휘소는 입자 물리학자이고, 핵무기는 수백 명의 핵 공학자와 기술자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핵무기 이론이야 이휘소가 살아 있을 때 이미 공개된 자료여서 대학생의 학부 논문으로도 나오고 있는 실정 아닌가"라는 강경식의 발언을 인용했다.

강주상은 두 번째로 이휘소가 박정희 정권에 대단히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점을 돋을새김한다. 이휘소는 1971년 정근모를 도와 우리나라에 물리학 하계 대학원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유신 체제가 강화되자 정근모에게 편지를 보내 대학원 사업을 없었던 일로 해버렸으니, 그 일부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위수령 발동, 학생 운동 탄압 등 최근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태로 우리가 추진 중인 하계 대학원 사업을 재고하게 됩니다. (…) 하계 대학원의 책임을 맡게 된다면 세인의 눈에 사실과 다르게 내가 한국의 현 정권과 그 억압 정책을 지지하는 것으로 비칠까 걱정됩니다. (…) 민주주의의 원칙을 무시하는 이러한 처사들에 실망되어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싶습니다."

이휘소는 파키스탄 출신의 노벨상 수상자 압두스 살람과 교분이 두터웠는데, 그가 고국의 물리학계에 이바지하는 바를 보고 많이 자극받았다. 살람은 상금을 전액 고국의 젊은 물리학자 지원 사업에 썼고, 파키스탄의 휴양지에 국제 하계 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이휘소는 첫해에 연사로 초빙되어 이 하계 학교에서 강의하기도 했다.

이른바 성공한 물리학자로서, 비록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지만, 고국의 물리학계 발전에 관심이 없을 리 없다. 비록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 의식 때문에 추진하던 하계 물리학교는 중단했지만, 1974년 AID 차관에 의한 서울대 원조 계획의 미국 측 심의 위원 자격으로 내한한다.

하지만 여기까지 일뿐이다. 강주상의 회고에 따르면 평소 이휘소는 "핵무기는 없어져야 하겠지만, 특히 독재 체제하 개발도상국에서의 핵무기 개발은 안 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일부 책에서 말한 박정희 친서는 분명히 없었고, 사후 받은 국민훈장 동백장은 국내 물리학계의 청원에 따른 결과였을 뿐이란다.

마지막으로 비운의 교통사고. 1977년 6월 16일, 이휘소는 콜로라도의 아스펜 물리연구센터의 학회와 페르미 연구소 자문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집을 떠났다. 공식 일정이 끝나면 가족과 함께 여름휴가를 보낼 계획이라 자가 운전을 했다. 사고가 난 도로는 시카고에서 서쪽으로 약 200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왕복 사차선으로 왕복 도로 사이에 약 20미터 폭의 움푹 파인 풀밭이 있었다. 사고는 오후 1시쯤 마주오던 대형 트럭이 고장 나면서 순식간에 중앙 분리 지역을 넘어 이휘소의 차와 충돌하면서 일어났다. 이휘소는 사고 현장에서 사망했고, 가족은 다행히 경상이었다. 사고 현장을 살펴보고, 사고 경위를 보건대 음모론자의 말대로 정보 당국의 암살일 확률은 거의 없다는 게 강주상의 판단이다.

이제, 이휘소의 삶과 학문 성과는 어떠했는지 살펴보자. 서둘러 결론부터 말하자면, 통상적인 표현에 빗대어 말하건대, 이휘소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이론물리학자이다. 만약 그가 42세라는 이른 나이에 유명을 달리하지 않았다면, 물리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고, 강주상에 따르면 1999년 네덜란드의 헤라르뒤스 토프트와 마틴 벨트만이 노벨 물리학상을 받을 때 공동 수상했을 가능성이 컸다.

이휘소는 어릴 적부터 독서를 좋아했고, 특히 일본에서 나온 <어린이 과학>이라는 잡지를 탐독했다고 한다. 양친이 다 의사였고, 중학교 시절 화학에 관심이 많아 공부방 한쪽에 작은 실험실을 차릴 정도였단다. 경기중학교를 다녔고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를 수석으로 들어갔다.

학과 공부가 지나치게 응용 화학에 치우쳐 실망했고 물리학에 더 큰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국내에서는 과를 바꾸기 어려운데 마침 미국 유학생 선발 시험에 합격해 마이애미 대학교 물리학과로 유학을 갔다. 이후 그는 "까다롭고 지루한 계산을 끝까지 해낼 수 있는 수학적인 기교를 터득한 물리학자이자, 추상적으로 보이는 이론이 실험 현상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잘 포착하는 특기"를 십분 발휘한 바, 한마디로 승승장구하는 삶을 살았다. 만 서른 살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물리학과 정교수가 되고, 만 서른여덟 살에 페르미 연구소 이론물리학장이 되었다.

학문적 성취가 어떠했는지는, 2006년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이휘소를 헌정하면서 작성한 헌정서에 잘 나와 있으니, 아래와 같다(헌정서의 내용은 스티븐 와인버그와 크리스 퀴그가 쓴 조사, 로버트 윌슨 페르미 연구소장의 추도사, 토프트의 추억담과 일치한다. 그만큼 객관성을 띠었다는 뜻).

"현대 물리학 이론의 기반인 '게이지 이론'은 양자전자기 이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이론은 질량이 없는 입자의 교환으로 전자기 현상을 나타낸다고 설명한다. 1967년 와인버그, 살람, 글래쇼는 무거운 게이지 입자들이 교환될 때도 성립하는 게이지 이론을 제창했다. 그러나 그 이론을 써서 실제로 의미 있는 계산이 가능한지는 모르는 상태였다. 이때 네덜란드의 젊은 대학원생 토프트가 유한한 답이 나오는 계산이 가능하다는 것을 벨트만과 함께 발표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논문은 특이하고 복잡하여 물리학계에서는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때 이휘소는 간명하고 일반적인 '비가환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라는, 이제는 고전이 된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벨트만-토프트 논문이 물리학계에서 각광을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와인버그-살람-글래쇼의 이론(현재 입자 물리학의 표준 모형이라 불림)이 전자기 현상과 약작용을 통합하는 전약작용이라는 통합 이론으로 널리 사용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헌정서에 나온 인물은 모두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강주상이 이휘소를 '노벨상 메이커'라 부른 이유다.

이휘소에게 덧씌운 핵무기 개발 참여라는 암막을 벗겨내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딴짓 안하고 연구에만 몰두한다 해서 붙은 '팬티가 썩은 사람'이라는 별명으로 상징되는 그 무엇이다. 우리가 이휘소라는 이름을 들을 때 떠올려야 할 것은 그가 모든 종류의 힘을 통합하는 궁극적인 이론을 찾으려 한 빼어난 물리학자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 있다. 그 이휘소를 우리가 키워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휘소가 살아있으면 노벨상을 받았으리라는 타령은 이제 그만하자. 우리의 교육과 연구 환경으로도 제2, 제3의 이휘소가 나오게 근본부터 바꿔나가자. 그래야 (핵무기 개발 운운하며) 이휘소에게 진 빚을 갚을 수 있을 테다.
tyio@pressian.com 다른 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