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미터 공자상, 돈에 무너진 지성의 가치
72미터 공자상, 돈에 무너진 지성의 가치
[장현근의 중국 사상 오디세이] 공자는 어떻게 중국인의 마음의 고향이 되었나?
72미터 공자상, 돈에 무너진 지성의 가치

중국(中國)이란 말은 특정한 지명이나 민족을 구분하는 용어가 아니라 모든 문화의 중심이란 뜻인데, 중국인들은 황제(黃帝)를 중국 문화의 원류라고 주장한다. 예컨대 중국 복식사도 황제에서 시작하고 중국 건축사도 황제에서 시작하고 중국의 문자도 황제에서 시작되었다는 식이다. 하드웨어는 그렇다 치고 중국의 정신이나 사상인 소프트웨어의 원조는 공자(孔子)이다. 공자는 중국인들의 마음의 고향이었고, 이젠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인의 정신적 원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공자는 히브리의 예수 같은 사람이었고, 고대 인도의 석가모니 같은 사람이었다. 일생을 병들고 힘든 세상을 구제하려고 노력했다. 그가 부처나 예수와 다름은 개인의 고난보다 사회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고, 수행이나 신앙을 통해 극락이나 천당에 이르기보다 지식과 정치를 통해 도덕적인 세상에 다다르려고 했다는 점이다. 고통스런 세상을 잊어버리고 벗어나는 것이 불교나 기독교의 구원이라면 세상 속에서 서로 부대끼며 열심히 공부하고 덕을 쌓아 모두 다 훌륭한 군자가 되는 것이 공자가 생각하는 구원이었다. 공자는 보이지 않는 신을 섬기는 삶 대신 역사상 존재했던 훌륭한 성인을 모범으로 삼아 중용(中庸)의 삶을 살고자 노력했다. '옛 어른들 말씀이 하나도 틀린 게 없어!' 이것이 공자다운 삶이다.

공부로 성공한 촌사람 공자

그의 삶은 신산했다. 배다른 누님들은 30세 이상 차이가 났고, 그나마 하나 있는 이복 형은 몸이 불편했다. 몰락한 귀족 출신인 아버지 숙량흘(叔梁紇)은 훤칠하고 힘이 장사였으나 구(丘, 공자의 이름)가 태어난 지 3년 만에 죽고 공자 열일곱 살에 아버지와 50살 이상 차이가 나는 천민 출신 어머니 안징재(顔徵在)를 여의었다. 가진 것 없었던 공자는 마구간지기 등 여러 일을 전전했으나 문(文), 무(武), 예(藝) 공부를 모두 성취하여 서른 살에 자수성가했다. 고난의 삶 속에서도 중니(仲尼, 공자의 자)는 자신이 배운 것을 열성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했고 제자들과 정치와 사회에 대해 끊임없이 토론했다. 노(魯)나라에서 잠깐 정치를 할 때에도, 14년 동안 온갖 고초를 겪으며 천하를 주유하면서도, 세상을 구하겠다는 꿈을 미련스럽게도 포기하지 않았다.

언제 공자가 노나라의 수도, 오늘날 중국 산동(山東) 곡부(曲阜)에 왔는지 알 수는 없다. 감숙성(甘肅省) 박물관에 가보면 곡부 사람들이 소금 산지를 찾아 서쪽으로 이주하여 예현(禮縣)에 정착함으로써 진(秦)의 조상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먹고 살기 힘들어 셈에 밝은 곡부 사람들에게 예(禮)를 가르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3000여 제자를 기르고 70여 명의 뛰어난 인재를 키워냈다. 이들 대부분은 천하 방방곡곡으로 흩어져 관료가 되거나 선생이 되었다. 자공(子貢)은 나중에 거상이 되기도 했다. 제자백가라고 불리는 수많은 사상가들은 이들과 관련이 깊다. 그리하여 공자는 마침내 스승 가운데 가장 성스러운 스승으로 추앙을 받았다. 오늘날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곡부의 공묘(孔廟), 공부(孔府), 공림(孔林)은 후대인들이 이 위대한 스승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놓은 거대한 건축군이다. 인구 60여만 명의 굽은 언덕 곡부 시내는 공자문화원, 공자연구원, 행단극장, 공자미술관 등 온통 공자판이다. <논어> 한 권 전체를 비석으로 만들어놓은 비림(碑林)도 가볼 만하다.

세계인의 볼 거리가 되어버린 곡부 시내에서 조용히 사색하며 제자들과 논쟁하던 공자의 모습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그의 후예 한 사람이 관광객을 태우려고 삼륜 모터 자전거를 몰고 가다 넘어진다. 동료들이 일으켜주니 운전자는 담배를 돌리며 괜찮다고 너스레를 떤다. 이내 혼자 남은 그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밥벌이인 기계의 고장이 클 텐데 남자의 호기는 혼자일 때 더 슬퍼진다. 좋은 가정에서 자라지도 못하고 편한 가정을 꾸리지도 못하고 훌륭한 주군을 만나지도 못한 인간 공자 또한 때로 너스레를 떨었을 테고 혼자 있는 대부분의 시간은 힘들고 쓸쓸했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밥벌이 따위를 고민하지는 않았다. 어떻게 하면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기막힌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고아와 과부와 홀아비가 굶지 않고 춥지 않고 살아가게 할 수 있을까? 등등을 생각했다.

중국 역사와 세계를 바꾼 고집쟁이 공자

곡부의 화려한 건축물들을 뒤로 하고 공자가 태어난 진짜 고향 니산(즉, 尼丘山)을 가보자. 여기도 시끄럽긴 하다. 길목에 72미터짜리 공자상이 있다. 72세에 돌아간 기념이란다. 공자는 인덕으로 세상을 구하려고 한 것인데 후예들은 세계 최대의 우상으로 돈을 벌려고 한다. 지성의 가치는 돈의 맛에 하염없이 무너져 내린다. 수염 많고 두 손을 맞잡고 서 있는 나이든 공자상은 당나라 오도자(吳道子)의 행교(行敎)상에서 유래한 모습이다. 나는 가끔 공부를 성취하여 눈이 빛나는 늘씬한 젊은 공자상을 꿈꾸곤 한다.

▲ 공자가 태어난 니산의 현재 모습. ⓒ장현근


기이한 돌산과 진흙 언덕 아래 부자동(夫子洞)은 공자의 탄생지이다. 이 동굴에서 갓 태어난 공자가 호랑이의 젖을 먹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나 여하튼 이 동네서 공자는 태어나고 뛰놀고 느꼈을 것이다. 곡부까지 100리 길이 안 되지만 참 깡촌이다. 공자는 먼지 풀풀 날리는 이 시골길을 걸어서 곡부로 나갔고 성공한 뒤 가끔 고향에 들렀을 것이다. 손자와 딸을 버스에 태우고 손을 흔드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공자의 어머니를 그려본다. 공자는 관천정(觀川亭)에 올라 멀리 기하(沂河)를 보면서 효(孝)를 몸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집안에서 효도 잘하고 밖에 나가 공경 잘하는 사람이 윗사람에게 덤비는 경우는 없다. 효제(孝悌)야말로 인(仁)의 근본이다.'

공자 사상은 한 마디로 인학(仁學)이다. 인(仁)이 귀천을 가리지 않은 평등한 인간관계를 뜻하는 글자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어질다'는 추상적인 뜻을 지니게 된 것은 공자와 관계가 깊다. 그리하여 동아시아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어진 사람이 되고자 한다. 중국 정치 사상 분야의 당대 최고봉인 유택화(劉澤華) 선생은 공자 당시 유행하던 '인'의 관념에 다음과 같은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예의를 지킴, 공적인 가치를 중시함, 백성의 생명을 보호함, 현명한 사람에게 기꺼이 권력을 양보함, 바른 뜻을 지킴, 정직함과 사람을 사랑함 등등이다. 어디 이런 지도자 없을까. 공자 때도 훌륭한 정치가는 참 드물었다. 어진 정치를 하라는 공자의 설득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공자는 수없이 좌절하면서도 인정(仁政)에 대한 희망의 끈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택선고집(擇善固執), 즉 좋은 가치를 선택하여 끝내 고집했던 공자의 삶은 그가 죽은 뒤 더욱 빛을 발했다. 공자처럼 살고 싶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맹자의 고향이나 순자가 활동한 지역은 모두 곡부와 니산에서 그다지 멀지 않다. 그들은 공자가 걷던 길을 거닐며 그처럼 살고 그와 같은 이상을 꿈꾸었다. 그들이 그리워한 사람은 제자들과 술 마시고, 절차탁마하고, 좋은 세상에 대해 논쟁하던 인간 공자였다. 한무제 이후 신이 되어버린 그런 공자가 아니었다. 거대한 건축물이나 동상을 만들어 팔지도 않았다. 공자를 살리려면 형식이 아닌 내용을 살려야 한다. 그래야 공부로 세상을 바꾸려는 보다 많은 공자가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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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소개
용인대학교 중국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중국 길림 대학교 문학원 및 한단 대학교 등의 겸임교수이다. 중국문화대학에서 '상군서' 연구로 석사 학위를, '순자'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가 사상의 현대화, 자유-자본-민주에 대한 동양 사상적 대안 찾기에 몰두하고 있다. <중국 사상의 뿌리>, <맹자 : 이익에 반대한 경세가>, <순자 : 예의로 세상을 바로잡는다>, <성왕 : 동양 리더십의 원형>, <중국의 정치 사상 : 관념의 변천사> 외 다수의 저서와 역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