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이 당신을 죽인다면, 그 '규칙'을 바꿔라"
"게임이 당신을 죽인다면, 그 '규칙'을 바꿔라"
[월요일의 '과학 고전 50'] <화학의 시대>
1990년대 독일에서 공부할 당시 화학 분야의 교과서는 우리나라 돈으로 대략 10만 원 정도했다. 지금도 작은 돈이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정말 큰돈이었다. 물론 독일 친구에게도 만만치 않은 액수였다. 하지만 문제가 없었다. 예를 들어 200명이 듣는 수업의 주요 교과서라면 학교 도서관에 150권, 학과 사무실에 30권 정도의 책이 비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도서관에서 한 학기 동안 대출받아 공부하는 게 상식이겠지만 나는 웬만하면 구입하려 했다. 이 도서관이 한국에도 있는 것은 아니니까. 독일 친구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나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독일 친구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바보였다. 그 수업을 듣고서 3년쯤 지나고 나면 도서관에서는 새 책을 구비하면서 예전에 쓰던 책을 5000원 정도에 팔았던 것이다. 3년이면 교과서가 변하는 게 화학인 것이다. 이것은 교과서 이야기이고 대중 교양 과학서에서의 화학책은 어떨까?

"화학 책이 없다." 연말만 되면 늘 드는 생각이다. 올해의 과학책 같은 것을 선정할 때마다 아쉬운 게 바로 화학책이다. 화학책은 일정 수준만 되면 리스트에 올릴 수 있을 정도로 드물다. 이유는 간단하다. 화학책은 쓰기도 어렵고 읽기도 어렵다. 화학은 생물학과는 달리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자연어로 서술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좋은 책으로 극찬 받는 화학책들은 대상을 직접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비유를 통해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 <화학의 시대>(필립 볼 지음, 고원용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사이언스북스

이런 점에서 볼 때 필립 볼의 <화학의 시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교양' 화학서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책은 고등학교 <화학 Ⅱ> 또는 대학의 <일반 화학> 수준 정도의 독자들이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화학 수업을 듣지 않았거나 일반적인 화학 교양서로만 화학을 접한 독자들은 책을 읽는 내내 한숨과 분노를 감추기 힘들 것이다. 화학과 거리가 먼 독자들에게는 '절대로(!)' 권하고 싶지 않다.

"화학 이외에는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화학조차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필립 볼은 이런 인용구로 서문을 시작한다. 이 말을 한 사람은 독일 최초의 실험물리학 교수로 알려진 18세기 사람 게오르크 크리스토프 리히텐베르크로다. 그러니까 적어도 우리는 이 말을 한 사람보다는 화학과 화학 바깥 분야의 것에 대해서 훨씬 더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필립 볼이 굳이 이 말을 인용한 것은 화학자들이 세부 전공의 범위를 벗어난 사고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화학, 매력 없는 과학

대부분의 사람들은 화학을 싫어하지만 화학이 생활에 도움이 된다는 데는 모두 동의한다. 화학을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근본주의 환경론자들도 의식주 모두를 화학에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도 화학은 가장 매력 없어 보이는 과학이다. 필립 볼은 이렇게 말한다.

물리학자들은 무의 무한한 신비를 탐구한다. 세상은 어디서 왔는가?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물질이란 무엇인가? 시간이란 무엇인가? (…) 생물학자들은 삶과 죽음의 문제에 도전한다. (…) 지질학자들은 화산과 지진에 용감히 맞서고, 해양학자들은 세상에서 숨겨진 깊은 곳을 탐사한다. 화학자들은 무엇을 하는가? 그들은 페인트를 만들고 다른 일도 한다. (8쪽)

남들은 하늘에서 우주의 흔적을 찾고, 지름이 수 킬로미터에 이르는 입자가속기에서 입자들을 충돌시키면서 세상이 무엇으로 이뤄졌는지 추적하고, 생명의 진화 과정을 연구하는데 기껏해야 페인트라고? 그렇다. 화학은 너무 평범한 것들을 연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대다수의 화학자들 역시 자신의 연구가 가치는 있지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지루할 것이라고 체념해버린다. 그래서 화학 책이 별로 없다.

필립 볼은 다르게 생각한다. 페인트를 연구하는 화학에는 놀라움이 있다. 물질의 화학적 성질을 이해하면 우리가 사는 세계를 조절하는 능력을 얻을 수 있다. 필립 볼은 화학이 고약한 냄새가 나는 시험관이나 흔들고 있는 학문이 아님을 보여주려 한다. 그는 유전학, 기상학, 전자공학, 카오스 연구처럼 화학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주제를 선택했다.

제1부 '현대 화학의 출발'은 2부와 3부에서 소개할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화학의 기본을 알려준다. 1장 '분자의 건축'은 원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분자를 이루는지를 설명한다. 한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2장 '촉매와 효소의 네트워크'는 화학 반응이 일어나기 위해서 꼭 넘어야 하는 장벽을 낮춰주는 촉매에 관한 내용이다. 금속 표면 촉매, 제올라이트, 생체 촉매처럼 낯선 주제를 설명하지만 1장보다 쉽다.

분자는 작다. 작은 분자를 어떻게 볼까? 이것을 소개하는 장이 바로 3장 '춤추는 분자의 스펙트럼'이다. 우리는 빛을 이용해서 분자를 본다. 그것을 다루는 학문을 분광학(分光學)이라고 한다. 3장에 들어서면 화학 문외한들은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할 것이다. 화학을 전공하는 학부생이라면 자신의 물리학 기초가 얼마나 허술한지 깨달을 것이다. 이게 이 책의 장점이다. 화학 전공자로 하여금 다른 분야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이쯤 오면 명민한 독자는 "화학 이외에는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화학조차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를 인용한 필립 볼의 의도를 간파할 수 있다.

노벨 화학상(1954년)과 노벨 평화상(1962년)을 단독으로 수상한 화학자 라이너스 폴링은 1950년에 "화학은 젊은 학문"이라고 말했다. 연금술과 연단술이 있기는 했지만, 드미트리 멘델레예프가 주기율표를 제안한 게 1869년이었고, 원자의 구조를 안 게 1900년대 초반인 것을 보면 1950년에 화학은 확실히 젊은 학문이었다.

지금은 어떨까? 4장의 제목은 '준결정 구조의 기하학'이다. 결정도 아니고 비결정도 아닌 준결정(quasicrystal)은 1984년에야 처음 발견되었다. 불과 30년 전이다. 내가 대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화학은 여전히 젊은 학문이다.

새로운 물질, 새로운 화학

2부는 새로운 물질과 새로운 화학을 다룬다. 그런데 이 책이 세상에 나온 게 1994년이다. 지금부터 22년 전으로 지금 화학과 학부생들이 태어날 무렵이다. 그 사이에 세상이 두 번 바뀌었다. 하나도 새롭지 않다. 하지만 이 책이 '과학 고전'으로 선정한 이유를 가장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5장 '분자 하나를 집을 수 있는 집게'는 분자가 다른 분자를 인식하는 과정을 다룬다. 초반에는 'DNA→RNA→단백질'이라는 우리에게 비교적 익숙한 생물학의 중심원리(central dogma)를 다루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을 보여주는 게 이 책의 목적이 아니다. 인공적인 분자가 어떻게 다른 분자를 인식하는지에 대해 서술한다. 매우 흥미로운 챕터다. 지구에 생명이 등장하기 전에 필연적으로 존재했을 분자의 자기 복제 메커니즘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6장 '전기가 흐르는 플라스틱'에서는 전기가 통한다는 게 무엇이고, 전기가 통하는 물질의 특성이 무엇인지를 살핀다. 반도체, 도핑, p형, n형, 세라믹, 초전도체 같은 단어가 쏟아진다. 다시 강조하건대 화학과 학부생들이 필독해야 할 부분이다.

7장 '칼로 자를 수 있는 액체'는 "나는 페인트를 만드는 것이 정말 이상한 직업이라는 것을 곧 깨달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필립 볼이 서문에서 화학이라는 학문을 정의할 때 왜 굳이 페인트를 사용했는지 이해하게 되는 장면이다. 이 말을 한 사람은 프리모 레비. 듣기만 해도 눈물이 나는 이름이다. 7장은 콜로이드에 관한 장으로 매우 지루하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콜로이드는 세포막과 LCD를 만든다. 이 둘을 설명하는 모든 것은 페인트를 설명한다. 화학은 생명과 모니터를 만드는 학문이고 이것을 빌립 볼은 간단하게 페인트를 만드는 학문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화학

3부는 화학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세 챕터로 되어 있다. 1부와 2부에서는 주로 화학 반응 과정을 다루었다면 3부는 화학 반응의 결과를 보여준다. 8장 '어떻게 화학에서 생명이 비롯되었는가', 9장 '분자 세계의 소우주', 10장 '지구를 되살리는 과학'은 생명, 자연, 우주, 환경의 이야기는 모두 화학으로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아직 그 어느 것도 이야기가 완결되지 않았다. 이야기가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과학이다.

필립 볼의 <화학의 시대>는 화학 반응론, 물리화학의 분광학, 무기화학의 결정학까지 화학에 대한 핵심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 화학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이 보려면 정신이 없을 것이다. 화학과 학부생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유기화학, 무기화학, 물리화학, 분석화학, 생화학으로 분리된 시각에서 벗어나 온전한 화학을 그리는 계기를 갖게 될 것이다. 옛날 책이다. 하지만 그 사이에 새로운 게 추가되었을 뿐 여기서 다룬 내용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여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화학자라면 읽어야 하는 책이다.

필립 볼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브리스톨 대학교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10년간 <네이처>의 물리와 화학 분야 편집자로 일하다가 현재는 다양한 분야의 과학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 출간된 책으로는 <흐름>, <가지>, <모양> 세 권으로 구성된 필립 볼 3부작이 있다.

필립 볼은 챕터마다 기막힌 인용구를 사용한다. 마지막 10장에서는 영성주의 정신과 의사 스캇 펙의 말을 인용한다.

"게임이 너를 죽이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면 게임의 규칙을 고칠 것을 심각하게 고려할 만하다."

화학의 시대에 특히 되새겨야 할 말이다.
tyio@pressian.com 다른 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