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음이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다"
"내 죽음이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다"
죽산 조봉암 법살(法殺) 50주년…재조명 작업 활기
2009.07.29 16:16:00
"내 죽음이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다"
"이 박사는 소수가 잘살기 위한 정치를 했고 나와 나의 동지들은 국민 대다수를 고루 잘살게 하기 위한 민주주의 투쟁을 했다.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기 바랄 뿐이다."

1959년 7월 31일 오전, 죽산 조봉암은 이같은 유언을 남기고 사형 당했다. 간첩혐의 유죄 판결에 대한 재심 청구 바로 다음 날이었다. 이승만 자유당 정부의 이강학 치안국장은 "민심을 자극하고 북을 이롭게 하니 일절 보도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다.

죽산 조봉암은 일제하에선 견결한 공산주의자로 투쟁하다 7년의 옥고를 치르고, 신생 대한민국에선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진보진영은 물론 뉴라이트로부터도 치적으로 평가받는 농지개혁을 주도했다. 이승만 장기집권기에는 야당 대통령 후보로 23.9%를 득표했다.

하지만 조봉암은 우파로 부터는 '간첩'으로, 좌파로 부터는 '전향자'로 치부당해 오랫동안 조명을 받지 못했다.

'법살' 50주년 맞은 다양한 토론회

▲ 죽산 조봉암 추모 토론회 포스터. ⓒ사회민주주의연대

그러나 '법살(法殺) 50주년'을 이틀 앞둔 29일, 정치권 안팎에서 다양한 추모행사가 진행되는 등 '조봉암 재조명' 작업이 활발해지고 있다. 특히 진보정당을 자임하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죽산 정신 계승'을 주장하며 경쟁적으로 토론회를 열었다.

민주노동당 새세상연구소 주최 토론회에서 발제자로 나선 조영건 6.15실천남측학술위원회명예위원장(경남대 명예교수)은 "죽산이 법살을 당한 것은 1956년 대선에서 표가 너무 많이 나와서"면서 "만약 죽산이 죽지 않았다면 4.19혁명 때 이 나라가 어떻게 변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우리는 광범한 근로대중을 대표하는 주체적 선도적 정치적 집결체이며 변혁적 세력의 적극적 실천에 의하여 자본주의를 지양하고 착최 없는 복지사회를 건설하여야 한다. (…) 우리는 남북한에서 평화통일을 저해하는 요소를 건제하고 진보당 세력의 주권 장악 하에 피 흘리지 않는 평화적 한국통일을 실현한다."

이같은 강령을 내걸고 대선에서 약진한 조봉암을 이승만 정권이 그냥 두고 볼 리 없었다는 주장이다.

진보신당 미래상상연구소가 주최한 '죽산 조봉암과 21세기 진보' 토론회에서 발제자로 나선 성공회대 조현연 교수는 죽산의 죽음이 자유당과 민주당의 합작품임을 지적했다.

조 교수는 "조봉암은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이승만의 정적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민주당의 정치적 라이벌이었기 때문에 죽은 것"이라면서 "민주당이 자유당에 맞서 동원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적 명분은 독재에 반대하는 '민주 수호'라고 할 수 있는데, 진보당 역시 민주수호를 주장하는 세력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당시 민주당은 조봉암의 법살에 대해 이렇다 할 입장을 내놓지 않았고 혁신계가 몰락한 공간에서 4.19 혁명이 발발하자 이후 정치적 과실을 독차지하다시피 했다.

안병직 "한국 진보세력, 낡은 사상적 구도속에서 헤매"

이날 토론회에서는 조봉암의 리더십과 정치철학의 현재적 계승에 대한 요구도 높았다.

민노당 토론회에서 조영건 교수는 "죽산은 6.15 통일시대에 부활했고 죽산을 승리자로 만드는 것은 이 시대를 민족공동체 정치의 알파와 오메가로 통일 책무를 안고 살고 있는 우리 몫이다"고 6.15와 통일에 방점을 찍었다.

진보신당 토론회에서 장석준 연구기획실장은 "조봉암은 제헌의회에 이은 총선과 대선 등 항상 대중 정치의 광장에서 단련되었고 국제 정치에 대한 안목을 바탕으로 평화통일 비전을 제시했다"면서 "그러한 리더십을 형성하는 것이야말로 '진보의 재구성'의 핵심과제다"고 주장했다.

한편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 등을 역임한 주대환 등이 주도하는 사회민주주의연대(사민련)토론회도 이날 오후 서울프레스센터에서 열렸다. 주대환 공동대표는 "조봉암 선생은 결코 잊혀져서는 안되는 분"이라며 "그 이유는 그가 역사의 희생자이기 때문도, 사법살인의 피해자이기 때문도 아니고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 토론회에는 뉴라이트의 정신적 지주 중 한 사람인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도 초청받아 "한국의 진보세력은 권위주의 시대의 '민주 대 반민주'라는 낡은 사상적 구도 속에서 헤매고 있다. 사회민주주의가 진보진영의 중심축에 서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

죽산 조봉암은 1898년 9월25일 인천 강화에서 태어나 강화공립보통학교와 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해 경성 YMCA 중학부에서 수학 후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첫 옥고를 치뤘다.

이후 일본 주오(中央)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사회주의 비밀결사 흑도회(黑濤會)에 참여하며 사회주의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925년 조선공산당 조직중앙위원장을 지내고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수학했다. 귀국 후 노농총연맹조선총동맹을 조직해 문화부책으로 활약한 뒤 상하이에서 코민테른 원동부(遠東部) 조선대표가 됐다. 1930년 ML당 활동을 하다 일본경찰에 검거돼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간 복역했다.

광복 후 인천에서 치안유지회·건국준비위원회·노동조합·실업자대책위원회 등을 조직하고, 조선공산당 중앙간부 겸 인천지구 민전의장을 지냈다. 하지만 1946년 공개서한을 통해 박헌영의 노선을 비판한 뒤 공산주의와 결별했다.

1948년 5·10 선거에서 제헌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고 이승만 정부의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냈다. 1950년에는 재선에 성공, 제2대 국회 부의장에 선출됐다.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2위 낙선하고 1956년 진보당 창당준비위원장으로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해 23.8%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같은 해 진보당을 창당했고 1958년 1월 이른바 '진보당 사건'으로 간첩 혐의를 받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됐다. 1심에선 징역 5년이 선고됐지만 1959년 2월 대법원은 사형선로를 내렸고 7월 30일에는 재심청구를 기각했다. 그리고 31일 사형당했다.

2007년 9월27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진보당 사건이 조작됐음을 인정하고 유가족에 대한 국가의 사과와 독립유공자 인정, 판결에 대한 재심 등을 권고했지만 정부는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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