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촛불을 낚아채는가?
누가 촛불을 낚아채는가?
[유라시아 견문] 테헤란 : 열린 역사와 그 적들
2017.06.17 13:10:37
누가 촛불을 낚아채는가?

1. 프레임과 패러다임

이란 대선에서 하산 로하니가 재선에 성공했다. 57% 득표율, 무난한 승리였다. 대략 2000만 표를 획득했으니 1860만 표를 얻은 지난 선거보다 성적이 좋아진 편이다. 청년들의 지지 덕이 컸다. 이란도 무척 젊은 나라이다. 18세부터 29세까지 유권자 비율이 30%에 이른다. 이 풋풋한 새천년의 주역들이 로하니의 최대 텃밭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엄지 척, 기호 1번을 선택했다. 기뻐하고 있을 테헤란 대학 친구들의 미소가 떠오른다.


못마땅한 것은 언론 보도이다. 대개 보/혁 대결로 접근한다. 로하니를 개혁파로, 라이시를 보수파로 분류한다. 수사는 더더욱 엉뚱하다. 로하니를 '중국풍 경제적 자유주의자'로, 라이시를 '러시아식 정치적 권위주의자'로 묘사하는 <뉴욕타임스> 기사에 실소가 터졌다. 으레 따라붙는 신정(Theocracy)이라는 규정에는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진다. 전혀 사실이 아니다. 여/야를 막론하고 수긍하는 '이슬람 공화국'이라는 국명과 헌정을 통으로 묵살하는 독법이다. 이슬람 문명의 정치학을 하나도 모르고 내뱉는 흰소리이다. 기실 보/혁을 가르는 잣대 또한 지극히 편파적이다. 서구에 유화적이면 개혁파라 부르고, 적대적이면 보수파란다. 제 눈에 안경이고, 제 논에 물대기이이다. 문제는 그런 편향적 시각(Fake News)이 영어 공론장의 영향력에 힘입어 한국서도 무비판적으로 통용된다는 점이다. 


테헤란에서 '현지 스승'으로 모셨던 이로 무함마드 마란디(سید محمد مرندی‎‎)선생이 있다. 테헤란 대학에서 세계학(World Studies) 연구소를 이끌고 있는 분이다. 정치 논평은 물론 문화 비평도 수려하여, 그의 토막글로 독해 공부를 하곤 했다. 그의 지론에 따르자면 서방과의 관계는 국면적인 정세일 뿐이다. 1979년 이슬람혁명 이래 40년간 체제전환을 획책하는 구미의 노림수가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경제 제제든 해제든 이란의 입장에서 보면 유별난 획기로 삼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응당 서방에 대한 태도로 보/혁을 구분 짓지도 않는다. 여/야를 망라한 대세는 유라시아의 대통합 물결에 이란을 조응시키는 것이다. 신실크로드의 한 축으로 나라를 재정립하는 것이 이란의 '개혁개방'이자 '뉴노멀'이다. 이 대사업, '리셋 이란'에 여/야, 보/혁은 따로 없다.


▲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 ⓒ연합뉴스


낡은 프레임을 깨기 위해서는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 예기치 않은 곳에서 뜻밖의 돌파구를 마주쳤다. 테헤란 대학 남문으로 길게 뻗어있는 헌책방 거리를 자주 쏘다녔다. 사르트르와 까뮈를 페르시아어 공론장에 소개했던 자랄 아흐마드(جلال آل‌احمد‎‎)부터 이란 독자의 탈식민주의 이론을 확립한 알리 샤리아티( علی شریعتی مزینانی‎‎)까지 1950~70년대 이란 사상계의 흔적을 되짚어보던 차였다. 역사에 불현듯은 없는 법이다. 1979년 이란혁명의 기저를 이룬 전사(前史)를 살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민머리에 뿔테안경을 쓴 익숙한 얼굴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책 한 권이 눈에 박힌다. 어라, 이 사람은? 단박에 미셸 푸코임을 알아챘다.


나로서는 감회가 새로운 인물이다. 세기말, 인문학부는 온통 푸코 열풍이었다. 훈육, 규율, 신체정치, 생체권력 같은 말들이 한창 유행했다. 나도 재빨리 대세에 편승했다. 새내기 겨울방학, 난생 처음 영어로 완독한 첫 책이 <푸코 리더>(The Foucault Reader>였다. 한지에 먹물 스미듯 흡수했다. 문장 하나하나가 진리의 말씀인양 쏙쏙 박혔다. 푸코 빠가 되어 입으로 폼을 잡던 덕후 시절이다. 그러나 오래 가지는 못했다. 제대하고 복학하니 이제는 너도나도 들뢰즈를 운운했다. 나도 덩달아 유목과 탈주와 탈영토화를 읊조렸다. 그렇게 한 철, 달뜬 열광은 시나브로 식어갔다. 이후 동아시아에 매진하면서 멀어져갔던 그를 유라시아로 선회하면서 재회한 것이다.

그런데 책의 제목이 영 낯설다. 엉성한 페르시아어 실력이었을망정, 제목 정도는 분간할 수 있었다. <이란 혁명론-'정치적 영성'에 관하여>란다. 눈대중으로 일별하니 1978년부터 3년간 집중적으로 이란혁명에 대해 썼던 글들을 모아서 번역한 것이다. 푸코가 이란에도, 이슬람에도 관심이 있었단 말인가?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와 베트남의 민족해방전쟁에 깊이 개입했던 바는 알고 있었다. 일본에 다녀와서 집필한 선불교에 대한 저서(On Zen Buddhism)도 익숙하던 바이다. 그런데 이란/이슬람은 금시초문이다. 곧장 웨이신(微信, wechat) 앱을 열고 마란디 선생에게 질문을 날렸다. 3초 만에 돌아온 메시지는 "100% must read!". 주저 없이 구입했다. 1만5000리알, 500원 정도 남짓이다. 5만 리알을 지불하고 거스름돈은 챙기지 않았다. 인간의 거래에 신의 거래를 아우르는 이슬람 경제식 셈법이다. 


1998년 초판으로 나온 책이었다. 푸코가 이란에 대해 첫 글을 쓴 1978년 이래 20주년을 기념한 것이란다. 더욱이 우연인 듯 인연 같았다. 영한 전자사전을 끼고 <푸코 리더>를 더듬더듬 읽기 시작한 해가 바로 1998년이었다. 응답하라, 1998. 이번에는 페르시아어-영어 구글 번역에 힘입어 푸코를 새롭게 읽어갈 차례였다.

2. 푸코의 오리엔트 : 정치적 영성

68혁명(의 좌절) 이래 유럽의 변혁 가능성에 낙담한 푸코는 아카데미보다는 저널리즘으로 기운다. 문헌 연구보다는 현장 천착을 별렀다. 책상 맡에서 가만히 생각하는 철학과 교수가 아니었던 것이다. 시대의 한 복판에서, 격동의 역사 속에서 사유가 촉발되고 철학이 격발되는 사상가였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지면을 제공해주겠다는 언론을 구하지 못한다. 결국 이탈리아의 에서 고정 코너를 맡는다. 처음에는 미국에서 새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카터 대통령을 취재할 계획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훨씬 더 강력한 기운이 이란에서 솟구치고 있었다. 이란의 근대화=서구화를 선도하던 샤에 대한 저항이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우연인 듯 운명처럼, 푸코도 이란에 빠져든다. 이란 혁명을 현장에서 직접 관찰하기로 결정하고, 이슬람 문명과 페르시아 제국에 대한 집중적인 학습에 들어갔다. 당시 그의 독서 목록 가운데는 알리 샤리아티의 저작도 있었다. 나도 짬짬이 읽어가던 차, 더더욱 반가웠다. 


▲ 테헤란의 미셸 푸코. ⓒmichel-foucault.com


푸코가 처음 테헤란에 닿은 것은 1978년 늦여름이다. 이후 파리와 테헤란을 오고가며 이란 혁명에 철학적 논평을 가미한 칼럼을 쓴다. 파리 교외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호메이니를 직접 만나기도 했고, 이란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경제학자 아볼하산 바니사드르(سید ابوالحسن بنی‌صدر)‎‎와도 대화를 나누었다. 테헤란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헬기에서 기관총을 난사했던 '검은 금요일', 국가 권력의 야만적인 폭압에도 이란 국민들은 공포에 짓눌리지 않았다. 진리와 함께 하고 있다는 용기로 충만한 100만 인파의 행진이 멈추지 않았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좌/우와 성/속을 망라한 만인만색의 봉기에 푸코는 압도당한다. 그리고는 '일반의지를 보았노라.'라고 썼다. 일반의지는 더 이상 사회과학의 이론적인 도구, 개념적인 방편에 그치지 않았다. 테헤란에서 일반의지(General Will=天命)는 현실태로 등장했던 것이다. 그 일반의지=주권은 1979년 2월 호메이니의 귀국까지, 장장 6개월을 쉼 없이 타올랐다.


관건은 구체제 타도 이후였다. 오월동주(吳越同舟), 우파들은 샤의 독재를 타도하고 자유민주주의로 이행해야 한다고 여겼다. 좌파들은 부르주아 독재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가야한다고 주장했다. 이슬람 유일체제를 옹호하는 근본주의자들도 있었다. 반세기가 넘도록 누적된 적폐청산에는 의기투합 했으되, 향후의 청사진만은 각기 달랐던 것이다. 이란혁명이 정파와 종파 간 이해관계로 분열하지 않고, 이슬람 공화정으로 귀착될 수 있었던 것 역시도 견고한 일반의지의 힘 때문이었다. 좌/우 및 종교의 극단을 배제한 80%의 일반의지가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사회계약과 역사계약을 견인한 것이다. 그래서 이슬람 근본주의도 아니요, 좌/우 근본주의도 아닌 성/속 합작의 독자적이고 독창적이며 독보적인 체제를 일구게 된다. 


그래서 이란혁명은 단순한 독재 타도에 그치지 않았다. 경제성장 이후의 민주화 요구도 아니었다.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근대화의 상투적인 단계론이 통용되지 않는다. 서구가 주조해낸 진보적인 역사, 계몽서사로는 수렴이 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정권을 바꾸어야 한다. 샤를 몰아내야 한다. 부패한 관료를 척결해야 한다. 경제와 외교 정책을 수정해야 한다. 나라 전체를 바꾸어야 한다. 적폐를 청산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자신을 변혁시켜야 한다. 누습을 타파해야 한다. 우리의 존재를, 우리의 존재 방식을, 우리와 타자의 관계 양식을, 우리와 사물의 관계 맺기를, 우리와 만물의 관계 짓기를, 우리와 영원의 관계를, 우리와 신의 관계를 변혁시켜야 한다. 그것이 진짜 혁명이다. 세계는 나와 남으로 구성된다. 남만 바꾸고 내가 바뀌지 않으면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반역이나 반란(Fake Revolution)에 그칠 뿐이다. 얼굴만 달리한 채 앙시앙 레짐이 반복되는 것이다. 푸코는 테헤란에서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과는 성격을 전혀 달리하는 ‘혁명적 혁명’을 목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좌/우 혁명의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창조적 혁명', 진정한 '문화대혁명'이었다. 나는 불길처럼 뜨거운 그의 문장에 녹색 밑줄을 치고, '계몽 이후의 개벽'이라고 말을 보태었다.


나와 남을 더불어 바꾸는 이 창조적 혁명 속에서 이슬람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이란인들의 영혼에 이슬람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란의 역사가 이슬람에 토대해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앞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아래로 쌓여서 공간을 이룬다. 그렇게 축적된 시공간의 지층이 바로 역사이다. 그래서 혁명 또한 역사와 무연할 수가 없다. 아니 긴박되어 있다. 이란의 혁명은 응당 이란의 역사와 긴밀하다. 시아파 이슬람의 역사로부터 혁명의 영감을 얻는다. 그래서 계급적, 지역적, 성별적 이로움을 다투었던 좌/우 혁명이 아니었던 것이다. 혁명의 주체 또한 자유주의를 추동하는 '깨어있는 시민'이나, 공산주의를 영도하는 '각성된 노동자'가 아니었다. 물론 그들도 있었다. 그러나 일부였을 뿐이다. 일반의지를 구현하는 부분의지였을 따름이다. 그리하여 이미 결정되어 있는 미래를 향해서 기성품 혁명을 답습하는 '역사의 노예'가 아니라, 창조적 역사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즉 이란의 혁명은 주체성 혁명이었다. 이슬람에 기반한 주체사상의 발현이었다. 푸코는 이를 '정치적 영성'이라고 명명한다. 동/서유럽의 경제적 이성도 아니요, 오리엔트의 비이성도 아닌 '정치적 영성'이 역사를 추동하는 원동력이었다. 


1978년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 출간된 해이기도 하다. 내 보건데 푸코의 오리엔트론이 훨씬 더 급진적이며 전복적이다. 사이드가 여전히 서구의 담론 분석에 그쳤다면, 푸코의 이란론은 서구를 역사의 생산자로, 비서구를 역사의 소비자로 간주하는 주/객 관계 자체를 허물어뜨렸기 때문이다. 교조적 민주주의, 자유주의 근본주의, 전투적 계몽주의에서 벗어나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진보라는 프레임을 벗어던짐으로써 패러다임 전환을 이룬 것이다. 일체의 선입견과 편견 없이, 지금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를 직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미 정립된 가치관, 세계관, 역사관으로 생동하는 현재를 가두지 않는 저널리즘의 정수를 구현한 것이다. 철학자-언론인이 선보인 르포르타주의 백미라고 하겠다. 나는 18년 만에 다시 만난 푸코에 훨씬 더 깊이 매료되었다. 두 번째 사랑이 더욱 곡진했다. 선각자라 아껴 불러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을 성싶다.

3. 계몽이란 무엇인가

▲ 테헤란의 미셸 푸코. ⓒmichel-foucault.com

하지만 동시대 푸코는 조롱거리가 된다. 비아냥대는 이들이 무척 많았다. '좌파 오리엔탈리스트'라는 딱지가 붙었다. 전근대적인 이슬람주의를 옹호하는 포스트모더니스트라며 지탄을 받았다. 


전례가 없지 않았다.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에서 68혁명의 영감을 얻은 '살롱 좌파'들이 프랑스에 유독 많았다. 덩샤오핑이 등장하며 개혁개방이 본격화되면서 비서구 사회주의에 열광했던 과거에 환멸을 품고 회개하는 풍조가 만연하던 무렵이다. 중국마저도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편입하는 마당에 대처의 '대안은 없다'(TINA)는 주장이 현실감을 더했다. 바로 그 시점에 한사코 이란혁명을 편드는 푸코가 시대착오적이라고 여긴 것이다. 마오를 호메이니로 대체한 것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푸코 본인도 자신을 향하는 곱지 못한 시선을 잘 알고 있었다. 1979년 5월 11일 <르몽드> 1면에 실린 칼럼이 재미나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내 친구들, 프랑스의 세련된 지성들은 나를 비웃고 있을 것이다.'라고 썼다. 그리고는 한 마디 더 보태었다. '하지만 나는 안다. 틀린 것은 내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라는 것을.'


그만큼 자신이 넘쳤다. 책상물림, 탁상공론이 아니었다. 현장에서 길어 올린 말이고, 실감에서 우러나온 글이었다. 그래서 말년에 제출한 저서가 <계몽이란 무엇인가?>(1984)이다. 칸트의 를 오마주한 것임에 분명하다. 혹자는 이란혁명 옹호를 철회하고 자유주의로 귀의했음을 확인하는 전향서 마냥 간주한다. 다시금 명백한 오독이다. 커녕 3년의 르포르타주를 더욱 발전시켜 더욱 단단한 철학으로 다져낸 책이다. 도리어 푸코는 칸트가 정의했던 계몽의 본질을 이란혁명을 통해서 보았노라고 말했다. 칸트 가라사대, 인간이 자기 스스로 만든 철창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계몽이다. 자기 속박, 자기주박에서 깨어나는 것이 계몽이다. 칸트 시절에는 탈-신학이 곧 계몽이었다. 그래서 중국 고전에 감화 받아 신학 이후의 철학을 입안했다. 그러나 칸트의 후예들은 스스로 계몽주의의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한때 계몽을 촉발했던 이성과 합리성이 딱딱하게 굳어버려 도그마가 된 것이다. 계몽을 또 하나의 교조로 삼는 계몽교가 들어선 것이다. 푸코는 이란 혁명을 목도함으로써 계몽을 재고하는 메타-계몽, 계몽적 계몽에 입문한 것이다. 


푸코가 계몽교도들이 섬기는 신으로 지목한 것이 바로 대문자 역사(History)였다. 역사가 신을, 사학이 신학을 대체했다. 신학적 목적론이 역사적 목적론으로 세속화되었다. 무차별적으로 살포되는 진보라는 관념이 역사의 다양한 가능성을 차단시켜버렸다. 그들이 맹종하는 역사의 귀착점을 향해 경쟁하는 좌/우파는 공히 '열린 역사의 적'이라고 했다. 그 '닫힌 역사'의 주박에 파열음을 내는 대장관을 테헤란에서 목도했던 것이다. 즉 푸코가 이란혁명에 공감했던 것은 전근대 세계에 대한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판타지 때문이 아니었다. 대문자 역사 밖에서 주체적인 인간들이 만들어가는 창조적 역사에 감화되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서구의 시간관은 산산이 부서져나갔다. 역사를 만들어가면서, 역사에서 자유로워지는 해방적 주체를 만난 것이다. 결정론에서 벗어난 자유인들을 접견한 것이다. 이란은 유럽의 모습으로 식민화된 과거(중세 봉건)에서도 해방되었고, 유럽의 형상으로 식민화된 미래(민주주의, 공산주의)에서도 해방되었다. 죽은 역사(Fake History)가 아니라 살아 숨쉬는, 살아 넘치는, 살아 움직이는 역사가 부활한 것이다. 열린 역사는 미래를 알 수가 없다. 역사는 불확실하고, 불확정적이며, 비결정적이다. 그래서 아름답다. 예술적이다. 경이롭다. 결말을 말하는, 종언을 논하는 이들은 죄다 <1984>의 빅브라더, 사기꾼이고 사이비(似而非)이다. 


'열린 역사'로 말미암아 비로소 윤리적인 주체도 가능했다. 미지의 미래에 기투하고, 역사를 창조하는 윤리학이 성립할 수 있었다. 테헤란 이후 푸코는 더 이상 '권력의 이론가'가 아니었다. 파놉티콘의 전지전능한 권력에 굴복하지 않았다. 통치성에서 주체성의 이론가로 전변한다. 1980년대 콜레주 드 프랑스의 강연도 UC버클리에서의 강의도 주체론에 관한 것이었다. 정치적 영성에 고무되어 역사를 창조해가는 윤리적 주체 탐구에 매진한 것이다. 대문자 역사 속에서 부속품으로 전락한 근대인이 아니라, 자기 변혁하는 주체, 자기 창조적인 주체를 깊이 탐구한 것이다. 그 소산이 바로 <성의 역사>의 마지막 3권, '자기 수양'이다. 그의 입론 속에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성적인 인간이 아니라 수양하는 인간으로 재탄생했다. 안타까운 것은 이란혁명 이후 촉발된 '다른 역사' 쓰기 작업이 채 만개하기도 전에 숨을 거두었다는 점이다. 충분한 의견 개진을 하지도 못한 채 푸코의 이슬람 담론은 중단되었고,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 속에서 다시금 확인사살, 부관참시 당하는 감시와 처벌을 면치 못했다.

4. 임을 향한 행진

트럼프가 중동을 순회하고 떠나자마자 걸프만 위기가 초래되었다. 느닷없이 GCC 국가들이 카타르와 단교를 선포하더니, 이란에서마저 테러가 발생했다. 호메이니의 영묘까지 목표로 삼았으니 이슬람 공화국에 대한 정면 도전인 셈이다. 그런데 다시금 아귀가 맞지 않는 프레임이 설파된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이란다. 시아파의 종가 이란과 수니파의 수장 사우디의 패권경쟁이 불거지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뭐 눈에는 뭐만 보이는 모양이다. 아랍세계의 길항을 유럽의 종교전쟁에 빗대어 파악하는 것이다. 


얼토당토않은 낭설이다. 순도 높은 가짜 뉴스이다. GCC는 태생부터 이란 혁명의 후폭풍이었다. 혁명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란이 시아파 국가라는 점에는 변화가 없다. 변곡점이 된 것은 이슬람 공화국이 건설되었다는 점이다. 혁명 이전 이란 또한 왕정국가였다. 계몽군주 샤가 미국의 속국으로 ‘페르시아만의 헌병’ 노릇을 했다. 이를 인민들이 뒤집어엎은 것이다. 이슬람의 천명을 수행하는 역성혁명이었던 것이다. 이슬람을 일국의 체제 수호 이데올로기로 강등시켰던 걸프만의 왕정국가들은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슬람에 바탕한 현대적인 공화정이 가능하다는 모델의 제시는 전 지구의 무슬림 공동체, 움마에게 호소력 넘치는 대안이었기 때문이다. 서둘러 왕정연합을 형성하고 미국의 군사력에 의탁하여 이란혁명 봉쇄에 나섰던 까닭이다. 즉 걸프연안 갈등의 핵심은 이슬람적 공화정의 확산이냐, 비이슬람적 왕정의 고수이냐이지 수니파 대 시아파의 경합이 아니다. 종파대결이 아니라 체제경쟁이다. 


헌데 테러에도 불구하고 이란은 좀체 조급하지가 않다. 미국처럼, 프랑스처럼 '테러와의 전쟁' 운운하며 노발대발하지 않는다. 차분하게 대처하고 침착하게 대응한다. 역사가 그들의 편이라는 자신감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근대화라는 전범을 세웠다는 자존감이 너끈하기 때문이다. 새 천년 들어 터키도 탈서구화와 이슬람적 근대화라는 궤도로 진입했다. 이집트를 비롯한 아랍세계의 반체제 세력의 근간도 무슬림 동포단이 상징하듯 이슬람적 근대화를 추구하는 집단이다. 1979년 이란 혁명이 '다른 역사'를 촉발하고 있음을 자부하고 있는 것이다. 탈서구, 탈석유 시대, 전전긍긍하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이란은 재차 유럽과 아랍에만 고착되어 있지 않다. 페르시아의 후예답게 시야가 넓고 깊고 멀다. 유라시아의 대세와 조응하고 있다는 확신이 뚜렷하다. 저 멀리 동쪽에서는 중화문명의 중흥이 울려 퍼진다. 바다 건너 인도에서는 힌두국가 만들기가 한창이다. 북방에서는 동방정교회에 바탕한 러시아의 재기가 뚜렷하다. 터키마저 유럽/NATO에서 선회하여 유라시아/SCO로 합류하고 있다. 이 모든 추세의 출발에 1979년 테헤란이 있었다는 긍지가 옹골차다. 지난 백년을 군림하던 '가짜 역사'를 타개하고 새 천년을 주름잡는 '다른 역사'(Reset History)가 바로 이란에서 시작되었다고 자부하는 것이다. 그 '다른 역사'의 태동기를 명민한 지성으로 지켜보며 '정치적 영성', '창조적 역사', '윤리적 주체' 등으로 개념화했던 지식인이 바로 미셸 푸코였다.


18년 만에 재차 푸코 빠가 되어 아랍세계를 주유하던 차, 광화문에서 촛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알자지라 특파원이 보도하는 서울의 모습이 동학의 횃불인양, 동방의 등불인 듯 뿌듯했던 시간이다. 푸코가 테헤란에서 보았노라 했던 일반의지=천명이 저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일었다. 이로움을 따지기보다는 의로움을 앞세우는, 욕심을 채우기보다는 양심을 만족시키는 정치적 영성의 발현, 나는 시종일관 푸코의 독법을 빌어 촛불을 관찰했다. 그래서 촛불 이후가 다시금 못마땅하다. 진부한 말들이 차고 넘친다. 87년 체제의 86세대들이 88년도 민주화 담론을 우려먹는다. 전혀 불온하지도, 창조적이지도 않은 말과 글이 촛불을 낚아채고 전유해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대교체를 요구했던 촛불을 고작 정권교체의 방편으로 복무시키고 마는 것이다. 적폐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체되고 지체되어 있다는 느낌을 쉬이 지우기가 힘들다. '다른 역사', '다른 민주화 서사'를 써야한다는 조바심이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1979년 이란혁명을 관찰하기 위하여 이슬람 문명사와 페르시아 제국사를 공부했던 푸코의 방법은 유력한 참조점이 되어준다. 2017년 촛불혁명 또한 장기 지속적인 동방의 민주화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동학운동부터 3.1운동을 지나 4.19와 5.18, 6월 항쟁과 촛불혁명까지 줄기차게 이어졌던 한국의 민주화 서사에 합당한 이름을 붙여주어야 할 것이다. 서구의 대문자 역사에 억지로 끼워 맞추지 않는 정명(正名)이 요청되는 것이다. '님의 침묵'이 '임을 위한 행진'으로 진화해갔던 지난 백년사의 척추를 올바로 세우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를 정의로운 공적 주체이자 역사의 창조자로 고무시키는 임의 뿌리를 밝혀내야 한다.


아무리 곰곰 생각을 굴려보아도 서구화=민주화는 도무지 정답이 아닌 것 같다. 베이징부터 델리와 테헤란, 이스탄불을 지나 바티칸과 모스크바까지, 유라시아 인구의 8할이 집합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비서구적 근대화, 탈서구적 세계화에 조응하는 어떤 것이라고 여긴다. 다만 그 '대안적 진실'에 대한 상은 여전히 또렷하게 잡히지 않는다. 혹시 독립운동과 복국운동과 중흥운동의 근거지였던 만주와 연해주로 동진해가면서 영감이 솟아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와중이다. 천일 계획의 <유라시아 견문>, 남은 250여 일 동안 촛불의 이름을 제대로 붙여주는 네이밍(naming)과 브랜딩(branding)을 숙제로 삼으려고 한다. 탈진실 시대, 자존감 수업과 자기주도 학습이 더없이 절실한 시점이다.


푸코와 테헤란과 촛불을 아우르니 너무나도 진지해져버렸다. 조금 가벼워지기로 한다. 유럽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들었던 도시는 암스테르담이었다. 너무나도 좋아서 예정보다 사흘을 더 눌러 앉았다. 그 사흘 가운데 3할, 만 하루를 꼬박 자전거를 타고 누볐다. 신나게, 신바람 나게 내달렸던 '자전거의 천국', 암스테르담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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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소개
동아시아 현대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논문보다는 잡문 쓰기를 좋아한다. 역사가이자 언론인으로 활약했던 박은식과 신채호를 역할 모델로 삼는다. 뉴미디어에 동방 고전을 얹어 아시아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Digital-東學' 운동을 궁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