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를 보면 세계화의 미래가 보인다
트럼프를 보면 세계화의 미래가 보인다
[좋은나라 이슈페이퍼] 트럼프와 세계화의 미래
트럼프를 보면 세계화의 미래가 보인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막말과 거짓말을 입에 달고 돌출행동을 일삼다가 취임 후 5개월도 채 되지 않아 탄핵이 거론되는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그런 트럼프에게서 세계화의 미래를 읽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과연 그에게 관심을 가질 가치나 있는가? 하지만 트럼프는 적어도 당분간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면서 세계화와 인류의 미래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가 어떻게 미국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되었으며, 그가 어떤 정책을 추구하는 지, 그리고 그의 정책은 어떤 결과를 낳을 지 등의 질문에 관한 대답은 세계화의 미래에 대하여 많은 시사점을 준다. (필자)

트럼프의 좌충우돌과 국제협력체제의 위기

트럼프가 대통령에 취임한 후 국제협력체제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우선주의라는 미명 하에 배타주의적이고 대중영합주의적인 정책을 남발하고 있다. 반이민 정책과 보호무역주의 정책에 이어 파리기후협정 탈퇴에 이르기까지 기존의 국제질서를 파괴하는 그의 안하무인식 정책은 국제사회에 충격을 안김과 동시에 국제협력체제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트럼프는 멕시코와의 국경에 거대한 국경장벽을 설치하는 황당한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예산 등의 문제로 추진이 지연될 것으로 보이지만 국경장벽은 그가 추진하는 반이민 정책의 상징과도 같다. 그는 취임 직후 무슬림·난민 입국 제한조치로 극도의 혼란과 이민자들의 격분을 야기했을 뿐 아니라 범죄전과 불법체류 이민자들에 대한 추방명령을 내리고 대대적인 불법체류 이민자 색출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민자 사회에는 추방의 공포가 확산되었고, 불법이민은 물론 합법이민까지 포함하여 신규 이민이 급감하였다. 이민당국은 트럼프 취임 후 첫 100일간 밀입국자가 1년 전에 비해 70% 급감하고, 난민은 20% 줄어드는 등 이민정책에서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자평하고 있다. 이민법 개정 없이도 이민 단속 강화만으로도 불법이민은 물론 합법이민 물결까지 막아내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국제사회의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고 보호무역주의 조치도 밀어붙이고 있다. 취임 직후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서명을 공식적으로 취소하였으며, 취임 100일 째에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한미 FTA를 포함한 미국이 체결한 개별 무역협정은 물론 세계무역기구(WTO)와의 협정까지 전부 재검토하도록 지시했다. 그가 내세우는 명분은 미국 노동자의 복지를 개선하며 공정하고 미국에 이익이 되는 무역협정이 되도록 재협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내세우는 공정의 실질적인 내용은 미국의 무역적자 해소를 의미하는 것이어서 다자주의적인 국제무역질서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것이다. 무역적자는 투자와 저축의 차이에 의해 나타나는 거시적인 현상인데 이를 개별 국가와의 협상을 통해 해소한다는 무리한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국제통상질서를 위협하고 있다. 

국제협력체제에 대한 트럼프의 가장 강력하고도 충격적인 도발은 지난 6월 1일의 파리기후협정 탈퇴 선언이다. 이는 21세기 국제협력의 최고 성과인 파리협정을 위협하고 갈수록 심각해지는 기후변화의 위험을 가속화할 뿐만 아니라, 재생에너지 등 녹색산업의 일자리 창출을 가로막는 조치라고 비난 받고 있다. 나아가 미국의 파리협정 탈퇴로 미국 기업들의 제조비용이 상대적으로 싸지면 무역상대국들이 미국산 제품에 관세를 부과하는 방식으로 대응함으로써 무역분쟁이 야기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미국의 파리협정 탈퇴에 대해서 전 세계에서 비난이 빗발치는 것은 물론, 미국 내에서도 다수의 주정부와 시정부 그리고 수많은 기업과 개인들이 연방정부의 정책에 맞서 파리협정 준수를 위한 다양한 노력과 투쟁에 나선다고 한다.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AP=연합뉴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정치적 귀결

트럼프가 우연히 미국 대통령이 된 것은 아니다. 트럼프가 추진하는 미국 우선주의 혹은 배타주의 정책은 많은 미국 유권자들과 대다수 세계시민들에게는 끔찍한 정책이었지만 동시에 그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는데 필요한 만큼 많은 미국 유권자들에게는 호소력이 있는 정책이었다. 우리는 트럼프의 좌충우돌을 비난하기 전에 왜 미국인들이 그를 대통령으로 선택했는지 물어야 한다. 제럴드 커티스 컬럼비아대 교수는 최근 방한하여 "트럼프 행정부가 끝나도 미국 우선주의에 따른 보호무역주의는 계속될 겁니다.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미국의 대외적 시각이 변했다는 얘기"라고 하면서, 그 배경으로 "정치 주류에 대한 미국인들의 환멸과 함께 소득 불평등 심화, 인구학적 변화 등"을 꼽았다. 즉 "미국 내 이민자 증가가 미국인들의 배타성을 키웠고 자유무역협정이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는 인식은 점차 커졌다"는 것이다.(한경닷컴, "트럼프 행정부 끝나도 미국 보호무역주의는 계속될 것" 2017. 6. 8.)

전통적인 제조업 일자리 축소에 따라 실업과 고용불안, 실질임금 정체와 소득불평등 심화를 경험한 백인 노동자들의 기성정치에 대한 분노가 트럼프 당선의 핵심적인 배경이었다. 트럼프는 기성정치와는 무관한 아웃사이더였으며, 이민과 무역을 일자리 감소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백인) 노동자의 복지와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워 이들의 지지를 획득하였다. 반면 클린턴 후보의 남편은 전직 대통령이자 세계화 신봉자로서 NAFTA와 금융규제완화의 주역이었고, 그 자신도 TPP 추진과 월가와의 유착 등으로 세계화에 앞장선 기성정치권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트럼프가 온갖 막말과 기행에도 불구하고 당선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러한 경제적 배경이 있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여론조사 전문가 실버에 의하면 "2007년부터 2014년 사이에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백인남성들의 중위 소득이 14% 하락했으며, 이들은 대선에서 거의 40% 포인트 차이로 클린턴보다 트럼프를 더 지지했다"고 한다.(Nate Silver, "Stop Saying Trump's Win Had Nothing to do with Economics". 9 January, 2017.) 

경제학자들과 정치인들이 제조업 일자리 감소의 주 원인은 자동화이며 이민과 무역이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봤자 현실적으로 고통을 당해온 노동자들에게는 기득권자들의 말장난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1980년대 이래 미국경제의 규모는 크게 증가했지만 노동자들의 중위 임금은 제자리걸음을 하였고, 최상위 계층에 소득이 집중되면서 소득불평등은 사상 최악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대중은 이민과 무역 등 눈에 보이는 적과 싸워줄 지도자를 갈구했던 것이다.

1999년 시애틀의 반세계화 시위 등 과거에도 대중은 기성정치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였지만, 특히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 기성정치에 대한 불신과 분노는 심화되었다. 2011년 뉴욕의 주코티 공원에서 벌어진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는 미국 전역은 물론 전 세계까지 확산되었다. 시위 참가자들은 기성 질서가 1%의 특권층만을 위한 것이며 99%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고 항의하였다. 경제위기 탓에 일자리나 집을 잃었으며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이 어려워진 사람들은 금융위기를 일으켜 경제를 나락에 빠트리고도 정부의 막대한 구제금융에 의해 살아나서 여전히 거대한 부와 특권을 누리는 월가의 금융자본, 그리고 이와 결탁된 워싱턴의 정계에 대해 극도의 분노를 표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월가 출신 인사들을 경제 관련 정부 요직에 앉히고, 금융개혁과 경기부양 등을 반대하는 월가와 공화당에 대해 타협적인 정책을 취하여 뚜렷한 대안을 보여주지 못한 것도 이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Michael Hudson, "Trump is Obama's legacy. Will this break up the Democratic Party?" Real-World Economics Review, issue no. 78, 2017)

기성정치에 대한 격렬한 반대운동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도 진행되었다. 2009년에 시작된 티파티 운동이 그것이다. 이들은 우익 반정부주의에 경도되어 의료보험 개혁이나 부자증세와 사회복지 등을 적으로 간주하였다. 인종차별 논란에 휩싸이기도 한 이 운동의 저변에는 위에서 언급한 백인 노동자들의 불만이 깔려있었다. 이들은 금융자본과 정치기득권의 연결은 간과하고, 정부가 중산층에게 세금을 걷어 유색인종과 이민자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 자신들의 경제적 곤란을 초래하는 원인이라고 본 것이다. 여기에 자유무역협정에 대한 공격을 더하면 백인 노동자들에 대한 호소력은 더 커지고, 처음에는 웃음거리로 여겨졌던 트럼프의 대통령 도전이 성공하게 된 배경이 된다.

트럼프의 출현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부작용이 낳은 반작용이다. 미국과 유사하게 불평등이 심화된 영국에서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국민투표를 통해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브렉시트(Brexit)가 결정된 것도 트럼프의 당선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일찍이 폴라니는 국제적인 시장 통합이 진행될수록 사회가 자기 보호를 추구하고 국가의 역할을 요구하게 된다고 내다보았다.(Karl Polanyi, 1944, The Great Transformation, Beacon Press, 1957.) 이러한 요구가 우익 포퓰리즘과 결합하면 민족주의, 배타주의적 반세계화, 심지어는 파시즘적 경향으로 나타나게 된다. 미국과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대륙 전역에서 이러한 흐름이 약진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무엇이 잘못되었나?

경제적 세계화는 19세기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래 우여곡절을 겪었다. 20세기 전반에는 양차 세계대전과 대공황 등으로 국제경제체제가 붕괴되었다가 20세기 후반에 세계화가 재개되었다. 1950~60년대에는 국가의 경제 개입과 복지확대 및 국제적 자본이동에 대한 통제를 전제로 하여 점진적 무역자유화를 추구하는 케인즈주의적 세계화가 진행되었고 당시는 "자본주의의 황금기'라고 불릴 정도로 안정과 성장을 구가했다. 그러나 1970년대에는 브레튼우즈(Bretton Woods) 고정환율체제의 붕괴와 석유파동 및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 등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케인즈주의가 퇴조하게 되었다. 1980년대 이래로는 국가 개입을 최소화하고 시장 기능을 최대화하자는 신자유주의가 만연하였고, 이에 따라 자본이동의 자유화를 포함한 급격한 세계화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 이르기까지 진행되었다. 이를 필자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라고 부른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무엇보다 전면적인 금융세계화를 특징으로 한다. 1970년대에 시작된 미국의 금융자유화 물결은 1980년대에 유럽으로, 그리고 1990년대에는 신흥시장국가로 확산되었고, 각국이 자본이동에 대한 규제를 완화함에 따라 국제자본시장의 통합이 급속도로 진전되었다. 1980년대에는 채권시장의 세계화가, 1990년대에는 주식시장의 세계화가 이루어졌다. 금융세계화의 진전에 따라 국제무역이나 해외직접투자보다 훨씬 빠르게 투기적 국제자본이동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국제자본이동의 가변성 및 전염성으로 인하여 국제금융질서가 불안정화 되고 크고 작은 금융위기가 빈발하였으며, 일부 강대국을 제외하면 신축적 통화정책의 여지가 축소되었다. 금융시장의 특성 상 건전성 규제와 감독, 예금보험 등 제도적 장치 없이는 안정성을 확보할 수 없으나, 금융세계화는 국제금융에 관한 제도적 안전장치를 확보하지 못한 채로 마구잡이로 진행되어 불안정이 심화된 것이다. 물론 이러한 금융불안정의 절정은 2008년 미국의 서브 프라임 위기에 뒤따른 글로벌 금융위기였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시대에 나타난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소위 '깊은 통합'(deep integration)이다. 1995년에 출범한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아래서는 개별 국가가 자국의 정치, 경제적인 목적에 따라 국제 교역과 투자에 어떠한 제한이나 조건을 부과하기 어렵게 되었다. 나아가 국제 교역과 투자에 영향을 주는 국내의 법과 제도까지도 통일하려고 한다. 더불어 고도의 자본 이동성 때문에 각국 정부는 자본의 입맛에 맞는 정책과 제도를 선택하도록 압력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요인들이 작용하여 세계화가 각국의 정책 공간(policy space)을 협소화하고 결과적으로 민주주의를 형해화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여러모로 비대칭적인 세계화였다. 이는 국제금융자본과 초국적 기업 그리고 미국 정부와 국제기구 등이 주도하여 추진한 것으로, 자본의 요구는 과다 반영되고 노동의 요구는 과소 반영되었다. 자본의 이동은 자유로워지고 노동의 이동은 제한되었으며, 자본소득에 대한 과세는 감소하고 노동소득에 대한 과세는 증가하였고, 투자자의 권리는 강화되고 노동자의 권리와 사회적 보호는 약화되었다. 자산과 기술을 가진 자들에게 세계화는 기회의 확장과 수익의 확대를 의미하였지만, 전통적인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에게는 구조조정과 실업의 고통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결국 대다수의 국가에서 심각한 빈부격차의 확대와 소득불평등의 증대를 초래하였다. 소득불평등의 심화는 또한 소비수요 기반을 약화시켰고, 경제성장은 갈수록 저금리 정책과 부채 증가에 의존하게 되어 결국 금융위기의 화약고가 되었다. 흔히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여러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에 있어서만큼은 매우 성공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세계경제의 성장률은 황금시대에 비해 현저하게 낮아졌으며, 경제의 불안정은 확대되었다.

트럼프와 반세계화론의 한계

트럼프 대통령은 과연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문제를 해결하고 노동자들을 비롯한 유권자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그의 정치적 기행과는 별도로 그가 추진하는 정책의 한계와 모순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트럼프는 보호무역과 이민 제한, 그리고 경제성장률 제고로 고용을 확대하고 노동자의 이익을 도모하겠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시대에 고용불안과 소득불평등을 초래한 가장 결정적인 요인으로 꼽히는 금융세계화와 금융 팽창에 관해서는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으며, 오히려 오바마 정부에서 실시한 온건한 금융개혁마저 해체하고자 금융규제완화를 추진하고 있다. 실제 트럼프 당선 직후 금융회사들의 주가가 치솟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보호무역과 이민 제한을 통해 고용을 지킨다는 것은 일시적인 방편은 될지 몰라도, 그 자체로 성장 동력과 고용 창출을 해낼 수는 없다. 트럼프의 인프라 투자 계획은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겠지만 과도한 감세정책은 재정적자의 확대에 따른 이자율 상승이나 복지지출 축소 등을 초래하여 성장에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금융규제와 노동규제를 완화하고 부자감세를 실시하는 트럼프가 과연 노동자의 이익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무역협정을 재협상도 마찬가지다. 최근의 무역협정들은 관세를 낮추고 무역을 확대하는 내용은 오히려 부차적이고 대기업들과 투자자들의 기득권을 강화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고, 이는 명백하게 노동자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트럼프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결여한 채 미국의 무역적자를 없애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무역적자와 같은 거시 변수의 조정은 무역협정 재협상으로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그의 성향으로 볼 때 무역협정의 독소조항은 오히려 더 심화되면 되었지 완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트럼프가 배타적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다고 해도, 아무리 미국이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라고 해도, 세계화를 쉽게 되돌려 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세계화에는 상당한 정도의 비가역성이 존재하고 세계는 이미 너무나 상호의존적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부시 정부 등 과거 공화당 정부에서도 무역정책, 기후변화정책, 군사외교정책 등에서 미국이 일방주의적 경향을 보인 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융자본 주도의 경제적 세계화에 제동을 거는 일은 없었다. 정도가 심할 뿐 트럼프 정부도 근래의 공화당 정부와 본질적인 차이는 없어 보인다. 미국의 일방주의, 배타주의 경향은 중국과 신흥국들의 부상에 따른 미국의 상대적 지위 하락에 대한 반작용이며, 이는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리더십을 더욱 약화시키고 있다. 파리협정 탈퇴 이후의 후폭풍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사실 기후변화 문제를 포함해서 이미 세계는 국제사회의 긴밀한 협력이 없이는 결코 풀어 낼 수 없는 많은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반세계화'가 결코 우리의 미래가 될 수 없는 까닭이다. 심지어 반이민정책의 경우에도 트럼프의 뜻대로 일이 진행되지는 않고 있다. 법원의 제동이 있고, 주정부와 시민사회의 반발이 있으며, 정부 내에서도 정책이 유화되는 조짐이 보인다.

'반세계화'를 외치는 이들은 세계화가 저임금과 실업, 빈곤과 환경파괴 등 만악의 근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신자유주의 정책이 초래한 부작용이지 세계화 자체의 불가피한 귀결은 아니다. 정치권과 경제계의 엘리트들이 세계화의 이름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정당화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대중의 입장에서는 이 둘을 혼동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과거 황금시대의 사례처럼 신자유주의와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화가 이루질 수도 있다. 세계화는 자유의 확대와 부의 증진을 가져올 수 있으며, 적절한 제도적 보완과 민주적 통제를 가함으로써 그 혜택이 골고루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관건이다.

세계화의 미래, 진보적 대안은 있는가?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초래한 모순이 극적으로 폭발한 사건이었고, 이를 기점으로 무분별한 시장만능주의와 급증하는 소득불평등이 정치적 현안으로 부상했다. 진보 정당이 집권하기에 절호의 기회일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후 서구 선진국에서 나타난 정치적 변화는 좌회전이 아니라 우회전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약간의 개혁적 정책도 추진했지만, 크게 보면 월가 구제는 성공하고 직장과 집을 잃은 국민들 구제는 미흡했으며 TPP 추진 등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노선을 견지했다는 점에서 결코 좌회전이라 할 수 없었다. 영국과 독일,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에 모두 보수 정권이 들어섰고, 진보 정권은 남미 대륙과 그리스, 스페인 등 유럽 변방 국가에 국한되었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좌파의 '원죄'라 할 수 있다.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신민주당(New Democrats) 노선을 통해, 블레어 영국 수상은 신노동당(New Labor) 노선과 '제3의길'(Third Way) 노선을 통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적극 수용하고 앞장서 실천했으며,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으로서 시장통합과 단일화폐 등을 성공시킨 들로레스 등 프랑스 사회당 출신 전문관료들은 금융세계화와 자본자유화를 제도화한 주역이었다. 대중의 머리 속에서 이러한 기억을 지우기는 쉽지 않다.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기득권과 기성 정치를 대변하는 인물이라는 이미지를 떨쳐버리지 못한 것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기 때문이었다.

지난 미국 대선 경선에서 또 하나의 아웃사이더로서 사회주의자를 자처한 샌더스가 예상 외의 선전을 한 것이나 작년에 영국 노동당에서 좌파 아웃사이더였던 코빈의 당수 선출, 최근 프랑스 대선에서 좌파후보 멜랑숑의 선전 등은 진보 정치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진보의 집권을 이루고 실제로 진보적 대안을 실천하는 데까지 나가려면 적어도 두 개의 장애물을 넘어야 한다. 하나는 이민/난민 문제에 대한 해법이고, 또 하나는 믿음직한 진보적 대안의 체계적인 제시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부작용을 절감하고 정치적 좌회전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나선 나라들은 대체로 이민/난민 문제가 별로 없는 나라들이다. 브라질, 볼리비아, 에콰도르, 베네주엘라 등 남미 국가들에게 세계화는 무역과 투자의 문제지 이민과 난민의 문제는 전혀 아니었다. 그리스와 스페인의 핵심 문제는 긴축정책이었다. 이것만 보더라도 이민/난민 문제가 진보적 정치세력에게 얼마나 어려운 문제인지 알 수 있다. 경제가 어려우면 이들에 대한 대중의 반감이 커진다. 여기에 테러 문제까지 결부되면서 반이민 정서는 반이슬람 정서와 섞여 더욱 휘발성을 띠게 되었다. 노동시장에서 어려움을 겪는 노동자들에게 사해동포주의와 인권의 보편성 등 원론적인 얘기만을 해서는 정치적 대안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민정책을 포함한 국제노동 이동을 규율하는 가버넌스를 구축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효과적인 개발 원조와 중동 지역 등의 분쟁 해결을 포함하여 이민/난민 문제의 원천을 없애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진보적 대안은 개방과 세계화의 진보적 가치에 대한 확고한 인식에 기초해야 한다. 개인의 자유와 기회를 확장하는 것은 진보의 근본적인 가치로서 세계화는 이에 부합하는 것이다. 지역사회나 국가의 경계를 근거로 지식, 정보, 사상이나 재화, 서비스, 생산요소 등을 교환할 기회를 인위적으로 제한하는 것은 출생지에 따른 기회의 불평등을 제도화하는 것으로 본질적으로 진보적 가치에 반한다. 나아가 세계화는 이론적으로 기회와 자유의 확대, 문화의 풍부화, 부의 증진 등을 가져온다. 문제는 현실의 세계화가 많은 경우 지역사회 공동체나 전통문화를 파괴하고 경제적 불평등과 경제의 불안정성을 증대시키며 환경을 파괴하고 민주주의를 제약하는 등 진보가 소중하게 여기는 여러 가치들을 훼손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세계화 그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신자유주의적 오류가 낳은 문제다. 세계화 반대가 아닌 신자유주의 혹은 시장만능주의 반대, 그리고 세계화에 대한 민주적 통제와 제도적 보완을 중심으로 대안을 형성해야 한다.

금융 불안정의 문제는 투기성 자본 이동에 대한 규제를 비롯한 국제적인 금융 규제의 강화와 주요 국가들의 정책 공조체제 강화, 그리고 기축통화시스템 개혁 등으로 대응해야 한다. 비대칭과 불공평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IMF와 WTO 등 국제기구의 민주적 개혁, 노동이동과 기술이전을 관리하는 국제기구의 신설, 빈국에 대한 실효성 있는 개발 원조가 필요하다. 조세피난처를 없애고 국제적 조세협력을 강화하며, 개별 국가 차원에서 불평등을 축소하기 위한 제도와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는 것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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