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도 진화가 필요하다
페미니즘도 진화가 필요하다
[민미연 포럼] "여성의 여성성마저 배제한 기계적 평등은 도움이 안 된다"
페미니즘도 진화가 필요하다
3세 아이를 기르며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공부하고 있다. 일하는 시간에는 친정어머니가 육아와 집안일을 대신 해주신다. 어느 날 집에 돌아와 냉장고를 열었더니, 가지런히 다듬어진 식재료가 눈에 띄었다. 껍질 벗긴 알이 실한 양파, 어떤 요리에든 편히 넣을 수 있게 어슷썰기 된 대파, 곱게 갈린 마늘 등. 내가 가장 귀찮아하는 일 위주로 모든 일을 말끔하게 해 놓고 가신 엄마. 순간, 남성들이 육아 및 귀찮은 집안일을 여성에게 미룬다며 육아와 가사에 있어 여성에 대한 한국 사회의 구조적 차별을 이야기하던 나야말로 엄마에게 또 그 가장 귀찮은 일을 떠넘기고 있는 당사자라는 생각에 서글퍼졌다.

나는 엄마가 내가 여성으로서 감당해야 할 책임을 대신해 주는 딱 그만큼의 시간과 범위 안에서 경제적 독립과 자아계발을 한다. 나의 자아는 엄마의 수고에 빚지고 있다. 여성의 사회적 기대 역할과 지위를 빚어내는 세세한 권력관계를 포착해내고 드러내려는 내 페미니즘은 또 다른 여성의 수고로 생긴 여가로 가능한 셈이다.

여성의 일상적 노동이 여성 개인의 책임으로만 인식되는 사회에서는 여성이 여성의 이야기를 드러내는 데에는 이처럼 또 다른 여성의 수고와 희생이 필요하며, 그로 인해 정작 수고와 희생을 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담론으로 드러나지 못한다. 이것이 한국적 페미니즘의 첫 번째 한계다. 한국 사회에서 기성의 페미니즘은 이처럼 누군가 대신한 여성의 책임 위에 쌓아올린 반쪽짜리 감상문과 같다. 고학력 중산층 여성에게나 가능한 사유와 욕구의 여백은 그 계층 밖 여성의 삶을 '억압적인 것' 혹은 '자아를 잃은 삶'으로만 단순화하고 그 내부의 감정과 서사의 맥락에는 닿아있지 않다. 남성 및 다른 계층과 시대의 여성들을 배제한 단순한 페미니즘은 대부분의 여성들이 처한 상황을 해결하기에는 너무도 둔감하고 추상적이다.

또한 오늘날 한국의 페미니즘은 여성의 특질을 직시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소위 '민주화 세대'로 일컬어지는 한국의 2세대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의식화된 주체성과 독립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러한 주체성의 형성 과정에서 남성은 여성을 억압하는 가해자로 단순 치환되고, 따라서 이러한 페미니즘 내에서는 남성과 여성 간의 실제적 관계와 감정에 대한 다양한 이해가 차단된다. 여성의 실질은 사회적 성역할의 기대치에서 벗어난 인간으로서의 여성 자신의 주체적 능력을 가정하는 데에서도 드러날 수 있지만, 무엇보다 남성과의 관계 속에서 여성 스스로 어떤 관계 정립을 원하는가를 솔직히 고찰하는 가운데 포착될 수 있다.

"만약 한 남자가 다른 누구보다도 한 여자를 좋아하지만 그녀와 관계를 가지기를 바라지는 않는다면, 그 여자는 실패했다고 느낍니다. 여성들은 자신들이 해방되었고 강하다고 느끼지만, 그러나 언제나 사랑받고 선택받는 사람이기를 원합니다."(아닉 제이유(Annic Geille) <플레이보이> 프랑스판 전 편집자)

여성의 주체성에 대한 욕구와 남성과의 관계에 있어서 여성이 취하고자 하는 본능의 모순을 이처럼 잘 표현한 말도 없을 것이다. 테오도르 젤딘(Theodore Zeldin)은 <인간의 내밀한 역사>(김태우 옮김, 강 펴냄)의 한 목차인 '성 해방과 소비 사회의 풍요에도 불구하고 흔히 삶이 우울한 이유'에서 프랑스의 성공한 언론인 아닉 제이유를 인터뷰하고 그녀의 삶과 생각의 궤적을 통해 소위 '성공한', '독립적인' 여성들의 내밀한 감정을 추적한다.

이 내밀한 감정의 추적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여성은 자신의 삶과 만남을 스스로 결정하는 등 주체성을 발휘하기를 원하는 동시에 남성의 세밀한 배려와 공감에 의존하고 싶어 하며, 상당 부분 자기 자존감을 성적 매력을 어필하는 데에서 충족하려는 본능이 있다는 점이다. "남자에 대한 여자의 애착은 남자가 우아하게 여성의 동의를 구하는 데 주로 달려 있다"는 무라사키 시키부의 소설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젤딘은 사회적으로 능력을 인정받아 여성에게 가해지는 여러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것처럼 보이는 여성일지라도 남성과의 관계에서 배려를 받는다는 느낌을 중시하는 여성의 본능이 충족되지 못할 경우 근원적으로 불만족과 우울을 느낀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늘날 한국의 페미니즘은 여성의 이와 같은 욕구를 '보호본능'과 같은 수동적인 언어에 가두고 비판한다. 여성이 남성의 배려를 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반드시 주체성을 상실한 수동적인 것만은 아니다. 소비를 통해서든, 남성을 통해서든, 자기 존재를 무엇인가에 전적으로 의존하려는 여성의 위축된 자존의식과 가치관이 그 내적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위축된 자기의식과 남성의 배려와 사랑을 원하는 존중 의식은 같은 것이 아니다. 성(性)은 물론 인간과 공동체에 대한 세밀한 배려와 이해가 결여된 교육시스템 등 여성과 남성 서로 간의 조화로운 대화와 이해를 가로막는 각종 제약들이 문제인 것이지, 배려와 사랑을 원하는 여성의 본능은 비판받을 만한 문제가 아니다.

페미니즘에 대한 이와 같은 제한적인 이해로 인해 아직도 한국 페미니즘은 소위 '잘 나가는' 여성들만의 주체성 발휘와 성공 스토리로 축소되어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남성들만의 영역에서 '여성 최초'의 타이틀을 따는 것만이 이들의 페미니즘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페미니즘은 소통과 조화의 연결고리를 잃고 투쟁과 반목의 이미지로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기성 한국 페미니즘 담론의 문제는 이처럼 다양한 여성들의 다양한 내적 서사를 담아낼 틀을 갖추지 못한 데 있다.

오늘날 2030세대가 표현하는 페미니즘은 단지 전투적인 평등주의에 갇히지 않는다. 요즘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여성성을 발취하는 양상은 다양하고 자유롭다. 자신의 계정에 본인의 몸을 노출한 사진을 싣고 경직된 페미니스트들을 비판하며 "성적 어필이 어때서! 나는 나를 성적으로 어필할 자유가 있다!"는 한 여성의 '드러냄'은 오히려 수동적인 것으로만 인식되었던 여성의 몸에 대한 상품화와 소비의식을 본인의 자유와 주체성으로 바꾸어 드러내는 페미니즘으로도 볼 수 있다. 이는 남성 위주 시선의 성 상품화와 다른 종류의 성 상품화이며, 이때 성 상품화는 타자화된 '악'으로만 규정되지 않는다.

여성들은 이와 같은 '비고전적인' 페미니즘과 마주쳤을 때 혼란스럽다. 이 혼란은 원래 알던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적 충돌 때문에 빚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성성에 대한 솔직한 고찰 때문에 일어난다. 소위 페미니스트 여성들은 본인의 '의식화된' 독립성이 남성으로부터 사랑받고 싶고 남성에게 성적으로 어필을 하고자 하는 본능적 욕구와 맞닥뜨렸을 때 내적 모순을 느낀다. 이러한 여성의 본질은 여성 스스로도 그 본질을 주체화하지 못했기에 또다시 소비 사회의 거센 특성 속에 묻히기 쉽고 이때 여성들은 육아, 가사, 시댁 관련 일 등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은 수행하지도 않으면서 남편의 경제력과 보호 등 여성으로서의 이득만을 취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비판은 임신·출산 등 여성의 생애주기를 고려하지 못한 한계를 보이긴 하지만 일견 그 스스로 맞닥뜨린 내적 모순을 '주체적으로' 정리하고 정립해내지 못한 오늘날 한국의 페미니즘의 현 주소를 잘 짚어낸 것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책에서 젤딘은 가정부, 경찰관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다양한 지역의 여성들을 인터뷰한 내용과 그의 인류학적 역사 지식을 결합하여 오늘날 우리의 내면에 살아 있는 관념과 감정들의 공통점을 발견하고 이에 '내밀한 역사'라는 지위를 부여한다. 이 내밀한 서사의 주인공들은 여성들이며, 젤딘은 대화, 고독, 사랑, 존경, 권력과 같은 기존의 인간 본성의 역사를 한층 더 내밀하게 파고들어가 대화와 대화 사이, 고독과 고독 사이의 세밀한 관념과 감정 정립의 서사들을 펼쳐 보여준다. 즉, 그는 남성의 이름으로 즐비한 '역사'의 마디는 수많은 이름 없는 여성들과의 다양하고 내밀한 관계 속에서 굵어 도드라진 것임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처럼 여성에 관한 서사는 보편적이고 획일적이기보다는 관계에 기초한 특수성과 다양성을 바탕으로 이해될 때 그 내밀한 깊이와 감성적 합리성이 온전히 드러날 수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소통을 원하고, 합리적으로 보이고 싶은 여성들이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적절한 방식과 선을 지키지 못하면 '꼴페미'로 낙인찍히기 쉽기 때문이다. 한국의 페미니즘이 이렇게 된 데에는 한국적 페미니즘이 서구로 따지면 1960년대 수준에 머물러 그 이후의 담론 계발을 하지 못한 데 그 책임이 있다.

페미니즘을 1세대, 2세대, 3세대로 나누는 것에서 보듯, (서구의) 페미니즘은 스스로 진화했다. 참정권과 재산권 획득을 부르짖으며 제도의 형식으로라도 남녀 간의 평등을 원했던 1세대 페미니즘은 생물학적 성(sex)과 사회적 성(gender)을 구분하며 젠더로서의 여성성을 극복하려던 2세대 페미니즘을 거쳐 오늘날 여성 간, 여성과 남성 간, 다양한 젠더 정체성 간의 차이도 드러내려는 3세대 페미니즘으로 흘러가고 있다. 즉, 오늘날 진정한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기계적 평등이 아닌 차이를 차별로 만들지 않는 실질적 평등을 추구한다. 이 과정은 여성이 스스로를 드러내며 부딪친 수많은 현실적 과제들과 여성 내부의 모순을 집약해 보여준다.

오늘날 한국의 페미니즘은 이러한 페미니즘의 역사에 내재한 각종 모순의 긴장과 힘을 직시하고, 이에 기초해 진화해야 비로소 여성을 위한 소통의 도구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남성의 특성 및 여성과의 관계성을 배제하고 심지어 여성 그 자신의 내부에서 여성성까지도 배제한 기계적 평등 의식은 여성 권익 향상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한다. 남성과 여성, 그리고 여성 그 자신의 특질 사이의 차이는 다양성의 인정과 존중으로 인식되어야 하며, 이러한 차이를 인식하는 가운데 인류 공통에게 주어져야 할 기본적인 권리가 여성을 배제하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일 때 실질적 평등의 구현이 가능할 것이다. 어디까지 어떤 부분에서 평등을 추구해야 할지, 어떤 영역에서는 차이를 합리적으로 용인할지를 따져볼 수 있는 실질적이고 한국적인 페미니즘 담론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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