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베리 요구르트와 사과 중 뭘 선택해야 더 즐거울까
블루베리 요구르트와 사과 중 뭘 선택해야 더 즐거울까
[함께 사는 길] 동물을 먹는다는 것 ① 벤담이 우리의 식탁을 본다면?
2017.07.15 12:22:33
블루베리 요구르트와 사과 중 뭘 선택해야 더 즐거울까
즐거움. 이 주제는 에피쿠로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 철학자들에서부터 바뤼흐 스피노자, 제레미 벤담, 존 스튜어트 밀 같은 근대의 사상가들 그리고 프레데리크 그로 같은 현대 철학자까지, 수많은 철학자들의 탐구 대상이었습니다. 동아시아의 도학자들은 이 주제를 깊이 탐구하지는 않았지만 '락(樂)'을 인생의 중차대한 가치로 삼고 음미했지요. 또한 이것은 우리 모두가 마음 깊이 바라는 것이기도 하죠. 하지만 무엇이 즐거움인가요? 그리고 무엇이 즐거운 식사인가요?

동물에도 눈 돌린 제레미 벤담

공리주의 철학의 선구자인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의 즐거움에 관한 논의는, 먹는 문제와 관련해서 주목을 요합니다. 벤담이 태어난 곳은 영국 런던입니다. 법률가 집안에서 태어난 벤담은 가족의 기대를 저버리고 글쓰기에 몰두했던 인물입니다. 가계의 이단아입니다. 하지만 그래서 인류에게는 축복이 된 사람입니다. 법조인이 되지 않고 철학자가 되어 법과 도덕에 관한 여러 철학적 저술들을 남기게 되는데, 이 가운데에서도 <도덕과 입법의 원칙에 관한 서설>(Introduction to the Principles of Morals and Legislation, 1789)이 가장 유명하지요. 공리주의 사상의 주춧돌을 놓은 기념비적인 저작입니다.

머리를 길게 기른 이 말끔한 신사풍 철학자의 결정적인 특징은 평등주의, 그리고 약자 보호에 방점을 둔 일관된 사상과 행동에 있어요. 그는 당시 상류층에게만 제한되었던 대학 교육의 문을 중산층에게도 확대하는 일에 나서기도 했는가 하면(런던 대학의 창립에 관여), 모든 사람이 한 표씩만의 선거권을 가지는 평등 선거를 옹호했습니다('모든 사람은 하나로 계산되며, 어느 누구도 하나 이상으로는 계산되지 않는다'는 원칙). 또한 벤담은 당대의 수감자들의 처참한 처우를 개선하고자 그들의 거처를 '감옥'이 아닌 '교도소'로 바꾸고자 했죠. 그가 생각한 건 위생적 화장실과 환기시설이 갖추어져 있고 시민들에게 공개되는 개방형 공간이었는데, 그것이 바로 파놉티콘(원형 교도소)입니다. 나아가, 비록 육식에 반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동물의 처우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지요.

'행복'은 무엇이고 '다수'는 누구인가

흔히 벤담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말과 함께 우리에게 기억되는데, 어떤 행동이 옳고 그르냐를 가늠하는 원칙으로 제시된 것입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으로 귀결되는 행동이 옳다는 것이고, 더 적은 이의 더 적은 행복으로 귀결되는 행동은 회피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여기서 '행복'은 무엇이고, '다수'는 무엇일까요? 벤담이 말한 '행복'은 감각적 고통이 없고 즐거움이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수'는 '인간 다수'가 아닙니다. 감각적 고통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생명체라면 모두가 '다수'에 해당됩니다. 고통과 즐거움을 느끼는 모두, 이들이 느끼는 즐거움의 총량을 최대치로 높이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이것을 '최대 행복의 원리'라고 합니다.)

벤담은 심지어 이 총량을 측정할 수 있다며, 측정 기준으로 일곱 가지를 제시해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합니다. 벤담이 생각한 일곱 가지 기준은 무엇인가요? 즐거움의 강도, 지속성, (즐거움이 일어날) 확실성, (시간적) 근접성, 다산성(다른 즐거움을 낳을 수 있는지 여부), 순수성(고통이 혼합되지 않는 정도), 범위(영향을 받는 이의 숫자)가 바로 그것입니다.

만일 이 기준을 유의미한 것으로 수용한다면, 우리는 이 기준을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동의 선택에 적용해볼 수 있어요. 물론 '오늘 뭐 먹지?'라는 중요한 선택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먹기'의 선택과 관련해서는 한 가지 '문제'가 있어요. 우리가 먹고 있는 동물들이 즐거움과 고통을 느낄 줄 아는 이들임을, 벤담이 말한 저 '다수'에 속한다는 점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는 겁니다.

ⓒ프레시안


자, 여기 우리 눈앞에 동일한 질량의 블루베리 요구르트가 있고, 사과가 있습니다. 어떤 걸 선택해야 더 즐거울 수 있을까요? 블루베리 요구르트를 A라고 하고 사과를 B라고 하면, 그리고 벤담이 우리와 동시대인이라면, 그는 저 일곱 가지 가늠자를 들이대며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겁니다.

칼로리로 보면 A가 높으니, 강도, 지속성, 다산성에서는 A가 B보다 우리를 더 즐겁게 한다고 할 수 있다. 확실성, 근접성, 범위에서는 A와 B의 차이가 없다. 한편 순수성에서는 여러 가지가 고려되어야 한다. 그 물질을 생산한 주체(예컨대 소)가 겪는 감각적 고통의 여부와 정도 같은 것 말이다.

강도, 지속성, 다산성에서는 블루베리 요구르트가 사과를 앞서서 즐거움의 총량이 앞서지만, 순수성에서는 상당히 의심스러운 게 블루베리 요구르트입니다. 물론 그건 거기에 소의 고통이 개입되어 있을 가능성 때문이죠. 하지만 문제는 그다지 간단하지 않아요. 소에게 인간다운 처우를 보장하는 농장에서 나온 요구르트 그리고 농약을 마음껏 뿌리며 수많은 익충과 미소동물, 미생물을 죽이면서 키웠고, 그걸 섭취하는 동물에게도 해를 가할 수도 있는 사과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우리는 거꾸로 요구르트를 먹는 것이 순수성의 측면에서 (그리고 강도, 지속성 등에서도) 더 나은 선택이라고 봐야 할 겁니다. 하지만 만일 블루베리 요구르트를 만드는 농장이 미국에 있다면, 그리고 농약을 많이 뿌린 사과가 경상도 사과라면, 우리는 푸드 마일리지라는 측면에서 (유통이 지구 생명에 가하는 압력, 즉 즐거움의 비순수성) 즐거움의 총량을 다시금 조정해야 합니다!

이처럼 오늘날 벤담의 입장에서 먹는 선택을 한다고 할 때, 순수성이라는 기준은 우리를 괴롭힙니다. 말할 것도 없이, 오늘날 글로벌 푸드 시스템 내의 생산·유통 활동이 생명(특히 가축)의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이죠.

즐거움에 대하여

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물어보겠습니다. 즐거움이란 무엇인가요? 즐거움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격렬한 감정이 아니라 조용히, 은근히 찾아오는 만족감이라는 것. 둘째, 은근하지만 미약하지는 않은, 풍성한 감정이라는 것. 그러니까 이건 잔잔하지만 깊은 감정입니다. 셋째, 돌연 느끼고 알아채는 감정이라는 것. 즉, 문득 깨어 보니 이미 만족스러운 쾌적한 에너지 상태에 있고, 또 그렇다는 걸 알아차립니다. 바로 그 자각된 만족스러운 에너지 상태가 '즐거운 상태'입니다. 넷째, 즐거움은 거기에 머물고픈 마음을 수반한다는 것. '아, 지금 그대로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흐르는 자기장(磁氣場), 바로 그것이 즐거움의 자기장입니다. 왜 그럴까요? 즐거움의 본질은 도달된 편안함, 도달된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고통의 무혼합성이라는 순수성이라는 기준은, 즐거움이냐 아니냐를 평가하는 자리에서 매우 중대한 기준입니다. 자유의 느낌이 바로 즐거움의 느낌이고, 여기서 중요한 건 마음의 무애(無碍)여서, 고통이 개입되면 즐거움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덜 강하고, 덜 지속적이며, 덜 다산적이고(적게 생산하고), 더 느리게 접근 가능하며, 덜 확실하게 느껴지고, 영향을 받는 이의 수가 더 적은 즐거움도 모두 일종의 즐거움이라고 볼 수 있어요. 하지만 나와 남의 고통이 조금이라도 혼합되어 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아예' 즐거움이 아닙니다. 순수성 기준을 충족하는 즐거움만이 즐거움이며, 그것이 바로 벤담이 말한 '행복'일 겁니다.

무슨 말이냐면, 한의학자 동무 이제마(東武 李濟馬)가 말한 결식(潔食), 즉 깨끗한 식사를, 깨끗해서 즐거운 식사를 하자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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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함께 사는 길>은 '지구를 살리는 사람들의 잡지'라는 모토로 1993년 창간했습니다. 사회적 약자와 생태적 약자를 위한 보도, 지구적 지속가능성을 지키기 위한 보도라는 보도중점을 가진 월간 환경잡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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