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즐겁게 살고 있어, 이 머글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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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월간 민들레] 덕력과 덕질로 무장해야 할지니…
"나는 즐겁게 살고 있어, 이 머글들아"
<덕후감>(북인더갭 펴냄)이란 책을 쓰고 나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 중 하나가 이거였다. "덕후처럼 보이진 않으시네요." 아마도 책 제목만 보고 저자 역시 덕후겠거니 짐작했을 텐데, 생김새나 말투, 행동거지가 짐작과 딴판이었던 모양이다. 그때마다 반문하고 싶은 걸 억지로 참곤 했다. "대체 덕후처럼 보이는 건 어떤 거죠?"

오타쿠의 환유 : 안여돼, 은둔형 외톨이, 로리콘

지금은 잘 쓰지 않지만 '안여돼'라는 말이 있었다. '안경 쓴 여드름 난 돼지'의 줄임말인데, 외모지상주의를 입증하는 대표적인 청소년 은어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이 말이 단지 안경을 착용하고 피부 트러블 있는 퉁퉁한 사람(주로 남성)만을 가리키는 건 아니다. 안여돼에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시력이나 몸매 등 자기관리를 하지 못한다는 비아냥도 숨어 있다. 그리고 이 말은 아주 우연하게도 전혀 다른 이미지와 만나기도 한다. 바로 오타쿠 또는 덕후다.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니, 안구건조증은 기본이고 시력도 저하된다. 주로 앉아 있거나 누워 있다 보니 뒤룩뒤룩 살만 찐다. 게다가 외부와 단절된 삶을 살다 보니, 정상적인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할 것 같은 이미지까지 겹쳐진다. 아마도 이런 선입견이 '오타쿠=안여돼'라는 등식을 만들어낸 게 아니었을까. 한마디로, 사람들은 내가 안여돼가 아니란 사실이 의외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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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많이 개선됐다고 하지만, 한번 각인된 스테레오 타입은 좀처럼 사라지기 어려운 모양이다. 물론 선입견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시간을 돌려 2008년으로 가보자. 도쿄 구치소 사형집행장에서 기념비적인 일이 있었다. 사형집행이야 별반 특별할 게 없었지만, 그날의 주인공은 1980년대 후반의 여아 연쇄 유괴살인범 미야자키 츠토무1)였다. 정신분열과 해리성 인격장애로 판정받기도 했지만, 미야자키 사건은 엄한 데로 불똥을 튀겼다. 네 명의 여아를 살해, 시간, 훼손했던 그의 집을 조사하자 5763개의 비디오테이프가 나온 것이다.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판단 내렸다.

'뿔테 안경 쓴 퉁퉁한 남자, 여아 유괴, 살해와 시간, 토막살인,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오타쿠는 위험하다.'

비디오테이프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었을까. 여아 연쇄살인범이 소장한 물건이니 많은 이들이 '로리콘'2) 성인물을 연상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6000개 가까운 비디오테이프 중에서 몇 편의 로리콘 성인물과 하드코어한 호러 영화가 있었던 건 사실이다. 오타쿠(お宅)가 말 그대로 집에서 은둔하는 존재이기만 했다면, 다들 그냥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속으로야 한심하게 생각할지언정 적어도 남한테 피해 주는 건 아니니까. 그런데 이 안여돼(?)에게 소아성애 성향이 있다거나 성도착증까지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다. 단지 꺼려지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에서 배척해야 할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다음과 같은 환유 또는 확증편향이 성립하게 된다. 오타쿠는 은둔형 외톨이. 오타쿠는 사회적으로 고립된 존재. 오타쿠는 변태적인 것을 탐닉하는 존재. 오타쿠는 위험한 행동을 벌일 수도 있는 존재. 오타쿠는 잠재적 범죄자. 따라서 오타쿠는 격리시켜야 하는 존재. 오타쿠는. 그러나 정신감정 결과, 미야자키는 소아성애가 아니라 네크로필리아3)였으며, 여아 살해 동기는 단지 성인보다 범행이 쉬웠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그렇지만 오타쿠가 안여돼이고, 잠재적 위험인물이란 사회적 편견은 그의 사형집행이 있기까지 근 20년 동안 수그러들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도.

비상한 자의식의 상상계

한국에선 오타쿠 문화가 일본만큼 충격적으로 시작된 건 아니었다. 물론 2012년 서울 신촌에서 놀라운 살인사건이 있긴 했다. '오컬트 문화'라고 해서 일본 애니메이션 류의 신비주의적 세계관으로부터 시작해 실제로 사령(死靈)을 추종하는 모임이 있었는데, 모임 내 갈등이 심각해지면서 살인사건으로까지 이어진 것이었다. 피해자는 여자친구를 이 모임에서 탈퇴시키려 했던 대학생이었고, 가해 용의자들은 각각 15세, 16세, 18세의 중고등학생들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오타쿠 문화 중에서도 극단적인 경우에 속했고, 무엇보다 오타쿠의 효용성(?)이 인정받기 시작한 시점에 있었던 일이어서 사회적 파장이 그다지 크진 않았다.

하지만 '서브컬처'에 대한 비하가 일반적이란 사실은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서브컬처라는 말은 주로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라이트노벨 등 하위의 대중예술 장르를 일컫는다. 한국에선 그중에서도 게임을 비하의 표적으로 삼는 관행이 유독 뿌리 깊다. 기성세대 관점에서 게임인즉, 도박이고 중독 유발 물질이기에 그와 비슷한 격의 서브컬처 대다수가 사회적으로 냉대를 받아왔던 게 사실이다. 물론 장르 자체의 특징일 수도 있겠다. 무언가에 시간을 뺏기고 넋이 나가 규범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는데, 고급예술과 달리 비생산적이고 무가치하기까지 하니 잠재적 범죄까지는 아니더라도 남 참견하기 좋아하는 한국인들 시선에 마뜩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사실 오타쿠에 대한 차별적 시선은 청(소)년 세대 내에서 훨씬 더 직접적이다. 그들 자신이 이 문화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일까. 그만큼 조롱과 차별도 구체적이다. 2000년대 후반 들어 청소년들 사이에서 나타난 새로운 조짐, '중2병'이 대표적이다. 중2병은 일반적인 사춘기와는 다르게 (이 말이 처음 유래한 일본에서처럼) 서브컬처식 세계관, 즉 허세와 망상을 기본으로 한다. 세계는 붕괴되어 있고(어른들 말로 '예전엔 좋았었다'고 하니 지금은 붕괴됐다고 짐작이 된다), 거기서 '나님'은 세계를 구원할 '초'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귀찮아서 안 하고 있을 뿐이다(왜 굳이 내가 그런 소명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렇게 현실과 판타지의 구분이 모호하다 보니 중2병에 빠진 청소년들은 종종 환자 취급을 받으며 또래에게조차 따돌림 대상이 되기도 한다.

가령 이런 식이다. 우연히 스친 친구의 차가운 살갗에 흠칫 놀라며 묻는다. "혹시 너도 뱀파이어니?" 우스갯소리이긴 하지만, 중2병에 관한 에피소드들은 오타쿠들이 어지간해선 정상인 취급을 받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현실의 상징 질서를 관통하지 못한 채 상상적 세계에 빠져 있는 상태. 자기들끼리 있으면 절실한 상상이고 감각이지만 타자의 시선은 따갑고 차갑다. 그래서 대다수의 오타쿠는 '일코'(일반인 코스프레)라는 걸 한다. 코스프레는 만화 캐릭터의 코스튬을 현실에서도 흉내 내는 2차 창작 공연 등을 가리키지만, 일코는 일상생활에서 자신이 오타쿠라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일반인처럼 행동하는 걸 일컫는다. 그들 자신이 '일반인'이 아니란 자의식이 그만큼 강하다는 반증일 것이다.

오타쿠에서 덕후로의 '덕밍아웃'

▲ <덕후감>(김성윤 지음, 북인더갭 펴냄). ⓒ북인더갭

그런 가운데 한국 사회에서는 오타쿠가 아닌 '덕후'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하면서 놀랄 만한 변화가 생겼다. 원래는 인터넷에서 오타쿠를 조롱할 겸 언어 유희를 섞어 '오덕후'라고 음차했던 것이 시작이었는데, 이후에는 이 말조차 줄여서 '오덕'이나 '더쿠' 또는 '덕후'라고 부르게 됐다. 이렇게 표현이 바뀌면서 뜻하는 바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오타쿠가 사실상 변태를 뜻했다면, 덕후는 특정 분야에 심미안을 가진 마니아적 기질로 동일시된다. 오늘날 덕후라는 말에 변태부터 떠올리는 사람은 아마 드물 것이다.

눈여겨볼 것은 덕후라는 말이 가진 놀라운 포용성이다. 오늘날에는 아이돌 팬을 위시로 해서 피규어 수집가에 이르기까지 모두 덕후라 부른다. 게다가 굳이 서브컬처에 국한되지도 않는다. 특정한 취향으로 문화적 활동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덕후로 불리는 기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수제맥주+덕후'나 '비틀스+덕후'는 물론, '클래식+덕후' 같이 얼핏 보면 형용모순처럼 보이는 경우까지 나타났다. 덕후는 오타쿠와 마니아 사이의 모든 이들을 가리킬 수 있는 보편적 접미사가 되었다.

사정이 급반전된 데는 몇 가지 배경이 있을 것이다. 추측해보자면, (일본에서 오타쿠 문화가 재조명됐던 것처럼) 덕후 문화 자체가 가진 경제적 파급력이 존중받게 된 점이 가장 클지 모른다. 흔히 말하듯 다품종 소량 생산 시대가 아니던가. 그만큼 상품에 대한 애착이 중요해졌다. 마케팅 담론도 많이 바뀌었다. 이제는 감정경제의 시대가 되었고, 말인즉슨 브랜드 소비를 넘어 '러브마크'4)를 소비하는 시대가 되었다. 오늘날 잘 나가는 상품이 내뿜는 미스터리, 관능성, 친밀감 등 러브마크의 구성요소들은 덕후들의 소비 패턴과 완전히 일치한다. 캐릭터가 됐든 텍스트가 됐든 덕후들은 러브마크를 이미 소비하고 있었던 셈인데, 이제는 거의 모든 문화상품들이 '덕력'과 '덕질' 같은 소비 감각에 의지하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타쿠 또는) 덕후야말로 오늘날 문화산업의 새로운 국면에서 가장 적합한 주체적 형태가 아닌가.

확실히 사람들은 시대의 변화를 (명확히 언어화하지는 않더라도) 감각적으로나마 인지하고 있는 것 같다. 오타쿠에서 덕후로의 전이 과정이 보여주듯 덕질을 건전한 취미 활동으로 인정할 정도로 사회적 시선이 많이 누그러졌다. 더러는 '덕업일치'5)해서 사회생활을 하는 경우들도 있다. 개중에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성공한 덕후'들도 나타나곤 해서 덕후에 대한 편견을 없애는 데 공헌하기도 했다. 구설에나 오르던 덕후가 사회적으로 해방(?)된 것이다.

전세 역전 : '닝겐'과 '머글' 시대의 종언

심지어는 전세가 역전되는 모양새다. 과거에는 일반인이 오타쿠를 비하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낮게는 안여돼, 높게는 정신이상자로 취급했던 게 사실이다. 조롱거리거나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고 있다. 이제는 (적어도 문화산업 내에선) 덕후가 주도하는 세상이 됐다. 오늘날 자본주의 상품 세계가 가장 필요로 하는 소비 주체의 형상. 그렇다면 덕후야말로 정상이고 일반인이야말로 비정상 아닐까? 자신이 딱히 덕후가 아니라고 여겨진다면, 그건 자신이 변화하는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는 문화 지체자란 뜻이 아닌가 말이다. 오타쿠를 비하하던 일반인이 이제는 자신에게 없는 덕후'감(感)'을 부끄러워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사실 오타쿠 내지 중2병이라고 손가락질받는 동안, 그들은 자기들끼리 일반인을 두고 '닝겐(인간(人間))' 또는 '머글'이라고 비아냥거리면서 정신승리를 하곤 했다.6) 현실 세계에서 이런 언어는 망상에 빠진 중2병 환자의 주절거림 따위에 불과했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중2병 세계관이야말로 놀라울 정도의 상상력을 보여 주고 있고, 정상(?) 생활하는 사람들은 단지 기계처럼 살고 있을 뿐이다. 덕후야말로 심미적 소비를 즐기고 있고, 그 어떤 취향도 없는 사람들은 대량 소비하는 군중 속에서 침묵하고 있을 뿐이다. 덕후의 감각을 쫓아갈 수 없는 머글들. 불쌍한 건 누구일까. 한심하고 답답한 건 누구일까. 성장을 거부한 채 골방에 처박혀 피규어를 수집하는 키덜트(kidult), 그리고 구조조정과 가계부채에 휘청거리는 꼰대. 이들 중 불쌍하고 답답한 건 대체 누구일까.

덕후란, 오늘날을 살아가는 주체적 형태들에 있어서 일종의 '문화적 우세종(cultural dominant)' 이다. 그렇다고 모두가 오타쿠처럼 서브컬처 캐릭터(의 특정 요소)를 '모에'7)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리고 모두가 덕후처럼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러브마크를 소비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덕후라는 군상이 이런 방식으로 이목을 끌게 되리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문화콘텐츠를 소비하고 또 대중문화 텍스트를 독해하는 방식이 덕후들의 덕질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앞으로는 더욱더 그렇게 될 것이고 말이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덕후들의 처지는 여전히 불안정하다. 세계의 문법이 바뀌고 있다 할지라도, 나름의 역사성을 지닌 사회와 문화까지 한순간에 바뀌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한쪽에선 우월의식이, 다른 한쪽에선 피해의식이 공존할 수밖에 없다. "나는 즐겁게 살고 있어, 이 머글들아." "그렇다면 닝겐들 눈에 띄지 않는 편이 낫겠군." 그래서 사회적 인정 욕구 때문에 틈만 나면 '덕밍아웃'(덕후+커밍아웃)을 하지만, 그래도 기본 기조는 일코다. 그래야 자신의 체면을 지킬 수 있으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그렇듯, 그들은 온전한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 특이점이 무르익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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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소비윤리로서 '덕력'과 '덕질'

어쩌면 우리들 중 누군가는 왜 하필 지금 시점에 덕후라는 담론이 무성해지고 있는지 궁금해할지도 모른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차별 어린 시선으로 점철됐던 바로 그 오타쿠 담론이 말이다. 어쨌든 세상이 이런 방향으로 굴러가는 이상, 덕후라는 언어는 더욱더 보편화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꼭 그런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들의 삶의 패턴 자체가 점점 더 덕질의 요소를 가미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덕후감(?) 없이 앞으로는 적정한 문화생활을 유지할 수 없게 될 것이니 말이다. 드라마 한 편을 보더라도 시청자는 캐스팅에 참견하고 내용을 예측하며 자기 의견을 결론에 반영시킨다.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아이돌 그룹을 만들 때도 제각기 팬심으로 멤버들을 조합하고 투표도 하며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바로 오늘날의 새로운 문화 소비 생활 아닌가.

문화콘텐츠는 언젠가 움베르토 에코가 말했던 '열린 예술작품'처럼 변모하고 있다. 텍스트들의 향연이 반짝거리는 가운데, 우리들 수용자(관객, 시청자, 이용자)는 별자리 맞추듯 스스로 콘텍스트를 채워가며 비로소 텍스트들을 완성시킨다. 하다못해 <어벤져스>(조스 웨던 감독, 2015) 같은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마블 코믹스의 '세계관'과 그들의 '속사정'을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던가. 이제부터는 우리들 소비자의 역량(=덕력)과 참여(=덕질)가 무엇보다 중요한 관건이 된다. 수용자는 그렇게 진화해왔고 또 진화해야 한다. 달리 말해, 덕력과 덕질로 무장해야 한다.

장담컨대 앞으로 새로운 압박이 시작될 것이다. 모든 분야에 해박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각자가 선호하는 문화적 대상을 하나쯤은 가져야 하며 또 그에 대한 오타쿠적 지식으로 무장해야만 한다. 그 대상은 아이돌이 될 수도 있고, 애니메이션이 될 수도 있으며, 또는 클래식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주체는 프로슈머8)가 됐든 참여하는 관객이 됐든, 덕후가 된다. 물론 이런 추세가 우리의 일상에, 그리고 정치·경제·사회·문화 지형에 어떤 효과를 가져올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단적으로 말해,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오타쿠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문제였다면 앞으로는 덕후로 살아야 한다는 보편적 강박이 문제가 될 것이다.

이 글을 읽고도 누군가에겐 여전히 덕후에 대한 편견이 존재하겠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편견과 비난이 아니라 분석과 비판이다. 누군가를 비판하려면 그와 동시에 그를 둘러싼 세계를 비판해야 하지 않을까. 분명 특이점이 오고 있지만, 덕후들은 여전한 피해 의식과 우월 의식 사이에서 동요할 수밖에 없다.

각주

1) 일본에서는 '미야자키' 하면 지브리 스튜디오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다음으로 떠올릴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다.

2) 롤리타콤플렉스의 일본어식 줄임말.

3) 시체를 사랑하는 이상 성욕을 의미한다.

4) 브랜드 소비는 상품에 대한 '높은 존중감'에 준거하지만, 러브마크 소비는 거기에 더해 상품에 대한 높은 수준의 '애정도'를 포함한다.

5) 덕질이 직업으로 이어진 경우를 말한다.

6) 영화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마법능력을 가진 이들이 일반 사람을 '머글'이라고 부르면서 차별하거나 동정했던 것처럼 말이다.

7) '싹틈'(萌え) 또는 '불타오름'(燃え)을 뜻하는 일본어로, 서브컬처 캐릭터 자체 또는 캐릭터의 특정 요소에 호감을 갖거나 열광하는 것을 일컫는다.

8) 생산자와 소비자 역할을 동시에 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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