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식사란 무엇일까?
소박한 식사란 무엇일까?
[함께 사는 길] "덜 문명적이고 덜 건강한 삶과 결별하는 일대 도약"
소박한 식사란 무엇일까?
삶을 살아간다는 건 무엇인가? 어떤 화가는 "산다는 건 소모하는 것"이라고 했다. 기꺼이, 잘, 흔쾌히 소모하면 잘 사는 걸까? 욜로(YOLO) 족이라면 환영할 만한 이러한 삶의 정의는, 삶의 전면이 아닌 단면에만 주목했다는 결점을 지닌다. 소모와 같은 아웃풋(output)이 있으려면, 먼저 인풋(input)이 있어야만 한다. 다른 생명을 움켜쥐고 집어삼키는 일 말이다. 전력이 발생되지 않으면, 전력의 소모도 없다.

어떤 이는 삶을 살아간다는 건 "주체로서, 나로서, 내 행위를 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객체가 되지 않을 때. 주체성을 회복할 때. 그때 진정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주체성이란 애매한 말이다. 공생체와 공진화에 관해 알고 있는 생물학자라면, 이 단어 앞에서 주춤할 수밖에 없다.

가령, 배가 고파 어떤 제품을 구매할 때 나는 객체가 아닌 채로 그렇게 하고 있는 걸까? 먹으려는 욕망은 '나'라고 부를 수 있는 단일 개체, 단일 주체, 또는 그 주체의 중심인 뇌의 것일까? 동일한 욕망인데, 왜 저것이 아니라 이것을 난 선택한 걸까?

ⓒ함께사는길


어떻게?

내가 어떻게 내 행위를 하는가를 이해하는 일이 내 삶의 주체성을 주장하는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이 '어떻게'를 번역해서 적어보면 이렇게 된다. '무언가를 하려는 욕망 자체가, 내 몸이 선택한 특정한 행동이, 내 몸에서 어떻게 발생되는가?'

이 '어떻게'와의 응전 과정에서, 우리는 세 가지 중대 현실에 부딪히게 된다. 하나는 인체라는 생명의 실상이 전생물체라는 현실이다. 인간의 체세포 자체가 일종의 진화된 공생체이지만, 인체는 무수한 미생물들이 들어와 숙주와 함께 공동의 삶을 꾸려가는 거대한 유기 시스템이다. (이것을 생물학자들은 '전생물체' 또는 '슈퍼 유기체'라고 부른다.) 인체 중에서도 특히 장에는 무수한 장내 미생물들이 우글거리며 살아가고 있는데, 이들이 아니라면 아무리 먹어도 우리의 체세포들은 제 기능을 할 수 없고, 그리하여 아웃풋도 전연 낼 수가 없다. 인체 내로 들어온 물질의 분해, 조직의 재생산을 촉진하고 림프 조직을 만드는 등 막중한 일을 바로 이들이 수행하기 때문이다. 인체가 다른 생물처럼 자기 생산을 한다면, 이 일은 오직 미생물의 힘으로만 가능하다. 그래서 숙주와 미생물과의 공생과 공진화라는 보편적 생명 현상에 주목한 일군의 진화생물학자들은 '전유전체 이론(Hologenonm theory)'을 내세우며 개체(낱개의 생명)라는 건 사실상 지구에 존재한 적도 없다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또 하나의 현실은 초국적 자본주의 체제라는 현실이다. 자본력으로 움직이는 생산과 유통과 마케팅의 메커니즘은 우리들 개별 신체의 외부에서 우리를 결박하며 우리의 주체성을, 주체로서 살려는 우리의 지향을 파열한다. 선택할 수 있는 선택 범위가 이미 기획되어 우리 앞에 제시되는 마당에, 우리의 선택이 진정한 선택일 수 있을까?

세 번째는 다름 아닌 '의미'라는 현실이다. 무언가 선택해야 할 때, 우리는 늘 각자의 취향, 스타일, 이념, 가치관대로 선택한다. 이 취향, 스타일, 이념, 가치관을 지시하는 다른 말이 바로 '의미'다. 초국적 기업들의 마케팅 전략의 구속성을 우리는 의미라는 체계로 희석하여 지금 이 선택은 내가 자율적인 주체로서 선택한 것이라고 우리 스스로를 기만한다. 이러한 자기기만은 의미 없이는 살 수 없는 어느 뇌용량 큰 포유동물이 자본의 질서 내에서 자유를 확보하려는 은밀한 전략이기도 하다.

식탁은 자연 윤리까지 비추는 거울

삶을 살아간다는 건 무엇인가? 살아갈 때 우리는 여러 겹의 활동을 동시에 한다. 우선, 신체를 스스로 (재)생산해가며(autopoiesis) '통제된 예술적 혼돈'(린 마굴리스·도리언 세이건)인 전생물체 시스템을 자기 자신도 모르게 유지해간다. 그런데 이 유지는 신체 시스템 전체의 엔트로피 증가에 대한 지속적인 저항이기도 하다. 물론 그 저항은 오직 다른 생명체라는 저항군의 투입으로써만 가능하다. 식사는 인간 동물 또는 그 동물의 신체를 구성한 다세포 군집체의 생존 저항이자, 인간 동물의 먹이가 된 다른 동식물의 인간 구원이다. 그것은 남의 죽음으로 자기 삶을 대체하는 신성한 드라마여서, 옛 성인들은 밥의 본질을 메밥(제삿밥)이라고 보았다.

또 다른 겹은, 의미를 추구하고 의미에 기꺼이 종속되기라는 겹이다. 의미에의 자발적 종속에는 예외가 없어서 세계에 진리, 의미, 목적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 역시 그렇게 세계를 해석할 때, 자신의 세계 해석의 결과에, 일종의 포스트모던적 의미에 종속되고 있다.

요컨대, 다른 생명을 잡아먹으면서 부단히 제자리를 지키려 하면서도, 의미에 잡아먹히며 제자리에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다. 하지만 주의할 것이 있다. 인풋과 의미가 분절되어 이해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첫째, 의미를 찾아내고 실현하는 뇌와 신경기관의 고차원적 활동은 인풋이라는 활동과 늘 함께하기 때문이다. 영혼이라는 불꽃은 다른 생명이라는 기름이 몸속에서 끓는 순간에만 타오른다.

또 하나. 인풋, 특히 식(食) 행위에는, '어떤 삶을 살려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이미 솟아 있기 때문이다. 식사 양식(樣式)은 의미의 구현체이기도 해서, 먹는 내용물과 양식을 살펴보면 식자(食者)가 어떤 의미에 구속되었는지 금세 드러난다. 식탁은 개별자의 취향, 스타일만이 아니라 그의 음식 지능, 신체를 관리하는 태도(섭생의 기율), 그리고 중요하게는 자연 파괴적 자본 질서 내에서의 자연(생명) 윤리까지 비추는 무서운 거울인 것이다.

그러니까 소박한 식사는 소박한 삶이라는 의미의 금광을 캐낸 이가 손에 쥔 보석이다. 소박한 식사가 보석이라고? 궁중 요리법이, 종가 음식이 찬미 되는 시대에, 아니 그 찬미가 우리의 귀와 눈과 코와 혀를 쉴 새 없이 공습하는 시대에, 이런 발언은 위험천만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씻고 다시 봐도, 아무리 생각을 곱씹어 봐도, 아무리 산해진미를 먹어 봐도, 아무리 삶을 살고 살아봐도, 소박한 식사만이 자유와 행복으로 가는 해답이라는 진리가 도리어 자명해질 뿐이니, 이 이야기를 없는 듯 감출 수는 없다.

소박한 식사란?

무엇이 소박한 식사란 말인가? 소박한 식사는 수수해 보이는 음식의 섭취가 아니다. 자발적인 내핍도 아니고, 내핍 상태에 대한 합리화는 더더욱 아니다. 불편하지만 행복한 식사도 아니다. 도리어, 소박한 식사는 충분한 숙고와 살핌을 통한 자유와 치유에 관한 것이다. 그건 더 단순하고, 더 직접적인 삶을 선택함으로써 그 반대의 삶이 강제하는 덜 문명적이고 덜 건강한 삶과 결별하려는 일대 도약이다.

삶의 전 국면에서 분열적이지 않은 전일한 인격체로서 살아가며, 자유를 살아내려는 절대적 선택이기도 하다. 낭비와 폭력, 질병을(우리가 지금 '살충제 달걀'에서 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폭력=질병이다) 늘 수반하고 또 분비하는 지금의 푸드 시스템, 소비주의 시스템과의 일대 대결이자 승리, 시스템의 내부 균열이며, 그 결과물인 조용한 만족과 감사, 휴식의 축제가 바로 소박한 식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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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함께 사는 길>은 '지구를 살리는 사람들의 잡지'라는 모토로 1993년 창간했습니다. 사회적 약자와 생태적 약자를 위한 보도, 지구적 지속가능성을 지키기 위한 보도라는 보도중점을 가진 월간 환경잡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