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엘리트의 ‘숨 막히는’ 북한 탈출기
경제엘리트의 ‘숨 막히는’ 북한 탈출기
[홍춘봉 기자의 카지노 이야기] ⑲북한군 3개 군단 먹여 살린 ‘카지노 타짜’
2017.09.27 09:31:43
경제엘리트의 ‘숨 막히는’ 북한 탈출기

북한군 3개 군단을 먹여 살려야 하는 임무를 맡아 어깨가 무거워진 이주영씨는 어떻게 돈을 벌어 나갈지를 고민하다가 중국인 무역업자를 만나 중국에서 수입하여 갈 필요한 물품이 무엇인지를 알아보았다.

“철은 물론 금, 은, 동 등의 귀금속과 희귀금속이면 무조건 사겠소.”

북한 군단에서 군용 화물트럭 2대와 자가용으로 8인승 승용차를 배정받은 그는 대좌계급장이 붙은 군복 4벌과 북한 보위부도 인정하는 고위층 신분증도 지급받았다.

 

▲북한 주민들이 김일성 동상에서 참배하고 있다. ⓒ네이버 캡처


그리고 이씨는 동네와 주변을 돌며 개인들이 몰래 보관하고 있거나 폐광 광산에 방치된 각종 광물을 비싼 가격에 산다고 소문을 내고 다녔다.

당시 북한에서는 개인들 간의 광물거래는 불법이었기에 개인들은 집이나 땅 속에 광물을 숨겨 놓고 있었다.

중국에서 매입하는 가격을 확인한 그는 비싼 가격에 철과 금, 은, 동은 물론 희귀금속인 코발트와 니켈, 산화철 등을 수집했다.

처음 한 달 동안 그는 4만 달러의 광물을 모아 중국인 무역업자에게 넘겼다.

중국인 무역업자에게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이때부터 물건을 넘겨받기 전에 계약금으로 30%의 현금을 먼저 받아 좋은 조건에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처음 무역거래로 이씨는 8배의 차익을 남겼고 이씨가 얼마나 사업에서 돈을 벌 수 있을지 학수고대 하던 군단 참모장과 3개 군단장들은 환호했다.

“이 동무, 정말 대단하오. 앞으로도 계속 활약이 기대됩니다!”

고무된 이씨는 황해도 금광과 계약을 체결해 원석을 일부 가공한 정광을 사 모았다.

또 평양 근처의 제련소를 수소문해 찾아간 이씨는 이곳에 지천으로 방치된 철을 확인했다. 일제 강점기 시절에 일본인들이 개발한 이 제련소는 해방 후 김일성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으로 일본인들이 철강 찌꺼기를 쓸모가 없다고 바닥에 버려졌던 철이 지천에 널려 있었다.

인민군 병력과 포크레인을 동원해 철강제품 수집에 나선 이씨는 장비와 인력으로 바닥을 알뜰하게 긁은 결과 이곳에서만 철강 3000톤을 수거했다.

평양 대동강에 화물선을 정박시킨 중국인 무역업자는 이씨에게 비싼 가격으로 철강을 사들였고 이씨의 경제활동 실적은 일취월장 하였다.

입춘이 지나면서 대동강의 얼음이 녹는 4월이 되면 이씨는 인민군 2개 소대병력에게 소형 그물을 나눠주고 까나리와 실뱀장어를 잡는 일을 시켰다.

중국인 무역업자는 고기 잡는 소형 그물 수백 개를 공짜로 제공했고, 고기를 잡는 방법도 알려 주었다.

물고기를 잡는 사업은 인건비 지급이 없는 탓에 파는 즉시 이익을 남겼다.
자신의 수고비는 별도로 떼고 무역으로 번 돈을 군단에 넘기면 3개 군단 3만 병력들의 식량과 유류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북한군은 1986년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외화벌이를 통해 식량을 해결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는 어느새 3개 군단에서 구세주가 되었다.

군단장들은 얼마 후 고마움에 보답하기 위해 700달러를 주고 8인승 자가용을 새로 바꿔 주기도 하였다.

이씨의 경제활동은 북한에서 손가락을 꼽는 위치였고 그는 북한에서 가장 잘 사는 부유층에 속하는 신분이 되었다.

“당시 돈을 잘 벌어 북한에서 최고의 생활을 할 정도가 되었다. 나를 담당하는 보위부 직원에게는 수시로 식사도 대접하고 용돈을 제공하면서 친분을 다졌다. 친지와 주변의 부러움을 받았고 군인들은 나를 최고의 복덩이처럼 감사하게 여겼다. 생활도 풍족했고 재산도 제법 모을수 있었다.”

그러나 인생은 새옹지마, 이러한 생활의 10년 만에 최악의 위기가 찾아왔다.

어느 날, 친하게 지내던 보위부 직원이 은밀하게 귀띔을 해주었다.

“동무, 당신의 가까운 가족이 남한 간첩과 내통한 것이 적발 되었소. 반역죄로 당신도 처벌될 것이오. 시간이 없소. 안타깝지만 내가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베풀 수 있는 온정이오.”

이씨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남한 간첩과 내통한 가족은 잡히는 즉시 엄청난 고문을 당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없는 사실도 실토해야만 한다. 보위부에 끌려가는 악랄한 고문을 받고는 결국 총살을 당하고 만다. 차라리 고문을 당하느니 죽는 것이 낫다.”

더 이상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평소 무역거래를 하면서 통역으로 알게 된 사람이 압록강 국경 근처에 살고 있었고, 그와 매우 친하게 지냈던 그는 인간관계가 이렇게 중요한 때 활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는 다소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그는 백두산에서 가까운 압록강을 통해 탈북하기로 결심을 하였다.

부인과 젖먹이 막내아들을 데리고 먼저 탈북한 후 나머지 자녀들은 추후에 데려갈 생각을 하였다.
가족이 많으면 탈북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튿날 이씨는 군단 참모장에게 “황해도에 광물을 알아보러 갔다가 오겠다”고 ‘연막’을 쳤다.
그리고 이씨는 평양에서 백두산 근처로 가는 열차를 타고 탈북루트를 점검하는 여정을 시작했다.

 

▲북한 해군. ⓒ네이버 캡처


2007년 2월 인민군 국경수비대의 근무가 취약한 새벽에 백두산 인근의 꽁꽁 언 압록강을 건너 조선족 통역원의 집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내가 며칠 후 가족과 함께 북한을 탈출하려고 하는데 반드시 도와 달라. 향후 3, 4일 후 부인과 어린 아들 3명이 오늘처럼 새벽시간에 찾아오겠으니 차량으로 이동시킬 수 있도록 준비를 해달라. 은혜는 잊지 않겠으니 꼭 부탁한다.”

약속을 받은 이씨는 하룻밤을 조선족의 집에서 보낸 뒤 새벽시간에 다시 압록강을 건너 북한으로 넘어갔고 열차편으로 집으로 향했다.

이런 사정을 전혀 모르는 이씨의 부인에게 북한 탈출계획을 알려야 했지만 전화는 도청 때문에 그는 “5분 후에 형님 집에 가서 전화를 받아야 한다”고 당부를 하였다.

영문을 모르는 그의 부인은 가까운 형님 집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 아무 소리 말고 막내아들만 업고 오늘 밤 8시까지 역전으로 나와. 다른 것은 일체 챙기지 말고 몸만 와야 하네.”

정확한 사정을 모르는 이씨 부인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
돈 잘 버는 탓에 이웃과 친지의 부러움을 받고 있는 집안인데 갑자기 옷가지만 챙겨 집을 빠져 나오라는 전화에 무슨 말인지 긴가민가하면서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남편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은 것을 눈치 챈 부인은 남편의 말대로 두꺼운 옷을 껴입고는 큰 아들과 딸들은 놔둔 채로 막내아들만 업고 역으로 향했다.

역에서 부인을 만난 이씨는 “자세한 이야기는 열차에서 할 테니 빨리 열차에 타자”고 말했다.
평양으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 간단하게 상황을 설명하자 불안한 눈치를 보이던 부인은 이내 체념하며 남편과 길을 같이 하기로 하였다.

이윽고 평양을 거쳐 백두산으로 이동한 이씨 부부는 압록강 근처의 임시 숙소에서 압록강을 건너 탈출하는 계획을 세웠다.

3살짜리 막내아들에게 성인용 수면제 두 알을 먹여 재운 이씨는 대형 배낭에 막내아들을 밀어 넣고 자신이 배낭을 짊어졌다.


새벽 1시가 지난 시간이었지만 압록강의 국경수비대와 인민군이 서치라이트를 구석구석 비추며 구역별로 도보 순찰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오늘 이 기회를 놓치면 북한에서 고문으로 목숨을 잃을 것이라는 불안감에 각오를 단단히 한 이씨는 경계의 사각지대를 서치라이트가 겹치는 부분으로 판단하고는 살금살금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인지 성인용 수면제를 두알 이나 먹인 막내아들이 잠에서 깨어 이내 울음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비좁은 배낭 안에서 아들은 추위와 공포를 느꼈는지 오줌을 싸며 울음을 터뜨렸고,국경수비대와 인민군이 서치라이트를 비추면서 추격해오기 시작했다.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자 이씨와 부인은 중국 방향을 향해 재빠르게 달아났다.

중국 국경쪽으로 탈출하는 이씨부부를 본 인민군과 국경수비대는 휴대하고 있던 소총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따르륵, 따따 따르륵!”

다행히 아무도 총에 맞지 않고 압록강을 건너는데 성공했으나 이번에는 인민군의 총소리를 듣고 중국 군인들이 트럭과 병력을 동원하여 국경 근처에 대한 수색에 나섰다.

사면초가 신세였다.

그러나 죽음을 각오하고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을 차리면 살 수 있다는 옛 속담을 떠올리며 중국군 트럭을 피할 수 있는 사각지대를 세심하게 살피면서 피신을 하였다.

다행히도 차량 헤드라이트를 피할 수 있는 비교적 큰 바위를 발견하고는 부인과 함께 바위 뒤로 몸을 숨겨 겨우 위기상황은 벗어날 수가 있었다.

이렇게 30분가량을 숨어 있다가는 주위가 잠잠해지자 이씨는 국경에서 가까운 조선족의 집에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한동안 아무 기척이 없어 이씨는 무엇인가 일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다행히 10분쯤 지나서 눈을 비비고 일어난 조선족 덕분에 이들 부부는 따뜻한 건너 방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영하 20도가 넘는 강추위를 뚫고 목숨을 건 탈출을 한 이씨 부부는 온 몸이 꽁꽁 언 상태였다.

손발이 얼음장처럼 얼어붙은 부인과 아들의 손과 발을 두 시간 이상 안마를 하며 주물러 주자 얼었던 몸이 풀리기 시작했다.

긴장이 풀리자 부인과 아들은 이내 곤한 잠에 빠져 들었지만 중국을 떠날 때까지 이씨는 안심을 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 한국으로 도피하기 위해서는 차를 타고 항구에 가야하는데 연결을 부탁합니다.”
이윽고 조선족은 차량을 가진 중국인에게 연락해 1단계로 장백까지 이동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씨를 싣고 갈 차량이 도착하기도 전에 이웃의 중국주민이 잠시 조선족을 만나러 왔다가 건너방에 인기척이 있자 집주인인 조선족에게는 양해도 구하지 않고 방문을 열어 이방인이 자는 것을 확인하였다.

중국인이 바로 조선족 집을 나서자 집주인인 조선족이 말했다.
“저 사람이 중국 공안에 곧장 신고를 할 것 같으니 우리 집에 있으면 불안하다. 빨리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

사람 좋은 조선족은 자가용을 갖고 있는 아들 친구에게 급히 연락하여 다른 차를 불러와 이씨와 조선족을 태우고 이동하여 10분 뒤에는 다른 곳으로 피신처를 옮길 수가 있었다.

이씨가 피신한 뒤 1시간이 채 안 되어 중국 공안 일행이 조선족의 집을 덮쳤지만 미리 피신하여 무사할 수가 있었다.

조선족이 알선해준 차량을 이용하여 장백으로 옮긴 이씨 가족은 무역거래를 하면서 알게 된 장백사람과 전화를 연결하여 만났고 다시 24시간을 넘게 피를 말리는 이동 끝에 심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장백에서 심양까지 이동하는데 도와주면 좋겠습니다.”

이 장백사람은 이씨가 심양까지 밀수거래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가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협조를 약속했다.

“좋습니다. 평소 나와 좋은 거래를 한 인연이 있으니 내가 도와주겠소.”

“감사합니다.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돈을 달라는 대로 주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3일 뒤 이씨 일행은 8인승 봉고차량 1대와 승용차 1대 등 2대로 심양까지 이동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신분증도 없는 이씨 일행을 차량에 태워 심양으로 이동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라 모두의 지혜를 모아 세심하게 이동하는 방법을 세워 실천에 옮기기로 하였다.

“승용차가 300미터 앞에서 먼저 출발하겠다. 승용차에서 전화하면 이상이 있는 것으로 알고 따라오지 말고 도피해야 한다.”

한 밤에 산길을 따라 이동하는데 앞 차가 이동검문소를 발견 하였다.

앞 차에서 전화를 건 뒤 앞차는 고장이 나서 수리하는 것 처럼 차를 주차하고는 본 네트를 열고는 수리에 나서자 이동검문소에 근무하던 중국 공안은 4시간 뒤 철수를 하였다.

피를 말리는 4시간이 지난 뒤 차는 다시 출발을 하였고, 20시간 가까이를 달려서 심양의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심양의 중심지에 위치한 목적지는 중국 공안들이 주로 사는 치안이 완벽한 동네였다.

자신을 심양까지 안내한 조선족 장백사람은 “여기는 심양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며 “그러나 외출하면 대화가 안 되고 수상하게 보여 질 수 있으니 절대 외출은 삼가고 집에서 휴식만 취하라”고 말해 주었다.
심양에서 탈북 브로커에게 연락한 장백사람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연결했다.

 

▲북한 인공기. ⓒ연합뉴스


“심양에서 인천항까지 1인당 2500만 원을 요구하고 있다. 3명이니까 7500만 원을 달라고 한다. 어쩔 셈이냐?”

“너무 과하다. 듣던 것 보다 너무 비싸다. 내가 남은 돈이 1만 달러 밖에 없는데 우리 가족 3명에 대한 인천항 탈출에 1만 달러로 해결하자.”

이렇게 협상을 해서 1만 달러로 합의를 하고는 3일 후에 심양을 출발하기로 하였다.
브로커가 말했다.

“한국 비자와 여권을 완벽하게 만들었다. 항만에서 중국 공안이나 옆의 누구에게도 절대 말 하지 말고 그냥 지나쳐라. 공안에게 다 손을 써 놨으니 아이를 업고 통과하면 된다. 절대 서툰 중국말을 하면 그대로 끝장이다.”

이 전문 브로커는 다른 한국인의 사진이 붙은 여권과 여객선 티켓을 준비해서 이씨 일행에게 건네주었다.
북한에서 압록강을 건너며 탈출하는 과정이 중국을 거치면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목숨을 건 여정이라는 것이 절실하게 느껴졌다.

casinohong@pressian.com 다른 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