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옆에 선 주교, '정교대국' 러시아의 자화상
푸틴 옆에 선 주교, '정교대국' 러시아의 자화상
[유라시아 견문] 키예프 : 동로마와 서로마, 그리고 북로마
2017.10.02 10:59:23
푸틴 옆에 선 주교, '정교대국' 러시아의 자화상

1. 형제의 난

그리스보다 더 어지러운 나라도 있었다. 우크라이나이다. 여전히 준 내전 상태이다. 거버넌스가 작동하지 않는다. 혁명의 미몽 끝에 혼돈만 남았다. 한 국가 딴 살림, 나라꼴이 엉망이다. 콩가루 집안이다. 2014년 2월에 대한 명명부터 첨예하게 갈라진다. 서쪽에서는 마이단 혁명이라고 부른다. 동쪽에서는 네오나치의 쿠데타라고 한다. 내부 갈등으로만 그치지도 않는다. 3월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전격 합병했다. 우크라이나 동남부 땅이 삽시간에 러시아의 영토로 귀속된 것이다. 미국과 EU는 발끈했다. 곧장 G8에서 러시아를 축출시킨다. 1997년 러시아를 수용했던 G8에서 2014년 G7으로 되돌아가 버린 것이다. 푸틴은 눈도 꿈쩍 하지 않았다. G7이야말로 20세기의 구체제, 구질서의 상징이라며 비아냥거렸다. 도리어 우크라이나 사태의 배후에 미국과 NATO가 있다며 비수를 겨눈다. 냉전의 산물인 NATO를 더는 확장시키지 않는다는 묵시적인 신사협정을 위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탈냉전 이래 최악의 지정학적 갈등으로 치달았다. 일각에서는 신냉전을 운운한다.


의도치 않게 혜택을 입고 있다. 러시아 체류 넉 달 째, 서방의 경제 제재 탓에 루블화 가치가 크게 떨어졌다. <유라시아 견문> 1권에서 이미 우크라이나를 짚은 적이 있다. 당시만 해도 여전히 좌/우의 시각에서 살폈다. 현장을 밟노라니 눈에 들지 않던 면들이 보인다. 보/혁보다는 동/서가 관건이다. 백년의 이념보다는 천년의 문명이 갈림길이다. 동로마와 서로마의 유산이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슬라브 세계를 절반으로 나누었던 가톨릭과 정교회의 길항이 우크라이나를 반토막내고 있다.

우크라이나(Україна), 라는 단어부터 단서가 된다. 국명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슬라브어 공통의 보통명사이다. 변경, 지방, 국경 등으로 옮길 수 있다. 크라이(край)는 현재 러시아의 지방 행정 단위이기도 하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연해주는 러시아어로 포리모르스키 크라이(Примо́рский край)이다. 문제는 이 '우크라이나'가 어디에서 본, 어느 곳의 변경인가 하는 점이다. 대개 모스크바라고 오해하기 쉽다. 나도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러하지 않았다. 폴란드에서 본 변경을 일컫는다. 가톨릭세계, 서로마세계의 임계를 뜻한다. 이 의외성으로부터 우크라이나 사태의 복합성이 드러난다. 시점이 중요하다. 보는 위치, 시좌(視座)가 관건이다.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사태의 모습이 전혀 달라진다. 역지사지(易地思之)가 긴요하다.

▲ 키예프 중심가.ⓒ이병한


한글 공론장의 고질병은 서쪽의 시각만 일방으로 유통된다는 점이다. 가짜뉴스까지는 아니더라도 반쪽뉴스에 머문다. 나까지 반복하지는 않겠다. 대신에 동쪽에 자리한 러시아의 시각을 전한다. 키예프를 자신들의 뿌리라고 간주한다. 988년 키예프 루시가 동방정교회를 수용함으로써 오늘의 러시아가 있다고 생각한다. 정교가 희랍세계(두 번째 로마)에서 슬라브세계(세 번째 로마)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투르크족과 만남으로써 아랍의 이슬람이 세계종교가 되어간 것처럼, 정교는 슬라브인과 조우함으로써 또 하나의 세계종교로 웅비한다. 고로 키예프는 러시아로서도 각별하다.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동시에 러시아의 고향이다. 그래서 형제국 의식이 남다르다. 러시아라는 국명부터가 '위대한 루시'라는 뜻이다. 양국 사이에 자리한 벨라루스는 백러시아, '하얀 루시'라는 의미다.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는 한 배에서 나고 자란 삼형제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제국 아래 대일통을 이룬 시기도 있고, 셋으로 분화된 삼국시대도 있었다. 누가 형이고 아우냐를 가지고 다투기도 한다. 키예프를 품고 있는 우크라이나는 자신들이 형이라고 주장한다. 러시아는 힘세고 덩치 큰 동생일 뿐이다. 러시아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는다. 대국이 형님국가이고, 소국이 아우국가이다. 우크라이나를 말 잘 듣지 않는 골치 아픈 동생처럼 대한다. 


모스크바 공항에서부터 처우가 이미 달랐다. 출구가 셋으로 나뉘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가 한 묶음이요, 구소련 국가들이 다른 한 묶음이요, 나머지를 죄다 모아 외국인으로 분류했다. 하여 우크라이나 사태 또한 도무지 지정학적 갈등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러시아란 무엇인가, 우크라이나란 어떤 나라인가, 근본적인 물음을 함축하고 있다. 양국의 정체성과 정통성에 직결되는 사안이다. 형제국이라는 역사적 유기성과 국가간 평등이라는 근대적 국제질서가 충돌하는 고/금 간 모순이라고도 하겠다. 고로 크림반도 병합 또한 '독재자 푸틴의 제국주의', 라고 간단히 치부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잘 모르니까 함부로 떠드는 것이다. 무지하니까 단정 짓는 것이다. 무식하니까 용감한 것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한 몸으로 섞인 것은 1721년이다. 우크라이나 동부는 '신러시아'라고도 불렸다.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를 병합하여 대영제국으로 성장한 것이 1707년이다. 18세기 초 서쪽에서 해양제국이 비상하고 있을 때, 동녘에서도 육상제국 러시아제국이 부상했던 것이다. 이 양대 제국이 서유라시아 전역에서 힘겨루기를 펼친 것이 19세기이다. 속칭 '그레이트 게임'이다. 그 러시아제국을 전복시킨 것이 1917년 러시아혁명이다. 올해로 꼬박 일백년이 되었다. 그 후신으로 소련이 솟아났다. 러시아제국보다 체격이 더욱 커진 제국이었다. 발트해와 발칸반도에서부터 옛 발해 땅까지 아우르는 20세기형 유라시아 제국이었다.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또한 소련을 구성하는 공화국이 되었다. 그럼에도 여느 공화국과는 대접이 달랐다. 형제국으로서 융숭한 대우를 누린다. 1945년 UN이 출범했을 때, 두 나라 또한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51개 창설국의 하나로 UN 헌장에 서명한 국가가 우크라이나였다. 냉전기 비상임이사국도 두 번이나 역임했다. 소련을 구성하는 연방공화국이면서도 UN에서 독립국 지위를 누리는 주권국가였던 것이다. 소련 시절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다음가는 넘버 투였다.

아니 상당기간 우크라이나 출신들이 소련을 영도했다고도 할 수 있다. 후르시초프도 브레즈네프도 (동)우크라이나에서 왔다. 군산복합체의 거점이 (동)우크라이나에 자리했기 때문이다. 핵발전소로 유명한 체르노빌도 (동)우크라이나에 있었다. 이곳 출신들이 군권에 이어 당권을, 모스크바를 장악했던 것이다. 고로 냉전기는 우크라이나의 봄날, 호시절이라 할만하다. 그래서 탈냉전 직후 우크라이나는 세계 4대 군사력을 보유한 것으로 평가되었을 정도이다. 인구 역시 4500만에 이르렀으니, 러시아를 잇는 슬라브 대국이 될 잠재성이 매우 컸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도 동유럽의 1989년 체제, 이행의 모순을 면치 못한다. 순식간에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 부패한 올리가르히가 주도하는 정실 자본주의로 옮아갔다. 독립 당시 폴란드와 대등했던 평균 소득은 현재 1/3 수준으로 떨어졌다. 막내 국가 벨라루스에 견주어도 절반 수준에 그친다. 나아가 탈소련화/탈공산화에 박차를 가하면서 떳떳치 못한 역사마저 수면 위로 불거졌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에 깔려있는 친나치 이력이다. 폴란드와 이웃했던 우크라이나의 최서단까지 소련에 병합된 것은 1939년이다. 한 순간도 러시아제국에 편입되지 않았던 땅까지도 정교회+공산주의 세력에 떨어진 것이다. 이질적인 외부자가 마땅치 않던 이들이 기댈 수 있는 현실 세력은 나치 독일뿐이었다.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꽃다발을 들고 나치 군을 환영한다. 허나 끝내 스탈린이 히틀러를 물리치자 부역자들은 대거 미국으로 망명 갔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해방운동에 투신하는 '냉전의 전사'가 되어갔다. 그들이 1991년 독립을 기점으로 대거 귀국한 것이다. 2004년 오렌지 혁명의 주역이었고, 2014년 마이단 혁명의 주인공이었다.

▲ 마이단 광장과 독립기념탑. ⓒ이병한


이 왕년의 나치들이 주도하는 '민주화'에 불편한 심기를 거둘 수 없는 이들이 동쪽 주민들이다. 그들은 스탈린과 더불어 히틀러를 무찔렀음을 오래 자부해 왔다. 우크라이나인의 희생으로 유럽을 해방시켰다는 자긍심으로 충만하다. 역사관이 전혀 다르다. 저 나치의 후예들이 동부 출신 대통령을 권좌에서 몰아내고 권력을 찬탈한 것에 분노를 금치 못한다. 애당초 종교와 언어까지 다른 종자들이었다. 합스부르크제국의 영향 아래 가톨릭이 드셌던 서편과 달리 동쪽에는 정교도가 많고 러시아어를 모어로 쓴다. 말도 다르고 믿음도 다르고 역사인식도 다르다. 따라서 정권 교체 또한 보수/진보 간 권력 이양만이 아니다. 저 멀리 동로마파와 서로마파 사이의 문명 교체에 더 근접하다. 과연 동우크라이나에서 분리 독립을 추구하는 세력들은 키릴문자 성서를 들고 게릴라 투쟁에 임한다. 종교는 21세기하고도 17년, 변함없이 (특히 서유라시아에서) 문명의 기초이고 척추이다. 유라시아 견문 3년차, 일국의 내정부터 국제관계와 세계질서에 이르기까지 더 이상 종교를 변수로 고려하지 않는 이론은 사이비(似而非)라는 실감이 더해간다. 사회과학적 분석(Fake Theory)만으로는 좀체 충분치가 않다.


2. 로마의 환생

우크라이나가 기어이 러시아와의 천년 형제관계를 청산하고 NATO의 꼬붕이 되고자 한다면, 양국 간의 암묵적 합의도 파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에는 탈냉전기에도 러시아의 흑해함대가 주둔했다. 대신에 저렴한 가격으로 러시아의 에너지를 우크라이나에 제공해주었다. 안보와 에너지를 교환한 것이다. 


푸틴은 번개처럼 크림반도 병합을 단행했다. 완력으로 뺏은 것만도 아니다. 주민투표에서 92%의 압도적 다수가 러시아를 선택했다. 우크라이나는 주민결의가 국제법 위반이라고 주장했고, 러시아는 자결권 행사에 부응한 것이라고 응답했다. UN에서도 표심이 묘하게 갈렸다. 크림반도 주민투표를 무효라고 한 나라는 100개국이다. 반대한 나라는 11개국, 기권한 나라가 58개국이나 된다. 결석한 나라가 흥미롭다. 이스라엘이다. 거의 모든 사안에서 미국과 일치된 견해를 표했던 이스라엘이 이번만은 투표에 불참한 것이다. 홀로코스트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이스라엘로서는 나치의 후예들이 선도하는 마이단 혁명에 호의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도리어 소련군과 발칸의 빨치산이야말로 나치로부터 유대인을 구해준 은인이었다. 한때는 현재의 아라비아반도가 아니라 크림반도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는 방안까지 궁리되었을 정도이다. 


▲ 얄타 회담 장소. ⓒ이병한


오묘한 것은 이스라엘 건국을 포함하여 전후질서의 초석을 놓은 얄타회담 또한 이곳에서 열렸다는 점이다. 크림반도의 최남단에 얄타가 자리한다. 미국의 루즈벨트와 영국의 처칠과 소련의 스탈린이 회합하여 냉전질서를 주조한 곳이다. 바로 그곳을 러시아의 영토로 재편입시킴으로써 또 하나의 세계사적 획을 그었다. 


▲ 세바스토폴. ⓒ이병한


흔히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로 흑해함대를 거론한다. 맞는 말이다. 세바스토폴 기지는 대륙국가 러시아의 예외적인 부동항이다.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장소이다. 그런데 현지를 살피노라니 그것만으로도 그치지 않는다. 군사 기지 근방으로 헤르소네스라는 장소가 자리한다. 천년도 전에는 동로마제국, 비잔티움의 입김이 미쳤던 곳이다. 무엇보다 키예프 루시의 블라디미르 대공이 988년 세례 받은 것을 기념하는 블라디미르 대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즉 크림반도는 '루시의 기독교화'를 상징하는 성지이기도 했던 것이다. '러시아 문명', '러시아 세계'의 원천지라고 할 수 있다. 군사적 요충지이자 정교회의 성지로서 러시아의 성/속을 아우르는 상징적인 땅이다. 


▲ 헤르소네스의 블라미디르 대성당.ⓒ이병한

▲ 크림전쟁 기념비(세바스토폴).ⓒ이병한


러시아를 대표하는 대문호 톨스토이가 크림반도를 찾은 적도 있다. 1850년대 크림전쟁에 종군했었다. 이제야 크림전쟁의 숨은 의미도 매직아이처럼 떠오른다. 으레 남쪽으로 팽창하는 러시아제국과 지중해를 사수하려는 오스만제국의 충돌로 간주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겉핥기이다. 크림에서 흑해를 바라보노라니 맞은편으로 가닿는 곳이 보스포루스 해협이다. 오스만제국의 이스탄불이 자리했던 곳이다. 이스탄불의 전신은 콘스탄티노플이었다. 비잔티움제국의 수도였다. 로마제국이 동과 서로 나뉘면서 동로마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은 '제2의 로마'였다. 1453년 무슬림에 의해 동로마제국이 멸망하면서 1000년 이상 존속했던 두 번째 로마가 붕괴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로마가 영영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로마인 이야기'는 계속된다. 장소를 바꾸어서 로마가 환생했다. 세 번째 로마가 탄생한 것이다. 동로마제국 최후의 황제의 딸이 신흥세력으로 등장한 모스크바의 대공 이반 3세와 결혼했다. 비잔티움의 시저(Caesar)를 계승하는 러시아의 차르(царь)가 등극한 것이다. 이 상징권력을 획득함으로써 이반 4세는 전 루시를 대표하는 러시아제국을 세울 수 있었다. 고로 모스크바 또한 북방제국의 정치적 수도로만 그치지 않는다. 무릇 모스크바는 '성도'(聖都)의 위엄을 누린다. 제3의 로마이자, 북방의 예루살렘이었다.

▲ 크림 반도. ⓒ이병한


러시아제국의 이 같은 속성을 제대로 알아야 크림전쟁 또한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다. 크림 반도를 처음 수복한 예카테리나 대제부터 기독교의 세례를 입은 땅을 군사 거점으로 만들겠다는 의도가 다분했다. 그리고 그 궁극의 목적 또한 흑해 마주 편에 자리한 제2의 로마, 이스탄불을 기독교의 손으로 탈환하여 콘스탄티노플로 되돌리겠다는 것이었다. 정교도들을 무슬림의 지배 아래서 해방시키겠다는 뜻이다. 즉 19세기 오스만제국와 러시아제국 간 수차례의 크림전쟁은 제2 로마와 제3 로마의 종교전쟁, 동로마와 '북로마'의 문명의 충돌이기도 했던 것이다. 오스만-러시아의 경쟁을 세력 균형의 관점에서 '동방문제'만로 접근했던 세속화 이후의 대영제국과는 시좌가 전혀 달랐던 것이다. 


과연 2014년 푸틴의 연말 교시연설이 흥미롭다. 러시아가 기독교에 입문한 성지, 블라디미르 대공이 세례를 받은 성소, 크림반도가 모스크바로 되돌아 왔음을 축복해마지 않았다. 러시아의 정통성과 정체성의 척추를 이루는 정교적 역사를 복원한 것이라며 위풍이 당당했다. 군사 기지 확보는 차라리 부차적이었다. 종교적 의의가 훨씬 심대했다. 푸틴의 옆자리에 나란히 선 이 또한 총리도 국방부장관도 외교부장관도 아니었다. 러시아 정교회의 총주교 키릴이었다. 키릴 총주교 역시 푸틴의 결단을 러시아를 위한 '문명적 선택'이었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정교대국' 러시아의 자화상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 얄타의 정교회 성당. ⓒ이병한


3. 성/속의 공진화

키릴이 러시아 정교회의 총주교에 오른 것은 2009년이다. 곧장 우크라이나를 방문했다.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 정교회는 여전히 1300만 신도를 거느린 최대 교회이다. 이 자리에서 우크라이나-벨라루스-러시아로 이어지는 형제애의 발현, '역사적 루시'의 통합을 역설했다. 키예프야말로 '러시아의 콘스탄티노플'이라는 헌사도 보태었다. 환기시킨 인물은 소련 시절의 반체제 작가 솔제니친이다. 그 또한 소련 이후의 국가상으로 '정교국가연합'을 제시했던 바이다. 즉 공산국가에 저항했다 하여 자유주의/자본주의를 지향한 것이 천만 아니다. 좌/우가 아니라 성/속 갈등이 '민주화'의 제1전선이었다. 러시아의 전통과 정통으로서 세속주의/공산주의 소련과 척을 졌던 것이다. 2013년 키릴 총주교는 재차 키예프를 방문한다. 988년 세례 이후 1025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 참여했다. 당시 동반한 이가 총리 노릇을 하던 푸틴이다. 총리 시절 싹을 틔운 '정교 외교'가 대통령에 복귀한 2012년부터 본격화되고 있다. 


그 결실이 바로 2016년 바티칸의 교황 프란치스코와 러시아 정교회의 총주교 키릴의 쿠바 회동이었다. 푸틴의 로마 교황청 방문 직후 성사되었다. 푸틴의 행보가 독특한 것은 각 나라의 수도를 순회하는 만큼이나, 각 지역의 성지도 순례한다는 점이다. 쿠바 회동은 가히 역사적인 만남이었다. 무려 1000년에 달하는 서방가톨릭과 동방정교회의 대립과 갈등의 종언을 선언하는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동/서 냉전의 이면에 동/서 로마의 분열이 깊숙하게 작동하고 있었음을 복기한다면 '제2의 탈냉전 선언'이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종교 지도자들이 주도하는 '제2의 탈냉전'으로서 세속 지도자들의 '신냉전'을 돌파하고 있는 것이다. 제1로마와 제3로마의 의기투합은 당장 세속정치에도 깊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첫 번째 로마와 세 번째 로마가 손을 맞잡고 제2로마의 사태 해결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중동의 시리아 내전부터 동유럽의 우크라이나 내전까지 교황과 총주교의 발언과 개입이 부쩍 잦아지고 있다. 서로마와 동로마, 북로마가 연합하여 서유라시아의 새판을 짜려한다. 하여 더 이상 UN이나 EU만 주목해서는 몹시 곤란하다. 국익을 다투는 국가 간 정상회담만 따라다녀서는 목하 세계사의 전환을 따라가지 못한다. '천주위공'(天主爲公)을 표방하는 종교 지도자간 회합을 주시해야 한다. 동/서 교회가 재회하고 있고, 신/구 교회가 화합하고 있고, 기독교/이슬람이 회동하고 있다. 나아가 '천주위공'(기독교세계)과 '움마위공'(이슬람세계), '천하위공'(중화세계) 간 공진화도 착목해야 할 것이다. 세계최대의 종교지도자 프란치스코와 세계최대의 세속지도자 시진핑의 밀레니엄적 회동 또한 개봉박두에 들어갔다. 20세기와는 다른 21세기, 탈세속화 시대의 새 정치가 이미 가동되고 있는 것이다. 이 흐름을 주시하지 않는다면 장차 유라시아의 향배를 가늠하기 힘들어진다. 


제1로마와 제3로마의 공진화, 교황과 총주교에 합을 맞추는 세속국가도 있다. 독일과 러시아이다.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에 가장 난색을 표하고 있는 나라가 독일이다. 나날이 우경화되고 있는 키예프에 우려를 표한다. 미국과 독일이 날카롭게 갈라지는 지점이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사태를 계기로 동/서유럽을 재차 쪼개려고 든다. 독일은 전혀 수긍하지 않는다. 동/서독 통일에도 소련의 기여가 다대했다. 소련의 송유관이 서독까지 이어지는 에너지 연결망이 독일 통일과 유럽 통합에 밑천으로 작용했다. 미국과 일정한 거리를 둠으로써 서유라시아의 대동세계를 구현해야 한다는 점에서 메르켈의 복심은 일정하게 푸틴과 통하는 것이다. 고로 러시아를 대하는 태도 역시 미국과는 매우 다르다. 동유럽을 사이로 러시아와 몸을 섞고 호흡을 나누며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숙명을 안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넘어서 베를린과 모스크바가 눈빛을 교환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정보기관이 거듭하여 메르켈을 도청하고 있는 근본 까닭이기도 하다. NATO의 사명이 무엇이었던가. 독일을 누르고 러시아를 멀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독일은 이미 미국 없는 유럽, NATO를 대체하는 유럽연합군을 도양광회(韜光養晦) 식으로 준비해왔다. '리스본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 푸틴이 대유라시아 연합을 처음 제창한 곳 역시도 독일이었다. 독-러 연대는 대서양에서의 미국 패권 상실을, 서유라시아의 '다른 백년'을 상징하게 될 것이다.

독일을 다닌 것은 지난 3월이다. 벌써 6개월이 흘렀다. 반년이나 묵혀 둔 것도 러시아로 옮아가기 직전에 독일을 다루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서유라시아의 행방은 20세기 독/소 전쟁만큼이나 독일과 러시아가 쥐고 있다. 때마침 독일 총선에서 메르켈의 4연임이 확정되었다. 2021년까지 집권한다. 내년 러시아에서도 푸틴이 재선하여 2024년까지 임기를 이어갈 가능성이 9할이다. 앞으로 4-5년 사이에 21세기 서유라시아의 초석이 다져질 것이다. 흥미롭게도 메르켈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이며, 푸틴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남성이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동독에 머물고 있기도 했다. 당시 메르켈은 35살 물리학자였고, 푸틴은 37살 KGB 요원이었다. 동독 경험이 두 사람의 세계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도 공통점이다. 나아가 메르켈은 러시아에 능통하고, 푸틴은 독일어에 발군이다. 두 사람이 회합할 때면 영어를 거치지 않는다. 메르켈이 러시아어로 농담하면, 푸틴은 독일어로 조크한다. 포스트-앵글로색슨 세계의 쌍두마차이다. 차례차례 살펴볼 때가 되었다. 레이디 퍼스트, 메르켈부터 짚는다. 베를린으로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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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소개
동아시아 현대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논문보다는 잡문 쓰기를 좋아한다. 역사가이자 언론인으로 활약했던 박은식과 신채호를 역할 모델로 삼는다. 뉴미디어에 동방 고전을 얹어 아시아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Digital-東學' 운동을 궁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