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합리적 보수'는 또 죽어가나?
이렇게 '합리적 보수'는 또 죽어가나?
[인터뷰]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저자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 ②
2017.10.25 09:00:49
2013년부터 <프레시안>에 연재됐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중 박정희 유신 체제를 본격적으로 파헤친 단행본 9, 10, 11권이 발간됐다. 이번에 발간된 세 권은 1972년 10월 17일을 비상계엄 선포로 시작된 '유신 쿠데타'와 관련 각각 △유신을 왜 일으켰나(9권) △왜 유신 체제를 막지 못했나(10권) △유신의 뿌리, 일본 군국주의(11권) 등을 살펴보는 내용으로 구성됐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는 1945년 해방 후 1987년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민주화 흐름을 짚어보는 기획으로 해방과 분단을 다룬 1권, 한국전쟁과 민간인 학살을 다룬 2권, 이승만 독재와 이에 맞선 조봉암의 비극을 그린 3권, 4월 혁명을 다룬 4권에 이어 5권부터는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의 탄생과 전개 과정을 다루고 있다. 이번에 유신 체제를 해부하는 세 권의 단행본에 이어 향후 6월 항쟁에 이르는 과정도 다뤄질 예정이다.

<프레시안>은 촛불 시위 1주년이자 11월 14일 박정희 탄생 100년을 맞아 저자인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를 만나 촛불 시위의 의의를 되새김과 동시에 유신 체제와 한국의 앞날을 조망하는 인터뷰를 마련했다.

촛불 시위가 없었다면 박근혜 정부 하에서 성대한 박정희 탄생 100주년 행사를 지켜봤을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서 교수는 여전히 한국 사회에 '박정희 신드롬'이 만연해있다며 이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미래를 설계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인터뷰는 지난 12일 <프레시안> 박인규 이사장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프레시안>은 이번 인터뷰를 세 편에 나누어 소개한다. 두 번째 편에서는 박정희의 권력 집권 의지에 대해 파헤쳐봤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우리는 흔히 박정희 집권 시대를 '18년 독재' 라고 말한다. 그런데 서 교수께서는 유신 이전과 이후를 엄격히 구분하던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서중석 : 일부 개발독재론자들은 자신들의 논리를 합리화하기 위해 3공화국과 유신체제가 권력형태에서 비슷하다는 주장을 폈다. 적지 않은 지식인 언론인들이 3공화국과 유신체제가 얼마나 엄청나게 다른지를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접할 때마다 두렵고 무서운 생각이 든다. 삼척동자도 알만한 사실인데 이렇게까지 현대사를 모르나 싶어 정말 큰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선 정치 체제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억압의 정도도 비교가 안된다. 우리는 해방이 되면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인 기본권을 갖게 됐는데, 3공화국 후기로 갈수록 언론 탄압이 심해지고 학원을 병영화하려고는 했지만 그래도 기본권이 있었다.

그러나 유신 체제에서는 유신 헌법에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에 제약을 가할 수 있게 해놓았을 뿐만 아니라 특히 '긴급조치' 하에서는 가혹하게 제약을 받았다. 긴급조치는 절대적으로 인간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장치로서 기능했다.

이 중 긴급조치 9호가 가장 심각한데, 언론‧표현의 자유를 완전히 억압‧말살하는 역할을 했다. 1975년 5월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됐는데 이때부터는 다방에 가서도 항상 주위를 둘러보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3공화국 시기는 그래도 자유롭게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 정도로 기본권이 강하게 제약받던 시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유신헌법 제정 이후에는 일제 말기나 1910년 무단통치 시기와 유사했다. 사람들이 1979년 10월 부마항쟁을 알게 된 것도 계엄이 선포되고 난 이후였다. 그렇게 큰 항쟁이 벌어졌는데, 한 줄도 쓸 수 없었다. 그렇게 심하게 통제했다.

제3공화국(1963~1972년) 시기에는 정치적 자유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 이승만 정권 때보다도 더 많은 정치적 자유가 있었고, 절차적 민주주의가 지켜지고 있었다. 정치인에게 직접적 탄압을 가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테러를 한다든가 그런 건 있었지만 그래도 지켜지는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유신 체제는 국민의 주권을 제한했다. 3공은 직선제였지만 유신체제는 간선제도 아닌, 통일주체국민회의(통대)라는 허수아비 기구에서 뽑았다. 그리고는 헌법에 통대를 주권적 수임 기관이라고 못박았다. 국민주권을 박탈해서 통대에 준 것이다.

유신체제는 민주공화국의 원리인 3권분립이 유린당했고, 의회주의는 형해화되었다. 헌법을 통해 대통령에게 절대권을 부여했다. 사법부나 입법부가 대통령에 의해 제약받았고, 대통령은 긴급조치권을 남용했다. 긴급조치 1, 4, 9호 등이 발령되면서 국회의원들이 제대로 발언을 할 수 없었다.

당시 신민당 김옥선 의원이 국회 본회의에서 유신 체제를 비판하는 발언을 하자 의원직에서 바로 쫓겨났다. 유신 말기인 1978년 총선이 지나면서 정국이 변하기 시작했고 1979년 5월 김영삼이 야당 총재가 되면서 격돌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유신 시기는 아주 엄혹했다.

중앙정보부의 역할에도 차이가 있었다. 기본적으로 박정희 정권을 지키는 역할을 했다는 점은 공통적이었지만, 3공화국 때는 유신 때처럼 노골적으로 감시를 하지는 않았다. 유신 시기의 김대중 납치 사건, 김형욱 납치 살해 사건이 1960년대라면 가능했겠나.

1970년대는 지독한 병영사회였다. 또 1960년대에도 시위가 많았지만 당시에는 주로 구체적 사안에 대한 반대였다. '3공화국 체제 타도' 등의 구호가 나온 적이 없었다. 하지만 유신 시기는 '유신 체제 타도'가 핵심이었다.

▲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9, 10, 11권 (서중석 지음, 오월의 봄 펴냄, 2017)


프레시안 :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유신 체제 식의 운영을 버리지 못한 것 같다. 국민들이 공적인 마인드가 없고 민주적 절차를 지키지 않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이렇게 당선된 사람들이 음성적으로 비민주적인 행위를 하는 것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이걸 그냥 박정희 신드롬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최근 바른정당에서 이들과는 달리 이른바 '합리적 보수주의'를 표방하고 있는데 이건 가능할까? 한국에서 민주적 보수세력의 형성은 불가능한 것인가?

서중석 : 합리적 보수주의의 반대가 수구적 기득권 세력 또는 수구 세력을 대표하는 수구 냉전 이데올로기, 수구적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합리적 보수주의가 강한 힘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는 한 잘못된 정치 행태가 계속 나타날 수밖에 없다.

합리적 보수주의가 수구적 기득권 세력을 누를 때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로 갈 수 있는 큰 전망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박정희 신드롬이 계속 힘을 갖고 있는 한 합리적 보수주의가 힘을 갖기가 어렵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합리적 보수주의가 자리 잡을 수 있는 기회가 4번 있었다. 첫 번째는 4월 혁명이다. 4월 혁명의 감격 속에서 지식인과 문화인들은 대개 보수적이었지만 우리 사회가 새롭게 가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이게 합리적 보수주의, 민주적 보수주의로 볼 수 있다.

허정 과도정부나 제2공화국의 장면 민주당 정부도 합리적 보수주의를 지향했다. 허정은 이승만의 최측근이었지만 자유당으로부터 견제당했고 탄압을 받았다. 허정 자체가 아주 합리적인 사람이기도 하다. 수많은 정치인 회고록이 나왔지만 제대로 쓴 회고록은 허정 하나라고 생각될 정도로 상당히 솔직한 사람이다. 자기가 알고 있는 한에서 이야기하고 거짓말로 호도하지 않는다. 이승만이 이기붕을 택하고 허정을 가까이하지 않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장면 민주당 정권은 1950년대에 탄압을 받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승만정권 아래서 민주주의와 자유, 기본권 등을 강력하게 주장해왔다. 물론 1960년 정권을 잡으면서 조금 변질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법치주의, 그와 짝을 이루는 합리적 보수주의로 나아가야 한다는 방향에는 동의했다. 그러나 5.16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이들이 정치‧문화‧사회 세력으로 성장하기가 어렵게 됐다. 공화당에도 합리적 보수주의자들이 적지 않았지만 결국 거세당하고 말았다.

두 번째는 1979년 10.26 이후부터 1980년 5.17 전까지의 서울의 봄 시기다. 물론 이 시기는 이미 12.12 쿠데타로 전두환이 군권을 장악했기 때문에 살얼음판 같은 정국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3김은 신군부 등장에 대해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쨌든 이 때 유신 체제가 잘못됐다는 것을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면서 우리 사회가 민주화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심지어는 '체육관 대통령'으로 당선된 최규하 대통령도 유신 헌법을 바꾸고 민주화로 가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5.17 쿠데타로 전두환 신군부가 출현하면서 합리적 보수주의가 자리 잡기 어려워졌다.

세 번째로 6월 항쟁을 꼽을 수 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의 몰락과 6월 항쟁으로 합리적 보수주의가 출현하나 싶었지만 1988년 총선 이후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의 합작으로 민주자유당이 만들어지면서 합리적 보수주의가 크게 약화됐다. 그리고 박정희 신드롬으로 합리적 보수주의가 자리를 잡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1995년 해방 50주년을 맞아 특정 신문들은 박정희 신드롬을 키우고 이승만 살리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그리고 1997년에 IMF 사태가 나면서 박정희 신드롬이 더욱 기승을 부렸다. 합리적 보수주의 보다는 수구적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이 정권을 잡고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유리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서 합리적 보수주의가 엷어졌다.

예컨대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에도 '북한에 퍼주기' 등의 프레임을 이용해 어떻게 해서든 새로운 차원의 남북관계를 허물려고 했고 한반도 평화에 저해되는 주장을 폈다.

네 번째로 2016년 11, 12월 촛불시위 시기를 들 수 있다. 이 때 합리적 보수주의가 가느다란 희망을 보여줬다고 본다. 당시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에 대해서는 종편과 거의 모든 언론이 다 비판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러면서 촛불 시위에 국민 대다수의 지지가 모아졌다. 수구적인 기득권 세력을 대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언론조차도 특집으로 합리적 보수주의를 제창하는 관계자들의 글을 싣는 모습이 보여지기도 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힘들긴 하겠지만 우리 사회에 합리적 보수주의가 나타날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희망을 갖게 했다.

그런데 거기 필자를 보니까 일부 필자는 합리적 보수주의를 지향했지만 또 일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러더니만 시간이 좀 지나자 해당 언론의 논조가 태극기 시위 쪽으로 기울면서 옛날의 모습을 보여줬다. 지금 그 언론은 1990년대보다도 퇴행의 길을 걷고 있다.

그렇지만 박근혜 탄핵 과정에서 촛불 시위 영향을 받아 바른정당이 탄생된 것은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본다. 합리적 보수주의는 우리 사회의 명운이 걸려있는 문제다. 진보 보수를 떠나있는 문제다. 진보세력도 제대로 된 진보세력이 되도록 하고, 보수적 합리주의가 하나의 어엿한 정치세력으로 등장할 수 있도록 진보 보수세력이 서로 손을 맞잡고 서로 키워주고 배려해야 한다. 큰 희망은 갖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바른정당에 희망을 갖고 있다.

프레시안 : 탄핵 당시에는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새누리당에서도 탄핵에 찬성했고 말씀하신 대로 바른정당이라는 정당도 만들어졌다. 그래서 전향적인 모습을 보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결국은 이전으로 돌아갔다. 이 역시 박정희 신드롬 때문인가?

서중석 : 수구‧냉전 이데올로기를 대변하고 있었던 언론이 합리적 보수주의에 가까운 보도를 하니까 이 언론을 가장 견실하게 지탱해주던 수구‧냉전 세력이 등을 돌렸다. 사실 이 언론은 체질적으로 원래 합리적 보수주의를 지향하기가 아주 힘들었다. 수십 년간 어느 한 방향으로만 갔기 때문이다. 이제 제대로 방향을 잡아보자고 해서 시작했지만, 가장 강고한 지지 기반에서 강한 비판이 나오니까 다시 이 세력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게 됐다. 결국 원래대로 되돌아간 것이다.

선거도 합리적 보수주의가 나오기 어려운 요인 중 하나다. 총선이나 대선에서 당선이 되지 못하더라도 확고한 표가 있는 것이 유리하다는 생각을 하는 정치인들이 있다. 특정 지역이나 계층과 연계되는 것이 가장 유리하다는 판단이다. 그래서 새누리당(자유한국당의 전신)에서 바른정당 쪽으로 가려고 했던 사람들도 표를 생각하다 보니까 그 전보다도 더 강하게 수구적인 냉전의식에 기대려고 하는 모습이 보여지고 있다. 참 서글프고 비극적인 현상이다.

▲ 지난 1월 24일 '개혁적 보수·따뜻한 보수'를 기치로 내건 바른정당이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중앙당 창당 대회를 열고 본격 출범했다. ⓒ연합뉴스


박정희, 처음부터 영구 집권을 꿈꿨다

프레시안 : 최근 출간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에서 박정희는 1961년 쿠데타 직후부터 영구집권을 꿈꿨다고 지적했다. 민정 출범 후 반년 만인 1964년 드골식 비상대권을 참조하겠다거나, 1965년 12월 2기 국회의장 선출에서 공화당 내 반발을 무릅쓰고 김종필계 정구영 대신 말 잘 듣는 이효상을 유임시킨 일, 1966년 11월 정구영 공화당 의장이 삼선개헌을 만류하고 '71년 평화적 정권교체' 건의를 했지만 이를 묵살한 일 등을 사례로 들었는데 이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린다.

서중석 : 일각에서는 박정희가 1971년 김대중과의 대선에서 지역 몰표에 기대 간신히 승리한 뒤 이제는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유신 체제로 가게 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물론 이런 설명조차도 박정희는 절대로 정권을 놓지 않겠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사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킨 그 시점부터 영구집권욕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5.16 쿠데타 직후부터 강권 통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는 점을 각별히 유념할 필요가 있다.

5.16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박정희는 혁명 공약을 발표했다. 박정희 시대를 살아본 사람은 알겠지만 학교 조회시간에 이걸 외우고 낭송할 정도로 혁명공약을 국민들의 뇌리에 심으려고 했는데, 여섯 번째 공약에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추겠다"고 서약했다. 그런데 박정희는 처음부터 이를 조금도 실천할 생각이 없었다.

예컨대 1961년 6월 3일, 5.16 쿠데타 있은 지 얼마 후 윤보선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윤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쿠데타 세력이 조속히 정권을 민간에 넘겨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언론에서도 이런 기대를 강하게 표명하고 있었다. <동아일보>는 윤 대통령의 기자회견을 '조속한 정권 이양 필요'라는 제목을 뽑아 1면에 보도했다. 이런 기사가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대통령이 이야기한 내용이어서 쿠데타 세력의 검열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쿠데타 세력은 즉각 동아일보의 편집국장, 정치부 차장, 그리고 해당 기사를 쓴 이만섭 기자 등을 연행했다. 이만섭 기자는 결국 구속됐다. 여기에 윤보선 대통령의 비서관 유동준까지 국가재건최고회의에 끌려갔다. 박정희 당시 최고회의 의장은 유 비서관에게 정권을 빨리 이양하라는 말의 진의가 무엇이냐고 추궁하면서, "우리가 목숨을 내걸고 한 혁명인데 누구에게 함부로 정권을 내주라고 한다는 말인가"라고 흥분했다고 한다.

그런데 민간인한테 빨리 정권을 조속히 이양해야 한다는 것은 한국 언론이나 정치인, 국민들의 요구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은 쿠데타를 사실상 용인‧지지했지만, 자신들의 지지 때문에라도 쿠데타 세력들이 빨리 민정 이양을 하겠다는 발표를 하라고 촉구했다. 이러한 국내외의 민정 이양 요구에 박정희는 1961년 8월 12일, 2년 후에 정권을 민정에 이양하겠다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1961년 11월 14일 미국에서 박정희가 케네디 대통령과 공동성명을 발표할 때도 민정이양이 포함됐다. 미국에서 박정희를 초청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민정 이양을 확실히 약속받기 위해서였다.

그 당시 박정희는 모든 정치인의 정치 활동을 계엄 포고로 금지시킨 상태였다. 그런데 박정희와 김종필은 이런 상태에서 자신들이 만든 중앙정보부를 동원해서 사전 창당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신당의 정책 개발 책임 임무를 맡은 중정 관계자와 학자들로 구성된 대외문제연구소가 1961년 10월 신당 준비 작업에 비밀히 들어갔다.

즉 박정희는 대내외의 요구에 어쩔 수 없이 민정 이양의 뜻을 밝힌 것일 뿐, 실제로는 거대 정당을 만들어 정권을 잡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이러한 목적으로 김종필과 함께 공화당을 사전 조직했고 김종필은 그 당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군정 말기를 떠들썩하게 한 4대 의혹 사건까지 일으켰다. 어떤 정치활동도 불가능하게 해놓고 자신들은 정보부 밀실에서 몰래 거대 정당을 만든 것이다.

1962년 말~1963년 초 민정 이양기에 접어들면서 이 문제가 불거졌다. 당시 박병권 국방 장관과 김재춘 최고위원 등은 3군 참모총장 등을 동원해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에게 군은 혁명공약 제6항에서 이야기한 대로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겠다, 정치는 민간인에게 넘기겠다는 약속을 하게 했다. 이게 1963년 2월 18일에 박정희가 발표한 2.18 성명이다. 군 온건파 세력들은 그것만으로도 부족하다고 판단, 2.27 선서를 추진했다. 주요 군 지도자들과 정치인들이 참여한 가운데 박정희가 국민에게 민정 이양을 엄숙히 선서했다.

▲ 1963년 2월 27일, 민정 불출마를 선언한 박정희의 2.18 성명을 수락하는 '정국 수습을 위한 선서식' 장면. 선서식에는 정치인들과 국방부 장관, 3군 참모총장이 참석했다. ⓒ연합뉴스


이것은 박정희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국민에게 기만적으로 약속한 것이었다. 박정희는 일부 군인을 동원, 3.15데모를 일으킨 뒤 그다음 날인 16일, 군정을 4년간 연장할 수 있다는 것을 국민투표에 묻겠다고 밝혔다. 여기서도 박정희의 집권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 볼 수 있다.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3선 개헌 때도 이게 마지막이라면서, 더 이상 대통령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했다. 1971년 대선 당시 이 선거가 박정희한테 불리한 게 많기 때문에 특단의 공약을 해야 한다고 정보부가 중심이 되어 박정희에게 건의했다. 그래서 선거 이틀 전인 4월 25일, 서울 장충단 유세에서 박정희는 더 이상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다음 날 MBC를 통해 본인에게 마지막 선거가 될 것이며 후계자를 육성하겠다고 분명히 이야기했다. 하지만 대통령에 당선되고 난 뒤 불과 8개월 뒤인 12월 6일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한 뒤 1972년 10월 17일 결국 유신 쿠데타를 일으켰다.

3선 개헌이 문제가 있지만 일단 그건 합법적인 절차를 밟았다. 그래서 박정희가 1975년까지 대통령을 하는 것은 헌법에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1972년에 일으킨 유신 쿠데타는 자신이 만든 제3공화국 헌법을 유린하고 국가 변란을 일으킨 행위다.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을 택하지 않고 1975년에 임기를 채우고 물러났다면 우리 사회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당시에도 그런 이야기가 많이 나왔고 이후에도 박정희를 아끼는 사람들, 우리 정치가 잘되길 바라는 사람들이 많이 했던 이야기다. 1975년 임기 때 물러났다면 1971년 대선 때 표출됐던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를 더 발전시킬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뤄지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유신쿠데타는 경제적인 면에서도 부정적 영향이 컸다. 특정 권력이 장기 집권하게 되면 심한 관료주의와 경직된 권력 체계가 나타나는 것과 함께 정경유착이 심화된다. 이승만 정권 시절 자유당 간부들이 권력을 잡고 싶어서 3.15 부정선거를 저지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권력의 유혹에 빠져 있었고 한 번 구축된 정경유착 고리를 끊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유신체제는 말기로 갈수록 경제가 나빠지고 있었다. 경기가 악화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심각한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 전두환이 최근에 낸 회고록에서 박정희 말기에 한국 경제가 고도 성장에 따른 만성적인 인플레이션과 국제 수지 적자 누적 등 구조적인 한계 상황에 봉착해 있었다고 강조하면서 "한마디로 말해 우리 경제는 일시적 곤경에 바진 것이 아니라 오랜 지병을 앓고 있고 그 상태가 아주 위중하다는 것이었다"라고 서술했다.

이건 전두환이 아니더라도 유신 말기에 경제를 볼 줄 아는 사람은 대개 그렇게 얘기했다. 만약 1975년 정권이 교체됐다면 경제가 그렇게까지 막다른 골목으로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김대중·김영삼이든 김종필이든 누구로 정권이 교체되더라도 박정희 정부의 경제 기조에서 크게 벗어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관료주의가 어느 정도 타파되는 속에서 구조 개선이나 새로운 경제 활성화 정책이 나타나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뜻대로 되지 않으면 할복자살로 생을 끝냈을지 모른다는 글들이 있지만, 권력을 넘겨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고, 더 나아가 5·16쿠데타를 일으킬 때부터 한국에는 강권 통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1961년 6월 16일에 <지도자 도(道)> 라는 짤막한 책자를 냈는데 그것을 보면 박정희는 “광범하게, 상당한 기간 동안 강력한 강권 활동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썼다.

이번 <현대사 이야기> 11권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해 분석했지만, 1962년에 출간한, 박정희 저서 중에서 그의 정치이념이 잘 담겨 있는 <우리 민족의 나갈 길>, 1963년 대통령 출마하면서 쓴 <국가와 혁명과 나>, 이 두 개의 책을 보면 서문도 그렇고 본문에서도 서구민주주의를 '직수입된 민주주의'라고 부르며 이건 우리나라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행정적 민주주의라는 말도 쓰면서 우리나라에 맞는, 강력한 영도력을 가진 정권이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고, 그와 함께 식민사관을 노골적으로 펴면서 민족성이 나쁘기 때문에 강력한 통치가 필요하다고 시사했다. 즉 의회민주주의와 정당정치, 3권 분립과 거리가 먼, 유신체제의 이데올로기인 ‘한국적 민주주의’가 쿠데타 초기부터 누누이 강조되고 있다.

박정희가 어떤 권력을 지향했는지, 왜 1960년대에는 이를 실현하지 못했는지에 대해 연구자들이 관심을 많이 가지지 않은 것 같다.

1964년 한일회담 반대 투쟁이 아주 치열해지면서 6.3사태가 발생하고 계엄이 선포됐다. 당시 김종필의 거취 문제가 중요한 사안으로 등장했는데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김종필을 외유 보내야 한다는 주장을 누르고 한때 김종필에게 공화당 당무 전반을 통제하라고 지시했다. 결국 외유를 보내기는 했지만.

공화당 초대 총재였고 1963년, 1967년 전국구 1번이었던 정구영 회고록에 의하면 이때 김종필은 6인 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면서 대통령의 비상대권을 규정하고 있는 프랑스의 드골 헌법을 참고해 대통령에게 비상대권을 주는 헌법 개정을 검토하라고 했다. 제3공화국 헌법을 공포한 지 채 1년 5개월, 민정이 출범한 지 불과 5개월 밖에 안되던 시점에서 나온 이야기다.

박정희는 드골이 가지고 있던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을 갖지 않은 채 비상대권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러면서 3선 개헌에 들어가고 개헌안이 통과되자마자 총통제 문제가 떠올랐다. 1971년 선거에서 이게 중요한 쟁점이 돼, 김대중은 이번이 마지막 선거라고 역설했는데, 선거가 끝난 몇 달 후 비상사태 선언에 이어 1972년 유신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처럼 박정희는 강권 통치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한순간도 벗어난 적이 없다.

'데탕트' 때문에 유신? 뭘 모르는 소리!

프레시안 : 유신 체제가 출현한 이유를 두고 닉슨 당시 미국 정부가 추진한 데탕트와 관련이 있다는 학설이 있다. 하지만 사실 유신의 가장 큰 배경은 결국 박정희의 집권욕이라는 것인가?

서중석 : 유신 체제가 왜 출현했는지를 두고 여러 학설들이 있는데 이것들이 과연 정확하게 당시 상황을 반영한 것인가, 이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9권에서 자세히 살펴봤다.

유신체제 성립과 관련, 당시 미국과 중국이 '데탕트'로 향했고 서독도 이 시기에 동방 정책을 펼쳤기 떄문에 이러한 세계의 움직임이 박정희 정권에 위기 요소로 작용해서 유신 체제를 선택한 것이라는 주장이 많이 나오는데 이건 구체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

휴전협정 체결 이후 북에서 군사적으로 남측을 가장 위협한 시기는 1968년이다. 당시 1.21 사태, 푸에블로호 사건, 울진‧삼척 게릴라 사건 등이 있었다. 그렇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국가비상사태라고 주장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향토 예비군을 창설하고 주민등록증을 발급하는 등 주민 통제를 강화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북의 위협이 남의 정권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박정희 정권을 더 강고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왔다.

1970년대 들어오면 남북 간에 군사적 문제는 벌어지지 않고 데탕트 분위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1970년 8.15에 박정희는 데탕트에 순응하겠다는 뜻을 명확히 표현했다. 이전의 대북정책과 다른 입장이었다. 당시 박정희의 비서실장이었던 김정렴은 그의 회고록에 박정희 대통령이 데탕트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우리 현실에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박정희는 10월 17일 쿠데타를 일으켜 헌정을 파괴했다. 이날 박정희가 특별선언을 발표했는데 우리 운명을 스스로 지키고 개척해 나가지 않을 수 없다면서 전쟁의 재발을 미연에 방지하고 평화로운 조국 통일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27년간의 기나긴 불신과 장벽을 헤치고 이제 하나의 민족으로서 남북 간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즉 쿠데타를 일으킨 이유로 서독과 동유럽과의 해빙, 미·중 해빙 비슷하게 적극적으로 남북관계를 풀어가겠다는 비전을 내세운 것이다. 이건 7.4 남북공동성명에서 나타났던 내용과 유사한데, 박정희는 민족의 염원이 담긴 이 공동성명을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장기 집권의 발판으로 이용하고자 했다.

그 뒤에 나온 수많은 성명이나 선언에서도 박정희는 데탕트 논리에 순응하는 논지를 펴고 있다. 12월 27일 박정희는 체육관 대통령에 취임하는데, 그때 취임사에서도 데탕트로 가야 한다는 것을 각별히 강조했다. 그는 분단의 논리가 지배하는 냉전의 대결 구도에서 벗어나 서로 번영을 추구하는 평화와 조화의 구조로 전환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신 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서지만, 이보다 더 데탕트적인 주장이 어디에 있겠나?

▲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프레시안(최형락)

그런데 유신 체제가 나오게 된 배경보다 왜 유신 체제를 아무도 막지 못했느냐가 더 중요할 수 있다. 박정희가 어떻게 1972년 10월 17일 국가 변란을 일으킬 수가 있었을까? 변란을 일으켜도 그것을 제지할 견제세력이 국내외에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공화당은 박정희‧김종필 두 사람이 독특한 형태로 장악하고 있던 정당이다. 박정희는 3선 개헌 과정에서 김종필계 즉 구주류를 무력하게 한 뒤, 그것에 대신해 등장한 김성곤 등의 4인 체제도 1971년 10월 2일 항명 파동을 통해 제거했다. 그러면서 공화당은 완전히 박정희 친정체제로 갔다. 야당은 강성 의원들에 대한 무자비한 고문과 구속 등을 통해 무력화했다. 군은 윤필용 사건과 하나회를 통해 사병화를 강화했다.

한국에서 독재정권에 가장 무서운 것이 언론과 학생이었다. 언론은 1960년대 중반부터 테러 등의 탄압과 회유 공작 등을 통해 휘어 잡았다. 대학가의 경우 1971년은 최악의 시련기였다. 교련반대 등 학원 병영화 반대 시위, 부정부패 추방 시위에 대해 박정희는 위수령을 내려 대량 제적 사태가 일어났고, 100명이 넘는 학생들을 강제 입영시켰다. 그러면서 학원의 병영화, 나아가 사회의 병영화가 급속하게 진행했다. 

박정희가 일인 독재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장기간에 걸쳐 비판세력을 탄압한 양상은 박정희가 어떤 성격의 독재자인가를 잘 보여준다. 이 부분은 박정희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다.

미국도 이 시기에 과거와 같이 한국에 강력한 통제력이 없었고, 유신 체제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유신 체제를 제재하겠다는 강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프레시안 : 같은 시기 대만은 부분적으로 민주화를 단행했다. 같은 분단국가로서 남한과는 전혀 다른 행보를 보였는데 그 배경은 무엇이라고 보나?

서중석 : 나는 이 부분도 비중을 두어 분석했는데, 1970년대 박정희의 경제 개발 정책이 잘못된 점이 많지만, 특히 대만과 비교해보면 이러한 점이 잘 드러난다. 1960~70년대 세계에서 경제 성장을 가장 많이 한 곳이 대만과 한국이었다. 대만과 한국은 비슷한 시기에 수출 위주 정책을 폈고 같은 시기에 중화학 공업을 강력하게 밀어붙였지만, 그 방식은 달랐다. 그런데 박정희가 유신 체제로 들어갔을 때 지독한 독재국가였던 대만은 다른 정치적 행보를 보였다.

사실 미·중 데탕트에서 가장 큰 위기감을 느낄 수 있었던 나라는 대만이었다. 미국은 상하이 공동성명에서 대만이 아닌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의 유일한 국가로 인정했다. 그러면서 대만과 국교를 끊는 나라가 늘어났다.

또 대만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상임국가, 유엔회원국 등의 지위를 박탈당했고, 유엔 산하기구와 여러 국제기구에서도 축출될 위기에 놓여있었다. 대만이야말로 1970년대 초에 들어가면서 국가 운명이 경각의 위기,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려있었다.

그런데 박정희와 다르게 1972년 대만 행정원장에 취임한 장개석 아들 장경국은 정치를 개혁해서 대만 출신과 화교 대표의 숫자를 늘리고 대만 출신의 정치 엘리트들이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폭을 넓혔다.

1972년 내각을 구성할 때도 행정원 부원장, 내정부장, 교통부장, 대만성 주석, 타이페이 시장 등 중요한 요직에 대만 출신을 임명했다. 사실 이등휘가 총통이 된 것도 장경국이 등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대만은 국가 존폐의 위기를 맞아 독재를 한층 더 강화한 것이 아니라 개혁과 민주화의 길로 가게 된 것이다.

장경국은 1971~72년 데탕트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대만사람 모두의 단결과 국민의 지지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대만에서 능력을 가진 모든 사람이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제대로 된 사회로 대만을 가게 하는 것만이 미중 간 데탕트에서 대만이 살 수 있는 길이라는 점을 간파했다.

그럼 왜 박정희는 대만과 다른 길을 갔는가? 1971년 4월 대통령 선거에서도 민주주의와 정권 교체의 요구가 드러났지만, 그 직후 치러진 5월 총선에서 부산과 대구에서도 압도적으로 야당이 이겼다. 도시 지역은 거의 야당이 휩쓸었다. 이에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균형 국회가 탄생했다. 정부를 감시할 수 있는 3권분립 체제를 명실공히 실현시킨 위대한 선거였다.

이렇게 민심이 분출하자 박정희는 영구집권과 거리가 먼 상황이 펼쳐졌다고 인식했다. 또 1971년에는 대선과 총선에서 분출된 민주화 요구 외에 사법부 파동도 있었고 교수 자율화 선언, 학생운동 등 여러 곳에서 민주화 운동이 거세게 분출하고 있었다. 즉 1971년은 역사적인 기로였다. 민심은 우리가 민주화로 가야 한다고 1971년에 명백하게 보여줬다. 그런데 박정희는 그 민심에 따르려 하지 않았고, 칼을 빼들어 장기 1인 독재 체제로 나아갔다. (3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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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기자 jh1128@pressian.com 구독하기 최근 글 보기
외교부·통일부를 출입하면서 주로 남북관계를 취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