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체육계를 무법천지 정글로 만들었나
누가 체육계를 무법천지 정글로 만들었나
[기고] 대한체육회의 이상한 선거, 이상한 재판
누가 체육계를 무법천지 정글로 만들었나
지난해 10월 5일 대한체육회장 선거가 치러졌다. 엘리트 체육을 관할하던 구(舊) 대한체육회와 생활 체육을 담당하던 국민생활체육회가 통합하여 탄생한, 대한체육회의 첫 수장을 민주적 방식으로 선출하는 매우 의미 깊은 선거였다. 그런데 선거인 명부에 등재된 1405명의 선거인 중 521명의 선거인이 허위 기재되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선거인들과 후보자들은 선거 직후 당연히 이의를 제기했고, 우여곡절 끝에 선거무효 소송 재판이 시작되었다.

재판 시작 전, 원고 측 변호사가 이번 재판이 갖는 의의와 중요성을 이야기하자, 판사는 이렇게 잘라 말했다.

"이 사건은 나에게는 그저 수많은 사건들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나는 이 사건에 어떠한 특별한 의미도 부여하지 않습니다."

이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건 바로 판사가 이 재판이 갖는 시대적 의미에 대해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며, 체육계의 선거판이 어찌 돌아가건 자신은 그런 것 따위에는 애당초 관심조차 없다는 당당한 자기 고백이었던 것이다. 제 스스로 높은 체하며 체육계를 발밑으로 보던 판사의 이러한 태도는 시종 석연찮은 재판과정을 거쳐 마침내 판결로서 드러나 모든 체육인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 제 40대 대한체육회장 선거가 지난해 10월 서울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열렸다. ⓒ연합뉴스


이상한 선거, 괴물 같은 판결

선거인 명부상 105명의 선거인 중 40%에 육박하는 521명의 선거인이 허위 기재되어 있었던 선거. 이 선거에 5명의 후보자가 나섰는데, 1위 득표자의 득표수는 294표였고 2위 득표자와의 득표 수 차이는 불과 81표였다. 법리를 따지기에 앞서 상식적으로 이 선거가 유효하다고 판단할 사람이 5000만 국민 중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이것이 바로 지난해 10월 5일 치러진 대한체육회장 선거의 실체였다. 놀랍게도 법원은 1심에서 1405명의 선거인 중 521명의 선거인이 허위 기재되어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선거가 유효하다고 판결했다. 그런데 법원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선거가 유효하다고 판단한 이유는 하나같이 차마 눈으로 볼 수도, 입으로 소리 내어 읽을 수도 없을 민망한 것들이었다.

1심 법원의 기이한 논리

우선 1심 법원은 "대한체육회 산하 시∙도 체육회 및 종목별 단체가 선거인 후보자 명단을 추천해서 대한체육회에 올렸던 것인데, 당초 이 선거인 후보자 추천명단 자체에 허위 기재가 있어서 대한체육회가 작성한 선거인 명부에 허위기재가 있게 된 것이므로, 이는 대한체육회가 책임질 일이 아니다"고 했다. 더 나아가 "대한체육회는 허위 기재된 선거인 명부를 반드시 수정해야 할 의무가 없으며, 선거준비 기간이 12일밖에 안 되었으므로 이 짧은 기간 동안 대한체육회가 선거인 명부의 오류를 일일이 찾아내어 수정할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고도 했다.

1심 법원은 원고가 증거자료로 제출한 대한체육회 정관과 선거관리규정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아니, 설사 읽어보지 않았다 해도 도저히 위와 같은 판결을 내릴 수는 없다. 위 선거의 주체는 '대한체육회'였고, 바로 대한체육회의 수장인 '대한체육회장'을 뽑는 선거였다. 그리고 시∙도체육회와 종목별 단체는 대한체육회의 관리∙감독을 받는 단체이다. 따라서 선거인 명부의 오류가 시∙도체육회와 종목별 단체가 올린 선거인 후보자 추천명단의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더라도, 대한체육회는 당연히 선거인 명부의 오류를 바로잡을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이는 대한체육회 선거관리규정에도 명시되어 있는 내용이다.

1심 법원의 궤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심 법원은 "선거인 명부는 선거인을 미리 확정하기 위한 것일 뿐, 선거운동을 위해 작성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것인가? 1심 법원은 선거인 명부는 선거인을 미리 확정하기 위한 것이니 엉터리로 작성되어도 좋다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 더 놀라운 것은 "모든 후보자가 같은 조건에서 싸웠으니 특별히 불합리할 것이 없다"고 한 것이다. 판사가 한 말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1심 법원은 이런저런 법률 용어를 주워 모아 기이한 결론을 끌어냈다(어쩌면 정해진 결론을 내놓기 위해 처음부터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앞장서서 법치를 말살하는 사법부

더 큰 문제는 지금부터이다. 이번 법원의 판결로 인해, 향후 대한체육회 산하 시∙도 체육회 및 종목별 단체에서 벌어질 어떠한 종류의 불법∙부정선거를 막을 명분도, 근거도 사라져 버렸다. 이미 얼마 전 대한봅슬레이스켈레톤연맹 회장 선거에서 유사한 사건이 일어났다. 사회 곳곳에 법치를 심어 나아가야 할 사법부가, 체육계에 조금이나마 존재하던 질서와 정의를 앞장서서 말살시키고 있다.

지금까지 이러한 방식으로 권세를 가진 자들은 체육계를 무법천지 정글로 만들어 놓고, 체육인들을 각종 행사를 장식하는 화환으로, 병풍으로 활용해 왔다. 지금이라도 체육인들이 스스로 깨닫고 일어나 이 폐습을 통렬히 타파할 수 있다면 다행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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