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거부할 권리는 없다
생명을 거부할 권리는 없다
[문학의 현장] 까치
2017.11.10 09:20:26
생명을 거부할 권리는 없다
까치

나는 어려서 까치를 좋아하기도 했고 뭣도 모르고 돌멩이를 던져 용케 맞히기도 했다 

집 앞 길옆에 굳은 손바닥 같은 배과수원이 있다 덜 풀린 노을을 두 팔로 휘저으며 까치를 쫓아내고 있는 아저씨의 목소리가 서글프다 그의 큰아들은 오십이 넘었는데 젊을 때에 교통사고로 식물이 되었고 아주머니는 중풍을 앓고 있다

둘째 아들이 얼마 전에 약을 사러 무면허 운전을 하다가 단속에 걸려 소처럼 글썽이며 나를 찾아왔다 나는 급한 원고를 미뤄두고 탄원서를 써서 마을에 돌렸다

까치는 콩도 파먹고 팥도 파먹고 큰아들의 약값도 다 파먹는다 부리가 아니라 호미 같다 내가 심은 땅콩은 싹이 세 개 밖에 나오지 못했다 간혹 날아드는 까마귀들은 숫자도 많고 몸집이 더 큰데도 까치들을 당해내지 못하고 매번 도망을 친다

처음 이사 왔을 때는 황금빛 푸른 깃털에서 장밋빛으로 물들어가는 긴 꽁지를 까불며 집 앞 소나무에 집을 짓는 노을까치를 보고 황홀함에 마음이 저렸는데 지금은 또 저리도록 밉다

<시작 노트>

아직도 촛불집회 때 있었던 분신과 투신 사건이 나를 무겁게 한다. 대통령 탄핵을 촉구하며 광장에서 분신했던 한 스님과 그것을 반대하며 태극기를 두른 채 아파트에서 투신했던 한 어버이. 그 둘 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목숨을 버렸을 것이다. 선악을 떠나, 그 신념이란 것이 얼마나 투철하고 소중하면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게 하는 것인가. 생명이란 것이 어디에서 어떻게 왔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식물인간이 된 배과수원 아저씨의 아들은 자신의 생명 연장을 스스로의 의지로는 거부할 수 없게 되었다. 가족들을 수십 년 동안 힘들게 하고 있지만 어쩔 수가 없다. 그런데 그에게 의식이 남아 있다면 자신의 생명 연장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그에게 있는 것일까. 그의 생명의 주인은 무엇인가. 

누구나 한번쯤 생명에 대한 생각을 해보겠지만, 나는 요즘 아주 단순하면서도 진지한 상상을 하고 있다. 진화생물학적인 관점에서건 창조설 혹은 조화론의 관점에서건 나는 나의 생명을 거부할 권리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유전자 속에는 불가항력적인 생명유지명령이 내재되어 있는 것 같다. 

웃으면서, 죽지 못해 산다는 배과수원 아저씨의 말을 들으면 서글프다.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그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큰아들은 수십 년 동안 식물인간이고 아내는 중풍에 걸려 움직이지도 못하고, 어눌한 둘째 아들에게 소리나 지르면서 살아가는 그에게 무슨 낙이 있을까.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한다. 그는 죽을 수도 없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 하다니. 자식이 식물인간이고 아내가 중풍이며 미래가 죽었어도 살아가야 하다니. 바다 속에 수장되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어린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야 하다니. 사악한 자본의 논리를 뒤집어 쓴 살균제로 인한 천추의 원통함 속에서도 살아가야 하다니. 국정농단의 패악질에도 살아가야 하다니. 핵무기를 운운하고, 전쟁 불사를 외치는 악마의 하수인들과 이 세상을 같이 살아가야 하다니.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 하다니.

이런 측면에서라면 삶은 얼마나 처절하고 서러운 것인가. 얼마나 초라하면서도 또 얼마나 화가 치밀어 오르는 일인가. 그러나,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위해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나의 생명을 살피면서 또한 다른 이들의 생명을 보듬어주는 일, 그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선택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분신이든 투신이든, 또 그것들을 추동하는 신념이나 확신 등이 생명을 근거로 생겨난 것인지 정밀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생명을 살리는 일에는 동참하고 생명을 죽이는 일에는 저항하는 행동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야 한다. 지금 한창 이루어지고 있는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도 신속하면서도 제대로, 정말 제대로 잘 이루어져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모든 생각이나 행위들이 생명의 편이냐 아니냐로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몸과 마음이 ‘나’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같이 큰 소리로 웃어주고 남몰래 눈물도 흘리면서 살아갈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손바닥만한 자갈밭 배과수원으로 병든 식구들과 간신히 살아가고 있는 노인을 떠올리면 보편복지의 실현이라는 것이 한없이 기다려진다. 한편으로, 까치들을 보면 자꾸 미워진다. 그들도 자신들의 생명을 위해 배를 쪼아 먹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미워지는 것이 어쩔 수가 없다. 오늘 저녁에는 맛있는 죽이라도 싸들고 배과수원 아저씨네 환자들을 문병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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