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에 유난히 자주 들은 이야기들
설날에 유난히 자주 들은 이야기들
[김형찬의 동네 한의학] 이제 오늘을 직시할 때
해가 갈수록 조금씩 무뎌지긴 하지만, 설이 되면 더는 미룰 수 없이 나이를 한 살 더 먹었다는 자각과 함께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특히 올해는 명절에 일어난 일들로 인해 좀 더 길게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본가에 내려가서 유난히 자주 들은 이야기들은 "욕심내지 말고 편하게 살아라. 억지를 부리면 꼭 사단이 나더라",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아끼지 말고 먹으면서 살아라", "살아보니 인생이 참 별거 없더라. 너무 아등바등 하지 말고 너희 자신을 소중히 여기면서 살아라"는 얘기들이었습니다. 

어쩌면 해마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는데 마음에 울림이 없었거나, 나이 드신 어른들이 늘 하시는 이야기 정도로 여겨서 쉽게 잊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젊은 치기로 그런 일신의 안위 말고도 뭔가 더 중요한 것에 시간과 힘을 쏟아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올 해는 그 말씀들이 가볍게 들리지가 않아, 내심 제 나이를 다시 한 번 실감했지요.  

가족들이 모두 모여 세배를 하고 명절마다 찾아뵙는 마을 어른께 갔습니다. 연초에는 차와 함께 글귀를 주시는데, 올해는 유심청정(唯心淸淨)이었습니다. 지난해에는 심외무법(心外無法)이었지요. 글을 설명하고 덕담 말미에 "족함을 알면 늘 즐겁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환자들께 조금만 마음을 내려놓으라고 하던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동시에 "그게 되면 벌써 제가 도통했지요"라고 말하며 웃으시던 분도 생각났습니다. 내 것이 분명한데 참으로 어찌 못하는 것이 마음이구나! 싶었습니다.

이런 저런 상념들을 되새기며 지내던 중에, 집안 어른의 부고가 전해졌습니다. 최근까지도 건강하셨던 분의 갑작스런 소식에 황망하기가 이를 데 없었습니다. 조문을 마치고 무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면서 '올해는 참 많은 질문과 함께 시작한다' 싶었습니다. 이와 함께 이런 의문들에 의혹됨 없는 스스로의 답을 얻는 것이 지금 내 시간의 숙제일 수 있겠단 생각도 들었습니다. 

조금은 심란한 와중에 한 편의 영화와 한 권의 책을 만났습니다. 짐 자무시 감독의 <패터슨>과 가즈오 이시구로 감독의 <남아 있는 나날>입니다. 두 작품의 주인공은 패터슨과 스티븐스입니다. 한 사람은 뉴저지 주 패터슨시의 버스기사이고 다른 한 사람은 과거의 영광을 잃어가고 있는 영국 달링턴 홀의 집사로, 둘의 시대와 겉모습은 확연히 다릅니다. 하지만 약간의 변주와 함께 무심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무한히 반복되는 것 같은 삶의 속내는 서로, 그리고 우리와도 비슷하지요. 

얼핏 단조롭기 이를 데 없는 이 두 사람의 삶에 숨을 불어 넣는 것이 있다면, 패터슨에게는 시이고 스티븐슨에게는 젊은 날 사랑했으나 떠나보낸 켄턴을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 두 사람의 마지막 보루는 산산조각 나 버립니다. 시를 적어 놓은 노트는 개에 의해 갈가리 찢겨 버리고, 젊은 날의 사랑은 이제 자신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함을 깨닫게 되지요. 우리가 '이게 나야'라고 내심 믿고 있는 것들이 실상은 착각이었거나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듯 말이죠.

하지만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 모든 것이 무너진 그 때 삶은 다시 시작됩니다. 패터슨은 그 지역 출신의 유명한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흔적을 찾아온 일본인과의 만남을 통해, 스티븐슨은 마지막 여정으로 들른 바닷가에서 만난 한 노인을 통해 삶의 수레바퀴가 다시 돌기 시작함을 확인합니다. 같은 색 같지만 조금은 다른 궤도로 말이지요.  

시간은 쉼 없이 흐르고 우리의 현재에는 과거의 잔상과 미래의 불안이 동시에 투영되어 있습니다. 지금을 살려 하지만 젊을 때는 미래의 불확실함에, 나이 들어서는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히기 쉽지요. 게다가 시간의 강물을 조금 멀리 떨어져 바라보면 인간 종의 일원으로서 개인의 삶은 참으로 허무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삶은 선택의 여지없이 지속됩니다. 패터슨의 시처럼 자신의 삶을 규정할 만한 그 무엇이 없다면, 기억과 불안에 사로잡힌 채 우리는 타인에 의해 규정된 삶의 궤적을 따라가며 살 수밖에 없을 겁니다. 

설도 지나 이제 더는 물러설 수 없는 새로운 한 해의 시작입니다. 1월 1일로부터는 이미 한참 달려왔고요. 참으로 답도 없고 말장난 같은 얘기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지?"란 질문을 민낯의 자신에게 던져 보고, 사색하는 시간을 가져 보면 어떨까 합니다.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나 품이 넉넉한 어른과 이야기를 나눠 보는 것도 좋고요. 만일 과거와 미래로부터 현재의 나를 살짝 드러내 조금이라도 더 명료하게 지금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면, 새로 맞이하는 봄은 분명 달라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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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소개
생각과 삶이 바뀌면 건강도 변화한다는 신념으로 진료실을 찾아온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텃밭 속에 숨은 약초>, <내 몸과 친해지는 생활 한의학>, <50 60 70 한의학> 등의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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