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주인인가, 노예인가?
나는 주인인가, 노예인가?
[박물관의 '주름'] 홍대용 2017 경계없는 사유 -실학박물관 특별기획전-
# '주름'의 의미는 메를로 퐁티의 '존재 속에 파묻혀 보이지 않는 움푹한 곳', 즉 이면을 말함. 여기서 표현한 '주름'의 의미는 드러난 전시 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박물관의 전반적인 경영과 사회적 책임 이행을 보려는 것으로 그 의미를 담고자 한다. 박물관은 넓은 의미로 미술관과 과학관, 기념관과 유적지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전시를 소개하는 글은 많다. 그러나 그 의미를 통해 인격적 성장을 생각하는 글은 만나기 어렵다. 전시를 보는 행위는 본질을 놓치지 않기 위한 걸음이다. 왜 사는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 보기 위함이다. 

이 글은 전시비평이라 하나 교육비평에 가깝다. 전시를 교육의 시선으로 보려한다. 마음을 기울이지 않으면 어느 샌가 손가락 사이로 '의미들'이 바람처럼 사라지고 없다. 그걸 붙잡고 싶어 기록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독자들과 마음이 통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고민의 시작, "배불리 먹을 수 있다면" 

연일 봇물 터지듯 뉴스를 장식하는 #Me too운동이 병원 내 태움으로 번지면서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의 고백도 엿보인다. 말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말하기 시작한 이 변화,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적어도 사람들이 이제는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말할 수 있다는 자유는 어디서, 누가, 왜, 어떻게 만들어낸 것일까. 

▲단촐한 옷매무새와 겸손이 가득한 홍대용 초상. ⓒ실학박물관


실학의 본래적 의미는 자유와 평등, 민주의 가치가 아니었을까. 실학자들은 좀 더 배운 사람들이 애써서 돕는 사회를 위해 노력했던 것 아닐까. 실학의 가치는 오늘날 무엇일까. 경계 없는 사유는 도발을 포함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로막지 않는, 경계 지을 수 없는 높고 넓은 사유는 왜 이제야 우리 사회에서 회자되는 것일까. 누군가를 지배하고 누군가를 조롱했던 그 시선이 왜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는 걸까. 

1987, 그 이전 1980, 사람이 죽어 나자빠지던 그때는 왜 그런 용기가 없었을까. 이제야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아마 이제야 들어주는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 아닐까. 그간 그들이 정말 말하지 않았을까. 분명 말했을 것이다. 그것이 어떤 형태든. 그런 그들의 말이 우리 사회의 문제로 등장하지 않았던 것은 그것을 문제로 보지 않았던 대다수의 방조자, 방관자, 동조자들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가 이제야 질문을 갖기 시작했다. 무조건이 아니라 조건을 따지기 시작했다. 그 조건은 무엇인가. 우리는 왜 그런 삶에서 주인이 되지 못했는가를 묻는 것이다. 

붉은 선비, 홍대용의 정신 
 
어떤 사회가 건강할까.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다수인 사회. 단적으로 말하면 이런 사회일 것이다. 그러나 정책이나 제도, 문화로 그 성취를 이루기는 쉽지 않다. 어떤 사회가 성장할 수 있는가. 무엇이 있어야 성장하는 사회가 가능할까. 실학은 문제에 몰입하여 새로운 세계로 전이하기 위한 외침이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알 듯, 실학의 반대편에 서 있는 유학의 공고함은 결국 실학을 무릎 꿇게 한 것 아닐까. 

실학의 실천자 홍대용을 다시 만난다는 것은 그가 이루려했던 가치를 되새김함이다. 그의 안타까움을 이어받아 새롭게 하고 깁기 위한 노력이다. '실사구시 경세치용'의 대명사가 된 실학박물관에서 나는 과거의 홍대용이 아니라 오늘의 홍대용이 무엇을 했는가를 보고자 했다. 봄은 가까이 강바람을 타고 오르고 있었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정초, 실학박물관은 겨울을 벗고 봄을 채비하고 있었다. 

▲홍대용의 전시장 입구는 온통 붉은 색이다. ⓒ실학박물관


나는 전시장 입구 붉은 벽에 압도되었다. 붉은 색은 뚝뚝 묻어 나올듯했다. 생경한 그 빛깔은 실학을 대변했다. 홍대용을 온전히 그 빛깔에 담고자 했다. 선명한 봉숭아 핏빛이 입구를 장악한 박물관으로 빨려 들어간 나는 그 골목길에서 새로운 단어들과 만났다. 

"덕을 검소하게 함에도 도가 있으니, 이름을 구하지 않을 뿐이다." 

붉은 색은 마음속에 또 다른 경계로, 두려움의 아이콘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레드 콤플렉스'가 떠올랐다. 왜 다른 색을 고려하지 않고 현대사를 지배한 트라우마의 원천 붉은 색을 초입에 놓았을까. 

<홍대용 2017 경계 없는 사유>는 홍대용을 재해석한 전시로, 역사와 사진, 설치미술에 이르는 융합전이다. 전시제목에서 알 수 있듯 홍대용의 삶을 사유의 방식으로 하는 전시였다. 무엇이 사유인가. 우리는 무엇을 사유해야 하는가. 사유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사유의 목적은 무엇인가. 사유되지 못한 결과는 무엇인가. 사유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는 어떤 빛깔이 될까. 

스스로 결정한다는 것 

전시는 새로운 것을 만드는 작업이라기보다,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해석의 새로움은 곧 삶의 새로운 방식이다. 해석이 새롭다는 것은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이다. 홍대용은 세상을 어떻게 보았을까. 그가 살았던 세상에서 경계는 무엇이었을까. 홍대용을 오늘날 우리가 다시 보아야 하는 그 이유는 무엇일까. 홍대용의 삶을 우리는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 걸까. 

홍대용의 작업은 문제를 새롭게 드러내어 실험하는 과정이었다. 그의 작업은 실증의 방식을 따랐다. 홍대용이 꿈꾸는 세상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 여기에서의 새로움이었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정신이고 그가 행하려는 것은 방법이었다. 이 세계가 바뀌고 있음을 증명하고 그것을 설계했던 사람 홍대용. 

▲김형중의 작품. '인간을 포함한 모든 객체가 독립적으로 상호 연결되어 스스로 결정하고 소통하는 수평 생태계를 표현한 작품.' ⓒ실학박물관


 2016년 겨울과 2017년 봄. 우리는 시대의 홍역을 치렀다. 대통령이 탄핵되었고, 촛불을 들지 않은 사람이 없을 만큼 우리는 격동의 시간을 보냈다. 촛불을 들고 광장에 섰던 그 많은 사람들. 그들의 마음속에 홍대용이 있었다. '이게 나라냐?'는 물음 속에 '나는 무엇인가?'도 있었을 것이다. 주권자 국민이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를 묻는 순간, 우리는 홍대용의 정신을, 홍대용의 사고를 녹여냈다. 무엇이 우리에게 필요한가. 무엇이 지금의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무엇이 우리의 미래를 밝혀갈 것인가.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그런 질문들이 꼬리를 물면서 질문은 질문 속에서 거듭난다. 홍대용의 사유는 질문의 연속이다.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공동체를 재구성하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왜 이 나라의 주인인가

주인과 객은 어떻게 다른까. 주인은 어떤 고통도 능히 참고 견뎌야 한다. 주인은 떠날 수도 없고 떠나지도 못한다. 삶의 터전이 그곳에 있으니까. 그러나 객은 그렇지 않다. 떠나면 될 테니까. 

우리의 정신은 우리가 왜 이 나라의 주인인가를 묻는다. 왜 이 나라의 주인이어야 하는가. 아마 홍대용도 그런 시민이었을 것이다. 가난과 굶주림이 일상이 되어버린 백성의 편이 되어 한 떼기 땅을 물려주는 아비가, 민중의 앞잡이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홍대용을 해석한 작가들은 박제성, 김형중, 김기철, 이상현만이 아니다. 국민대학교 영상디자인학과의 김현지, 유도원, 유재동, 이민우도 함께 했다. 개인의 삶을 예술매체로 재결합한 전시는 디지털 시대의 신선한 소통방식이었다. 전시는 낯선 형식으로 홍대용을 해석했다. 그의 삶을 예술작품으로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가 고민한 그 시대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그가 추구한 실학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그 실학은 왜 失學이 되었을까. 그것은 實學일 수 없었던 것일까. 변화는 고통을 수반한다. 크든 작든. 변화가 필요할 때는 안과 밖에서 긴장이 일어난다. 변화를 일렁이게끔 하는 물결은 멀리서도 오지만, 가까이에서도 온다. 감지한다는 것, 그것이 부족했던 시기의 조선. 변화가 무엇인지, 어떻게 우리 삶에 도전해 올지 알 수 없을 때 변화를 두려워한다. 변화를 따라서 이해되었을 때 비로소 새로운 동력을 얻게 될 것이다. 

250년간의 통찰 <조선문답> - 이상현 - 

우리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 이상현은 홍대용의 <의산문답>을 재구성하여 <조선문답>을 만들었다. 이 작품은 '한국인, 당신들은 누구인가'를 묻는 것처럼 보였다. 무엇이 한국인의 정체성인가. 역사의식은 왜 우리에게 필요할까. 그 역사의식은 과거와 현재, 작가와 관람자의 시각이 반영된 통찰의 세계로 보인다. 

"태극기를 들고 있는 노병들이 있다. 그들이 지킨 나라... 이 나라는 내 청춘의 피땀으로 만들어졌다." 

이상현의 작품 속 내레이션은 이렇게 그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그들의 삶에서 목숨을 바치는 일들은 빈번하게 일어났다. 국가는 때론 폭력으로 백성을 다스리기 좋아했다. 국가의 이런 빗나간 권력사용은 백성이 지배당하는 사회를 구축했다. 

▲이상현의 <조선문답>중 일부. ⓒ실학박물관


"4.19는 무너지고 5.16으로 다시 태어나는" 와중에도 우리는 4.19는 옳고 5.16는 그르다는 방식으로 역사를 정리하고 있다. 혹은 4.19는 5.16에 당했다는 소리도 한다. 5.16이 현대사를 지배하면서 국민은 그들의 놀이갯감이 되는 숱한 역경을 견뎌냈다. 그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확장하고 내면을 다졌을까. <조선문답>에서 이상현은 그가 인식한 문제에서 출발한다. 그의 행위는 보다 거리를 두고, 보다 의미를 함축해 냈다. 그의 내레이션은 "나라를 망친 권력의 총알"로 군부독재를 조롱했다. 우리가 그 시대를 어떻게 살아냈는지, 그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우리가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규로 느껴지기도 했다. 무엇이 안 되고 무엇이 가능한지, 그 세계는 왜 이리 늦게 도착하여 우리를 위험에 빠뜨렸는지를 이제야 말하고 있다. 

"원수보다 먼저 죽지 말라는 스승의 말씀"

이상현의 작품 속 메시지는 단 하나로 정리되었다. '원수보다 먼저 죽지 말라'는 숙제. 그들에게 원수는 누구인가. 그 원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원수보다 먼저 죽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내야 할까. 이런 질문들은 다소는 강요되고 다소는 자발적인 것들로 변형되면서 그 사회의 관습으로 정착될 것이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실학처럼,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노력일 것이다. 우리가 생각한다는 것은 진실을 찾고 진실을 지켜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는 통찰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 사회가 과거를 통찰하려면 무엇이 전제되어야 할까. 작품을 보는 시각이다. 작품에 담겨야할 홍대용의 모습이다. 작품이 나와 어떤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런 숱한 내용은 우리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를 공유하자는 의미다. 무엇이 우리에게 교훈이 되고 사표가 될까. 건강하게 살아가야 하는 메시지는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이 될까. 

한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60억 원을 받는다 

재벌의 아들들은 불법을 자행하고 불법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가진 재력 때문일 것이다. 가난한 아버지를 만나 가난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집의 아이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최선의 노력을 다하면 이루리라는 말을 듣지만, 진실은 금방 들통나고 만다. 무엇이 우리에게 필요할까. 재벌기업을 향한 의탁 프레임이다. 

재벌을 묵과하는 현상들은 우리 사회의 성장을 발목 잡는다. 우리 사회는 왜 이런 도둑들을 그대로 놔두고 있는가. 아들은 그저 아버지를 잘 만나 사장이 되고 재벌이 되는 이상한 상속은 우리 사회를 속속들이 재벌 사회로 만드는 데 조력한다. 그 누구도 원치 않았을 것이지만, 버젓이 이런 사회는 만들어졌다. 우리는 이 재벌 사회가 먹여 살리는 노동자를 위해 참아야 한다고 하고, 그 회사에 취직했다고 축하하고 축하 받는 이상한 일을 반복한다. 이상한 일은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 되고, 우리 모두는 그들의 그런 노력에 찬사를 보낸다. 세금을 안 낸 그 지혜를 부러워하면서. 60억 원을 받는 아들은 법을 초월한 존재다. 작가 이상현은 이런 '공화국 삼성'을 이야기한다. 그들은 이미 국가를 지배하고 있다고. 

우리가 해야 할 마지막 질문은 무엇이어야 할까. '나는 주인인가? 노예인가?'일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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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소개
교육학박사. 성공회대 연구교수. 박물관의 전문직인 정학예사. 박물관교육의 새로운 교육콘텐츠를 개발하는 기관 <새롭게보는박물관학교> 대표. 박물관은 일반대중들에게 아직은 낯선 곳이다. 박물관에서 성찰하고 존재의 의미를 찾는 방법을 안내하는데 마음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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