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성노동자의 7년
어느 여성노동자의 7년
[기고] '먹튀' 원조 하이디스 싸움에 '국가는 없었다'
2월의 마지막 날. 경기도 이천 하이디스 공장에 들어갔다. 3년 동안 그토록 가고 싶었던 공장은 공사가 진행되면서 폐허가 되어 있었다. 전기도 끊어져 어두운 노동조합 사무실을 바라보다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들어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것저것 챙길 것은 챙기고 버릴 것은 버려두고 왔다. 정말 금방이었다. 마음도 좀 버려두고 오면 좋았으련만 그러질 못해 아팠다. 지회사무실에 놓여있던 배재형 열사의 영정을 챙겨 나왔다. 

"이렇게 데리러 와서 죄송해요." 

자꾸만 나오는 눈물을 삼키고 삼켰다.

오후부터 비가 많이 내렸다. 그 비를 맞으며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을 만나기 위해 평택공장으로 향했다. '모두'라는 글자 앞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있었다. 우리는 비록 공장으로 돌아가지 못했지만 쌍용차 해고자들은 꼭 공장으로, 공장으로 돌아가길 빌었다. 10년 전 상하이기차로부터 먹튀와 정리해고를 당했던 쌍용차가 다시 마힌드라로부터 먹튀를 당하지 않길 기도했다. 

2011년 2월 21일 하이디스에 입사해, 2015년 4월 1일 정리해고 당해 3년을 싸웠고, 공교롭게도 2018년 2월 21일 하이디스 투쟁보고대회를 끝으로 긴 싸움이 끝났다. 7년을 되돌아본다.  

입사일이 퇴사일이 되어버린 2월 21일

2011년, 스물 두 살 때였다. 대학을 다니다가 집안 사정으로 휴학을 하고 들어간 공장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했다.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서 6개월을 버티다 결국 그만뒀다. 우연히 하이디스 입사 공고를 보게 되어 지원서를 냈다. 하이디스는 1989년 출범한 현대전자의 LCD 사업부문에 뿌리를 둔 회사였다. 

사실 처음에 하이디스에 입사했을 땐 6개월만 일하고 돈을 모아서 다시 학교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집안사정은 계속해서 안 좋았다. 내가 대출을 받고 집에 자동차를 사드리게 되면서 학교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집안에 보탬이 될 수 있어서 괜찮았다. 

금속노조 하이디스지회 대의원을 맡게 되었고, 자연스레 노동조합 활동을 하게 되었다. 나름대로 일도 열심히 하고 노조활동도 적극적으로 했다. 쉬는 날에 가족들과 여행을 가기도 하고, 친구들도 만나면서 평범한 나날을 보냈다. 

2013년, 생산물량이 줄기 시작하더니 순환휴직에 들어갔다. 그리고 희망퇴직이 공고되었다. 관리자들이 사람들을 모아놓고 얘기했다. 

"희망퇴직 받지 않고 남아 있어도 너희가 할 일은 없다. 지금 나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줄줄이 희망퇴직서를 냈다. 하지만 희망퇴직이 마무리되자마자, 생산물량은 거짓말처럼 돌아왔다. 인원은 반으로 줄었는데 물량은 더 많아졌고, 더 많은 일을 해야 했다. 관리자들은 이제 회사를 살려야하지 않겠냐며, 힘들더라도 참고 일해 달라고 했다. 

가족들까지 불러 모아놓고 회사의 미래를 얘기했다. 회사를 살리겠다고 했다. 신입사원 채용까지 했다. 2014년 신입사원으로 친동생이 하이디스에 입사했다. 동생과 함께 시간도 많이 보내며 열심히 일했다. 
 
행복했던 회사 생활

2015년 1월 7일 회사는 멀쩡히 돌아가던 공장을 폐쇄 통보했다. 그리고 3월 31일부로 정리해고가 통보되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멀쩡히 일하고 있었는데 공장폐쇄라니, 열심히 일했을 뿐인데 정리해고라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중국 상하이기차가 쌍용차를 먹튀했던 것처럼, 2007년 하이디스를 인수한 대만 이잉크가 기술을 빼먹고 '먹튀'를 한 것이었다. 억울했다. 그래서 남아서 투쟁하기로 결심했다. 

하이디스는 1989년 출범한 현대전자(현 하이닉스)에 뿌리를 둔 국내 LCD 원조 기업이었다. 성장을 거듭하 중 외환위기를 맞았고, 김대중 정부의 빅딜 정책으로 2002년 말 LCD를 만들어본 적도 없는 중국 비오이에 매각됐다. 기술을 다 빼먹은 비오이는 중국현지 설비가 완공되자 2006년 하이디스를 부도처리하고 철수했다. 2017년 현재 중국 비오이는 LG디스플레이를 제치고 세계 최대 LED 패널 제조사가 됐다. 하이디스는 먹튀의 원조였다. 

동생은 부모님 집 문제로 대출받은 것이 있어서 희망퇴직금을 받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동생이 있어서 나는 그래도 한시름 놓고 투쟁을 시작 할 수 있었다.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정리해고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가 금방 이길 거라 믿었다. 싸움이 금방 끝날 줄 알았다.
 
2015년 5월 11일. 배재형 열사의 죽음으로 열사투쟁이 시작되었다. 하루하루가 끔찍했다. 왜 사람이 죽어야했는지도 모르겠는데, 사람이 죽었는데도 아무도 나서지 않는 현실이 너무나 끔찍했다. 이잉크 회사를 만나기 위해 열사부인과 함께 대만으로 떠난 3차 원정단이 무자비하게 불법연행 강제 추방되었다. 

나는 절대 원정투쟁만은 안 된다는 부모님을 설득해서 4차 원정을 떠났다. 숨 막히는 더위 속에서, 폭우 속에서 우리를 도와주는 대만 연대동지들과 함께 투쟁했다. 대만사회에 여기저기 하이디스투쟁을 알리기 위해 찾아다녔다. 땀에 젖은 선전물을 돌리고, 데일 듯한 햇빛아래 피켓팅을 했다. 얼음물을 아무리 마셔도 갈증은 가시질 않았다. 일정이 끝나고 숙소에 돌아오면 어지럼증과 피곤에 시달렸다. 

하지만 다음날이면 새벽에 일어나 이곳저곳 사람이 많은 곳에 가서 무작정 플래시몹을 하고 구호를 외쳤다. 외국이라 좋은 점은 길거리에서 율동을 아무리 춰도 아는 사람을 마주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정말 수십 번의 플래시몹을 했다. 그렇게 대만에서의 투쟁과 한국에서의 투쟁으로 열사투쟁은 끝이 났다. 하지만 하이디스 정리해고문제는 해결되지 못했다.

원정투쟁에서 돌아와서는 대만영사관이 있는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노숙농성을 이어갔다. 대만에서 더위를 다 타고 왔다고 생각했지만 2015년 한국의 여름도 가혹했다. 절절 끓는 아스팔트 위에서 피켓팅을 하고,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선전물을 돌렸다. 선전물을 돌리는 것보다 나를 짜증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그 눈빛들이 더 힘들었다. '내가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건가' 자존감이 땅으로 떨어졌다. 

대만 이잉크 자본의 먹튀

더위를 간신히 버텨냈더니, 어느새 추위가 찾아왔다. 겨울의 광화문은 너무나 추웠다. 저주받은 땅이었다. 천막도 칠 수 없는 곳이라 비닐 한 장 치고 하루 종일 추위에 떨어야했다. 더위는 더위대로 추위는 추위대로 서러웠다. 3차원정단이 떠났을 때부터 시작된 동화면세점 앞 농성은 524일간 이어졌다. 우리의 투쟁도 그만큼 길어졌다. 

투쟁이 길어질수록 투쟁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것들이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일하는 친구들은 약속을 잡을 때마다 해고자인 내 꽉 찬 일정에 놀랐다. 분기에 한번 만날까 말까였다. 처음에 투쟁을 지지해줬던 가족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힘들어했다. 투쟁한지 1년이 넘었을 때 당시 남자친구의 집에서 결혼얘기가 나왔다. 

상견례까지 치루고 결혼식 날짜를 잡는 와중에 문제가 생겼다. 나는 곧 있을 민사 1심 결과까지 보고 생계로 나가겠다고 했다. 물론, 투쟁은 계속 이어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남자친구네 집에는 아예 투쟁에서 빠져야 한다고 했다. 생각의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며칠 뒤 내가 투쟁하는 게 생각하면 할수록 싫으시다는 말과 함께 이별통보를 받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싫다"는 그 말이 한동안 날 꿈에서까지 아프게 했다. 

그 와중에 내가 대만에서 신발던지기를 해서 형사고발 된 사건의 1심판결이 났다. 항소했는데도 불구하고 본가로 벌금납부서가 날아갔다. 200만 원짜리 벌금고지서였다. 집에서는 혼비백산해서 전화가 왔다. 엎친데 덮친 격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아무생각도 나지 않았다. 

내가 다시 투쟁을 하러 돌아올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집으로 갔다. 부모님은 내 상처가 아파서, 나는 부모님의 상처가 아파서 많이 울었다. 나에게 닥친 현실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렇게 투쟁에서 빠질 수는 없었다. 한 달 동안 나를 추스르고 다시 투쟁으로 돌아왔다. 그 뒤로 집에서는 투쟁을 더 반대할 수밖에 없었고, 나는 불편해서 집에 잘 가지 않았다.

눈물로 보냈던 시간들

투쟁은 투쟁대로 힘들어졌다. 사측이 장비반출을 하기 시작했다. SK하이닉스 단지 내에 공장이 있어서 우리가 대응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입구에서 피켓팅을 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투쟁사업장 공동투쟁위원회 동지들과 함께 5차 원정을 떠났다. 교섭이 열렸지만 장비반출은 계속 되었다. 곧 교섭도 결렬되었다. 그렇게 장비가 빠져나갔다. 우리가 돌아갈 공장이 허무하게 사라졌다. 투쟁사업장 공투위 동지들과 함께 시국농성에 돌입해서 정부청사와 광화문 앞에서 200여일 있었다.

2017년 6월,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투쟁을 시작했다. 어느 때보다 뜨거운 여름을 보냈다. 16년 여름에 판결났어야 할 해고무효소송 민사 1심이 드디어 판결되었다. 우리가 이겼다. 법정에서 판결을 듣는 순간 투쟁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이겼으니 달라질 거라는 일말의 희망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100여 곳이 넘는 국회의원 실을 찾아다니고, 매일 아침 점심 피켓팅을 하고, 집회를 했다. 모기와의 사투를 벌여가며 노숙농성을 이어갔다. 

행진을 하고 삼보일배를 했다. 삼보일배 하던 날 비가 내렸다. 비에 잔뜩 젖은 채로 한걸음씩 내딛고, 세걸음에 한 번씩 바닥에 절을 하며 괜히 흐르는 눈물을 참느라 힘들었다. 왜 그렇게 눈물이 났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눈물겹도록 뜨겁게 여름을 보냈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다시 쓰러진 마음을 일으켜 세웠다. 하늘이 높고 유난히 파랬던 가을날, 청와대에 네 번째 농성장을 차렸다. 투쟁하기 전엔 그렇게 좋았던 겨울이, 투쟁을 시작하고는 너무 싫었다. 더위보다 추위가 더 아팠다. 그나마 쳐놓은 비닐 한 장도 도시미관을 해친다며 농성장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걷어가 버렸다. 

우리가 3년째 길거리에서 싸우는 동안은 아무것도 안했으면서, 그 비닐 한 장을 걷어가는 일엔 아주 빠르고, 적극적이었다. 결국 그날은 비닐조차 없이 맨몸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날도 비가 내렸다. 세상이 너무 야속했다. 

시퍼렇게 벼려진 추위가 온몸을 할퀴었고, 오랜 투쟁에 지친 사람들의 상처는 날로 커졌다. 투쟁이 오래되다보니 힘들어진 마음들이 자꾸만 스스로를 갉아먹었다.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 해고무효소송 2심 재판부에서 조정을 진행했다. 판결을 내려달라고 계속해서 요청했지만 재판부는 조정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 

조정이 길어졌다. 결국 한해가 넘어갔고, 법원은 강제조정안을 냈다. 그리고 지회 총회에서 조정안이 가결되었다. 3년의 투쟁이 무색할 만큼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 투쟁을 이어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또다시 기약 없는 싸움을 결의하긴 힘들었다. 그렇게, 너무나 허망하게도 끝나버렸다. 3년의 투쟁 중 가장 힘든 시간을 보냈다. 자본에 벽에 부딪혀 끝내는 이렇게 처참하게 패배했구나 하는 패배감에 빠졌다. 하지만 이렇게 패배감 속에만 갇혀있을 순 없었다.

한국GM, 쌍용자동차, 아사히글라스…. 외투자본에 맞서 싸우는 동지들이 있다. 외투자본의 먹튀는 당사자들만의 투쟁만으로는 막아낼 수 없다. 더 많은 노동자들이, 시민들이, 정부와 정치권이 나서야한다. 

하이디스 투쟁은 끝났지만, 아직 나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다시는 하이디스가, 다시는 나와 같은 사람들이 더 이상 생기지 않도록 계속 함께 할 것이다. 어떻게든, 어디서든, 하이디스투쟁에서 받은 연대의 마음들을 새기고 꼭 갚으면서 살 것이다. 

사람이 이렇게 길거리에서 3년을 싸워야 하는 세상이 아니라,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 조금이라도, 작은일 하나라도 하는 사람으로 살 것이다. 그렇게 하이디스 투쟁의 끝에 서서 나의 투쟁을 바라본다. 

나의 투쟁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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