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능력이 있다
누구에게나 능력이 있다
[귀농통문] 순창 마을공동체 '비빌언덕'
누구에게나 능력이 있다

도심을 벗어나 순창의 이정표를 따라 달리다 보면 섬진강 주변으로 산이 포근히 감싸고 있고, 그 아래로 하얗게 눈 덮인 마을이 이채롭게 펼쳐진다. 버스 정류장 옆, 오랜 기간 마을의 터줏대감으로 자리했던 구멍가게 터에 도착하니,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그 시절 사람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하다. 세월이 흘러 누군가는 마을을 떠나고 또 들어오고, 동전소리 대신 카드 찍는 소리가 들리게 된 지금, 작은 구멍가게였던 그곳은 향긋한 빵 냄새가 풍겨오고 지친 귀농인들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비빌언덕'의 주요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이하연 씨가 운영하는 '니나의 밀밭' 빵집에서 다방면으로 분주하게 활동하고 있는 그들이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다.(☞관련 기사 : 순창에는 '니나의 밀밭'이 있다)

ⓒ조예진


혼자라면 힘든 일도 함께라면 같이 할 수 있다

언뜻 거창한 모임처럼 보이지만 각자의 의도와 기획을 재미있게 풀고자 모인 모임이 바로 이 '비빌언덕'이다. 각자의 재능을 발견해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운영하고, '누구나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장점을 통해 지역 사회에 기여하도록 한다.


지금까지 진행된 활동을 소개해달라는 질문에 구준회 씨는 "이런 것도 얘기해도 되나?"라며 쑥스러운 듯 말을 이었다. "우리가 한마을에 사는 것은 아니지만 삼십 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살고 있다. 각자 다른 일을 하고 살지만 '촌시장'을 계기로 혼자라면 힘든 일도 함께라면 같이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것 같다. 순창에서 진행한 촛불문화제에서부터 소녀상 건립 등 크고 작은 행사에 참여했다. 앞으로가 더 기대된다"라고 말하는 구준회 씨의 눈빛에서 '비빌언덕'에 대한 자긍심이 느껴진다. 이어 김태현 씨는 "순창에서 진행된 의미 있는 행사에 대부분 관여를 했던 것 같고, 시골에서 일을 기획하고 지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활동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라며 말을 보탰다.

우리 모두가 기획자

ⓒ조예진

'비빌언덕'은 어떻게 시작하게 된 것일까?

2016년 여름, 9명의 귀농·귀촌인이 모여 순창에서의 재미있는 활동을 고민하다가 모두 기획자가 되어보기로 했다. 유통이나 마케팅 쪽에 관심을 가진 구준회(전 농민회사무국장)씨와 김태현(문화해설사)씨는 귀농귀촌인 장터를 기획하고, 이민선(흙건축연구소 살림 대표)씨는 여성들의 비빌언덕 만들기, 아이들을 좋아하는 신혼부부 김경구(청소년수련관 활동가)씨와 장희정 씨는 아이들 프로그램 기획자로 엄마들에게 자유를 주는 기획을 담당했다.

음식을 잘하는 이경아 씨가 혼자 내려와 있는 총각들에게 맛있는 밥 한 끼 해주기를 맡는 동안, 김현희(순창군 귀농귀촌지원센터 팀장)씨가 청년들을, 이유미(순창군 귀농귀촌지원센터 국장)씨는 농사 프로그램과 씨앗 모임을, 싱글 여성으로 내려온 마지막 기획자 조선영(친환경영농조합법인 실장)씨는 여성 귀농인들을 챙겨주는 역할을 맡았다. 그렇게 각자의 역할을 정하고 보니 하나둘씩 재미있는 일들이 더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각자가 서로에게 비빌언덕이 되어주고 있었다. 아마도 이 모임이 지속되는 비결이 아닐까.

'비빌언덕'의 유쾌한 작당

'비빌언덕'의 기획에 '반드시', '언제까지' 해야 한다는 규칙은 없다. 본인이 하고 싶을 때 진행하면 된다. 단, 누군가 기획한 일을 시작하면 모두가 힘을 실어주는 조력자가 되어준다. 제일 처음 시작한 기획물은 '촌시장'이다. 정식 명칭도 정말 촌스럽게 '촌빨작렬시시콜콜 골목장'이다. 매달 첫째 주 토요일에 작물이나 만든 물건을 파는 장터인데, 처음에는 삼삼오오 마음 맞는 귀농인들끼리 시작했다가, 이제는 제법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순창의 월례행사로 자리 잡았다.

바쁜 농사철이 지나자 이하연 씨는 귀농인들에게 기분전환의 기회를 만들어주기 위해 먹고 마시고 춤추는 '디제잉파티'를 기획했다. 7080 음악이 흐르고, 흥이 나면 빈 공간으로 몸을 흔들고 들어가면 되는, 기분대로 즐기는 유쾌한 시도였다.

김태현 씨는 아내와 함께 순창대표행사인 장류 축제에서 한지공예와 등공예 등의 재능을 발휘하여 큰 관심을 받았다.

토종씨앗모임의 이유미 씨는 시집와서부터 지금까지 홀로 토종씨앗을 지켜온 이득자 언니를 만난 건 행운이라며, 순창에 토종씨앗 도서관이 세워질 때를 기대하고 있다.

각자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해볼 수 있게 서로가 지지하고 그 선한 영향력이 지역에 고스란히 전해지니 얼마나 유쾌한 작당인가. 앞으로 또 어떤 작당들이 이어질지 벌써 기대가 된다.

▲ 김경구·장희정 부부의 '공동체 결혼식'. ⓒ장희정


소박하지만 결코 소박하지 않은 결혼식

또 하나의 주요활동으로 모두가 함께 기획하고 만들었던 김경구·장희정 부부의 결혼식을 꼽는다. 낯도 많이 가리고 사람들에게 신세 지는 것을 싫어했다던 장희정 씨는 순창에 내려와 소박한 결혼식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막상 준비하다 보니 생각보다 할 일이 많았는데, 본인이 뭘 해야겠다고 하기 전에 주례부터 식장을 꾸미는 것까지 '비빌언덕' 구성원들이 알아서 척척 준비해주었다고 한다. 웨딩드레스는 본인이 직접 만들어 입고, 지역의 귀농인들이 모인 풍물패가 축하 공연을 했다. 두 사람의 행복을 위해 순창 귀농·귀촌인 전체가 함께했던 '공동체 결혼식'인 셈이다. 소박하지만 결코 소박하지 않은, 모두가 함께하는 아름다운 축제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도 출산했는데, 어찌나 순한지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안고 재워도 칭얼대지 않는다. 아이 덕분인지 모임 내내 웃음이 그치질 않는다. '아이 하나를 키우기 위해선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을 실감하며, '비빌언덕' 구성원들은 순창 아이들의 배움터를 만들 수 있도록 함께 고민하고 있다. 아이들의 미래 때문에 '비빌언덕'은 더 바빠져야 할 것 같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외로움'과 '심심함'

귀농해서 당장 어떤 것이 힘들었냐는 질문에 이들은 하나같이 '외로움'과 '심심함'이라고 입을 모았다. '비빌언덕'의 구성원이 된 지금은 힘든 일이 있으면 같이 해결해 줄 친구 같은 사람들이 생겨서, 함께 할 수 있어서 좋고, 큰 보람을 느낀다.

가장 늦게 '비빌언덕' 구성원이 되었다는 조선영 씨는 "아는 사람도 없이 여자 혼자 순창으로 귀농을 했다. 할 일도 없고, 갈 데도 없고, 갈 수도 없었다. 그러다 '비빌언덕'을 만났고,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일을 상의했다. 만날 사람이 있고, 갈 곳이 있고, 믿을만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내게 큰 의미였다. 내가 도움 받았듯 앞으로 귀농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전화도 자주 하고, 뭐 하나라도 돕고 나누고자 노력한다"며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그들은 서로를 믿고 지지하며 끈끈하게 함께할 동지를 만난 것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그들이 놀라울 만큼 서로를 전적으로 믿고 의지한다는 것을 표정에서 알 수 있었다.

향후 행보에 대해서는 "같이 하고 싶은 일도 많고, 협동조합을 만드는 것도 생각하고 있다. 처음 시작할 때보다는 순창에 조금 더 적응하고 안정이 됐다. 앞으로 충분히 변화할 여지가 많다고 생각한다"는 말로 갈음했다. 지금처럼 좋은 일, 슬픈 일을 공유하며, 서로가 기획자가 되고 지역에 기여하는 '비빌언덕'이 되길 바란다는 말도 덧붙였다.

ⓒ비빌언덕(조예진)

▲ '비빌언덕' 구성원들이 함께하는 시간, 그리고 함께 만드는 저녁 만찬. ⓒ조예진


귀농인과 마을 전체의 '비빌언덕'으로

무엇이 이들을 이곳에 모이도록 하고 더불어 살아가게 했을까?

'비빌언덕'의 시작과 현재 모습 뒤에는 모두 '순창군 귀농귀촌지원센터'(이하 순창본부)가 있다. 이들 대부분은 순창본부에서 만난 사이다. "순창본부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래서 나도 가능하다면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고, 다들 그런 마음일 것이다.", "큰 빚을 졌다고 생각한다. 가진 것은 없지만, 뭐라도 생기면 나누고 싶다"라며 받은 만큼 나누고 싶다는 그들의 결심이 담겨있어 더욱 특별했다.

'비빌언덕'은 몇 년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마을과 농촌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도움이 필요한 귀농인들에게 도움을 주며, 그에 맞는 해결책도 함께 만들어가고 있다. 순창 내에서 짧은 기간이지만 안정적인 청년공동체로써 활동을 펼쳐온 이들의 경험과 지혜는 귀농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되어주고, 지친 그들에게 '비빌언덕'이 되어 줄 것이다. 하얀 눈 이불을 덮고 긴 겨울을 지나 봄이 오면 순창 곳곳에 '비빌언덕'의 아름다운 활동이 움트길 바란다. 아이들은 함께 성장하고, 어른들도 더불어 행복하길. 그리고 청년공동체로서 순창지역 활력을 위해 함께 협력하는 모습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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