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철 개고기 식용 논란, 지긋지긋하다고?
여름철 개고기 식용 논란, 지긋지긋하다고?
[민미연 포럼] 동물권과 생명존중을 생각하다
여름철 개고기 식용 논란, 지긋지긋하다고?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여름철 복날이 되면 보양식을 먹는 풍습이 있다. 흔히 이를 '복달임'이라고들 하는데, 삼복(三伏)에 고기로 국을 끓여 먹는 풍습을 말한다. 먹을거리 자체가 넉넉지 않던 시절, 잠을 설치기 일쑤인데다가 기운은 없고 입맛은 떨어지다 보니 고기를 챙겨먹고 힘을 내 무더위를 견디어 온데서 비롯된 듯하다.

복달임 음식과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있으나, 가장 오래된 복날 음식으로는 팥죽이 있고, 조선시대에는 복날 궁중에서 소고기와 얼음을 하사하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일반 백성들은 이런 것을 구하기가 어려워 구하기 쉬운 개고기나 닭고기를 먹었다고 한다. 아마 오늘날 개고기와 닭고기가 여름철 보양식의 대표가 된 것도 서민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재료였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한국의 초복에 해당하는 지난 7월 17일(현지 시간) 미국 연예인들과 동물보호단체인 '동물을 위한 마지막 희망(LCA, Last Chance for Animals)' 회원들이 한국 LA 총영사관 앞에서 '개고기 반대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초복에 맞춰 한국 복날 보양식으로 악용되는 개고기에 반대하기 위해 시위를 기획했다고 한다. 게다가 한국 정부도 개고기를 먹는 것을 큰 문제로 인식해야 하며,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촉구했다고 한다. 같은 날, 국내에서도 동물보호 단체들이 '개식용 반대 집회'를 열고 '개식용 금지'를 법제화할 것을 촉구했다. 


전통적으로 농경문화와 유목문화로 대별되는 동서양의 문화나 풍토에서 식생활 문화가 다르리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특히 농경문화가 주류였던 우리나라에서는 곡물과 채소가 주식이 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게다가 옛날 우리나라에서 여름이란 주식인 쌀보리와 같은 곡물이 떨어지는 시기인 데다가 더운 날씨로 기력이 허해지는 시기다. 그러다 보니 복날 어쩌다 한번 쉽게 구할 수 있고, 농경문화에서 별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도 없어 보이는 개를 잡아먹음으로써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의 풍습과 식생활문화를 두고 그것도 육류를 주식으로 하며 지나치게 많은 칼로리를 소비하는 문화를 가진 서양인들이 한국인을 미개인 취급하며 개고기를 먹지 말라는 등 도덕 선생 노릇을 하는 것에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서양인들이 우리에게 개고기만은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억지 논리라며 반박할 수도 있다. 그리고 개고기가 유통 및 도살과정에서 잔인하고 비위생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도 소나 돼지고기처럼 양지화해서 좀 더 안전하고 믿을 수 있는 먹을거리로 유도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반박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복날에 무엇을 먹던 이것은 이제 옛날이야기로 취급받을 날이 머지않아 보인다. 오늘날 우리는 이제 복날 음식이 무엇이고, 더위에 개고기나 닭고기를 먹느냐 마느냐의 문제보다도 평소에 음식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가를 더 큰 문제로 삼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얼마 전 보도에 의하면, 우리나라 남성 비만율은 2005년 34.7%에서 2016년 42.3%로 꾸준히 늘고 있고, 체질량지수가 30이 넘는 고도미만율도 2011년 4.3%에서 2016년 5.5%로 높아졌다. 그리고 2030년이면 지금의 두 배에 이를 것이라는 보고가 있다. 더군다나 요즘 이른바 '먹방'과 '쿡방(요리하는 방송)'이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어 폭식과 비만을 조장한다는 우려 끝에 먹방 규제 논란이 일 정도다. 


다소 지난 통계이기는 하나, 미국인들의 경우도 줄잡아 필요한 것보다도 평균 25%나 더 많은 칼로리를 소비한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날 미국인 5명 중 3명은 과체중(overweight)이고 5명 중 1명은 비만(obese)이다. 게다가 죽음의 원인 상위 10개 중의 상위 3개인 심장병, 뇌졸중 그리고 암을 포함하여 네 가지도 과체중과 비만에 직접 관련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보양식 논란보다도 사실 잘못된 식생활 문화와 고기 소비를 줄이는 것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다. 또 이런 상황에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히려 미국인들에게 고기든 무엇이든 좀 덜 먹으라고 시위하고 경고해야 할 판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도입과 함께 우리에게 유입된 서양의 식문화를 신랄하게 비판해야 할 상황이다. 


그러나 개고기 식용의 옳고 그름이나 육류 과다섭취의 옳고 그름이 문화적 우월성이나 관습, 권위, 감정 등에 따라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 스스로가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도덕적 자율성의 발휘를 통해 제시되는 합리적 근거에 따라 결정되는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누구든 받아들일 수 있는 명확한 근거를 찾는 일이 쉽지 않아 논란이 지속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이런 쟁점에 성급하게 종지부를 찍기보다는 그냥 이런 문제가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 고민에 이르게 하는지를 실감하는 것으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문화가 급속하고도 대규모로 확장되거나 변화되고 있는 상황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환경윤리나 동물윤리 그리고 동물권 운동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윤리적 고려대상이나 애착 대상들의 범위가 확장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단순히 개고기나 다른 동물을 과도하게 잡아먹는 문제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이유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동물을 이용하고 대우하는 문제에 대해서 윤리적으로 폭넓고 심도 있게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더 나아가 우리가 어떤 이유에서든 동물생명을 학대하고, 남용하고, 착취하여 함부로 다루는 것이 옳지 못하다면 윤리적 규범을 넘어 법률로 금지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동물권'이니 '동물복지'니 하는 말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우리는 동물의 '도덕적 지위'니 '본래적 가치(intrinsic value)'니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고민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동물을 소중히 여기는 이유나 근거는 다양하다. 먼저 단순한 식량으로써 뿐만 아니라, 유목생활에서 가축을 돌보는 일을 돕는 수단이나 농경생활에서 농사일을 돕는 수단으로써 소중히 여기기도 한다. 아니면, 반려동물이라는 단순한 애착 대상 혹은 그저 생명체라는 이유로 소중히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대표적인 동물윤리학자인 피터 싱어(Peter Singer)는 동물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 즉 '유정성(sentience, 혹은 지각력)'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톰 리건(Tom Regan) 같은 사람은 동물이 단순히 살아 있거나 생존하는 것 이상으로 삶을 영위하는 존재, 즉 '삶의 주체'이기 때문에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이유들은 우리가 동물을 상업적 목적으로 혹은 공장식으로 집단 사육하는 일이나 식량으로 취급하는 일, 오락을 위해 학대하거나 혹사시키는 일, 연구와 실험에 이용하는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것을 함의한다. 하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동물을 도덕적으로 소중히 여기는 것에서 더 나아가 법적인 권리를 부여하게 되어 '동물보호법'을 제정하기까지 한다.


'동물보호법'은 대체로 동물을 적정하게 보호 관리하고 불필요한 학대를 방지하기 위해 제정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의 동물보호법은 1966년 당시 애완동물의 재산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실험실 동물복지법(Laboratory Animal Welfare Act)'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독일의 동물보호법은 1933년에 제정된 '제국 동물보호법'을 기초로 하여 1972년 '동물보호법'으로 개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장 발달한 동물보호법을 제정한 국가 중 하나인 스위스는 일찍이 1893년 연방헌법에 도살금지규정을 도입했고, 이후 1978년에 '동물보호법'을 제정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1991년에 '동물보호법'을 제정하고 수차례 개정을 거치며 오늘에 이르렀고, 현재도 일부개정 법률안이 계류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밖에도 농림축산식품부 내에 동물복지정책팀을 설치하고 동물복지위원회를 운영하는 등 구조적으로 동물보호 및 복지 수준의 향상에 필요한 제도를 정비해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동물생명이 가치가 있기에 소중히 여겨야 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당위에 대해서는 별다른 토를 달만한 이유가 없어 보이지만, 막상 법을 제정하는 일은 물론 구체적인 실천의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면 해결하기 만만치 않은 여러 가지 까다로운 문제들 및 논란에 직면하게 된다. 앞서 말한 개고기를 둘러싼 불법화니 합법화니 하는 문제나 문화적 자존심의 문제도 문제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동물생명을 존중하면서도 동시에 생명유지를 위해 동물생명을 잡아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에게는 채식이라는 대안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잡식성 동물로 보이는 인간이 채식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고 논란이 적지 않다. 


게다가 식물도 생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생명 존중의 윤리를 일관되게 실천하려 든다면, 인간은 물론 모든 동물을은 마른 풀잎을 뜯어 먹거나 식물처럼 땅속의 양분을 빨아먹고 살아야 한다는 반직관적인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타당하지도 않다. 인간뿐만이 아니라 생명이 생명으로서 존속하기 위해서는 다른 생명을 식량으로 이용해야 하고, 이는 우리가 거역할 수 없는 생태학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동물권과 생명존중의 윤리를 곧이곧대로 일관되게 실천하는 경우, 오히려 생명은 물론 생태계조차도 균형이 깨져 모든 존재가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생명존중의 실현을 위해 어느 정도 선에서 생명의 이용을 도덕이나 법으로 규제해야 하는지를 정하는 것이 문제가 될 텐데 이는 아주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가 된다. 이런 이유로 윤리학자들은 생명존중과 같은 문제는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결정해주는 규칙의 문제로서 제시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 가져야 하는 근본적인 태도, 즉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를 결정하는 태도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동물권이나 생명존중의 윤리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나는 어떠한 유형의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규칙의 윤리학'이 아니라 '성품의 윤리학'으로서 인간 행위의 측면이 아니라 성품·성향·가치의 측면에서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들은 결국 각각의 생명의 본래적 가치를 경외하고 존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품과 성향을 갖춘 선한 사람들이 동물을 죽이고 먹는 것을 선택하는 상황과 관련해서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또 돼지와 소를 잡고 닭을 잡는 육가공업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야기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성품의 윤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런 경우, 동물생명을 존중하는 사람들은 이런 선택에 대해서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더라도 이러한 결정들에 책임감을 가지고 의식적으로 조심스럽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명존중과 같은 윤리는 우리가 이런저런 구체적 행위를 결정하는 데 대한 책임에 민감해지도록 하는 성품이나 태도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우리가 생명을 매정하게 닥치는 대로 가차 없이 죽이는 행위를 해야 하는 경우에 주저하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이며, 그래서 결국에는 우리가 진정한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어떤 고기를 먹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리고 어느 정도 선에서 고기 먹는 것을 금지해야 할지를 규범이나 법률로 명확히 정하기가 쉽지 않다. 어떤 면에서는 성품이나 태도 운운하면서 두루뭉술한 해법을 제시하는 것이 오리려 합리적으로 보인다. 사정이 이러하니, 여름만 되면 개고기 식용 논란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그렇다고 또 이런 지긋지긋한 논란에 진저리를 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반복적인 논란은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고민을 통해 동물생명과 삶에 대한 이해의 깊이와 폭을 넓혀가도록 만들 수 있다. 그리고 동물을에 대해 생명존중의 태도를 가지도록 할 수도 있고, 그래서 결국 윤리적 차원에서든 법률적인 차원에서든 동물을을 올바로 대우해야 하는 최선의 이유나 근거 및 구체적인 실천방안들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배가 부른데도 그저 관습이나 기호를 위해서 동물을을 쓸데없이 잡아먹거나 사냥하고 학대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면, 그런 행동을 스스로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행위에 거부감을 갖게 될 것이고, 결국 거부감이 커지게 되면 규제방안을 마련할 수도 있을 것이다. 먹는 양이 지나치게 많다 싶으면, 양을 적정수준으로 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동물을 먹거나 활용해야 할 때도 다른 것으로 대체가 가능하다면 대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인간의 필요에 따라 동물의 본성을 철저하게 억압하는 공장식 축산(factory farming)도 점차적으로 자연농법으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동물복지 인증제와 같은 제도를 확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윤리적이고 잔인한 동물실험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어, 필요 없는 실험을 줄이거나 대체하는 것과 같은 동물실험의 '3R 원칙(동물실험을 개선·축소·대체한다는 의미를 가지는 Refinement, Reduction, Replacement를 말함)'을 더욱 발전시키고 적극 실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유럽연합처럼 동물실험을 통해 개발된 화장품의 전면 판매금지조치를 발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선언적인 의미에 머물러 있는 동물권 및 동물윤리문제나 동물보호법 등도 실제적인 적용이 가능하도록 개선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개고기를 먹는 관습도 그것이 오늘날 기준에서 꼭 먹을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고 논란이 많은 것이라면, 그런 관습은 역사 속에 묻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특히 먹을 것이 비교적 넉넉하고 영양 섭취가 오히려 과도한 오늘날 구태여 개고기를 복달임으로 고정해서 먹을 이유가 없다면 동물복지는 물론 환경과 건강을 생각하는 적정한 먹을거리로 대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요약건대, 우리가 동물을 생명공동체 일부로서 받아들이고 생명에 대한 존중의 태도를 갖게 되면 우리는 동물생명을 어떤 형태로든 이용하는 것에 대해 반성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동물을 이용하는 것이 삶에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엽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된다면, 우리는 바람직하지 않게 동물을 이용하던 관행을 쉽게 포기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애견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강아지 공장, 중성화, 애견의 산업화 등에 대해서도 경각심을 가지고 동물을 다루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해야 할 것이다. 결국 동물을 대우하는 데 대한 우리의 판단이 기존의 윤리이론이나 통념들, 그리고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의 각종 과학이론과 같은 배경이론과 정합하는지 두루 살펴 동물생명을 존중하는 최선의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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