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게 대기업 합격, 그런데 출근은 하지 마라?
힘들게 대기업 합격, 그런데 출근은 하지 마라?
[김선수, 노동을 변호하다] <8> IMF 위기 직후 채용 내정 취소 사건
2013.06.19 11:57:00
힘들게 대기업 합격, 그런데 출근은 하지 마라?
1990년대 후반은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시절과 다른 의미다. 1996년 12월 25일 이른바 '노동법 날치기 파동'이 있었다. 새누리당의 전신인 신한국당 의원들이 새벽에 관광버스를 타고 국회에 '잠입'해 '기립' 표결로 정리해고를 법제화한 노동법을 날치기 처리했다. 다음 날 노동계는 전면 총파업에 돌입했다. 이 사건은 김영삼 정부가 추진한 세계화의 진화를 의미했고,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확산을 예고했다. 그것은 실로 폭력적인 개량이자 계몽이었다.

1997년 11월 21일 김영삼 정부는 국가 부도 위기를 막기 위해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 금융을 수용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IMF 사태'의 서막이었다. 회사가 공중 분해돼 길거리에 나앉은 사람들이 넘쳐났고 해고자가 거리를 헤맸다. 청년들은 '취업 불황'에 시달려야 했다.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대가는 혹독했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아직 '1997년 체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거쳐 군사 독재 정권의 완전한 종식을 목격한 노동운동 세력이 막 틀을 잡아가는 단계였다. 그런데 IMF 사태 전후로 노동자들은 '눈에 보이는 폭력'을 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에 맞서야 하는 운명에 직면했다. 그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도 벌어졌다. 김선수 변호사가 소개하는 이번 사례는 IMF 구제금융 사태 당시 대기업 취직에 성공했다가 출근을 거부당한 노동자들의 이야기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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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용 내정 제도는 사용자가 우수한 노동력을 조기에 확보하기 위하여 대학 졸업 예정자를 대상으로 졸업 이전의 일정한 시기에 채용 예정자로 내정해두었다가 최종적인 채용 결정은 현실적인 근로의 개시가 가능한 졸업 후 시점까지 유보하여 두는 제도를 말한다. 채용 내정 제도는 일본에서 정착되고 우리나라에도 도입되었는데, 일본에서는 우수한 인재를 조기에 확보하고자 하는 기업의 의도와 조기에 취직처를 결정하고자 하는 대학생들의 의도가 맞아떨어져 생겼고, 종신 고용제의 전제 조건으로서 종신 고용을 보장받는 직원의 자질을 신중하게 검토한다는 취지에서 사회적으로 인정되었다고 한다.

채용 내정자는 해당 기업 취직이 확정된 것으로 생각하고 다른 진로 가능성 모색을 그만두는 것이 보통이고, 채용 내정이 취소될 경우에 대비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채용 내정이 취소되면 그로 인해 받는 불이익은 단순히 그 기업에 취직하는 것이 좌절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적어도 1년간 또는 평생 정식 근로자로 채용되는 길이 막힐 위험에 처하게 된다.

IMF 경제 위기를 이유로 한 채용 내정 취소

1997년 말 경제 위기로 IMF에 구제 요청을 한 것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서 묵묵히 일하던 많은 노동자들이 고통 받았다. 그중 대기업에 채용 내정되었던 대학 졸업 예정자들이 일방적으로 채용 내정 취소 또는 취업 시기 연기의 불이익을 받았다.

당시 언론에 보도된 내용들이다. SK건설은 1997년 말에 채용을 확정했다가 경영난을 이유로 바로 다음 날 번복하고 사과했다. LG전자는 1998년 초 50명의 채용 내정자를 확정했다가 7개월 이상 발령을 유보했다. 주택공사는 1997년 말 89명을 채용 내정하였지만 1998년 7월초까지도 발령을 내지 않았다. 현대전자는 1997년 10월 말경 1100여 명을 채용 내정했다가 1998년 6월 중순에 이르러 채용하지 못하겠다고 밝혔다. 동양시멘트는 산학장학생 형식으로 채용 내정했다가 1998년 8월 18일에 채용 내정을 취소했다.

현대전자 채용 내정 취소 경위

현대그룹은 1997년 8월에 1998년 2월 대학 졸업 예정자들을 대상으로 신규 채용 공고를 내고 채용 절차를 진행했다. 채용 내정자들은 1997년 9월 29일 현대그룹으로부터 서류 전형 합격 통보, 10월 24일 현대그룹으로부터 면접 합격 및 배치 예정 회사가 현대전자라는 사실 통보, 10월 31일 현대그룹 본사에서 신체검사 실시, 11월 최종 합격자 통지의 절차를 거쳐 채용 내정이 확정되었다.

그런데 1997년 11월 21일 한국 정부가 IMF에 구제금융 신청을 했다. 회사는 11월 30일 '대졸 신입 사원 입사 예정자 소집 간담회'를 개최하였는데, 이날은 한국통신 등 다른 대기업의 공채일이었기 때문에 위 간담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다른 회사의 공채에 응할 기회를 상실했다. 위 간담회에서 회사는 입사 안내문을 통하여 7차에 걸친 교육차수별 입사일(최종 1998년 4월 6일)을 알려주고 입사에 필요한 근로계약서와 제반 구비 서류들을 안내하며 개인별 입사 일정에 관하여 12월 10일까지 개인별로 전보로 통지한다고 했다. 회사는 12월 10일까지 개인별 통지를 하지 않다가 1998년 2월 졸업식에 맞추어 안내문을 발송하였는데, 이에 의하면 입사 일정이 사업 구조조정에 따른 세부 대처 방안이 가시화된 이후에 결정될 것이므로 개인별 입사 일정이 결정되면 빠른 시일 내에 통보하겠으니 자기 계발에 힘쓰라고 당부했다.

회사는 1998년 6월 8일 채용 내정자 소집 점검을 한다고 안내문을 발송하고 6월 11일 내지 12일에 걸쳐 서울, 이천, 대전, 경주에 분산시켜 채용 내정자들을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 회사는 위로금 200만 원을 지급받고 '입사 지원 취소 확인서'에 날인하든가(1안), 1999년 6월까지 신규 수요가 있으면 개인별 입사 순위에 따라 입사하고 그때까지 입사되지 못하면 1999년 6월 30일부로 채용 취소에 동의한다는 '채용 발령 연기 동의서'에 날인하든가(2안)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했다.

채용 내정자들은 사전에 위와 같은 내용에 대해 전혀 사전 통지를 받은 바 없이 회사의 소집에 응하여 갔다가 위와 같은 선택을 강요받았다. 총 채용 내정자 1192명 중에서 1안 선택자는 702명, 2안 선택자는 377명(이 중 1명은 2안의 채용 발령 연기 동의서 끝부분에 기재된 "일체의 민·형사상, ·행정상의 법적 청구를 귀사에 대하여 하지 않을 것을 이에 서약합니다"라는 부동문자 부분을 지우고 서명하여 회사에 제출했다), 선택 거부자는 36명, 소집 불응자는 64명이었고, 13명은 다른 계열사에 입사했다. 채용 내정자들은 6월 16일 '98현대전자산업(주) 신입 사원 입사 추진협의회'(약칭 '현추협')를 구성하여 회사 측과 해결을 모색했으나, 회사 측에서는 현추협을 대화 상대로도 인정해주지 않았다.

회사는 1998년 1월부터 신입 사원 채용을 주관하였던 현대그룹 기획실에 채용 내정자들을 다른 계열사로 전배해 줄 것을 요청하여 채용 내정 취소 당시까지 13명이 다른 계열사에 입사 조치되었고, 그 후에도 1998년 6월까지 현대그룹 28개 계열사에 54명이 입사 조치되었다. 회사는 소송 중이던 1999년 6월 7일에 168명, 7월 12일에 72명을 신입사원으로 입사 조치했다. 이에 해당하지 못한 2안 선택자들의 경우에는 1999년 6월 30일까지 입사 조치되지 못함에 따라 확정적으로 채용 내정이 취소되었다.

▲ 1997년 12월 3일 임창렬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과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서울 세종로 청사에서 긴급 자금 지원을 받기 위한 최종 협상 결과를 발표한 후 악수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동양시멘트 채용 내정 취소 경위

회사는 1997년 4월 초순경 각 대학에 1998년 2월 졸업 예정자를 대상으로 산학장학생을 추천하도록 의뢰했다. 1997년 5월 2일 서류 전형 합격 통보, 5월 8일 면접 실시, 5월 15일 면접 합격 통보, 5월 20일 신체검사, 5월 말경 최종 합격 통보의 절차를 거쳤고, 합격자들은 회사가 요구하는 서약서, 재정보증서, 재정보증인의 인감증명 및 재산세 납세 증명원 등 필요 서류를 제출했다.

합격자들은 대학 재학 중 회사로부터 일정한 장학금을 받는 대신, 대학 졸업을 조건으로 1998년 1월 4일부터 최소한 2년간 회사에 근무할 것을 서약하고 2년 이내에 사직할 경우에는 장학금과 은행이자 상당의 금원을 배상하기로 하는 약정을 했다. 산학장학생이라 불린 합격자들은 정해진 시기마다 회사로부터 장학금을 지급받았으며 회사가 실시하는 연수, 수련회 등에 참가하여 사실상 회사 직원에 준하는 대접을 받고 의무를 이행했다. 공채로 채용된 신입 사원들이 신체검사를 받은 1997년 11월 30일 재차 신체검사를 받았다.

산학장학생들은 1998년 1월 4일부터 회사에 근무하기로 약정되어 있었는데, 회사는 1997년 12월 17일 이들을 소집하여 입사 시기를 1998년 3월 1일로 연기했다가 2월 18일에 다시 1998년 상반기 중에 전원을 채용하고 상반기 중 전원 채용이 안 되는 경우 1998년 말까지는 반드시 전원을 채용하겠다고 하면서 입사 시기를 다시 연기했다. 이들은 모두 1998년 2월말에 대학을 졸업하였으나, 회사는 1998년 8월 13일경 채용 내정을 취소한다는 통지를 한 후 8월 18일 이들을 소집하여 채용 내정 취소 의사를 재차 확인했다.

법리 및 판례 연구

현대전자 채용 내정자들은 1998년 6월 소집 점검에서 1안과 2안 중 선택을 강요받은 후 우리 사무실을 방문했다. 나는 우리나라 판결례와 일본 사례를 검토했다. 우리나라에서 당시까지 채용 내정 취소를 정면으로 다툰 예는 없었다. 채용 내정의 법적 성질과 그 취소의 효과 그리고 해고 무효 확인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지 등의 쟁점에 관한 첫 사건이었다.

우리나라 판결례로는 채용 내정 후 1년 정도 발령을 내지 않다가 내정을 취소한 사안에서 손해배상을 인정한 우석대학교 사건 판결(대법원 1993. 9. 10. 선고 92다42897 판결)과 원고들이 회사에 채용된 이후 임금이 모집 광고 또는 면접 시의 구두 약속과 다르다고 하여 그 차액을 청구한 사건에서 사원 모집 광고 또는 면접 시의 구두 약속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근로계약에 있어서 청약의 유인 또는 준비 단계에 불과하여 그 자체로서 근로계약의 내용이 된다고 볼 수 없다는 하급심 판결(서울민사지방법원 1989. 12. 12. 선고 89가합16022 판결)이 있을 뿐이었다. 행정해석례로는 졸업 예정자가 근로를 제공함이 없이 명목상으로만 근로계약을 체결하고 있는 경우라면 근로자로 취급할 수 없다는 예가 있었다(1980. 11. 26. 법무 811-30876).

반면에 일본에서는 1952년의 면방불황, 1971년의 닉슨 쇼크에 의한 달러 파동(금-달러 교환 정지), 1973년의 오일 쇼크 등 경제 불황이 있을 때마다 대량의 내정 취소 또는 자택 대기가 있었고, 또한 1968년부터 1969년의 대학 분쟁 시에는 과격파 학생 활동가로부터 기업을 방위한다는 명목 하에 채용 내정 취소가 빈번하게 이루어져 사회 문제로 되었다. 다수의 소송이 제기되어 노동법학계에서 이에 대한 논의가 전개되었고 판례도 형성되었다.

당시 일본 기업들이 채용 내정자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하여 채용 내정을 취소하면서 합의를 할 경우 보통 20만 엔 정도를 지급하고 합의를 한 것으로 소개되었다. 현대전자가 200만 원을 합의금으로 제시한 것은 일본의 예를 본받은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일본에서는 거품 경제 붕괴 이후 장기간에 걸친 불황과 그로 인한 기업의 고용 조정의 진행으로 말미암아 1993년 졸업 예정자에 대한 채용 내정 취소가 1970년 전반의 오일 쇼크 이래 최고 수준이 되었다. 이에 따라 일본 노동성은 채용 내정자를 보호하기 위해 직업안정법 시행규칙을 개정하고 지침을 제정하는 등 일련의 조치를 취하기도 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채용 내정의 법적 성질과 취소의 효과 등에 대한 학설과 일본의 판례 등을 집중적으로 연구해서 그 결과를 후에 서울대노동법연구회에서 발표하고 학술지인 <노동법연구>에 게재하기도 했다("채용내정자의 법적 지위", <노동법연구> 제8호, 서울대학교노동법연구회, 1999. 6, 197-237면). 채용 내정의 법적 성질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백가쟁명이다. 다양한 학설이 주장되었는데, 나는 이름도 긴 '취업시기부 해약권유보부계약설(就業始期附 解約權留保附契約說)'의 입장을 취했다. 채용 내정의 통지에 의해 근로계약은 성립하여 효력을 발생하고 다만 취업은 졸업 후 예정된 시점에 이루어지며, 그때까지 졸업하지 못하는 등 계약 소정의 사유가 발생하면 사용자가 해약할 수 있는 권리가 유보되어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다. 법원도 이 견해를 받아들였다.

현재전자 사건의 진행

현추협 대표들과 1차 상담을 한 후 현추협이 채용 내정자들을 대상으로 마련한 설명회 자리에 참석해서 채용 내정 취소의 법률 효과와 법적 구제 방법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사건을 수임하여 1998년 8월에 소장을 제출했다. 채용 내정자 소집 점검에서 1안 또는 2안을 선택한 168인과 어느 선택도 하지 않은 32인 사건으로 구분했다. 1안 또는 2안 선택자의 경우 회사 측이 부제소합의를 했다고 주장하면 이 부분이 중요한 쟁점으로 될 것이기 때문에 따로 진행할 필요가 있었다. 청구 내역은 최종 입사 예정일이었던 1998년 4월 2일부터 종업원 지위에 있음을 확인하고, 그 이후 취업시킬 때까지 모집 광고에서 알린 급여를 지급하고, 위법한 채용 내정 취소로 인한 1000만 원의 위자료이다.

선택거부자 32명이 제기한 소송은 1심(1999. 6. 18. 선고 98가합67930 판결, 재판장 판사 이수형, 판사 황병현, 판사 김상규), 2심 (서울고등법원 2000. 8. 25. 선고 99나41055 판결, 재판장 판사 변동걸, 판사 윤남근, 판사 여상원), 3심(대법원 2000. 11. 28. 선고 2000다51476 판결, 대법관 유지담(재판장), 서성, 배기원, 박재윤)의 순으로 이어졌다.

1심은 채용 내정 확정으로 최종 입사 예정일부터 근로관계가 확정적으로 성립되었고 채용 내정 취소는 해고에 해당한다고 인정하였으나, 해고가 정리해고 요건을 구비하여 유효하다는 이유로 종업원 지위 확인 청구 부분과 위자료 청구 부분을 기각했다.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에 의한 해고 대상자 선정'이라는 정리해고의 요건과 관련하여 법원은 "채용 내정자가 비록 회사와 사이에 근로계약이 성립되어 종업원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당시까지 현실적으로 노무를 제공하지 않은 상태로서 근로 관계에의 밀접도가 통상의 근로자에 비하여 떨어진다고 할 것이어서 기존의 근로자들에 비하여 우선적인 정리해고 대상에 속할 수 있다고 할 것이므로 피고 회사가 위와 같이 원고를 비롯한 채용 내정자들을 정리해고 대상자로 선정한 것은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고 판단했다.

최종 입사 예정일인 1998년 4월 2일부터 채용 내정을 취소한 1998년 6월 12일까지의 급여 약 274만 원씩을 지급하라고 인정했다. 2심 진행 중에 16명이 취업하여 소를 취하했고, 나머지 사람들이 2심과 3심을 진행했으나 항소와 상고가 기각되었다. 결국 쟁점은 정리해고의 정당성 문제로 되었다.

1안과 2안 선택자 168명이 제기한 소송은 1심(서울지방법원 1999. 7. 1. 선고 98가합67923 판결), 2심(서울고등법원 2000. 4. 28. 선고 99나41468 판결, 재판장 판사 김동건, 판사 황적화, 판사 홍임석), 3심 (대법원 2002. 12. 10. 선고 2000다25910 판결)의 순으로 이어졌다. 위 사건에서는 1심 판결 선고 전에 22명이 소를 취하하고, 1심 판결 선고 후에 73명만이 항소하였으며, 2심 판결 후 41명만이 상고했다.

1심 판결은 모든 원고에 대해 부제소합의의 효력을 인정하여 소를 각하했다. 2심 판결은 1안 선택자들의 경우에는 부제소합의의 효력을 인정하여 항소를 기각했으나, 2안 선택자들의 경우에는 채용 내정 취소(해고)에 대한 부제소합의는 인정했지만 회사 종업원의 지위를 취득한 1998년 4월 6일부터 2안에 따라 최종적으로 채용 내정을 취소한 1999년 6월 30일까지의 임금청구권은 사전에 이를 포기하거나 이에 대해서까지 부제소합의를 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위 기간 중의 급여 약 1914만 원씩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2안 선택자 중 부제소특약 부분을 삭제한 원고에 대해서는 정리해고로 보아 그 정당성을 인정하고 다른 2안 선택자와 마찬가지로 급여 청구만 인정했다.

▲ IMF 구제 금융 위기 이후 실업 사태가 본격화하면서 거리로 내몰린 실직자들이 낮이면 일자리를 찾아 헤매다 사회 단체들이 제공하는 무료 급식으로 주린 배를 채우고 밤이 되면 지하철 통로에 노숙을 하고 있다(1998년 6월 22일). ⓒ연합뉴스

동양시멘트 사건의 진행

내가 현대전자 채용 내정 취소 사건을 진행하고 있다는 사정을 파악한 동양시멘트 채용 내정자들이 최종적으로 채용 내정 취소를 통지받고 사무실을 방문하여 사건을 수임하게 되었다. 1998년 9월에 소장을 접수했는데, 시기가 맞지 않아 3명과 2명으로 나누어서 진행했다. 동양시멘트의 본사가 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 관할이어서 이 법원에서 진행했다. 다행히 이 사건에서는 부제소합의 쟁점은 없었다.

1심 판결은 1999년 4월 30일에 선고되었다(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 1999. 4. 30. 선고 98가합20043 판결: 재판장 판사 변종춘, 이은애, 김종석). 채용 내정 및 그 취소와 관련하여 "피고 회사가 1997년 11월 말경 원고들에 대하여 최종 합격 통지를 하고 같은 해 12월경 서약서 등 입사 관계 서류 제출을 요구하여 교부받음으로써 원고들과 피고 회사 사이에는 원고들이 1998년 2월까지 대학을 졸업하지 못할 것 등을 해약 사유로 유보하고, 취업할 시기를 1998년 3월 1일로 하는 내용의 근로계약이 성립되었다 할 것이고, 따라서 피고 회사가 1998년 8월 18일 원고들에 대하여 한 채용 내정 취소 통지는 그 실질내용에 비추어 해고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므로, 위 채용 내정 취소에 정당한 이유가 없는 한 피고 회사가 원고들에 대하여 한 위 채용 내정 취소는 무효"라고 판단했다.

또한 정리해고의 정당성 여부에 대해서는 채용 내정을 취소하기 전에 그를 회피하기 위한 노력을 하였고 채용 내정 취소가 객관적 합리성과 사회적 상당성이 있다는 점을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고 하여 정리해고의 정당성을 부정했다. 1998년 3월 1일부터 회사의 종업원 지위에 있음을 확인하고 그날부터 취업시킬 때까지 매월 급여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완전한 승소다. 회사가 항소하여 항소심(서울고등법원 99나27790)에 계류 중이던 1999년 11월 22일 조정이 성립되어 종결되었다.

사회 첫 경험으로서는 너무 큰 대가

위 두 사건은 채용 내정의 확정으로 근로계약관계가 최종적으로 성립하여 유효하고 채용 내정의 취소가 해고로서 근로기준법의 제한을 받는다는 점을 법원을 통해 명확하게 확인한 것으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동양시멘트 사건은 당사자들이 완벽하게 구제를 받았으나, 현대전자 사건은 다음 단계에서 부제소합의의 효력과 정리해고의 정당성이 문제로 되어 당사자들이 충분히 구제를 받지 못했다.

특히 현대전자 사건에서 마음이 약해서 회사의 요구에 따라 1안에 서명한 사람들은 아예 소송 제기의 권리 자체를 포기한 것으로 인정되어 최소한의 보상도 받지 못했다. 부제소합의의 효력을 부정하기 위해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 비진의 의사표시, 착오에 의한 의사표시, 사기에 의한 의사표시, 불공정한 행위, 신의성실 원칙 위배 등 가능한 모든 주장을 했으나 어느 주장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처분 문서에 서명한 경우 그 효력을 부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절감하게 되었다. 당사자들로서는 사회 첫 경험치고는 너무나 큰 대가를 치르고 배운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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