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의 적'…"나는 애초부터 없었다"
'공공의 적'…"나는 애초부터 없었다"
[밥&돈·16] 공공부문이 보내온 편지
'공공의 적'…"나는 애초부터 없었다"
난 공공부문이다. 한국전력공사, 국민연금관리공단, 산업은행 등 공기업들이 내 형제들이고, 중앙정부, 지방자치단체가 내 사촌뻘 된다. 요새 어딜 가도 우리 집안이 잘 나간다고들 한다. 대학생들이 가고 싶어 하는 최고의 직장이고, 결혼 상대 1순위가 우리 공기업 직원이라니 어깨가 절로 으쓱거린다.
  
  근데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선망하면서도 나에 대해서는 나쁘게만 이야기한다. '신이 내린 직장'이라고 비꼬기도 한다. 도대체 어깨를 펴고 다녀야 할지, 고개를 숙이고 지내야 할지 모르겠다.
  
  마침 대선이다. 온갖 약속이 쏟아 나오는 때다. 혹 나의 자존심을 세워줄 후보는 없는가?
  
  1. 나를 반긴 여사, 영국 대처
  
  지금 나는 '공공의 적'으로 몰려 있다. 우리 족보엔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집안이라고 나와 있는데 말이다. 사실 우리 가문의 이러한 내역을 기억하는 이들도 많지 않을 듯하다.
  
  내가 공공의 적인 까닭에 재미를 본 정치인들이 여럿 있다. 영국의 대처 여사가 대표적이다. 그녀는 1975년 보수당 당권을 장악하고 1979년 집권할 때, 그리고 이후 10년 이상 나를 가지고 톡톡히 장사를 했다.
  
  수상에 당선될 때는 공공부문의 비효율과 파업을 자신만이 이겨낼 수 있다는 이른바 '영국병' 논리로, 집권 초기에는 석탄 구조조정을 빌미로 1년 이상 탄광노조의 장기파업을 사실상 유도하고 진압하며 '공공부문 노조 해결사'로, 그리고 세 번의 연임 기간 동안에는 공기업 민영화 세일을 대대적으로 단행하는 '주인 찾기 운동가'로 각광을 받았다.
  
  그 결과 영국이 많이 변했다. 통신(1984), 가스(1986), 항공(1987), 석유(1987), 철강(1988), 수도(1989), 전력(1990), 석탄(1994), 철도(1994) 등 공기업들이 줄줄이 민영화됐다. 공기업부문에 종사하는 노동자도 1981년 187만 명에서 1996년 41만 명으로 무려 146만 명이 감소했다. 영국에서 우리 집안이 거의 망했다는 이야기다.
  
  2. 잃어버린 나의 성, '공(公)'
  
  영국 보수당이 17년 집권의 막을 내리고 노동당의 블레어가 총선에서 승리한 1997년, 나를 둘러싼 정치가 한국에서 재현되었다. 영국이 1976년 IMF 구제금융을 당할 무렵 내가 원성의 대상이 되었듯이, 한국에서도 1997년 IMF 금융위기 이후 나라를 살리는 핵심 구조조정의 대상으로 내가 선택되었다.
  
  IMF 금융위기와 함께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공공, 금융, 기업, 노동 등 4개 영역을 구조조정 대상으로 삼으며 IMF가 제시한 가르침을 모범적으로 따르는 채무자가 되었다.
  
  김대중은 공공부문의 구조조정을 '혁명적'으로 진행하라고 지시했는데, 자본과 노동 측의 반발이 예상되는 다른 세 부문(금융, 기업, 노동)을 선도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실질적인 고용주인 공공부문에서 구조조정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정부는 19개의 공기업에서 일률적으로 20%의 고용감축을 단행했고, 그 결과 3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일자리를 떠났다.
  
  공기업 민영화도 진행되었다. 1998년 국정교과서, 1999년 종합기술금융, 2000년 대한송유관공사, 포항제철, 한국종합화학, 한국중공업 등이 민영화됐다. 이어 2002년에는 한국통신과 담배인삼공사의 매각이 마무리되었다.
  
  노무현 정부도 착실히 선배의 길을 뒤따랐다. '발전노조 38일 파업'에 놀라 네트워크 기간산업의 민영화는 보류했지만, 소프트웨어 개혁이라는 이름 하에 나의 혼을 본격적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공공부문 경영평가라며 상업적 논리를 들이대고, 양파 껍질 벗기듯 외주화가 확대되었다. 나의 성이 왜 '공(公)'인지 이젠 잘 모를 정도다.
  
▲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영화 반대 운동. ⓒMEA

  이렇게 나는 10년 이상 두들겨 맞고 있는데, 나를 두둔하는 사람은 우리 식구 빼곤 아무도 없는 것 같다. 요즈음엔 공무원 친척들도 무척 힘들어 한다. 연금 이야기만 나오면 화살이 빗발치고, 현장직 공무원들은 외주화 혹은 민간위탁 리스트 앞에 떨고 있다.
  
  솔직히 나도 불안하다. 유력 중앙지들은 벌써부터 차기 보수정권을 기대하며 공기업 민영화를 주문하고 있다. 상수도 민영화는 이미 궤도에 진입하였고, 한미 FTA를 우회해 자발적 형태로 개방되고 있는 교육과 의료 분야도 심상치 않다.
  
  이번 국정감사를 마무리하면서 한나라당은 "국책은행과 공기업 산하기관 등 공공부문의 몰염치가 극에 달했다"며 강력한 태풍을 예고했다. 나를 때려 재미를 본 사람들이 또 나를 공격할 것이다.
  
  3. 자업자득
  
  지난 20년은 내 인생에서 격동의 시간이었다. 우리 집안이 본격적으로 번성하기 시작했던 2차 대전 전후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서구에서 좌파정권들이 들어서면서, 사회복지 부문뿐만 아니라 기간산업들이 대거 국유화되었다. 당시는 보수당조차 나의 가치를 한껏 인정해 주었다. 그래서 우리 동네는 일자리도 안정적이었고 노사관계도 평화로운 곳이었다.
  
  출발 목적은 다소 달랐지만, 한국에서도 나는 권위주의 권력의 후원을 받으며 순조롭게 성장한 편이다. 물론 노사관계도 화목했다. IMF 위기 이후 구조조정의 회오리가 몰아치기 이전에는.
  
  언제부턴가 내가 원성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대처는 나를 거의 '바이러스'로 취급하고, 김대중은 꼭 손봐야 할 '깡패' 다루듯 했으며, 요즘 시민들은 자신의 지갑을 파먹는 '탱자탱자족' 쯤으로 여긴다. 그 좋던 시절이 이렇게 쉽게 가버릴 줄이야….
  
  사실 나도 할 말이 없다. 간혹 '자업자득'이라는 생각도 든다.
  
  대처가 영국통신을 민영화의 첫 대상으로 삼은 이유는 영국 국민들이 통신에 가장 분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중전화 박스 유리창은 여기저기 깨어져 있고 주변 분위기도 스산한데 오늘도 공중전화가 동전을 먹어버릴 때, 사람들은 세상에서 쌓인 모든 분노를 나에게 쏟아 부었다. 그래서 또 유리창이 깨어졌으니….
  
  한국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환경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니 공기업인 한국전력공사를 못마땅해 했다. 오죽하면 '공룡 공기업이 아니라 민간기업이면 환경감시가 수월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겠는가?
  
  토지공사, 주택공사에 대한 서민의 불만도 크다. 공공기관이 공공임대주택이 2%대에 불과한 현실을 통탄하기보다는, 드러내놓고 분양차익부터 챙기니 원성이 높아지는 건 당연하다.
  
  얼마 전엔 한 공기업이 직원들에게 창립기념품으로 고가의 노트북을 지급해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이어서, 어느 금융공기업에서는 직원 2400명 중 연봉 1억 원이 넘는 사람이 406명이라는 점이 밝혀져 세상을 놀라게 했다.
  
  4. 나는 애초부터 '없었다'
  
  그렇다. 신자유주의가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는 시장만능주의라면,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는 데 기여한 자 중 하나가 역설적이게도 나다.
  
  서민에게 꼭 필요한 서비스는 이윤의 논리를 넘어 공적 영역에서 생산되고 분배되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내가 탄생했는데, 오히려 서민의 원성을 낳게 했으니, 그래서 서민들을 더욱 시장의 품으로 가게 했으니 내가 죄인이다!
  
▲ 멕시코시티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끊긴 철도. ⓒ프레시안

  지금까지 나를 심판한 사람은 대처도, 김대중도, 노무현도 아니라 바로 내가 섬겨야 하는 서민들이었다. 이들이 나를 공공서비스의 온전한 생산자로 여기기보다는 자신을 괴롭히는 '공공의 적'으로 간주했다.
  
  이들이 대처와 김대중과 노무현을 지지했고, 나를 구조조정 하라고 그들에게 요구한 것이다. 그래서 서민들을 실망시킨 장본인이 바로 나이며, 오늘날 나를 벼랑으로 내몰아 간 것도 결국 내 자신이다.
  
  한국에서 우리 집안은 처음부터 엉터리였다. 집권세력이 권위주의 지배의 도구로 나를 이용했고, 툭하면 군대에서 배운 낙하산을 내려보내 주위를 소란스럽게 했다.
  
  내가 서민에게서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한, 나의 정체성도 생겨날 수 없지 않은가? 어쩌면 나는 애초부터 '없었다'.
  
  5. '공공의 적'이 아니라 '공공의 벗'이 되고 싶다
  
  나의 이름을 제대로 찾고 싶다. 난 시장의 폭력을 제어하는 '공적 지팡이'고 싶다. 내가 제대로 서야 이윤에 눈 먼 사람들을 혼내주고, 서민들에게 괜찮은 공공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난 공공의 적이 아니라 공공의 벗이 되고 싶다.
  
  새로 태어나고 싶다. 지금의 나를 소개하라면 '관료화, 상업화'가 제 격이다. 구석구석 관료적 틈새를 만들어 숨어 왔다. '무늬'는 공기업이지만, 국가독점 시장기업으로 군림해 왔다. '비효율'로 낙인 찍히지 않기 위해 수익성을 쫓아 살아 왔다.
  
  근래 진보세력이 사회공공성을 외치고 있는 것을 안다. 사회공공성은 신자유주의 시장만능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내세운 대안 가치이다. 최소한 공공부문에서 호혜와 연대의 가치를 실현해 나가야만 미래 진보사회를 상상할 수 있을 테니, 당신들에겐 운동의 사활이 걸린 문제일 것이다. 그래서 당신들과 연대를 제안한다. 나를 제대로 세워 달라, 당신들이 대안세력으로 인정받는 일이기도 하니, 상생의 연대운동이다.
  
  6. 나를 혁신하라
  
  대선이 40여일 남았다. 내가 공공의 적으로 남아 있는 한, 시장, 경쟁, 개방, 민영화, 탈규제 슬로건이 이길 것이다. 내가 공공의 벗으로 다시 태어날 때 비로소 공공성, 연대, 호혜, 사회화, 조정 슬로건이 앞 설 것이다. 보수후보가 나를 가지고 또 우롱하기 전에 나를 혁신할 비전을 밝혀 달라. 어떠한 비판도 달게 받을 테니 말이다.
  
  첫째, 진보세력이 먼저 나의 혁신을 요구하라. 지금까지 공공부문 개혁이 노동자의 퇴출 수단으로 악용되어 왔던 탓에 당신들이 나의 개혁에 소극적이었던 것을 잘 안다. 하지만 공공부문 혁신이 반드시 노동자의 고용불안을 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피하지 말고 맞서 대안을 내라.
  
  임기 동안 대통령 직속 '공공의벗만들기위원회'를 설치해 나를 서민의 서비스 기관으로 거듭나도록 하기 위한 전면적인 대수술을 추진하겠다고 밝혀라.
  
  둘째, '공공부문 관료화ㆍ상업화 백서운동'을 시작하라. 오랫동안 권위주의 체제에 지배당한 탓에 나의 몸 안에 관료주의 잔재가 남아 있고, 정부의 상업화 방침에 이윤논리도 뿌리내리고 있다.
  
  이 운동에는 공공서비스 이용자를 대표한 시민단체, 생산자를 대표한 노동조합, 공익을 대표한 전문가 등이 함께 참여할 것이다. 그 중 핵심주체는 노동조합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 볼리비아 코차밤바의 지방 상하수도 서비스는 세계은행의 압력과 비밀 입찰을 통해 1999년 미국의 초국적기업 벡텔에 매각됐다. 2000년 수도요금이 35% 인상되자 코차밤바의 수만 명의 시민들이 시위를 벌였고, 2000년 4월, 코차밤바 전역을 마비시킨 일주일간의 총파업으로 물 사유화 반대 투쟁은 절정에 달했다. 결국 정부는 물 사유화에 대한 입법을 철회했다. ⓒTom Kruse

  셋째, 나를 평가하는 기준을 제대로 만들어 달라. 난 이윤논리로 재단당하기 싫다. 현재와 같은 시장기업회계로 나를 평가하면, 나의 고유한 역할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종래 기업회계방식에서 벗어나 '공공적 부가가치(public added-value)'를 계량화하고 이를 반영하는 '사회공공회계(social accounting)'를 개발해야 한다.
  
  사회공공회계가 당신에게 생소할 듯 해 몇 줄 더 보탠다. 예를 들어, 철도에 대한 공공적 투자가 확대되고 취약계층 요금할인이 마련될 경우 현행 기업회계 기준으론 손익이 떨어지겠지만, 사회공공회계에선 친환경성, 안정성, 서민 이동권 등 후생효과를 반영해 플러스(+)가 될 수 있다.
  
  토공, 주공이 서민을 위한 공공임대주택을 확대공급하면 기업회계 기준에선 재무구조가 악화되겠지만, 서민의 주거안정화를 통한 사회통합, 민간 부동산시장 거품 제거 등의 후생효과로 인해 토공, 주공은 좋은 공기업이 된다.
  
  교육부문의 경우에도 질 좋은 교육 여건, 인문적 교양 교육 등의 투자가 행해지면, 중장기적으로 범죄율 약화, 창의력 증대 등 잠재적 사회공공가치가 증대되는 정의 효과를 거두게 된다.
  
  넷째, 최소한 우리 집안부터 공공참여이사회가 도입되어야 한다. 공공부문의 불신을 해소하고, 내부민주화를 이루기 위해선 '낙하산'이 아니라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나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
  
  정부가 추천한 공익인사, 공공서비스 이용자인 시민대표, 공공서비스 생산자인 노동자 대표 등이 각 3분의 1씩 참여하는 이사회면 좋겠다. 이 이사회는 한국에선 경영권을 침해하는 불온한 것일지 모르지만 서구에선 이미 오래전부터 정착되어온 제도이다.
  
  오랜만에 글을 썼다. 나의 진정성이 얼마나 전달되었는지, 내가 이러한 글을 쓸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관료적 작풍에 찌든 내가 이렇게 긴 글을 썼다는 게 놀랍다. 그만큼 불안하고 급하다. 어서 나를 구해 달라.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다른 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