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타>가 연 황금시대, '탈근대 코리아'의 조건은…
<피에타>가 연 황금시대, '탈근대 코리아'의 조건은…
[장시기의 '영화로 읽는 세상'] 박정희와 김일성 넘어서기
<피에타>가 연 황금시대, '탈근대 코리아'의 조건은…
I. 4.19 혁명과 5.16 쿠데타 사이

▲ <피에타> ⓒ김기덕필름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2012)가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바야흐로 한국영화의 황금시대이다. 그러나 한국영화의 황금시대가 1990년대 후반 이후 21세기의 문화 한류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1960년의 4.19 혁명과 더불어 한국영화의 황금시대가 도래했었고, 소설과 시를 비롯한 한국문학과 더불어 한국영화는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과 프랑스의 누벨바그 그리고 일본의 뉴저팬 시네마와 함께 새로운 문화 한류의 흐름을 형성했었다. 그것은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시대와 더불어 해방과 한국전쟁을 통한 분단체제로 인한 이승만의 식민지 근대성 체제와 김일성의 폐쇄적 근대성 체제를 넘어서고자 했던 문화적 시도였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과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 그리고 김수영 시인의 <풀> 등등의 시와 소설들과 더불어 김기영 감독의 <하녀>, 홍성기 감독의 <길은 멀어도>, 김화랑 감독의 <울려고 내가 왔던가>, 신상옥 감독의 <로맨스 빠빠>와 <이 생명 다하도록>, 이규환 감독의 <낙화암과 삼천궁녀>, 양주남 감독의 <대지의 어머니> 등등은 21세기 현재의 영화관에서 상영을 해도 전혀 모자람이 없는 훌륭한 영화들이었다.

이러한 시와 소설 그리고 영화들은 네오리얼리즘이나 누벨바그 그리고 뉴저먼 시네마 등등과 마찬가지로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즉 서양과 동양이나 백인과 유색인 혹은 남성과 여성 등등의 이분법을 통하여 지속적인 대립과 갈등을 양산하는 식민지 근대성이거나 폐쇄적 근대성을 강요하는 서구적 근대성을 넘어서고자 했던 시도였다. 그러나 그러한 한국문화 황금기의 시대는 5.16 쿠데타를 통한 박정희 정권의 등장과 더불어 사라져버렸다.

근대 극복의 문화가 사라져버린 1970년대 중반, 미국의 <타임스>지가 선정한 세계 3대 독재자들은 아프리카 우간다의 이디 아민 대통령과 싸우스 코리아(South Korea)의 박정희 대통령, 그리고 노쓰 코리아(North Korea)의 김일성 주석이었다.

1970년대의 박정희와 김일성은 코리아의 남과 북을 지배하는 독재자로 세계 방방곡곡에 그 유명함을 과시함과 동시에 서구 유럽의 전 지구적 확산으로 이루어진 지구촌 근대화 과정에서 비서구 지역들에 존재하는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근대성의 두 가지 축면을 대표한다. 그것은 박정희가 대표하는 식민지적 근대성과 김일성이 대표하는 주체적 근대성이다.

박정희의 식민지적 근대성은 미국을 추종하기 때문에 서구 유럽이 만든 지구적인 근대성의 측면에서 일본과 유사한 세계적 근대성의 요인이 존재하고, 김일성의 주체적 근대성은 세계를 주도하고 있는 미국을 적대시하기 때문에 서구 유럽이 만든 지구적인 근대성의 측면에서 과거의 중국과 유사한 폐쇄적 근대성의 요인을 지니고 있다.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사회와 국가도 항상 서로서로의 관계 속에서 나름의 장점과 단점으로 드러나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이것은 지난 2000년의 6.15남북공동선언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나눈 대화의 일부이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식민지적 근대성과 폐쇄적 근대성이라는 근대적 이중성의 단점들을 넘어서서 그들이 지니고 있었던 세계적 근대성과 주체적 근대성이라는 근대적 이중성의 장점들을 되살려 싸우스와 노쓰의 대립과 갈등을 넘어서는 탈근대의 코리아를 만들기 위하여 6.15남북공동선언을 한 것이다.

▲ <실미도> ⓒ플래너스(주)
그러나 오늘날 이명박 정부 하의 대한민국, 그리고 박정희의 딸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의 등장은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지난 20세기의 박정희와 김일성을 다시 불러내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일본의 제국주의 지배를 계승한 미국이 선진국과 후진국이거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분법을 통하여 서구적 근대성을 지속시키는 근대적 세계에서 박정희와 김일성은 지난 20세기의 한반도가 낳은 위대한 근대적 지도자들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들의 위대함은 온전한 하나의 위대함이 아니라 반 쪼가리의 위대함이고, 그들이 대표하는 식민지 근대성과 폐쇄적 근대성은 온전한 하나의 한반도가 아니라 한반도의 반쪽인 싸우스 코리아나 또 다른 반쪽인 노쓰 코리아를 대표할 뿐이다. 이러한 근대성의 이중성은 단지 박정희와 김일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지난 20세기의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시대와 해방 이후 남과 북의 분단 상황에서 서로 같으면서 서로 다른 근대국가를 추구했던 싸우스 코리아인과 노쓰 코리아인은 박정희와 김일성이라는 두 가지 근대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영화와 현실에서 모두 드러난다. 강우석 감독의 <실미도>(2003)에 등장하는 1968년의 '684 주석궁폭파부대'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서 '김일성 모가지 따기' 훈련을 받았지만, 실제로는 '박정희 모가지 따기'를 실행하기 위하여 청와대로 향한다. 이와는 반대로 1980년대 <강철서신>으로 김일성을 추종하는 운동권 주사파의 대부 노릇을 했던 김영환 씨는 1990년대 이후 북한 인권운동가가 되어 박정희 세력의 최전선에서 그 나름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II. 박정희와 김일성의 두 가지 근대성 넘어서기

박정희의 식민지 근대성과 김일성의 폐쇄적 근대성을 넘어서기보다는 다시 박정희를 불러내고 김일성을 불러내어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독재시대로 퇴행하고 있는 정치적 상황에서 시와 소설, 그리고 영화의 문화 한류가 시작되었던 1960년 4.19 혁명과 1961년 5.16 쿠데타 사이의 4.19 혁명 시대를 다시 한 번 되새김질해보자. 이승만의 식민지 근대성과 김일성의 폐쇄적 근대성을 넘어서고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이승만을 계승하여 박정희의 식민지 근대성과 김일성의 폐쇄적 근대성을 부활시켰던 1960년과 1961년 사이의 4.19 혁명 시절은 오늘날과 유사한 문화적 해방의 시대였다. 그러한 문화적 해방의 4.19 혁명 시절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김수영의 유작 시 <김일성 만세>이다.

철학자 강신주 교수가 한 대학의 특강에서 다루어 화제가 되고, 한만수 교수가 프레시안에 연재하고 있는 [한만수의 '백 년 동안의 검열'] 칼럼의 "'김일성 만세'와 국가보안법"(☞ 바로가기)에서 다시 언급된 김수영의 유작 시는 당시에 발표된 최인훈의 소설 <광장>과 마찬가지로 '4.19 혁명과 5.16 쿠데타 사이'에 있었던 식민지 근대성과 폐쇄적 근대성을 모두 넘어서고자 했던 주체적이며 세계적인 탈근대성의 구체적 역사성을 제시하는 시이다. 문제는 김수영의 유작 시 <김일성 만세>가 보여주는 특이성은 5.16 쿠데타를 통한 박정희의 등장과 '박정희 만세'를 부르는 식민지 근대성의 대한민국을 예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시에 등장하는 '조지훈이란 시인'이 대표하고 있는 일제 식민지 시대의 교육을 받고 자란 식민지 근대성 인문학 지식인들과 '장면이란 관리'가 대표하는 미국 교육을 받고 자란 식민지 근대성 사화과학 지식인들을 구성하는 식민지 근대성의 지식과 권력이다.

김수영의 시를 음미하면서 4.19 혁명 시절의 문화 한류를 계승하고 있는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2000)과 임상수 감독의 <그때 그 사람들>(2005)을 살펴보자.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밖에

김수영 시인은 이승만 체제와 김일성 체제를 넘어서고자 했던 4.19 혁명의 상황에서 "김일성 만세"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 나는 잠이 올 수밖에"라고 말한다. 당시의 대학과 언론의 지식권력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던 조지훈으로 대표되는 인문학적 지식인들이 식민지 근대성에서 허우적대고 있으니 김수영 시인이 세상사 다 팽개치고 "잠이 올 수밖에"에 더 있겠는가? 그러나 김수영은 "김일성 만세"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라는 정치권력의 식민지 근대성의 논리에서 "나는 잠이 깰 수밖에"라고 이야기한다.

수십 명의 학생들의 죽음과 수백 명의 시민들이 상처를 입고 달성한 4.19 혁명에 의하여 만들어진 민주당 정부의 관리가 오직 식민지 근대성에 안주하여 주체적 근대성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으니 더욱 강력한 식민지 근대성의 정치인들이 등장할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래서 김수영은 "나는 잠이 깰 수밖에"라고 말한다. 아니나 다를까? 5.16 쿠데타를 통한 박정희 정권의 등장은 이승만보다 더 강력한 식민지 근대성의 정부와 국가를 만들었다. 한반도의 남과 북을 모두 독재체제로 만드는 식민지 근대성과 폐쇄적 근대성을 넘어서서 주체적 근대성과 세계적 근대성을 결합하여 탈근대적 한반도를 만들고자 했던 김수영 시인과 마찬가지로 김지하 시인이나 장준하 선생과 같은 지식인들도 "잠이 깰 수밖에" 없지 않은가? 또한 일제 식민지 교육이나 미국의 신자유주의 교육이 아닌 자율적 근대교육을 받은 대학생들도 "잠이 깰 수밖에" 없지 않았던가? 그것이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의 대한민국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박정희 정권에 의해서 장준하 선생님처럼 죽음을 당하거나 김지하 시인처럼 아직도 고문의 상처에서 시름하고 있다. 따라서 식민지 근대성의 대한민국에서 온전하게 잠에서 깨어나 지난 근대화 과정에서 만들어진 북조선의 폐쇄적 근대성과 남한의 식민지적 근대성을 넘어서서 북조선의 주체적 근대성과 남한의 세계적 근대성을 결합하여 주체적 세계성이라는 한반도의 탈근대성을 이야기하는 지식인들은 대한민국이 제도적 민주화를 달성한 1990년대 이후의 세대들이다.

▲ <공동경비구역 JSA> ⓒ명필름
그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1990년대 후반부터 이루어진 문화 한류의 영화를 대표하는 박찬욱 감독과 임상수 감독이다.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에 등장하는 북조선 인민군 중사 오경필(송강호 분)과 전사 정우진(신하균 분), 그리고 남한의 국군 이수혁 병장(이병헌 분)과 남성식 일병(김태우 분)은 <실미도>에 등장하는 식민지적 근대성이나 폐쇄적 근대성에 매몰되어 있는 1960년대나 70년대의 인물들이 아니다. 그들에게 김일성이나 박정희는 중국의 모택동이나 장개석처럼 단지 과거의 인물들일 뿐이다. 역설적이게도 미군이 관할하고 있는 공동경비구역에서 주체적 근대성을 추구하는 사람은 남한의 이수혁 병장과 남성식 일병이고 세계적 근대성을 추구하는 사람은 북조선의 오경필 중사와 정우진 전사이다. 그들이 공동경비구역의 북측 막사에서 감광석의 노래를 듣거나 오리온 초코파이를 먹으면서 나누는 대화는 박정희의 식민지적 근대성과 김일성의 폐쇄적 근대성에서 벗어나 세계적 근대성과 주체적 근대성이 서로 결합한 주체적 세계성을 지닌 탈근대인의 모습들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여전히 식민지 근대성과 폐쇄적 근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반도의 분단 상황이다. 그 분단 상황에서 벗어나 온전하게 박정희와 김일성 넘어서기를 한 사람은 한국계 스위스인 소피 장 소령(이영애 분)이다. 그녀는 최인훈의 <광장>에 등장하는 이명훈처럼 1950년의 한국전쟁에서 남과 북의 그 어느 곳도 선택하지 않은 아버지가 제3국을 선택한 덕분으로 스스로 주체성과 세계성을 두루 갖춘 탈근대인이 되었다. 그녀는 싸우스 코리아인도 아니고 노쓰 코리아인도 아니면서 싸우스와 노쓰를 모두 아우르는 코리안 스위스인이다. 그녀는 김일성주의자도 아니고 박정희주의자도 아니면서 김일성주의와 박정희주의를 모두 넘어서는 탈근대인이다.

그러나 그녀는 세계에서 그 유례가 없는 근대적 분단 상황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공동경비구역의 판문점에서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태생적으로 남한이나 북조선의 어느 하나를 조국으로 선택해야만 하는 오경필 중사와 이수혁 병장에게 안타까운 연민을 보낼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친구들과 사랑하는 연인들처럼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주체적이며 세계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폐쇄적이며 식민지적인 관계로 만드는 남과 북의 근대적 대립과 갈등이 너무나도 안타까운 것이다. 이런 상황은 죽은 김일성이 되살아나는 것이고, 또한 죽은 박정희가 되살아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죽은 박정희를 되살리는 것은 죽은 김일성을 되살리는 것이 되고, 죽은 김일성을 되살리는 것은 죽은 박정희를 되살리는 것이 되는 것과 같다.

▲ <그때 그 사람들> ⓒMK Pitures
임상수 감독의 <그때 그 사람들>은 김수영의 <김일성 만세>라는 시가 보여주는 것처럼 대한민국 식민지 근대성의 한계를 잘 보여준다. 김수영의 <김일성 만세>가 1960년대의 4.19 혁명 시절에 이승만의 식민지 근대성을 계승하는 박정희의 등장을 예견하는 것처럼 임상수 감독의 <그때 그 사람들>은 1979년 박정희의 죽음이 다시 박정희의 식민지 근대성을 계승하는 전두환 정권의 등장을 예견하도록 만든다. 전통적인 보수성을 대표하는 부산과 마산에서 민주화의 열기를 뜨겁게 타오르게 했던 '부마항쟁'을 겪으면서 1979년 10월 26일의 김재규에 의한 박정희의 암살은 1980년 잠시 동안 식민지 근대성과 폐쇄적 근대성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서울의 봄'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임상수 감독의 <그때 그 사람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당시의 대한민국을 지배한 사람들은 '장면이란 관리'와 같은 정치인들도 아니고 '조지훈이란 시인'과 같은 학자들도 아니었다. 오랜 식민지 근대성으로 인하여 미군의 지배와 통제를 받으면서 같은 언어와 역사를 기지고 있는 이웃들에게 총과 칼을 겨누고 있는 군인들이 박정희의 시신을 감싸고 국회를 지배하고, 언론을 장악하고 있다. 박정희를 암살한 새벽, 미래를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김재규(백윤식 분)의 심복이었던 주 과장(한석규 분)이 텅 비어 있는 중앙청 앞 도로를 갈팡질팡 운전하는 모습은 미래의 희망을 보지 못하는 식민지 근대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박정희보다 더 강력한 전두환의 신자유주의 식민지 근대성이 판을 칠 수밖에….

III. 탈근대의 지식과 권력

서구적 근대성을 모두 부정하는 폐쇄적 근대성의 대안이 서구적 근대성을 모두 받아들이는 식민지 근대성이 아닌 것처럼, 서구적 근대성의 노예가 되는 세계적 근대성의 대안이 외부와의 단절을 통한 내부의 통제로 이루어진 주체적 근대성은 아니다. 다행히도 지금은 1960년의 4.19 혁명 시절이나 1980년의 '서울의 봄' 시절과는 달리 식민지 근대성과 폐쇄적 근대성이 대립하고 갈등하는 근대의 시대가 아니다.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가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은 것처럼, 혹은 지난 런던 올림픽에서 브라질과 멕시코와 함께 한국과 일본의 축구 대표 팀이 나란히 4강에 올라간 것처럼 문화적인 삶에서 근대적 서구유럽의 문명과 비서구 지역의 야만, 혹은 근대적 선진국과 후진국의 이분법이 사라진 탈근대의 시대이다.

김기덕 감독뿐만 아니라 박찬욱, 홍상수, 임상수, 봉준호 등등의 수많은 감독들의 영화들이 서구 유럽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들에서 다양한 가지각색의 지구촌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K-팝으로 대표되는 주체적이며 세계적인 대한민국의 탈근대 문화는 다양한 지구촌 가지각색의 사람들과 더불어 삶의 즐거움을 나누고 있다. 중세의 암흑에서 벗어나 근대의 문화를 생산하기 시작한 16세기 서구 유럽의 르네상스 시대처럼 탈근대적 문화의 생산 중심에 있는 대한민국에서 식민지 근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김수영의 지적처럼 '조지훈이란 시인'과 같은 식민지 인문학의 지식인들이고 '장면이란 관리'와 같은 식민지 사회과학의 지식인들뿐이다.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가 베니스 영화제의 황금사자상을 받았다고 호들갑을 떨 필요도 없다. 박찬욱이나 임상수 혹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들은 그동안 베니스 영화제의 황금사자상을 받은 영화들보다 훨씬 더 훌륭하고 주체성과 세계성을 결합한 주체적 세계성이라는 탈근대성의 스크린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문제는 21세기에 맞이한 대한민국 문화의 황금기가 1960년의 4.19 혁명 시절처럼 일시적인 현상으로 그칠 것인가, 아니면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메리카의 여러 지역들에서 서구 유럽과 미국 중심의 제국주의 문화에서 벗어나 지구촌 전체의 탈근대 문화의 형성에 기여할 것인가이다. 그것은 '조지훈이란 시인'과 같은 식민지 인문학의 지식인들과 '장면이란 관리'와 같은 식민지 사회과학의 지식인들이 하루라도 빨리 식민지 지식과 권력에서 벗어나 탈근대의 문화를 토대로 한 탈근대의 지식과 권력을 형성하는 것에 달려 있다.

탈근대의 지식과 권력은 박정희의 식민지 근대성이나 김일성의 폐쇄적 근대성을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박정희의 식민지 근대성에 내재해 있는 세계적 근대성과 김일성의 폐쇄적 근대성에 내재해 있는 주체적 근대성을 결합하여 비서구 유색인 여성뿐만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자연의 생명의 권리와 문화의 권리 그리고 교육의 권리 등등을 보장하는 주체적 세계성의 탈근대 코리아의 문화를 만드는 것이다. 지난 20세기의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코리아의 두 독재자들, 즉 박정희와 김일성의 근대적 망령이 아니라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가 탈근대의 코리아를 만드는 것이다.
overview@pressian.com 다른 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