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년만에 햇빛 본 페론의 출생비밀
113년만에 햇빛 본 페론의 출생비밀
김영길의 '남미리포트' <163> 페론 주치의의 충격고백 (2)
113년만에 햇빛 본 페론의 출생비밀
"생모를 먼 시골에 혼자 살도록 내버려두고 어머니라고 불러보지도 못한 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묻고 살았던 페론은 정말 불행하고 고독한 지도자였다"고 운을 뗀 바레이로 박사는 "그런 죄책감 때문에 나에게 자신의 생모에 대한 비밀을 꼭 밝혀 달라고 부탁했던 게 마지막 유언이 됐다"고 밝혔다.
  
  페론은 당시 원주민 부족들 대다수가 그랬듯이 9살 때까지 어머니의 젖을 물어야 잠을 이룰 만큼 막둥이로 어머니의 애정을 듬뿍 받으면서 성장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생이별을 한 후 사회분위기 때문에 원주민 어머니를 두었다는 사실 자체를 감추며 살아야만 했다.
  
  페론은 그러한 자신의 삶을 노년에 와서야 뼈저리게 후회하며 대통령을 아들로 두었지만 이 사실을 가슴 속에 묻고 숨어살아야 했던 한 가련한 원주민 여인의 일생을 자신의 사후에라도 세상에 알리고 싶어했던 것이다.
  
  임종을 앞둔 페론은 자신의 생모가 겪어야 했던 희생과 그녀의 존재를 세상에 밝힘으로써 어머니에 대한 불효를 일부분이나마 보상해주기를 갈망했다. 그래서 이를 마지막 유언으로 남겼던 것이다. 바레이로 박사가 평생을 바쳐 페론가의 뿌리 찾기에 나섰던 이유다.
  
▲ 페론 대통령의 할아버지였던 또마스 리베라또 페론.그는 유명한 의사였고 아르헨 사회의 저명인사였다. ⓒ김영길

  페론의 생모였던 후아나 소사 똘레도 여사는 자신이 원주민 출신이라는 신분 때문에 아들이 출세에 지장을 받을까 봐 자신을 철저하게 숨겼다. 그녀는 오로지 페론의 출세가도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 하며 평생을 홀로 살다 지난 1953년 수도에서 2000Km 이상 떨어진 아르헨 최남단 도시 꼬모도르 리바다비아에서 한 많은 일생을 마감했다.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 같은 기구한 운명을 가진 비극의 여인이었다.
  
  이어지는 페론가의 기록은 상당부분 바레이로 박사가 25년 넘게 아르헨 전국을 누비며 페론과 유년시절을 함께 보냈던 생존자들의 증언과 도서관, 시청, 개인 소장자료 등을 인용한 것이다. 여기에 첨부하는 각종 사진자료들도 바레이로 박사의 게재 허락을 받아 필자가 재촬영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페론은 부에노스아이레스주 로케 페레스라는 작은 시골농장의 두 칸짜리 오두막집에서 태어났다. 그것도 16세의 원주민 소녀와 의사 지망생이었던 결핵환자 백인청년 사이에서 말이다.
  
  '아르헨군의 주적이 된 떼우엘체 원주민 부족'
  
  지난 1880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아르헨 수도로 결정한 연방정부는 원주민 말살 정책을 펴 아르헨 전역에서 원주민들의 '씨 말리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유럽 각국에서 곡물과 육류의 주문이 밀려들자 라빰빠 지역의 가축농장 관리와 곡물 재배를 위한 일손 확보 차원에서 원주민들의 거주를 마지못해 허용했다. 일종의 노예 같은 일꾼 확보를 위한 것이었다.
  
▲ 의학도였던 페론의 아버지 마리오 또마스 페론. 그는 폐결핵에 걸려 요양 중 원주민 소녀를 알게 되고 사랑에 빠진다. ⓒ김영길

  이에 앞서 아르헨 군부는 칠레 국경과 아르헨 남부를 지배하던 떼우엘체 부족이 독립을 위한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켜 이의 진압을 위해 수많은 희생을 치렀던 악연을 가지고 있었다. 용맹스런 떼우엘체 부족과의 전쟁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던 군은 이 부족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을 살려두면 두고 두고 화근이 될 것이라는 게 군부의 공식적인 입장이었다. 당시 아르헨군은 원주민 떼우엘체 부족을 주적(主敵)으로 삼고 있었다는 얘기다.
  
  이런 시대상황 가운데 떼우엘체 부족의 생존자이자 나중에 페론의 생모가 되는 소사 똘레도 가족은 수도에서 130Km 정도 떨어진 로케 페레스라는 농장지역에 천막을 치고 삶의 터전을 잡게 된다.
  
  똘레도 가족은 성인들은 농장에서 각종 잡일을 도맡아 노예 같은 생활을 보내면서도 아이들은 서양교육을 시켰다. 수도와는 다르게 농촌 지역에서는 원주민들과 이민자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아이들 교육 등은 원주민일지라도 백인 이민자 후손들과 함께하도록 눈감아주는 분위기였다.
  
  이 무렵, 그러니까 1885년 촉망 받던 의학도 마리오 또마스 페론(1867~1928)이 폐결핵 치료와 요양을 위해 이 지역으로 내려오게 된다. 당시 사회분위기는 결핵 환자들은 일반사회와 격리돼야 하며 주기적으로 의사들의 검진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리오 페론은 당시 아르헨에서 유명한 의사였던 아버지의 배려로 로케 페레스 지역에 조그만 규모의 농장을 마련하고 근처의 유일한 도시였던 로보스시 지역 유지들과 안면을 넓혔다.
  
  사회와 격리된 채 양떼를 먹이며 5년 동안 요양생활을 하던 청년 마리오 페론은 1890년 어느 날 이웃농장의 원주민소녀를 알게 되고 잔심부름과 집안 청소 등을 부탁하게 된다. 당시 주변 농장에 살았던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 원주민 소녀는 신식문화에 목말라 있었고 스페인어를 잘하는 원주민을 신기하게 여겼던 페론은 부족한 일손과 자신의 병간호를 위해 이 원주민 소녀가 필요했었다는 것이다.
  
  '원주민 가문에 호적 올린 사생아 후안시또 소사'
  
▲ 아르헨 군의 앙숙이었던 떼우엘체 원주민 부족의 피를 이어받은 페론의 생모 후아나 소사 똘레도 여사. 중년이 돼서야 사진을 찍을 만큼 자신을 숨기며 살았다. ⓒ김영길

  원주민 소녀의 헌신적인 농장 돌보기와 병간호로 병세가 호전된 페론은 이웃 로보스시의 지방법원 직원으로 임명되어 법원과 농장을 드나드는 이중적인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던 중 1891년 11월3일 당시 15세의 어린 원주민 소녀는 마리오의 아들을 낳게 되고 가족과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았던 마리오 페론은 자신의 2세 탄생에 고무되어 아예 주거지를 농장 집으로 옮겨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그리고 1893년 10월7일 23개월 만에 마리오는 또 다른 아들을 보게 되는데 이 아이가 훗날 아르헨티나 역사를 바꾼 후안 도밍고 페론이다.
  
  아르헨 역사는 페론이 태어난 곳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100Km 지점인 로보스시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생가를 비공식적으로 지정해 페론 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지난 6월4일 바레이로 박사가 25년간의 노력 끝에 로케 페레스에 있는 두 칸짜리 오두막집이 정부로부터 '페론의 생가'로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페론 가문은 대를 이어갈 마리오 페론이 폐결핵에 걸려 로케 페레스 목장에서 요양했던 사실과 원주민 며느리를 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의도적으로 후안 도밍고 페론의 출생지가 로보스라고 기록해두었던 것이다.
  
  또한 공식적인 페론의 탄생일은 1895년 10월 7일이다. 그러나 바레이로 박사가 현지 호적기록과 생존자들의 증언, 페론의 기억 등을 종합해 페론의 정확한 탄생 일은 1893년임을 밝혀냈다. 이 문제는 지난 1944년부터 공개적으로 거론돼 왔으며 현지 학계와 언론들도 대체적으로 이를 인정하는 분위기다.
  
▲ 지난1999년 바레이로 박사가 처음으로 찾아냈을 당시의 로케 페레스 목장의 페론 생가. ⓒ김영길

  한때 사회로부터 눈총 받던 환자였던 데다 군부와 악연을 가진 원주민 부족 출신과의 혼혈이 된 두 아들을 둔 마리오는 철저하게 은둔생활을 했고 농장과 외부 일의 처리는 동거인인 원주민 후아나 소사(페론의 생모)가 도맡아 처리하도록 했다.
  
  마리오 페론은 수도의 가족을 방문할 때나 농장 밖의 사회생활 속에서는 철저하게 두 아들을 둔 사실과 원주민 동거인과의 관계를 숨겼다. 자신은 미혼이며 환자임을 주장해 그 자신의 부모까지도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손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정도였다.
  
  하지만 미혼모였던 원주민 소사는 큰 아들에게 아벨리노 소사, 둘째에겐 후안시또 소사라고 이름을 지어 사생아로 떼우엘체 가문의 호적에 올리고 양육과 교육에 극진한 애정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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