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의 녹을 먹는 일'과 '우직한 남자의 지어미로 사는 일'
'나라의 녹을 먹는 일'과 '우직한 남자의 지어미로 사는 일'
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31〉 기이편 '내물왕 김제상'조
'나라의 녹을 먹는 일'과 '우직한 남자의 지어미로 사는 일'
『삼국유사』 기이편 "내물왕 김제상'조는 제목부터가 잘못 붙여져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눌지왕 때에 박제상이 고구려와 일본에 볼모로 가 있는 눌지왕의 두 동생 보해와 미해를 구출해 신라로 돌려보낸 뒤 자신은 왜땅에서 화형 당했다고 되어 있음으로 미루어, 제목은 '눌지왕 박제상'으로 바뀌어야 하며 기사의 순서도 기이편 '미추왕 죽엽군' 조 다음에 그냥 둘 게 아니라 '제18대 실성왕' 조 다음에 자리잡아야 한다. 박제상 이야기는 『삼국사기』 신라 본기의 내물왕, 실성왕, 눌지왕 조에 걸쳐서 실려 있는데, 웬일인지 일연은 『삼국사기』를 전혀 참고하지 않은 듯, 곳곳에서 착오를 드러내고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부터 살펴본다.
  
  내물왕 36년(390년) 내물왕의 셋째 아들, 그러니까 눌지왕의 셋째 동생 미해가 열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왜국에 볼모로 간다. 그리고 눌지왕 3년(419년)에는 눌지왕의 둘째 동생 보해가 고구려에 볼모로 간다. 그 후 눌지왕 10년에 왕이 신하들 앞에서 외국에 볼모로 가 있는 동생들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짓는다. 이에 김제상이 고구려, 왜국을 차례로 찾아가 왕의 두 동생들을 탈출시켜 신라로 귀국시키고 자신은 왜땅에서 죽는다.
  
▲ 울주군 두동면의 치산서원(박제상 사당). ⓒ김대식

  눌지왕의 셋째 동생 미해가 390년에 왜국에 볼모로 가고, 둘째 동생 보해가 거의 30년 후, 눌지왕의 재위 기간인 419년에 고구려에 볼모로 간다는, 『삼국유사』의 기사는 『삼국사기』의 기사들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삼국사기』의 관련 기사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내물왕 37년(391년) 내물왕은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다. 실성은 9년 동안 고구려에 머물러 있다가 내물왕 46년 신라로 돌아온다. 이듬해 내물왕이 죽자 실성이 왕위에 오르고 실성왕은 즉위하던 해(401년)에 내물왕의 셋째 아들 미사흔을 왜국에 볼모로 보낸다. 그리고 실성왕 11년에는 내물왕의 둘째 아들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다. 그러던 중 실성왕 16년에 내물왕의 맏아들 눌지가 실성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눌지왕 2년에 박제상이 고구려에 가서 복호를 데려오고, 그해 가을에는 미사흔이 왜국에서 도망해 돌아온다.
  
  『삼국사기』의 기사는 『삼국유사』의 그것과 사뭇 차이를 보이면서 『삼국유사』보다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우리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하여 내물왕과 실성왕 사이에 갈등이 있었으며 그 갈등의 여파로 실성왕이 의도적으로 눌지왕 형제들을 고구려와 왜국에 볼모로 보냈음을 알 수 있다. 또 그에 대한 보복으로 눌지가 실성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후, 박제상의 힘을 빌어 고구려와 왜국에 볼모로 가 있던 동생들을 구출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 치술령 정상 아래의 망부석 전경. ⓒ김대식

  정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즉위 당시의 눌지왕은 자신의 동생 둘이 각각 신라와 대치하고 있는 고구려와 왜국에 볼모로 잡혀 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대외적으로 운신의 폭이 매우 좁은, 난감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따라서 두 동생을 적국으로부터 구출하는 문제는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 중의 하나였는데 박제상이 이를 일거에 해결함으로써 눌지왕의 정치적 입지가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유사』의 '내물왕 김제상'조 기사는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군신관계를 주제로 삼아, 박제상의 충성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신이 듣기로, 임금에게 근심이 있으면 신하가 욕을 당하며,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는다고 합니다. 만일 일의 어렵고 쉬운 것을 따져서 행한다면 이는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옵고 또 죽고 사는 것을 생각한 뒤에 움직인다면 이는 용맹이 없는 것입니다. 신이 비록 불초(不肖)하오나 왕의 명령을 받아 행하기를 원합니다."
  
  이 말을 했을 때 박제상은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제상이 고구려로 들어가서 보해를 데리고 신라로 돌아오자 눌지왕이,
  
  "마치 한 몸에 팔뚝이 하나만 있고, 한 얼굴에 한 쪽 눈만 있는 것 같구나."
  
  라고 말하여 왜국에 있는 미해마저 데려와 달라는 뜻을 내비쳤을 때, 제상이 그 자리에서 왕을 하직한 후, 집에 들리지도 않고 다시 길을 떠나 왜국으로 향했던 것도 애초부터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물왕 김제상'조는 이처럼 지극한 제상의 충성을 보여준 데에 이어 후반부에서는 남편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박제상 아내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박제상이 고구려에서 보해를 구출해 온 후, 곧바로 다시 왜땅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들은 제상의 아내는 남편을 뒤쫓는다. 제상의 아내가 말을 달려 율포에 이르러 보니, 남편은 이미 배에 올라 있었다. 제상의 아내가 애타게 불렀으나 남편은 손만 흔들 뿐 배를 멈추지 않았다. 이에 앞서 제상의 아내가, 고구려에서 돌아온 남편이 바로 왜국으로 떠났다는 말을 듣고 쫓아가다가 따라잡지 못하고는, 망덕사 대문 남쪽 모래밭에 이르러 길게 드러누워 목놓아 울었는데 친척 두 사람이 양쪽에서 부축하여 돌아가자고 했음에도 제상의 아내는 다리를 벌린 채, 일어서지 않았다고 해서 그 모래밭을 장사(長沙), 드러누웠던 곳을 벌지지(伐知旨)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치술령 정상의 치술신모사 터 비석. ⓒ김대식

  이 대목에서 우리는, 박제상의 아내가 이미, 제상이 왜땅에서 죽어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제상의 아내는 남편에 대한 사모의 정을 이기지 못하여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서 왜국 쪽을 향하고 통곡을 하다가 죽었던 것이다. 『삼국유사』는 제상의 아내가 마침내 치술신모(鵄述神母)가 되었으며 치술령에 그 당집이 있다고 적고 있다. 우리는 신모(神母)의 위치가 어떠한 것이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박제상의 사건이 일어났던 무렵의 신라는 불교가 공인받기 전이었음에 비추어, 아직 토착신앙이 위세를 떨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고, 토착신앙에서 제상의 아내를 신모라고 부르게 된 데에는 신라 조정이 박제상을 떠받드는 과정에서 그 아내까지 아울러 떠받들게 된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부언하자면, 제상이 충신으로 일컬어지게 되면서 아내는 그에 걸맞는 열녀(烈女)로 추켜지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박제상 부부에 대한 이같이 극진한 대우가 즉위 초의 눌지왕이 처했던 정치적 난국을 타개해 주었던 박제상의 공을 기리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우상화 작업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나는 박제상과 그의 아내의 자취를 찾아서 경주 시내 통일전 가는 길목, 망덕사 터 인근 남천 뚝방의 '장사 벌지지'라고 추정되는 곳을 찾기도 하고, 울주군 두동면에 있는 박제상 사당을 찾기도 했다. 그 사당 동북쪽의 산 정상이 바로 치술령이다. 사당에서 제법 가파른 산길을 한 시간 남짓 올라가면 치술령 정상에 이르게 되는데 치술신모의 당집이 있었다는 곳이 바로 그 근처다. 치술령 정상 바로 아래에는 동남쪽을 향하고 서 있는 망부석(望夫石)이 있고 그 위에 서면, 멀리 바다 쪽이 보인다.
  
  치술령에는 그러나 박제상 아내의 자취만 있을 뿐 막상 박제상의 자취는 없다. 박제상은 왜땅에서 왕제(王弟) 미해를 탈출시킨 후, 목도라는 섬에서 화형을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제상은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도 왜왕의 회유를 뿌리치고 끝까지 '계림의 신하'로 일관했던 일로 만고의 충신으로 불리고 있다.
  
▲ 일본 대마도의 박제상 순국비. ⓒ김대식

  '충신'과 '열녀'. 박제상이 애초부터 죽음을 각오하고 나섰고, 그 아내 또한 남편이 죽음을 각오하고 나섰음을 알고 있던 터에, 사후에 그들에게 붙여진 이런 호칭들은 한갓 공치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호칭이, 박제상의 공을 치하하고 제상을 사랑했던 여인의 애닯음을 기리고자 하는 뜻을 넘어서, 나라의 녹을 먹는다는 것이 때로는 목숨까지 바쳐야 하는 두려운 일이 될 수 있으며, 또한 우직한 남자의 지어미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애달픈 일이 될 수 있는지를 아울러 말해주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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