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만큼 힘들다
아는 만큼 힘들다
[이종범의 사림열전] 김일손(金馹孫): 당신의 죽음은 하늘의 시샘이었다 ⑥
2007.11.12 00:39:00
아는 만큼 힘들다
죽음 앞에서
  
  탈상이 얼마 남지 않은 연산군 4년(1498) 정월이었다. 나라 사정이 금나라에 쫓겨 남쪽으로 내려간 북송의 어지러운 시절 같았다. 「유월궁부(遊月宮賦)」에 소회를 풀었다. 유월궁은 달나라로서 임금이 정사를 잊고 노닐던 방탕의 장소를 가리킨다.
  
  바둑으로 천하를 내기하듯 賭天下於碁局
  판을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기다 돌을 떨어뜨리니 謾推枰而落子
  바로 승패가 결정되었네 俄勝敗之兩決
  이백 년 왕업이 二百年之基業
  한 판 노름에 망하고 輸孤注於一擲
  갈 곳 없이 남과 북으로 흩어졌네 各飄然而南北兮

  
  임금이 유희에 빠지면 나라가 망한다는 노래였다. 또한 연산군이 간언을 듣지 않고 훈구대신과 환관의 말에 의지하며 정사를 팽개치고 사치하고 방종함을 근심하였다. "권간이 나라를 좀먹고 충현(忠賢)을 배척하며 환관을 중히 높이고 토목공사를 일삼는다."
  
  연산군 4년(1498) 7월 김일손은 함양의 남계에 있었다. 모친상을 끝내고 정여창이 살던 근처에 지어놓은 집에서 요양하며 더불어 공부할 요량이었다. 여기에서 금부도사에게 체포되어 국청으로 끌려왔다.
  
  연산군은 『성종실록』 편찬을 위하여 실록청(實錄廳)에 수합된 김일손의 사초를 직접 읽고 국문하였다.
  
  연산군 : 네가 『성종실록』에 세조대의 일을 기록했다는데 바른 대로 말하라.
  김일손 : 신이 어찌 감히 숨기리까. '권귀인(權貴人)은 바로 덕종(德宗)의 후궁(後宮)이온데 세조께서 일찍이 부르셨는데도 분부를 받들지 아니했다'는 사실을 듣고 적었습니다. 『연산군일기』 4년 7월 12일

  
  또한 연산군은 '세조는 소훈 윤씨(昭訓 尹氏)에게 많은 전민과 가사를 내렸고 항상 어가가 따랐다'는 사초에도 신경을 곧추세웠다. 권귀인과 윤소훈은 성종의 생부로 덕종(德宗)으로 추존된 의경세자(懿敬世子)의 후실로서 세조의 며느리들이었다. 궁정의 숨기고 싶은 비밀이었다.
  
  연산군은 자신을 거듭 비판한 김일손을 '왕실을 능멸하였다'는 빌미로 죽이고 말겠다는 살기를 품었다. 출처를 집요하게 추궁하였다. 김일손도 완강하였다. "사초의 출처를 밝히면 실록은 폐지될 것이다." 그러나 무서운 불 담금질에는 어쩔 수 없었다. 허반(許磐)에게 들었음을 실토하였다. 세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던 권귀인의 조카이며 양자이기도 하였다.
  
  허반도 바로 잡혀왔다. 언젠가 좌의정 홍응(洪應)에게 '세자는 훗날 다음 대를 이을 임금이 되면 만백성이 우러러 의지할 분인데, 지금 환관과 함께 거처하고 서연(書筵)에 나아가는 때가 적고 놀며 희롱하는 때가 많다'는 걱정을 털어놓았다가 연산군에게 들킨 적이 있었다. 이미 죽을 목숨이었던 것이다.
  
  국문은 계속되었다. 연산군이 '소릉의 관을 파서 바닷가에 버렸다'는 사초를 들이대며, '세조에게 반심(反心)을 품은 증거이다'라고 하였을 때에도 김일손은 당당하였다.
  
  성종 대에 출신한 신이 소릉에 무슨 정이 있으리까. 임금의 덕은 인정(仁政)보다 더한 것이 없으므로 소릉을 복구하기를 청한 것은 군상(君上)으로 하여금 어진 정사를 행하시게 하려는 것입니다. 『연산군일기』 4년 7월 12일
  
  소릉복위는 어진 정사의 첫 단추라는 것이다.
  
  이튿날에도 김일손은 사관의 책무를 말하며 바른 기록이야말로 임금과 국가에 대한 충성의 발로임을 강조하였다. "예로부터 사관은 순과 우와 같은 성군의 부친이라도 그 악행을 숨김없이 바른대로 적었으며, 공자 역시 『춘추』에서 당대 임금의 조그마한 잘못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진실 기록: 고난의 행군
  
  김일손의 다른 사초들이 속속 들춰졌다. 즉 '박팽년·하위지의 재주를 애석히 여긴 세조가 이들을 살리고자 신숙주를 보내어 효유(曉諭)하였으나 모두 듣지 않고 죽었다'거나, '탄선사(坦禪師)가 시구(屍柩)를 수습한 정분(鄭苯)은 김종서와는 죽음은 같아도 의리는 같지 않다고 하며 죽었다'는 내용 등이었다. 남효온의 『육신전』과 정여창의 「정분전」을 발췌하여 옮긴 것이었다.
  
  또한 성종 21년(1490) 3월 경연에서 노산군의 입후치제를 주장한 직후에 작성한 사초에 있는 '노산군의 시체를 숲 속에 던져버리고 한 달이 지나도 염습하는 자가 없어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와서 쪼았는데 한 동자가 밤에 와서 시체를 짊어지고 달아났으니, 물에 던졌는지 불에 던졌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한 내용도 문제가 되었다. 남효온과 같이 방문한 원호에게 들었던 이야기였는데, 여기에 「조의제문」의 전문을 덧붙여 놓았었다. 『세조실록』에 실린 '노산군이 영월에 있을 때 금성대군과 송현수(宋玹壽)·정종(鄭悰) 등이 형벌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을 매고 세상을 마치니 예로서 장사 지냈다'는 사론에 대한 정면부정이었다. 조정은 엄청난 충격파에 휩싸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조의제문」이 거론되지 않았다. 그런데 유자광이 「조의제문」에 덧붙인 '김종직이 과거하기 전에 꿈속에서 보고 느낀 바대로 충분(忠奮)에 부쳤다'는 평가를 근거로 세조의 정변과 찬탈의 풍자임을 조목조목 밝히면서 사태는 일변하였다. 7월 15일, 김일손이 잡혀온 지 3일 만이었다.
  
  권오복과 권경유도 즉각 잡혀왔다. 권오복은 '「조의제문」은 간곡하고 측은하고 침착하고 비통하여 남이 말 못하던 데를 말하였다'고 하였고, 권경유는 '「조의제문」은 충의가 격렬하여 보는 자가 모두 눈물을 흘렸는데 김종직에게 있어 문장은 다만 여사(餘事)일 뿐이다' 고 적었었다.
  
  권경유는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조의제문」을 실은 것은 항우가 의제를 시해한 악행은 만세가 지나도록 통분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초를 작성하는 추관이 '만세가 지나도록 통분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는 구절을 삭제하였다. '단종의 죽음에 대한 원통함도 만세까지 간다'로 읽었던 것이다. 공초를 본 권경유는 이 구절을 뺄 수 없다는 이유로 서명을 거부하였다. 항우의 의제 시해나 세조의 단종 죽임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실로 무서운 고문이 가해졌다. 그러나 '눈을 감고 견디며 아프다고 외치지 않았다.' 연산군이 전해 듣고 '권경유는 강포(强暴)한 자'라고 하였다고 한다. 『연산군일기』 4년 7월 22일에 나온다.
  
  다른 사관의 사초도 문제가 되었다. 홍한(洪瀚)은 '세조께서 화가(化家)를 꾀하고자 하는데 한명회 등이 무사(武士)와 결탁했다'고 하였고, 신종호(申從濩)는 '정창손이 노산군을 벨 것을 처음으로 주장하였는데, 노산군이 비록 세조에게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몸소 섬겼던 정창손이 어찌 베자고 제창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또한 표연말은 '소릉을 헐어버린 일들은 문종에게 저버림이 많았다' 하고, '소릉은 반드시 헐지 않아도 되는데 헐었다'고 적었다.
  이 사초들은 「조의제문」을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당대 최고 훈구공신인 한명회가 배후에서 무력 동원을 획책하였고, 정창손의 의리 없고 떳떳하지 못함을 들춰냈을 뿐만 아니라 세조 치세의 소릉 폐치가 분명 과도한 조치임을 거론한 것이다. 어두운 기억의 저편에서 건져낸 편린이며 망각의 탈출을 위한 진실 기록으로 역사투쟁의 한 장면들이었다.
  
  운명적 만남
  
  김일손은 마침내 무거운 짐을 벗었다. 붓도 함께 내려놓았다. 김일손의 문헌은 무오사화로 가택이 압수되면서 거의 없어졌지만, 백형 김준손의 아들인 김대유(金大有)가 겨우 일부의 시문과 일기를 수습하여 『탁영선생문집』을 꾸몄다. 중종 7년(1512)이었다. 그리고 한참 후인 명종 3년(1548)에 김일손의 일기를 바탕으로 『탁영선생연보』로 엮고서 친동생이며 김일손의 후사로 정해진 김대장(金大壯)에게 맡겼다. 김일손은 초혼의 단양 우씨와 재혼한 예안 김씨 사이에도 아들이 없었다. 이후 사손(祀孫)들이 흩어지면서 『연보』도 사라졌는데, 고종 11년(1874) 춘천의 한 집안의 서책 중에서 발견되어 빛을 보았다. 다음은 『연보』를 중심으로 성종 21년(1490) 27세의 궤적을 간추린 것이다.
  
  1월 연경의 오만관(烏蠻館)에 머물다
  2월 귀국
  3월 노산군(魯山君) 입후치제 주장. 사초에 「조의제문」실음
  4월 『육신전』첨삭 교정. 근친 귀향.
  「영산현감신담생사당기(靈山縣監申澹生祠堂記)」지음
  5월 「매월루기(梅月樓記)」지음
  김굉필과 가야산 유람하고 「조현당기(釣賢堂記)」 지음
  8월 홍문관 부수찬으로 경연 검토관·예문관 검열·춘추관 기사관을 겸함 9월 김시습·남효온과 중흥사 모임
  10월 예문관 대교(待敎)로 승진, 정여창을 후임 검열에 천거
  11월 진하사(進賀使)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으로 떠남
  
  김일손은 이해 봄 노산군의 입후치제를 주장하고, 남효온이 힘겹게 지은 『육신전』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등 국가의 문서를 참조하며 첨삭 교정하였으며, 여름에는 고향에서 신담을 위한 생사당의 기문과 「매월루기」등을 남겼으며 김굉필과 가야산을 돌았다. 그리고 가을에는 정여창을 예문관 검열로 추천하고 북경으로 다시 떠났다. 일 년 사이 두 차례나 북경을 찾은 것이다.
  
  무척 분주한 삶이었다. 그 사이에 남효온과 같이 처음으로 김시습을 만난 이른바 '중흥사 모임'도 가졌다. 세 사람은 사육신의 희생과 노산군의 분한에 관한 많은 사연을 주고받으며 지난 세월의 상흔을 더듬고 쓰린 가슴을 쓸어 담았다. 김일손은 실로 무거운 짐을 지고 달린 것이다.
  
  그러나 김일손이 어두운 과거와 대면하며 역사의 상흔을 기억하게 된 것은 김시습을 만나기 한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5세 때에 선산의 이맹전(李孟專)을 찾았을 때였다.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평생 귀머거리 소경노릇을 하며 세상을 피하던 노(老)선비였다. 『주역』을 제대로 풀이하여 '동방의 주역선생'이라는 의미로 역동(易東)이라 불린 우탁(禹卓) 집안의 규수와 혼인하고 신행 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이맹전의 나이 87세,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이었다. 이맹전이 반가운 마음에 시를 지어 주었을까? 이렇게 되어 있다.
  
  집 옆 맑은 계곡에서 꿈도 많이 꾸었지 宅邊淸澗夢行多
  문득 우리 집에 등잔이 밝게 비추는 것을 알았네 俄覺燈明在我家
  음성과 용모 지척인데 보도 듣지도 못하니 애달프다 惆悵音容違咫尺
  다만 이 몸은 늙고 병들어 가는 나날이네 只因衰病日來加

  
  김일손이 「삼가 경은(耕隱)선생께 올리다」를 바쳤다. 경은(耕隱)은 이맹전의 호다.
  
  선생이 숨어 살며 청맹과니 하신 뜻을 先生韜晦久盲聾
  소자가 어찌 알아 뜻을 같이 하오리까 小子何知意欲同
  밤마다 접동새 우는 소리 끊이질 않는데 夜夜子規啼不盡
  달빛 받아 구의산 빛깔이 더 훤하네요 九疑山色月明中

  
  이맹전을 배알한 후 김일손의 뇌리에는 한때 만백성의 어버이였던 임금이 어디에 묻혔는지도 모르고 제사도 지내지 않는다면 말이 되는가? 현덕왕후는 쫓겨난 임금의 생모라는 이유로 넋마저 문종과 함께 잠들 수 없는가? 무엇 때문에 문종은 종묘에서 홀로 제사를 받아야 하는가? 이렇듯 왕가에 의리도 명분도 없으니 훈구공신이 오만과 방종, 사치와 부패를 일삼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화두가 떠나지 않았다. 운명적 만남이었다.
  
  순례자의 노래
  
  성균관에서 두 형과 공부를 하던 김일손은 남효온을 만나고 원주의 원호를 배알하였다.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집현전 부제학을 버리고 영월에서 흐르는 동강과 제천을 흐르는 서강이 만나 만들어낸 '한반도지형'이 아래로 보이는 산 중턱에 관란재(觀瀾齋)를 짓고 단종의 최후를 가까이서 지킨 은사였다. 평소 백이숙제가 되리라는 뜻을 「탄세사」에 읊었는데 다음과 같다.
  
  저 동쪽을 바라보니 솔잎이 푸르디푸른데 瞻彼東岡 松葉蒼蒼
  부수고 빻아서 주린 배를 채운다 采之擣之 療我飢膓
  아득하다 하늘 한 귀퉁이여 目渺渺兮天一方
  흙빛 같은 암울함이여 구름이 오색 빛을 가리누나 懷黯黯兮雲五光
  아 백이숙제가 아득하여 벗할 수가 없어라 嗟夷齊邈焉寡儔兮
  수양산에서 푸른 풀 뒤적이며 공연히 헛손질하네 空摘翠於首陽
  세상이 모두 의리를 잊고 녹봉을 쫓으니 世皆忘義循祿兮
  나만이라도 몸을 깨끗이 하고 노니는 척하여야지 我獨潔身而徜佯

  
  김일손은 북받쳤다. 「삼가 무항(霧巷)의 탄세사를 받들다」를 올렸다. 무항은 원호의 호다. 이때가 18세였다.
  
  한강물은 흘러 흘러가고 漢之水兮滖滖
  솟아오른 산은 푸르고 푸르러라 起之山兮蒼蒼
  어디선가 들려오는 두견새 울음소리 鵑哭兮一聲
  이 사람의 애간장을 끊어놓네 愁人兮斷腸
  서리가 대지를 덮으니 울창한 숲 빛깔이 변하고 霜滿地兮喬林變色
  구름이 하늘을 가리니 훤한 햇빛이 없어지네 雲遮天兮白日無光
  풍채가 장대한 사람이 若有人兮頎然
  양지 바른 산에 홀로 서 있구나 表獨立兮山之陽
  당신은 이제 떠나 목숨을 버려도 후회하지 않으리 此君一去沒身而不悔兮
  아아 나 또한 따르려고 하며 기웃거리네 我欲從之而徜佯

  
  
▲ 관란정(觀瀾亭)과 원호유허비각
  
  충청북도 제천시 송학면 장곡리. 충청북도 기념물 제92호. 원호가 단종이 유배된 영월의 청령포를 향하여 조석으로 눈물을 흘리며 문안을 드리던 곳으로 손수 가꾼 채소와 과일을 빈 박통에 넣고 물에 띄워 청령포로 보내어 단종께서 드시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세종 5년(1423)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직제학에 이르렀던 원호는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고향인 원주에 내려와 은거하였으며, 단종이 죽자 영월로 가서 2년 상을 마쳤다. 임제의 『원생몽유록』에서 두건을 쓴 호남아로 형상화된 남효온을 하늘에 있는 단종과 사육신에게 인도한 선비로 나온다. 원호의 손자 원숙강(元叔康)은 벼슬에 나갔다가, 『세조실록』편찬 당시 사초에 사관의 이름을 빼고 실록청에 올려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가 장살 당하였다. 이때 원호는 모든 집안의 서책과 문헌을 불태웠다고 한다. 문집으로 『관란유고』가 전한다. 관란정 오른 쪽 비각의 유허비는 홍양호(洪良浩, 1724~1802)가 찬하여 세웠다.

  
  

  문과 합격 후인 성종 18년(1487) 가을에는 파평의 남곡으로 성담수를 배알하였다. 성삼문의 재종제였다. 비바람도 가리지 못할 오막살이 초가집에서 돗자리도 없이 흙바닥에서 밤을 지내고 날이 새면 낚시로 소일하고 있었다. 역시 남효온과 같이 갔는데 열흘을 함께 지냈다. 하루는 술병을 차고 강으로 나갔는데 성담수가 마음이 풀어졌던지 시를 지었다.
  
  낚싯대 잡고 종일토록 강변을 헤매다가 把竿終日趁江邊
  푸른 물에 발 담그고 곤한 잠을 청하니 垂足滄浪困一眠
  백구와 함께 나라 밖으로 날아가는 꿈꾸다가 夢與白鷗飛海外
  깨어나니 이 몸이 석양 아래 있더라 覺來身在夕陽天

  
  김일손이 「삼가 문두(文斗)선생께 올리다」를 바쳤다. 문두는 성담수의 호다.
  
  갈매기 해오라기 때 모르고 강 양편을 날고 도는데 鷗鷺忘機護兩邊
  모래를 깔고 바위를 베고 함께 한가로이 잠이 들었네 茵沙枕石共閒眠
  그대 꿈에 어디를 가서 놀고 왔는지 알 것 같지만 知君一夢遊何處
  지금은 맑은 바람 부는 북쪽 바다 하늘 아래 있을 뿐 只在淸風北海天

  
  성담수를 만난 다음에는 조려를 찾았다. 진주향교의 교수로 있을 때였다. 세조가 임금이 되자 과거를 포기하고 함안의 서산(西山) 아래에서 살았는데, 성담수·김시습 등과 함께 세조 4년(1458) 동학사에서 단종을 위한 초혼제에 참례한 적이 있었다. 낚시질 하던 어계(漁溪)로 호를 삼았는데 이때 69세였다. 무척 좋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다시는 소식이 없었다. 조려가 글을 보냈는데 다음은 그때 시 같다.
  
  한번 가더니만 하늘 끝인가 결국 오지 않고 一去天涯遂不來
  다시 소식이 없으니 무엇을 애달파하랴 更無消息竟何哀
  지금도 홀로 서서 두둑에서 고기 잡으며 如今獨立漁溪畔
  그대가 아니라 소개한 사람을 도리어 원망하노라 不怨伊人却怨媒

  
  조려는 다시 한 번 김일손이 보고 싶었는데 서운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국사에 얽매 있으니 그러겠지 하며 '소개자가 밉다' 하였다. 반전이 좋다. 그런데 누가 소개하였을까? 김일손이 황급히 「삼가 어계(漁溪)선생의 멀리 주신 글을 받들다」를 보냈다. 성종 19년(1488) 어느 날이었다.
  
  숨어 있는 붉은 꽃 누굴 향해 피었을까 幽花一朶向誰開
  봄 숲에 두견새 슬피 울어 창자를 끊는구나 斷腸春林蜀魄哀
  동풍에 휩쓸려 다 떨어진다고 해도 縱被東風零落盡
  단심을 지킬 뿐 벌 따위에 시집을 갈까 守紅不許嫁蜂媒

  
  김일손의 글을 받아본 조려는 이듬해 세상을 떴다.
  
  이렇듯 김일손은 열다섯 살부터 이십 대 후반까지 세조의 치세를 은둔으로 저항한 노(老)선비를 차례로 탐방하였다. 그것은 차라리 순례였으며, 우리나라 기억운동, 당대사 바로쓰기 역사운동의 원형을 잉태한 풍경이었다. 따라서 김일손의 역사투쟁은 결코 섣부른 모험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아름다운 패자와의 진실을 향한, 미래를 전망하는 약속의 실천이었기에 추악한 승리에 매진하는 모습이 비일비재한 오늘날에 더욱 소중하게 새겨야 할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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