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서 '윤리'를 찾는 나르시스트에게 고함
소설에서 '윤리'를 찾는 나르시스트에게 고함
[프레시안 books] 제발트의 <토성의 고리>
2011.11.11 18:25:00
소설에서 '윤리'를 찾는 나르시스트에게 고함
W. G. 제발트의 <토성의 고리>(이재영 옮김, 창비 펴냄)와 나를 연결시켜준 것은 미셸 우엘벡의 <지도와 영토>(장소미 옮김, 문학동네 펴냄)였다. 좀 더 극적으로 말하자면 나에게 있어 <토성의 고리>는 <지도와 영토>의 마지막 문장에서 시작되었다.

"오직 바람에 풀들만이 하늘거릴 뿐. 식물의 압승이다."

생기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이 식물성 세계의 정조는 "완벽하게 마감 처리된 아우디 A6 안과 같은, 고요하고 기쁨이 없는, 무감각한 중립 상태"이며 이것은 우엘벡이 우리에게 종종 보여준 황량한 근미래의 풍경과 닿아있는 감정이다.

우엘벡의 책을 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우연히 제발트의 새 책의 광고인가 기사인가를 보게 되었다. 거기엔 폐허, 문명, 종말 따위의 단어들이 늘어서 있었고 그것은 여전히 내 머리 속에 남아있는 <지도와 영토>의 마지막 장면, 잡초에 뒤덮여 사라져가는 문명의 흔적을 떠올리게 했다.

사실 그 전에도 제발트에 대해 들어왔고, 책을 읽을 기회도 있었다. 하지만 그냥 흘려버렸는데 이참에 흥미를 끄는 주제도 있고 하니 읽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제발트의 책은 한 권 한 권 꾸준히 번역되고 있었고, 작지만 깊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에서만 벌어지고 있는 일이 아니었다. 폴 오스터와 같은 유명 작가가 그의 팬을 자처했고, <뉴욕타임스>와 수전 손택도 그의 편이었다. 누군가는 영감을 받아 영화를 만든다 했고 어디선가는 낭독회가 열리고 있었다.

▲ <토성의 고리>(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창비 펴냄). ⓒ창비

신기한 일이다. 나는 생각했다. 흥미로운 문화 현상으로서 연구할 가치가 있어 보였다. 그러니까 나는, 제발트에 끌리는 사람들이 궁금했다. 왜냐하면 그들을 특정한 하나의 부류로 묶을 수 있을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을 '문학적 인간'으로 지칭하고 싶다. 그것은 '문학인'과 다르며 특정한 세계관을 공유하는 당대의 지식인/예술가를 지칭하는 것에 가깝다. 그 세계관은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종말 후의 세계를 사는 인간이 갖는 최소한의 윤리로 표현할 수 있다. 그것은 홍상수의 세계관과도 연결되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해 특정 종류의 사람들이 제발트에게 열광하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덧붙여 그의 쇠락한 제국의 바닷가를 따라 이어지는 여정이 우엘벡의 (지극히 유럽적인) 묵시록적 비전과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만약 있다면 거기에서 특정 종류의 비관주의를 당대 유럽의 보편 정서로 도출해낼 수 있는지 그 점이 궁금했다.

그리고 나아가 만약 그 비관주의를 당대 유럽을 넘어서 전 세계 '문학적 인간'들의 보편적 정서라고 할 수 있다면, 그 정서를 연구해보는 것으로 지금 우리가 처한 교착 상태를 좀 더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나의 계산이었다. 미리 말하자면 나는 이 교착 상태의 핵심에 윤리를 문학적 제스처로 환원시키는 일종의 문학 지상주의, 즉 '문학적인 것'의 과잉이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문학 대신에 예술, 미라는 말을 넣어도 상관없다.)

<토성의 고리>에 등장하는 서퍽 지방의 묵시록적 풍경은 과연 우엘벡의 책에서 익숙한 것이었다. 물론 우엘벡의 책에서는 그런 풍경이 근미래에 대한 상상적 언급에 그쳤다면 이 책에서는 그런 풍경이 핵심 테마의 역할을 한다. 흥미로운 것은 자연과 종말의 연결 짓기와 그 연결 짓기의 방식이다. 풀에 뒤덮인 과거 부르주아의 대저택, 영국 군대에 처참하게 파괴당한 베이징 근교의 정원, 병해와 폭풍우에 쓰러진 오래된 나무들의 경우와 같이 이 책에서는 자연이 파괴와 끊임없이 짝지어진다. 과거에 행해진 파괴는 폐허와 같은 서퍽 지방의 풍경, 그것을 뒤덮은 잡초로 형상화된다.

그런데 이 모든 장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제목인 "토성의 고리"다. 그런데 토성의 고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연을 넘어선 상징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상상하는 자연은 커져봤자 아마존의 밀림이나 고비의 사막이지 지구를 넘어서 태양계의 단위로 나아가지 않는다. 물론 토성이란 행성은 고대부터 점성술에 의지해온 인간에게 그리 낯선 존재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얼음조각과 부서진 달의 파편으로 이루어진 토성의 고리라고 한다면 그것은 근대 과학의 발견이다. 사람들은 토성의 고리를 우주 과학과 연결시키지 대자연과 연결시키지 않는다. 우주 과학은 인간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압도적인 규모의 존재들에 대한 것이다. 깜깜한 우주 공간 속에서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얼음과 달의 파편의 이미지에는 아무런 인간적인 것이 없다. 이런 인간적인 것의 부재는 제발트의 글에 마치 영원히 하늘에서 빛나는 별과 같은, 탈 역사적 아우라를 덧씌운다.

이런 탈 인간적 정조는 제발트 특유의 감정을 엄격하게 억누르는 금욕주의적 서술 태도와도 잘 어울린다. 문제는 이런 인간적인 것들의 제거가 제발트가 의도했을 성찰과 애도의 글쓰기를 몹시 세련된 에세이 쓰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극도의 회의주의를 스타일로 취하는 포스트모던한 글쓰기로 주저앉힌다는 것이다.

책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나'는 영국의 서퍽 지방으로 여행을 떠난다. 여행을 떠난 지 꼭 1년 뒤에 거의 온 몸이 마비가 된 채로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그 사이에 주인공이 여행하며 본 것들, 그것을 통해 떠오른 사실과 허구가 뒤섞인 과거의 이야기들이 책을 채우고 있다. 문장은 유려하고, 그 유려한 문장이 호명하는 대상은 작가의 높은 교양 수준을 보여준다. 섬세하고, 고유의 스타일이 있으며, 흠잡을 데가 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수전 손택이 에세이 '비탄에 빠진 정신'(<강조해야 할 것>(김전유경 옮김, 이후 펴냄))에서 말하듯이 이 시대의 위대한 문학인가? 그런데 대체 문학이란 뭔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문학, 즉 소설로 보기에는 부족해 보이는 이 책이 문학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은 화자와 관련되어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화자가 갖는 두 가지 형식과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여행과 윤리다. 수전 손택 또한 위의 에세이에서 제발트 문학의 테마 중 하나로 여행, 그리고 여행이자 작가로서의 삶을 꼽는다.

여행자인 작가, 혹은 작가인 여행자라는 인물은 낯선 것이 아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19세기의 유미주의 경향 속에서 나타난 보헤미안에게 닿게 된다. 그들은 보들레르에서 랭보를 거쳐 광인이 되어 오지를 떠돌게 되었다. 그들의 선배와 후배도 적지 않다. 루이 페르디낭 셀린느의 <밤 끝으로의 여행>(이형식 옮김, 동문선 펴냄)의 주인공은 아프리카를 거쳐 미국까지 갔고,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도 떠돌이 여행자 신세다.

제발트는 서퍽 지방을 여행하는 화자를 통해 독자들에게 잊을 수 없이 아름다운 묵시록적인 풍경들을 전해준다. 그리고 그 풍경을 통해서 과거를 기억의 형태로 불러들인다. 그리고 그 기억을 통해 재 대면하게 되는 폐허에는 번영했던 시절의 영광이 풀리지 않을 마법처럼 서려 있다.

그런데 그 마법의 시기는 영국이 한때 부강했던 시절, 즉 근대 자본주의의 호시절과 겹친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제국주의의 호시절과 겹친다. 그러니 좋았던 지난날에 대한 기억은 언제나 그 좋았던 날을 이루기 위해서 벌어져야 했던 어마어마한 폭력에 대한 기억을 끌어당긴다. 그리고 이런 파국에 대한 기억이 바로 제발트의 글이 가진 윤리의 핵심이다.

제발트는 실제로 죽기 얼마 전에 <가디언>과 가진 인터뷰에서 문학의 윤리적 뼈대를 기억과 연관시킨다. 그런데 그것은 독일인으로서 제발트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억과 연관되어 있다. 1944년 독일의 소도시에서 태어난 그는 홀로코스트를 경험하지 못했다. 자라는 동안에도 홀로코스트에 대해서 제대로 듣지 못했다. 17살이 되어서야 다큐멘터리 영화를 통해 그 사건을 대면하게 된다. 이 경험이 그의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게 거대한 사건이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수상한 침묵 속에서 공백으로 남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그에겐 무서운 경고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섬세한 문장은 파괴 속에 상처 입었을 아주 사소한 것도 쉽게 지나치지 않는다. 그것이 물고기이든 나무이든, 아니면 몰락한 부르주아의 자식이든 말이다. 그런 세심함은 눈앞에 펼쳐진, 혹은 풍경을 통해 머릿속에 떠오른 어떤 기억도 놓치지 않겠다는 식의 강박적인 묘사로 이어진다. 그것은 제발트의 글을 끊임없이 두 갈래로 뻗어나가는 길들이 있는 정원처럼 어지럽게 느껴지게 한다. 그것은 보르헤스의 글에서 익숙한 정서이다.

실제로 제발트는 책에서 보르헤스의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를 언급한다. 보르헤스의 그 글에서 화자는 존재하는지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책을, 희미한 단서에 의지하여, 끈질기게 찾아 나선다. 하지만 탐구는 길을 잃고, 결국 이야기는 중단된 채로 끝을 맺는다. 전형적인 보르헤스식의 결말이다. 독자는 처음 가보는 생경한 거리 한복판에서 버려진 듯한 느낌을 받는다.

비슷한 느낌을 독자는 제발트의 글에서 받게 된다. 그것은 기억의 특성 때문이다. 제발트가 서술하는 과거는 사실과 허구가 뒤섞여 있는데 기억도 마찬가지다. 기억은 불완전하고 불확실하다. 하지만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기억에 의지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며, 정확한 지침 없이 기억을 파헤치다 보면 진실을 얻게 되기보다는 혼란 속에서 길을 잃게 되기가 더 쉽다.

제발트는 그것을 개의치 않고 풍경에서 과거의 기록으로, 사람들의 증언에서 허구의 이야기로, 다시 본인의 기억으로 자유롭게 넘나든다. 그 결과 제발트의 글에서 과거는, 과거의 파국에 대한 기억들은 현실과 꿈의 사이에 있는 뭔가로 느껴지며 제발트의 글에 특유의 환각적인 분위기를 부여한다. 그리고 가끔씩 예기치 않게, 여행이 결정적 파국의 장면 앞에서 중단될 때마다, 그 환각적인 분위기는 절제된 슬픔과 애도와 뒤섞여서 일종의 명상에 가까운 치유적인 효과를 가져다주게 된다.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제발트의 글이 갖는 윤리에 대해서 의혹을 갖게 된다. 그의 글은 지나치게 아름답고, 안락하다.

다시 윤리로 돌아와서, 그런데 왜 우리는 문학에 대해서 말할 때 윤리를 말하는가? 좀 더 구체적으로, 요즘 문학가들이 문학에 대해서 말할 때 윤리를 말하게 되는 순간은 언제인가? 그것은 문학의 위기에 대해서 말할 때이다.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문학의 영향력은 보잘것없이 축소되었다. 문학은 학교의 권위로 연명하며 소수의 독자를 위해 존재하는 살롱 문학과 평범한 사람들의 여가 시간을 채워주는 대중(상업) 문학으로 양분되었다. 이 중에서 사람들이 문학으로 지칭하는 것은 전자이고, 그런 전자의 문학이 대중(상업) 문학과 자신의 차이점을 내세울 때 호명되는 것이 바로 문학의 윤리다. 그것이 다른 하찮은 글과 문학을 차별화 시켜주는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나는 문학에 있어 윤리가 일종의 알리바이로 쓰인다는 의혹을 갖게 된다. 다시 말해, 문학적 인간들이 제발트의 글에서 이 시대에 흔치 않은 문학의 흔적을 보면서 열광하는 것은, 거기에서 자신들의 존재 근거를 발견하기 때문이 아닌가? 자신들의 정체성을 정당화하기 위한, 흔치않게 세련된 알리바이를 발견하기 때문이 아닌가?

(이것은 지식인/예술가를 주제/관객으로 다루는 홍상수의 영화가 '사람이 되지는 못해도 짐승은 되지 말자'며 '최소한의 윤리'를 주장하는 사태와 연결되어 있다. 결국 이 시대의 윤리란 사회적 급진성을 잃어버린, 더 정확히 말해 사회의 기득권이 되어버린 어떤 분야/사람들이 자신의 처지를 변명하는 알리바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장되는 문학적인 윤리란 무엇인가? 제발트의 글을 통해 유추하자면 그것은 잊힌 것들을 애도하는 것이다. 파국의 풍경에서 통증을 느끼고, 결국 여행의 끝에 진짜로 몸에 마비를 일으키는, 신음하는 마음이다. 그러니까 이 윤리는, 엄청난 예민함에서 비롯된, 마비시키는 윤리다. 중단시키는 윤리다. 그렇기 때문에 제발트의 글은 소설과 에세이, 허구와 비허구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끼어 있는 글 더미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의 윤리가 무언가가 되기를, 어딘가로 가기를 완강하게 거부하기 때문이다.

뭔가를 이루려는 인간의 광기가 우리 모두를 이런 폐허의 세계로 이끌었기 때문에, 그것을 잊지 않으려는, 그것을 막으려는 의지는 극단적인 회의주의의 형태를 띠게 된다. 이것이 전후의 지적/예술적 운동의 중심에 놓여 있는 회의주의다. 모든 것에 대한 절대적인 회의가 해체와 거부를 거쳐 마비로, 그러니까 완벽한 교착 상태로, 귀결되는 것은 논리적이다. 그러니까 아무데도 갈 수 없다.

그런데 이 비탄에 빠져, 아무데도 갈수가 없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된 마음을 윤리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한가? 그건 이 회의주의를 가져온 원인 세계를 망각한 채로, 회의주의 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된 일종의 종교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혹은 '최소한의 윤리'를 주장하는 스스로를 거울에 비추며 사랑에 빠지는 나르시시즘이 아닌가?

만약 이것을 윤리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리고 이 윤리의 결과물을 문학이라고 한다면 이 윤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문학뿐이다. 아무것도 만들지 못하고 아무데도 이르지 못하지만 오직 문학이 되게 하는 윤리. 그것은 문학을 제외한 모든 것을 불신하는, 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불신을 문학에 대한 열광으로 전도시키는, 지극히 낭만적인, 마음의 구조다.

*

글이 너무 길어져서 자세한 논의는 다음으로 미루고 글을 마무리 하겠다. 공허감을 잊기 위해 여행을 떠났는데 결국 비탄 속에서 온 몸이 마비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는 우울하고 섬세한 여행자에게 작은 기쁨을 안겨줄 정도로 좋은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비탄에 빠져 마비되는 것은 너무 빠르다. 우리의 문명을 부서져 나간 달의 잔해로 보기에는, 아직도 달은 부서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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