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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작가들은 왜 '핵'에 침묵하는가?

[후쿠시마 그리고 1년] 히로세 다카시의 <체르노빌의 아이들>

오창은 문학평론가 2012.03.09 18:33:00

3월 11일,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난 지 딱 1년이 됩니다. 21세기 인류 문명의 전환점으로 기록될지 모르는 후쿠시마 사고, 그 1년을 맞아서 '프레시안 books'는 특집호 '후쿠시마 그리고 1년'을 준비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후쿠시마 사고를 깊고 넓게 볼 수 있는 다양한 시각을 책과 함께 선보입니다. <편집자>

시간이 멈춰버린 도시를 상상해 본다. 그곳은 갑작스럽게 찍힌 정지 사진처럼 거칠지만, 낱낱의 생활의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베란다에는 새까맣게 변한 빨래가 걸려 있고, 거리에는 유모차가 방치되어 있다. 경찰서, 병원, 관공서 건물도 손상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다. 그곳은 사람만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도시이다.

2012년에도 여전히 1986년 4월인 곳.
프리프야트.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
파국의 장소!

1982년 첫 가동될 때 만해도 체르노빌 핵발전소는 구 소비에트 연방의 자존심이었다. 소련 핵에너지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러시아의 물리학자 아나톨리 알렉산드로프는 "소련의 핵발전소는 사모바르(러시아 전통 주전자)만큼이나 안전하다"며, "크렘린 궁전 바로 옆 붉은 광장에 세워도 된다"고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1986년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 이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 30킬로미터 내에 있던 13만5000명이 버스로 강제 이송되었다. 프리프야트는 텅 비어 버렸다.

현재 프리프야트는 서구 유럽인들의 이벤트 장소가 되었다고 한다. 여행사에 의해, 이곳을 방문하는 관광 여행 상품이 개발되었고, 색다른 체험을 원하는 여행객이 간헐적으로 '위험한 방문'을 한다. 이곳은, 할리우드 영화의 배경으로도 자주 등장한다. <트랜스포머 3>는 체르노빌 근처를 스펙터클한 배경 영상으로 활용해 볼거리를 제공한 바 있다. 영화에서 버려진 도시의 풍경은 비밀스러운 것을 간직한 '음모의 장소'가 되어 있었다. 그곳은 우스꽝스러운 역사의 흔적처럼 보였다.

하지만, 비극적 사건은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에서 폭력적으로 다시 발생했다. 우리가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은 체르노빌 핵발전소와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이의 상관관계다. 후쿠시마는 체르노빌을 20세기 역사 속에서 21세기로 다시 소환했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는 현재 세계 31개국에 존재하는 443기의 원자력 발전소를 전향적으로 사고해야 한다고 절규하고 있다. 미국 104기, 프랑스 58기, 일본 54기, 러시아 31기, 한국 21기 등에 대한 대안적 사고를 하지 않으면, 인류의 미래를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를 통해 유추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 <체르노빌의 아이들>(히로세 다카시 지음, 육후연 옮김, 프로메테우스 펴냄). ⓒ프로메테우스
그런 의미에서, 히로세 다카시의 <체르노빌의 아이들>(육후연 옮김, 프로메테우스 펴냄)을 주목하게 된다. 1990년 처음 발표된 이 소설은 '핵의 위험성'을 사실적으로 재현해낸 '절망의 문학'이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믿음이 분노로, 사랑이 절망으로, 생명이 죽음으로 바뀌는 순간을 냉철하게 응시한다. 그리고 자신이 밝혀낸 진실에 이야기의 옷을 입혀 실감 있게 전달한다.

이 소설의 핵심적 문제의식은 구체적 실감이다. 일본에서 '1인 대안 언론'을 구현해낸 뛰어난 활동가인 히로세 다카시는 소설이라는 허구의 형식을 통해 '체르노빌의 진실'을 포착해냈다. 그는 "지금 사람들이 핵발전소의 위험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머지않아 지구는 끝장이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이 작품을 썼다고 이야기했다. 그 절박함에 대한 감정 이입이 체르노빌의 아이인 이반과 이네사, 카리나와 드미트리, 그리고 코랴와 그리를 통해 이뤄진다.

<체르노빌의 아이들>은 열다섯 살의 소년 이반과 열한 살의 소녀 이네사 그리고 어머니 타냐와 아버지 안드레이의 이야기이다. 이 소설의 초반부는 체르노빌 핵발전소의 관리 책임자 중 한사람이었던 아버지 안드레이의 비극적 최후와 이반 가족의 강제 이주 과정이 그려진다. 후반부는 사건을 은폐하려는 음모와 이 와중에서도 생명의 의지를 불태우는 이반과 이네사의 애절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소설은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 희생자들의 실제 경험을 이반과 이네사를 통해 재현함으로써, 그 고통과 희생이 핵발전소를 유지하고 있는 곳에 상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픔의 감각이 약자인 이반과 이네사를 통해 그려지고 있기에, 감정 이입의 강도 또한 높다. 이 소설을 읽다보면, 히로세 다카시의 냉정한 필치가 잔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그 잔인함에는 맥락이 있다. 우선은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가 고통의 출발점이고, 다음으로 사고의 진실을 은폐하려 했던 소련 당국자들에게 책임 있고, 핵발전소 마피아로 일컬어지는 현대의 거대 기술 권력이 폭력의 실체이다. 기묘한 공모가 <체르노빌의 아이들> 속에서 요동치며, 불안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파국의 미래를 예언한다.

한때, 체르노빌은 20세기의 어처구니없는 유산처럼 치부되었던 적이 있었다. 어떤 장소가 배경으로 스케치 되고 있다는 것은 기억의 방식이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시간이 흐르고, 대상과의 거리가 형성되고, 그리고 잊힌다. 그런데,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태로 인해, 체르노빌은 21세기 현재에도 온전히 고통의 목소리가 그대로 전수되어야 할 대상이 되었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의 주민들은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지만, 그 고통이 나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한국에서는 일반적인 것 같다. 그렇기에 1986년 4월은 1987년 6월 항쟁보다 아득하고,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의 핵발전소 사고는 고리, 월성, 영광, 울진의 과장된 안정성에 묻힌다.

'3·11 사태'는 '잊혀진 공포의 귀환'이며, 비극적 파국의 전주곡이다. '잊혀진 것들'과 '예고된 불안'의 싸움이 시작되고 있다. 이것은 은폐하려는 자와 밝히려는 자의 진실 게임이고, 권력과 피억압자의 대립이며, 위험한 과학과 건강한 생명의 사투이기도 하다.

문학비평가로서 나는 '한국 문학과 핵 발전'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시민적 양심으로 문학을 통해 파국적 운명에 대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한국 문학은 왜 핵발전소 문제에 대해 냉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왜 아직도 작가들은 모종의 탐색 속에서 침묵하고 있을까?

그간, 한국 문학은 핵무기 문제를 파국적 결말로 연결시키곤 했다. 장정일의 단편소설 '제7일'(1990년)은 남녀의 극단적 사랑 행위가 "핵폭탄을 가득 적재한 폭격기"의 등장으로 대미를 이루는 서사를 취했다. 1980년대 반미 반핵 운동이 '핵무기의 위험성'을 중심 화두로 삼았다면, '핵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외피'를 쓴 핵발전소 문제에 대해서 한국 문학은 무력했다. 핵무기에서 핵발전소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작가적 인식, 시민사회의 인식이 냉철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한 성찰이 요구되는 것이 지금의 상황이다.

다음으로 구체적 실감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한국 문학은 '파국의 상상력'이 꿈틀꿈틀 움트고 있다. 평안한 일상이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요동치고, 불안한 미래가 극단적 언어로 표현되며, 내면의 극심한 혼란으로 인해 스스로 파멸을 자초하는 현상 등아 디스토피아적으로 그려진다.

그 사례로 SF적 상상력으로 금지된 구역을 이야기하는 윤이형의 '판도라의 여름'(2007년), 닫힌 공간에서 생명 파괴의 환상과 공포에 시달리는 편혜영의 '아오이가든'(2005년), 한 섬에서 일어나는 연쇄적인 폭사(暴死) 사건을 그린 김유진의 '늑대의 문장'(2009년) 등을 거론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이들 작품에서 불안의 실체는 모호하다. 그 원인은 작가들의 경험 세계가 닫혀 있고, 이데올로기의 영역에서 '핵에너지'에 대한 다양한 입장이 긴장 관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문학과 과학의 대결에서 작가들은 자신감이 왜소해지는 경험을 한다. 압도적인 과학기술의 우위 속에서 인문학과 문학은 수세적이 되고, 상상력을 억압당한다.

건강한 시민적 양식을 갖고, 예술적 상상력의 힘을 믿어야 한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에서 발생한 사건은 과학을 압도한다. 객관적 데이터나 인과 관계, 심지어 권력 관계로 억압한다 하더라도,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핵발전소는 사고의 위험을 안고 있다. 이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인식이다.

문학적 상상력은 '거짓의 장막'을 걷어 내고, 더 먼 미래를 당당히 말하는 것이다. 운명의 유추를 믿자. 과학적 권력에 인문학적 신념을 굴종시키지 말아야 한다. 한국 문학이 핵에너지를 문제 삼는 순간, 민주주의와 인류의 운명에 훨씬 더 긍정적인 많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