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만세!' '박정희 만세!'
'김일성 만세!' '박정희 만세!'
[한만수의 '백 년 동안의 검열'] '김일성 만세'와 국가보안법
'김일성 만세!' '박정희 만세!'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밖에.

김수영의 유작 시 '김일성 만세'의 전문이다. 얼마 전에 철학자 강신주가 한 대학의 특강에서 다루어 새삼 화제가 되었다. 1960년 <경향신문>과 <동아일보>에 보냈지만 물론 발표되지 못했던 작품. 4.19혁명과 5.16쿠데타 사이, 이승만 독재가 무너지고 박정희 독재가 들어서기 전의 이 짧은 간빙기(間氷期)에조차, 당시의 대표적인 진보언론이었던 두 신문에서조차 이 시는 발표될 수 없었다. 훨씬 뒤인 2008년에야 사망 40주기를 기념하는 학술대회를 준비하던 연구자들이 발굴해내 소개했다.

▲ 김수영
첫 발굴 때도 이번 강신주의 강연 때도, 이 작품에 대해서는 보수언론도 제법 관심을 가지고 다루었다. 그것도 국보법으로 처벌하라고 목청을 높이는 식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문화면이라는 점, 김수영이라는 이름이 주는 문화적 권위 등과 관련되는 것이리라.

사법당국으로서도 이미 작고한 김수영을 처벌할 도리는 없었고, 단지 그의 입을 빌리고 해석했을 뿐인 강신주를 처벌하기도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오늘 당장 누군가가 광화문 네거리에서 '김일성 만세'를 실제로 부른다면? 물론 이는 문화면이 아니라 사회면이나 정치면으로 옮겨갈 것이고 당장에 잡혀가게 될 것이다. 왜 예술가가 아닌 사람은 그럴 권리가 없는가. 왜 예술의 형식이 아닐 경우는 그런 표현의 자유를 얻지 못하는가.

아니 예술의 형식을 빌리더라도 무명 문인이 이런 작품을 썼다면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김수영만한 이름을 가진 사람이 아닌 경우, 그리고 이미 사망해서 보안법을 적용할 수 없는 '특혜'를 누리지 못한다면 역시 찬양고무죄로 붙잡혀가기 십상일 것이다. 실제로 인터넷 댓글에는 "김수영도 빨갱이였구나", "그런 시를 인용하는 강신주도 마찬가지다"하는 '아메바' 수준의 반응들이 적지 않았으며, 공안검사들의 감각 역시 이에서 그리 벗어나지 않는 것이리라.

그런데 김수영은 왜 '김일성 만세'라는 시를 써야 했을까. 그는 진정 김일성을 찬양하고 싶었던 것일까. 널리 알려져 있는 것처럼 그는 단지 자유주의자였을 뿐이고, 그런 만큼 김일성체제와는 결코 친숙할 수 없다.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않는다.

자유주의자 김수영은 왜 '김일성 만세를 허용하라'고 요구하는가. 그것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가장 강력한 금기이기 때문이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이것만은 안 된다고 판단하는 것, 그런 주장까지를 허용할 때에만 언론의 자유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언론자유나 표현자유는 무제한적으로 보장될 수 없다. 국가사회에 대하여 '현존하는 명백한 위험'이 있을 때라면 제한될 수도 있다는 것이 법학자들의 일치된 견해이다. 그렇다면 '김일성 만세'에는 어떤 현존하는 위협이 있는가. 생각이 매우 독특한 몇몇 사람이 모여서 '김일성 만세'를 부르면 대한민국이 위험해지는가. 우리 사회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빠지는가.

대한민국이 그렇게도 허약하다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국이 아무리 비판받을 구석이 많다고 하더라도 북한에서 살기를 선택할 사람도 거의 없으며, 북한체제를 본받아 대한민국을 바꿔야 한다고 믿는 사람도 거의 없다. 거의 모든 사람이 영향 받지 않는다면 표현자유를 제한할만한 위험은 현존하지도 명백하지도 않다. 제한할 이유가 없다.

우리나라의 '아메바'들이 금과옥조로 생각하는 미국의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 2년 전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연구년을 보낸 적이 있었다. 대학 정문 앞에서 "공산혁명"이라는 깃발을 내걸고, 유인물을 나눠주는 대학생들을 보았다. 놀라는 사람은 그러나 나뿐이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고, 그 주위에 몇몇이 모여 잡담을 나누고 있었는데 그들은 그냥 '주최 측 인사'들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힐끔거리며 지나쳐버렸다.

불법을 무릅쓴다는 비장감도 없었고, 전경들이 둘러싸지도 않았으며 '명박산성'도 물론 없었다. 그저 자기가 믿는 바를 대중들에게 알리고 싶은 모임일 뿐이었다. 레즈비언 시위나 동물학대 방지를 위한 시위처럼 그저 무수한 시위 중의 하나처럼 취급될 뿐이었다. 잡혀갈지도 모른다는 비장감 없이, 전경의 살벌함이 없이, 심지어는 '공산혁명'까지를 외칠 수 있는 자유. 이런 자유란 기실 당연한 인권 아닌가. 숨 쉬는 공기처럼 당연한 노릇 아닌가.

물론 미국에서 허용되는 것이 모조리 한국에서도 허용되어야 한다거나, 금지되는 것이 모조리 금지되어야 한다고 믿는 것은 아니다. 미국은 그저 유의미한 참조항일 뿐 우리의 금과옥조가 아니다. 한국의 경우 '김일성 만세'의 주장은, 미국과는 달리, 좀 더 많은 사람들의 거부감을 지닐 수밖에 없는 표현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두말할 것도 없이, 한국전쟁을 통해 약 300만 명의 인명피해를 낸 크나큰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거부감을 지닌다고 해서 무조건 그런 표현을 금지하는 일에는 반대한다. 그런 점에서 '김일성 만세'는 리트머스시험지 같은 구실을 한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의견조차도 그 의사표현 자체만은 허용할 수 있는가의 여부에 따라서 우리 사회의 건강성은 확보될 것이다. 오히려 주류의 의견과 다르다고 해서 소수의견을 금지하고 처벌하는 획일적 사회야말로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든다.

표현자유는 다수결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강력하게 반대하는 견해인가를 기준으로 표현 자유를 제한해서는 안 된다. '김일성 만세'를 허용하는 일은, '아메바'들의 조건반사처럼 '김일성'을 강화하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의 건강성과 민주성을 보장한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참으로 오랫동안 이 표현의 자유를 획득해내지 못했다. 예컨대 100년쯤 전 염상섭의 '만세전'(1924)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원래 나에게는 사회주의라는 '사'자나 레닌이라는 '레'자는 물론이려니와, 독립이라는 '독'자도 없을 것은 나의 전공하는 학과만 보아도 알 것이었다. 아니 설령 내가 볼셰비키에 관한 책을 몇 백 권 가졌거나 사회주의를 연구하거나, 그것은 학문의 연구라 물론 자유일 것이요, 비록 독립사상을 가진 나의 뇌 속을 X광선 같은 것으로나 심사법(心寫法)으로 알았다 할지라도 행동이 없는 다음에야 조사하기로 소용이 무엇인가.

하다못해 일제 때조차도 사회주의나 독립에 대한 서적을 읽어 연구하고 그런 사상을 갖는 일은, '행동'이 없다면, "물론 자유"였다는 것이다. 내가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는지를 누가 어떻게 알 수 있을 것이며, 또 알아본들 처벌할 도리가 있겠느냐고도 항변한다. 그런데 요즘의 종북 논쟁을 보면, 이한구나 조갑제 같은 분은 염상섭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일을 가능케 만들었다. X선의 새로운 용도를 개발해냈거나 '심사법'을 터득하지 않았으면 하기 어려운 발언들을 서슴지 않는 것이다. 아니 견훤의 독심술을 전수받았는지도 모르겠다. 이 땅의 자유는 100년을 뒷걸음질치고 있는 것이다.

그 100년 동안 표현자유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한국전쟁 시기라면 남한에서 '김일성 만세'를 부른 사람은 죽창에 찔려 죽었을 터이고, 북한에서 '이승만 만세'를 불렀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박정희와 전두환의 독재시기에 숱한 사람들이 '남산'(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고문 받고 보안법위반으로 기소되었는데, 그들은 '김일성 만세'조차 부른 적이 없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단지 '이적표현물'을 소지 및 탐독했다는 혐의만으로 처벌되었으며, 인터넷이나 언론 등에서 보도된 내용들조차도 국가기밀 누설로 인정되어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책을 읽고 언론보도를 요약하는 일조차 처벌했으니 국가보안법의 무소불위의 위력이었다.

물론 2012년 강신주는 멀쩡하다. 어쨌건 우리는 그만큼은 진전되어 온 셈이다. 물론 그 진전은 값진 것이긴 하지만 충분치는 못하다. 국가보안법, 특히 불고지죄 찬양고무죄 등 항목은 시급히 철폐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보안법은 법전이나 공안검사의 뇌리에만 살아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우리 마음속에는 "국가보안법을 손대면 국가적 혼란이 초래될 수도 있다"는 식의 막연한 불안감이 없지 않다. 어떤 내용인지 어떻게 활용되는지를 잘 모르는 채로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게 교육받고 세뇌되어왔으니까.

강신주가 이 시를 소개했을 때 대학생들이 모두 불편해했다는 것도 이를 입증한다. 그들이 느낀 불편함은 물론 대북 적개심을 강화시키는 데 몰입한 이 정권의 선전공세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위험한 이야기'라는 거의 본능적인 감각을 자극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위험을 느끼지 않고서는 자기표현을 할 수 있다면 그 사회는 표현의 자유를 구가하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이렇게 보안법과 반공이데올로기는 힘을 합쳐서 우리의 내면을 직조해내고 있다.

김수영 역시 '김일성 만세'를 허용하라 촉구하면서도,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라고 말한다. 김일성 만세가 가장 강력한 금지규범이라면, 그것의 허용은 왜 최종적으로 도달해야 할 극점이 아니라 한낱 '출발'에 불과할까.

'김일성 만세'는 가장 예민한 리트머스시험지이지만, 단지 그것을 허용하는 제도적 개선 자체만으로 표현자유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리라. 그런 제도가 마련된 이후, 우리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억압심리,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이 말하는 위협감, "바른말하면 잡혀 간다"는 억압감에서 점차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 억압에서마저 벗어날 때에만, 즉 보안법의 철폐가 우리의 무의식 차원에서도 진행되어야만, 우리는 진정 자유롭게 사고하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자유로운 주체로 재탄생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김일성 만세'는 단지 출발에 불과하다는 것이겠지.

기실 '김일성 만세'는 김수영이나 강신주보다는 오히려 박정희에게 잘 어울리는 외침이다. 남로당원으로 처형당하기 직전에 살아났다는 그의 전력을 염두에 두고 하는 이야기만은 아니다. 김일성주의와 박정희주의는 서로 잘 어울린다. 김일성 만세는 기실 박정희 만세와 큰 차이가 없다. 어떤 비판을 허용하지 않고 모든 국민의 머릿속까지를 자신이 통치하고 싶어 했으며, '하면 된다'로 무장되어 있었던 주체중심주의자, 다른 말로 하자면 '주체사상'의 신봉자였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그 둘은 독재체제를 만들어 서로 도우면서 이를 유지해갔다. 소위 적대적 의존관계. '북괴의 적화야욕론'에 기대어 박정희는 독재를 유지할 수 있었고, 김일성도 마찬가지로 '미제(美帝)와 남조선 괴뢰도당의 침략위협론'에 기대어 철권통치를 이어갔다. 그들은 닮은꼴이면서 은밀한 협조자였다.

현실의 맥락상에서도 그러했다. 남한에서 '김일성 만세'를 부르는 일은 불온세력 소탕의 필요를 들어 독재를 강화할 빌미를 준다는 점에서 '박정희 만세'의 효과를 불러왔다. 북한에서 '박정희 만세'를 부른다면 역시 '김일성 만세'의 효과를 가져 올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김일성 만세'는 '박정희 만세'의 동음이의어에 불과하며, 한반도는 김일성과 박정희라는 두 개의 모가지를 지닌 기괴한 쌍두용(雙頭龍)으로 표상될 수 있다. 이 흉측한 쌍두용의 두 모가지는 서로 싸우는 듯 보이지만 기실은 한 몸이었다. 무수한 민생을 희생시키면서 양분을 공급받고, 그러면서도 서로 적대적인 척 '쇼'를 하면서 권력을 유지해왔다.

이런 맥락에서 '김일성 만세' 허용론이란, 그 모가지 중의 한쪽을 상찬하는 주장을 허용하자는 차원에 그치는 게 아니다. 서로 싸우는 듯 보여야 자신의 통치를 효율화하는 적대적 의존체제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아예 싸우기를 거부한다고 선언해버리자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가장 강력한 금지규범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일을 통해서 우리의 내면을 해방시키는 일이 되기도 할 것이다. 남한에서는 '김일성 만세'가, 북한에서는 '박정희 만세'가 아무렇지도 않은 일로 허용되는 사회를 꿈꾸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그 쌍두용은 수명을 다하게 되지 않겠는가.

국가보안법이 악법임은 새삼스레 주장할 필요조차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법이 살아남는 것은 기실 많은 국민들이 국가보안법이 만든 사고에 아직도 포박당해 있기 때문이리라. 사실, 가장 커다란 위험은 우리 내면에 있다. '김일성 만세'라는, 아무런 현존하는 위험도 없는 표현조차 허용하지 못할 만큼 우리의 주체는 허약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허약한 주체를 만들어낸 것은 김일성과 박정희의 합작품인 셈이다. 그들은 자신의 명령에 의존하여 사유하고 행동하는, 자기의 머리로 사유하고 책임질 능력을 박탈당한 국민을, 아니 신민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그들은 이미 죽고 없지만, 오늘 우리의 내면에서 그들은 여전히 강력한 '대주체'이며 남과 북의 '지도자'로 남아있다. 이 쌍두용의 두 모가지는 이름만 바꾼 채 지속되고 있다. 마땅히 분노하고 저항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김수영은 위 인용 작품에서, 조지훈과 장면의 검열찬성론을 비판한다. 그 둘은 '김일성 만세'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언론과 정치의 자유"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공산주의에 맞서는 것이 자유의 수호이며, 따라서 '김일성 만세'라는 '친북적' 표현을 검열로 금지하는 것은 자유를 위해 필요한 조치라는 주장이다.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자유의 수호라니? 한마디로 궤변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오랫동안 남한사회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지녀온 사유방식이다. '반공연맹'이 1989년 '자유총연맹'으로 이름을 바꾼 것만 보더라도 확인되며, 진중권 같은 이조차 '종북 몰이'에 열을 올리는 상황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이 땅에서 '반공'이란 '자유'와 동의어인 것이다. 조지훈과 장면이 보장하는 자유는 '반공할 자유'였던 것이다. 자유를 극도로 억압하는 북한과 소위 체제경쟁을 하는 방식이 어째서 자유에 대한 억압이어야 한단 말인가. 정반대로, 즉 완벽한 자유를 보장하는 방식이어야 제대로 된 체제경쟁이 되지 않겠는가.

이 시의 화자는 조지훈의 검열 찬성론을 듣고 "잠이 올 수밖에 없다"는 반응에 그쳤지만, 장면의 이야기를 거듭 듣고서는 잠을 깬다. "깰 수밖에" 없다고 한다. 먹고 살기도 급급한 대중들은 웬만해서는 정치에 관심을 보이지 않지만, 그들이 한번 깨어나면 결과는 예측이 불가능하다. 그들은, 김수영의 대표작 '풀'에서처럼,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지만 "바람보다 먼저 일어선다."
mal@pressian.com 다른 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