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옹호는 미군정의 임무!
친일파 옹호는 미군정의 임무!
[해방일기] 1947년 10월 8일
2012.10.08 08:05:00
친일파 옹호는 미군정의 임무!
1947년 10월 8일

북조선에 진주한 소련군은 일본인에게 넘겨받은 행정·경찰권을 바로 인민위원회에 넘겨주는 등 조선인의 자치 활동을 적극 유도했다. 그 결과 1946년 2월에는 북조선 지역을 총괄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만들어졌고, 1년 후에는 선거를 통해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세워졌다.

남조선의 미군은 권한 이양에 훨씬 소극적이었다. 1946년 12월 입법의원이 만들어졌지만 그곳에서 통과된 법안은 군정장관의 승인이 있어야만 효력을 발생하게 해놓았다. 1947년 5월에는 민정장관을 수반으로 하는 행정부에 '남조선 과도 정부'란 이름을 붙여줬지만 이것 역시 군정장관과 사령관에게 예속된 기구였다.

10월 2일 입법의원에서 법안 공포 절차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작보한 바와 같이 지난 2일 입의 본회의에서는 (1) 입의의 통과가 없이 발포 시행되고 있는 군정법령의 재심의, (2) 입의에서 통과된 법안을 5일 이내에 행정부에 송달하여 행정부로 하여금 15일 이내로 재의를 요구케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공포케 할 것 등의 2건의 안을 토의한 결과, 전자 (1)은 법제사법위원회를 확대한 특별위원회를 조직코 현행 군정 법령을 재심케 하기로 가결하였으며, 후자 (2)는 법제사법위원회로 하여금 이 건의안을 기초로 한 법안을 제정케 하여 본회의에 상정케 하기로 가결하였다는 바, 이 안이 정식 가결되면 부일 협력자 등에 관한 특별법과 약헌, 공창 폐지안 등 입의에서 제정된 법안의 공포도 불원 실시될 것이다. (<입의속기록> 제153호, <조선일보> 1947년 10월 2일, 3일)

입법의원에서 통과된 법안을 군정장관이 언제까지 승인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지 규정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7월 20일 통과시킨 '부일 협력자 등에 관한 특별법'이 승인도 받지 못하고 재의(再議) 요청도 없는 채로 10월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군정장관의 승인을 필요로 하는 입법권이라면 '불완전한' 입법권이라 할 것인데, 그나마 승인 여부를 결정하는 시한도 없는 입법권이라면 이것은 '존재하지 않는' 입법권이다.

문제는 부일 협력자 특별법에 있었다. 승인하기는 싫은데, 거부할 명분이 없는 문제였다. 이 법안에 대한 태도 표명을 늦추다 보니 그 후에 넘어온 조선임시약헌(8월 6일)과 공창 폐지안도 처리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 미군정 수뇌부는 부일 협력자 특별법을 승인하기 싫어했을까? 자기네가 예뻐하는 부미(附美) 협력자 중에 부일 협력자 출신이 많다는 사실을 그들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커밍스는 1947년 여름에서 1949년 초 사이에 작성된 CIA 문서에서 이런 내용을 발췌해 보여준다.

우익의 지도력은 (…) 이 나라의 부와 학력을 실질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소수로 구성된 계급이 장악하고 있다. 이 계급은 일본인 재산의 공정한 분배가 이뤄질 경우 과도하게 집중된 조선인 소유 재산의 몰수를 위한 선례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걱정하기 때문에 좌익에게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일본인 지배 하에서 이 계급이 우월한 위치를 구축하고 지켜오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협력'이 없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대중이 납득할 만한 후보를 공직에 내보내는 데 어려움을 겪어 왔다. 그래서 그들은 이승만, 김구 같은 해외에서 들어온 정치가들을 앞세울 수밖에 없는데, 이 두 사람도 친일의 오명이 없을 뿐, 본질적으로 독재 정치를 꿈꾸는 선동가들이다.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186쪽에서 재인용)

경찰의 성격 문제를 미군정 측에서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 역시 같은 범위의 CIA 문서에서 발췌한 글로 확인된다. 미군 점령 지역에서 극우파가 공식 정치 기구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소요 진압에 극도로 잔인한" 국가 경찰 덕분이라고 했다.

경찰과 우익의 결탁이 강화되고 있다는 사실은 좌익 활동의 철저한 탄압을 위한 경찰과 우익 청년 단체 사이의 협력 관계에서 나타난다. 이 결탁으로 인해 좌익은 지하 조직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설령 좌익이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경쟁하고 싶어도 그럴 길이 없기 때문이다.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186~187쪽에서 재인용)

여기에 커밍스는 이런 설명을 붙였다. 설명 중 인용문 역시 같은 범위의 CIA 문서에서 발췌한 것이다.

남로당을 비롯한 좌익 대중 단체의 가입이 미군정 하에서 공식적으로는 합법이었지만, "경찰은 대개 공산주의자를 폭도나 반역자로 여기고, 조그만 핑계만 있어도 체포하고, 구금하고, 때로는 쏘아 죽일 대상으로 보았다." 남조선의 관료 체제는 "본질적으로 옛 일본의 체제 그대로였다." 전쟁 전 일본의 가장 어두운 반동 세력의 소굴로 E. H. 노먼이 지목했던 내무부는 남조선에서 "인민의 생활 거의 모든 면에 걸쳐 고도의 통제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국가 경찰의 수장 조병옥은 이승만 다음으로 큰 권력을 가진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여긴 사람인데, 한민당은 그의 도움 덕분으로 "경찰과 지방 정부 안에 자기네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187쪽)

미소공위 수석대표 브라운 소장도 이런 사정을 알고 있었음을 1947년 2월 하지 사령관에게 보낸 편지에서 알아볼 수 있다.

오늘날 [남]조선의 가장 강력한 집단은 우익 집단입니다. 그들의 힘은 조선의 재력 대부분을 그들이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들은 행정부의 중앙과 지방, 그리고 경찰에서도 요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조선 운영을 위한 정책을 좌우할 수 있는 힘을 그들이 많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186쪽에서 재인용)

1947년 8월 26일에서 9월 3일까지 트루먼 대통령 특사로 조선을 방문한 웨드마이어 장군의 보고서에서도 이와 비슷한 인식이 보인다는 사실을 1947년 9월 3일자 일기에서 설명했다. 조선 문제에 관심을 가진 미국인들은 이런 사실들을 대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1. 한민당은 친일파 출신을 주축으로 하는 이권 집단이다.
2. 한민당은 민중의 지지를 받지 않으면서 미군정에 큰 영향력을 누리고 있다.
3. 한민당 등 극우파는 경찰의 힘에 의지하면서 테러 단체를 운용하고 있다.
4. 좌익 활동은 경찰과 극우 테러 단체의 폭력에 과도한 억압을 받고 있다.

이런 인식이 하지 사령관과 러치 군정장관의 발언에서 보이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두 사람의 머리가 특별히 단단하다는 인상을 받는 일도 종종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그들의 직책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군정 시행에 직접 책임을 가진 입장에서 자기들의 근본적 실패를 명시적으로 인정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부일 협력자 특별법에 대한 태도에서 알아볼 수 있는 일이다. 당시 입법의원에서 극우파가 우세했기 때문에 이 특별법은 원래 중간파 발의자들의 의도를 멀리 떠나 허술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미군정 책임자들은 승인을 하염없이 미뤘다. 두 달이 넘도록 가타부타 아무 말 없이 미루고 있으니 입법의원도 참지 못하고 법안 처리 절차에 시한을 둬야겠다는 의논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7월 20일 입법의원을 통과한 부일 협력자 특별법은 러치의 귀국 중 군정장관 대리를 맡고 있었던 헬믹 준장에서 시작해 8월 7일 귀임했다가 9월 11 죽은 러치, 다시 대리를 맡은 헬믹, 그리고 러치의 후임으로 10월 말에 부임한 윌리엄 딘 소장에 이르기까지 군정장관 방석 밑에 깔려 있었다. 11월 27일에 이르러서야 딘 소장이 공포 거부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현 입법의원의 절반이 관선이기 때문에 완전한 민의 대표기관이 못 된다는 이유였다. (<한국 현대 민족 운동 연구>(서중석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582쪽)

거부 이유도 희한하다. 입법의원이 "완전한 민의 대표기관이 못 된다"고? 그러면 다른 법안을 다룰 수 있었던 것은 무슨 자격인가? 이 특별법이 시행되지 않기를 내심 바라던 극우파라도 용납할 수 없는 이유였다. 김규식 의장 이하 입법의원이 해산을 불사하는 강력한 항의에 나서자 재고하겠다고 한 발 물러섰다. 그러나 이 특별법은 결국 미군정이 끝나는 날까지 빛을 보지 못하고 만다.

갓 부임한 딘 소장에게 특별법을 그런 식으로 봉쇄해야 할 확고한 의지가 있었을 까닭이 없다. 그것은 하지 사령관의 의지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는 1945년 말부터 김구를, 그리고 1946년 여름부터 이승만을 적대시하고 중간파를 지원하면서도 한민당 측 사람들에 대한 호의는 거두지 않았다. 최소한 경찰 수뇌부라도 교체하라는 김규식과 안재홍의 끈질긴 요구마저 못 들은 척했다.

부일 협력자 특별법의 단호한 거부 태도로 볼 때, 하지도 한민당이 친일파 세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몰랐다면 거부 태도가 그렇게 단호할 수 없었다.

친일파 옹호가 일본의 옛 식민지가 새로운 체제로 독립하는 데 근본적 장애라는 점을 미국인들도 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옹호하고 나섰을까? 미군정의 장악력을 확보하기 위해 친일파가 운영하는 경찰 등 식민 통치 기구가 필요했다고 하는 실용적 동기가 지금까지 인식되어 왔다.

그보다 더 개인적인 동기는 없었을까? 맥아더가 1942년 1월 일본군 침공 앞에 필리핀을 떠나며 케손 대통령에게 50만 달러를 받아먹은 일이 생각난다. 이 일은 맥아더가 죽고 15년이 지난 1979년 한 연구자의 손으로 밝혀져 맥아더의 위신에 먹칠을 했다. 해방 공간의 조선에는 하지에게 돈을 먹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널려 있었고, 돈 자격 없는 돈을 미군정이 돈으로 인정해 준 '붉은 돈'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하지가 맥아더보다 장사를 더 잘한 일이 언제 밝혀지더라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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