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폭탄' 지젝, '자기계발서'를 쓰다?
'시한폭탄' 지젝, '자기계발서'를 쓰다?
[프레시안 books] 슬라보예 지젝의 <멈춰라, 생각하라>
2013.01.18 18:49:00
'시한폭탄' 지젝, '자기계발서'를 쓰다?
작년 12월 초,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의 <멈춰라, 생각하라>(주성우 옮김, 이현우 감수, 와이즈베리 펴냄)가 번역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서점에 갔다. 그런데 이 책은 당연히 비치되어 있을 줄 알았던 인문 코너에는 없었다. 서점 직원에게 묻자 그는 자기계발 코너로 가보라고 했고, 나는 속으로 실소를 머금으며 인문 코너 뒤에 있는 자기계발 코너로 갔다. 아니, 우리 시대에 가장 위험한 꿈을 꾸는 세계적인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책을 어떻게 자기계발 코너에 갖다 놓을 수 있나? 이토록 우스꽝스러운 일이.

위안을 주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독자에게 은근히 이래라저래라 명령하는 보통의 자기계발서와 비슷한 제목('멈춰라, 생각하라')만 보고 서점 직원은 지젝의 신간을 자기계발 코너에 배열한 듯싶었다. 이 제목은 작년에 방한해 강연을 한 지젝이 한국의 독자들에게 남긴 말인데 말이야. 그래 그럴 수 있지, 뭐. 정말로 <멈춰라, 생각하라>는 어슷비슷한 제목으로 환기되는 숱한 자기계발서 가운데 한 개의 상품으로 꽂혀있었다.

책을 집어든 나는 서점 직원에게 "이 책은 인문 코너에 있어야 할 것 같은 데요"라고 말했지만, 바쁜 직원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아차! 싶었다. 만일 지젝의 <멈춰라, 생각하라>가 숱한 인문 저서들 사이가 아닌 자기계발서 한가운데 꽂혀 있는 것이 정말로 '맞는다면?' 양손으로 얼굴을 받친 채 심드렁하게 자신에게 몰입되어 있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책을 바라보는 상품 구매자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것 같기도 한 지젝의 표정이 인상적인 <멈춰라, 생각하라>. 내가 틀렸고, 그 직원이 옳았다. 그 상품은 숱한 자기계발서 한가운데에 당당하게 꽂혀 자신의 위용을 뽐내고 있어야 마땅하다. 그리고 그 '자기계발서'는 마침내 내게 조용히 이렇게 속삭이는 듯했다. '나는 지금 위험한 꿈을 꾸는 시한폭탄이야. 날 작동시켜줄래?'

<멈춰라, 생각하라>는 원제('The Year of Dreaming Dangerously')에 부합하게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2011년은 양방향으로 위험한 꿈을 꾼 해였다. 뉴욕의 월스트리트,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 런던과 아테네 등지에서 시위자들을 거리로 이끌었던 '해방적인' 꿈과 네덜란드에서 헝가리에 이르기까지 유럽 전역에서 브레이비크와 인종 차별주의적 포퓰리즘을 부추긴 어둡고 '파괴적인' 꿈이 공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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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멈춰라, 생각하라>(슬라보예 지젝 지음, 주성우 옮김, 이현우 감수, 와이즈베리 펴냄). ⓒ와이즈베리
그런데 책 말미에 이르면 지젝은 이 두 개의 꿈 가운데 '해방적인' 꿈은 점차 햇빛 속의 눈처럼 소멸해가고 '파괴적인' 꿈만이 남아 도무지 질주를 멈출 수 없는 호랑이처럼 미쳐 날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낙담해하는 듯하다. 실제로 아랍 혁명은 엄청난 유혈의 내전과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의 새로운 독재로 이어지고 있으며, 월스트리트의 '점령하라' 시위대는 반(半) 강제적으로 해산되어 버렸다. 헤겔이 말한 '역사의 간계'가 아닐 수 없겠다.

그렇지만 지젝의 글은 환호와 열광으로 시작해 허무와 절망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과거와 현재의 시간적 연속을 놓고 보면, 지금 우리가 사는 시간은 낙담과 우울의 시간이겠고 또 미래는 현재의 공허하고도 동질적인 연장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미래와의 단절을 적극 도모하는 한편으로 이 미래와 단절하는 다른 미래를 상상하는데 결코 주저해서는 안 된다. 프로이트‧라캉 정신 분석에서 '꿈작업'(dream work)의 정체가 그러한 것처럼, 꿈은 압축되고 전치(轉置)된다. 과거와 현재의 파편은 꿈작업 속에서 한데 뭉치고, 하나는 다른 하나가 보낸 신호로 뒤바뀐다. 꿈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낯설게 반복되며, 이상한 신호를 보내온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사태는 오래 전에 일어났던 사태의 반복일 수 있으며, 알 수 없는 미래에서 온 신호가 될 수도 있다. 햇빛 속의 눈은 자취 없이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눈이 내린 흔적을 반드시 남기게 마련이다.

지젝은 알아볼 수 없게 뒤섞여 있는 혼란스러운 '꿈내용'이 어떠한 압축과 전치를 통해 서로 적대하는 두 개의 꿈, 곧 해방적인 꿈과 파괴적인 꿈으로 변별되는가에 대한 탁월한 임상분석을 내놓는다. 예를 들어 그는 아랍 국가들에서 일어난 혼란스러운 혁명 과정을 분석하면서 이를 응시하는 서구의 위선을 폭로할 뿐만 아니라, 아랍 혁명에 내재한 해방적인 꿈(공산주의)과 파괴적인 꿈(이슬라모파시즘)의 경계를 줄타기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근대의 합법적 독재자 루이 보나파르트 3세의 집권에서 미국의 TV시리즈 <와이어(The Wire)>(2002~2008)에 대한 분석에 이르기까지, <멈춰라, 생각하라>는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일어난 일련의 정치경제적, 문화적 사건들에 대한 MTV 철학자 지젝 특유의 '꿈의 해석', 정치경제학 비판이다.

논란의 여지가 있더라도 지젝의 '이론적 계급투쟁'에서 배워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역사의 간계'라는 풍화작용으로 사라지지 않도록 해방적인 꿈의 약한 물줄기조차 트고 한데 모아 혁명이라는 발전소를 위한 저수지를 만들려는 노력이 아닐까싶다. 발터 벤야민의 말을 빌리면 혁명가는 구원이 될 만한 것은 뭐든지 끌어 모을 줄 아는 넝마주이여야 한다.

2012년에 미국에서 발간되고 한국에서 번역된 이 책의 동시성은 우리에게도 매우 인상적일 정도로 당대적이다. 전 지구적 상황에 대한 지젝의 이론적 개입은 군데군데 좌충우돌하지만 대체로 명민하다. 또 그의 분석은 18대 대선 전후의 이른바 집단 '멘붕'에 빠진 우리가 국내외적으로 처한 상황에 응용해도 조목조목 들어맞을 정도로 흥미롭다. 내 생각에 <멈춰라, 생각하라>의 백미이자 이 책 전체를 누비는 이론적 매트릭스는 제 3장인 '정치적 대표의 꿈작업'이다. 이 글은 1848년 프랑스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와해된 뒤에 일어났던 루이 보나파르트 3세의 '꿈같은' 집권 과정과 그것의 현대적 반복을 몽타주한다.

백문이 불여일견인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 브뤼메르 18일>은 한마디로 말하면 백치나 다름없던 루이 보나파르트 3세가 그의 삼촌인 나폴레옹을 흉내 내면서 어떻게 모든 계급의 "가부장적 은인"(마르크스)인 황제를 참칭하게 되었던가에 대한 놀라운 분석이다. 마치 꿈과도 같았던 보나파르트의 집권과 쿠데타는 민주주의의 대표의 위기와 함께 그 속에 내재한 계급적대를 은폐한 '와 남 니하단(War Nam Nihadan)'이다. 지젝이 <멈춰라, 생각하라>의 첫머리에 인용하는 페르시아어 '와 남 니하단'은 "누군가를 살해하려면, 시체를 묻은 다음 그 위에 꽃을 심어 시체를 숨기라"는 뜻이다.

'민주주의 꽃'이라고 불리는 투표는 기본적으로 대표하는 것=대표되는 것의 필연성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보나파르트는 어떻게 '합법적으로' 집권해 황제가 되었던 것일까. 도대체 이 '민주주의 꽃'은 어떤 방식으로 시체를 숨겼던 것일까. 첫째, 루이 보나파르트는 모든 계급적 이해관계를 초월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마르크스가 '룸펜 프롤레타리아트'라고 부른 바 있는, 사회계급에서 가장 비천한 방식으로 배제되었지만 가장 반혁명적이었던 '12월 10일 회'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았다.

둘째, 보나파르트는 모든 계급의 대표자, 이른바 '100퍼센트' 프랑스를 자임하면서 "모든 계급 위에 군림하고, 모든 계급 사이를" 누볐다. 그는 농민이면 농민, 상인이면 상인, 군인이면 군인, 관료면 관료를, 말하자면 국민 전체를 대표하려 했다. 이것은 '12월 10일회'가 주축이 된 미디어의 탁월한 '상징' 조작을 통해 실현됐다.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면, 보나파르트는 공공연하게 국민을 부유하게 만들겠다고 했지만 증세엔 반대했다. 누군가가 그 때문에 착취당해서는 결코 안 되기 때문이다. 이 은혜로운 보나파르트에게 그 '누군가'는 바로 국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잘살아보세!'는 다시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면, 실제로는 어느 한 계급을 착취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어느 한 계급'은 도대체 누구인가. 이 '누군가'도 바로 국민이다! 그러고 보면 이들 국민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경제적 파멸에 투표"하고 만 셈이다.

셋째, 보나파르트는 스스로는 대표되기 어려워 누군가에게 대표되기를 바랐던 분할지 소농, 그것의 현대적 판본으로 말해보자면 숫자가 가장 많으면서 계급적으로 가장 불안정한 자영업자들의 적극적인 대변자가 되었다. 보나파르트의 후광에 힘입어 그들은 국민의 진정한 '대표'가 되었고, 마침내 보나파르트는 모든 '국민의 어머니'가 된 것이다. 마르크스가 비꼬았던 것처럼, 실제로는 약탈의 재분배에 불과하지만 모든 국민에게 '은혜'를 베푸는 황제로 보이려면 그는 조만간 프랑스를 위해 프랑스 전체를 팔아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모두 대의민주주의의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가능했던 일이다. 그러니 이쯤에서 투표라는 '민주주의 꽃'으로 시체를 가려버린 대의민주주의의 진짜 얼굴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지젝은 대표하는 것=대표되는 것의 대의민주주의는 '보나파르트'라는 사건에서 순전한 자의성(우연성)을 노출시켰으며, 그렇게 순수한 의미의 대표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100퍼센트 대한민국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을 수 있겠다. 도대체 가장 힘없고 가난한 자들이 그들의 '경제적 파멸'에 적극적으로 투표하고 지옥행 특급열차의 입석표마저 매진시켜버린 이 "계급무의식"을 최종적으로 표상하게 된 원인은 도대체 무엇일까.

물론 이 계급무의식의 "'무의식적 소망'은 여러 대표들의 게임을 중층결정하는 '부재 원인', 즉 거대 자본의 이해관계라는 실재"다. '민주주의의 꽃'으로 시체를 가려버린 정치가 폭로한 맨얼굴은 바로 경제다. 대의민주주의는 그렇게 아무런 의심조차 받지 않고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천진난만하게 공모한 것이다. 지젝의 급진적인 주장을 빌려보면 어쩌면 경제 민주화와 복지 국가라는 이상조차도 민주주의라는 저 아름다운 꽃이 자양분으로 삼고 있는 한, 봉분 아래 감춰진 시체의 정체를 폭로하는 데는 역부족일지도 모른다.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꽃병과 옆얼굴'처럼, 정치와 경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한 면만 보면 다른 면의 정체를 파악하기 힘들다. 그러나 사르트르가 말했던 것처럼, 꽃병과 옆얼굴을 함께 볼 수 있는 최소한의 방법이 없지 않다. 그것은 사르트르의 눈이 실제로 그러했던 것처럼 사시(斜視)를 취하는 것, 곧 '삐딱하게 보기'(looking awry)다.

자, 이 모든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160년 전, 멀리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꿈같은' 사건에 대한 간략한 소묘에 불과하다. 하지만 대선 이후, 1832년 혁명과 그 좌절을 담은 <레 미제라블>을 관람하면서 분노하고 눈물을 흘렸던 한국 관객에게 이것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조차도 삐딱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루이 보나파르트 브뤼메르 18일>을 시작하면서 마르크스는 역사는 한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번은 소극으로 반복된다고 말했다. 비극은 그것이 소극으로 반복될 때 더욱 비극적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이명박에서 박근혜로 반복되는 이것은 비극도 아니고 소극도 아니다. 이명박은 박정희를 반복했고(비극), 박근혜는 불길하게도 이명박을 반복할 지도 모른다(소극). 그러나 박근혜는 우리가 대선과정에서 충분히 지켜보았던 것처럼 박정희의 패러디('잘살아보세'), 반복이다. 박근혜는 박정희와 이명박을 두제곱한 반복일 가능성이 적지 않다.

비극의 반복인 소극, 다시 소극의 반복일 가능성. 반복의 반복의 반복. 심지어 득표율 '51.6'조차도 '5.16'의 패러디 같지 않은가. 패러디의 패러디의 패러디. 이쯤 되면 울 수도 웃을 수도 없고, 울어도 우는 게 아니고 웃어도 웃는 게 아니다. 너무도 고통스러우면 울기도 어렵고 헛웃음을 흘리는 것조차 버겁다. 그렇게 박근혜가 당선되자마자 불길한 신호처럼 해고 노동자들이 연이어 안타깝게 죽어갔고, 울산, 평택, 아산의 노동자들은 엄동설한에 높은 탑에 올라가 결단코 침묵을 고수하는 하느님과 가장 가까이 마주하고 있다.

지상에 남아있는 어떤 이들은 이제 파국 이외엔 남은 게 없다고 하면서 '그들'이 잘못하기를, 그들의 잘못을 기뻐하기를 바라고 있다. 옛 운동권 가요의 한 구절처럼 '조금만 더 쳐다오, 시퍼렇게 날이 설 때까지'는 자칫 약이 아닌 독이 될 수 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역겨운 미소를 흘리면서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눈물을 닦아주는 힐링과 상생의 대통합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고 행동해도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 아닐까. 크던 작던 간에 혁명이 부산물로 극단적인 니힐리즘과 무기력한 백치주의라는 쌍둥이를 낳는다는 것은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섬뜩한 교훈이다.

우리는 우리의 어깨에 올라탄 니힐리즘과 백치주의를 어떤 식으로든 감당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저들의 선택이 우리의 선택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과 그들의 외침이 '있다.' 잘 안 들린다고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잘 들리지 않더라도 목소리의 주인공은 분명히 '있다.'

<레 미제라블>은 1832년의 혁명 좌절 이후의 이야기라고들 한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나 1848년에 혁명이 발생했지만 혁명은 또다시 실패했고, 보나파르트는 1851년에 집권했다. 황제 보나파르트는 철지난 과거의 반복이자 패러디이지만, 우리에겐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이며, 그 미래의 반복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1848년도, 1851년도 오지 않았다. 혁명도 쿠데타도 겪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과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남은 우리가 어떤 편에 서느냐에 따라 미래는 1848년이 될 수도, 1851년이 될 수도 있다. 혁명이 될 수도, 쿠데타가 될 수도 있다.

지젝의 주장을 다 받아들일 필요는 없겠다. 비록 시체를 숨기는 꽃이더라도 이번 대선은 상당수에게는 분명히 최악을 피하기 위한 항의 투표였다. 내 생각에 그것은 더 나아가 '계급무의식'이 전치된 계급투표였고, 그 사후 효과는 여기저기서 벌써부터 분노의 도가니로 들끓고 있다. 우리들이 <레 미제라블>을 관람하거나 읽으면서 상상한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벌써부터 조급증에 시달리는 것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성급히 하려고 하기 전에, 지금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한발 물러나 '멈춰라, 생각하라'가 아닐까. 아무것도 '안' 하자는 말이 아니다. 국가와 자본을 위해 아무것도 안 '할' 방법을 지금부터 다시 함께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숱한 자기계발서에서 들리는 사악한 초자아의 달콤한 사이비 명령의 틈새에서 지젝이 한국 독자들에게 남긴 말은 우리가 처한 상황 속에서 제각각 곱씹어야 할 정언명령이 아닐 수 없다. '멈춰라, 생각하라.'
mal@pressian.com 다른 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