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대통령 vs.자비로운 독재자?!
위대한 대통령 vs.자비로운 독재자?!
[프레시안 books] 샤를 드골의 <드골, 희망의 기억>
위대한 대통령 vs.자비로운 독재자?!
1. "모든 이들이 과거에 드골주의자였거나, 현재 드골주의자이거나, 아니면 앞으로 드골주의자가 될 것이다."

드골의 '천재적인' 친구, 소설가, 1958년 드골정부의 정보부 책임자였고, 얼마 후 문화부장관 겸임 국무장관, 아니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문화부장관이 되었으며, 드골 체제의 위대한 시인이었던 앙드레 말로의 말이다.

2. 1969년 4월 샤를 드골은 몇몇 소소한 문제에 대해 국민투표를 진행했다. 국민에 대한 대통령의 유대를 확인하기 위한 의도였다. 개표결과는 'Yes' 47%, 'No' 53%. 드골의 패배였다. "나는 공화국 대통령의 직무 수행을 중단한다. 이 결정은 오늘 정오부터 그 효력을 발생한다." 4월 28일 밤 12시 10분 드골의 공식성명.

▲ <드골, 희망의 기억>(샤를 드골 지음, 심상필 옮김, 은행나무 펴냄). ⓒ은행나무

3. 고향 콜롱베로 돌아온 드골은 방문객을 거의 맞아들이지 않고 가족들과 생활하면서, "이제 시간이 얼마 없다는 절박감에 사로잡혀 부지런히 과거의 일들을 종이 위에 재현해낸다."(<드골 평전>(필리프 라트 지음, 윤미연 옮김, 바움 펴냄)) 두 차례 외국 방문 중에도 드골은 매일같이 자신의 기억들을 글로 옮겼다.

"드골은 자신이 엘리제궁에 머물면서 할 수 있었을 그 모든 일들보다 이 작업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 보호의 알레고리들을 재창조하고 그 기획에 의미를 부여하는 '회고록'들은 미래를 위해 과거의 역사를 만드는 최후의 방법이었다."(같은 책)

1970년 10월 23일 회고록 <드골, 희망의 기억(Mémoires D'espoir)>(샤를 드골 지음, 심상필 옮김, 은행나무 펴냄) 제1권이 출간된다. 책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하여 비평가들의 비평을 넘어서, 이제 더 이상 텔레비전에 나와서 말할 수 없는 그는 엄청난 수의 독자들과 다시 연결됐다. 드골은 거기서 절대적인 위안을 느꼈다.

4. "한 민족 두 체제, 두 사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 그의 통치는 하나의 참고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역자 심상필)과 명분이 이 책을 번역으로 이끌었다. 40여 년 전 처음으로 소개됐지만, 번역이 미진했단 생각에 "이것을 바로잡으려고 일생을 벼르다가 퇴직 후 다시 시작했고, 누락된 것을 바로잡는 등 완역했다." (…) "마지막 교정은 나의 아내 장의순이 해주었다." 역자는 1936년생이다. 그렇다면 이 또한 하나의 역사다.

5. 드골은 평생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한 작가이기도 했다. 80년의 인생 EHDDKS 13권의 단행본과 3만5000통의 편지, 5권 분량의 연설문을 썼다.

"그는 정확하게 구두점을 찍었고, 언제나 검정 잉크를 묻혀 직접 손으로 글을 썼다."(<드골>(마이클 E. 해스큐 지음, 박희성 옮김, 플래닛미디어 펴냄))

1952년 드골은 자신의 가장 중요한 문학적 과업인 <전쟁 회고록(Mémoires de Guerre)>을 저술하기 시작해 1954년 10월 제1권을 출판했고, 다시 1956년 <전쟁 회고록> 제2권을 출판했다. 그 다음 인생을 담은 책이 바로 이번에 번역 출간된 회고록 <드골, 희망의 기억>이다. 책은 총 7부로 구성되는데, 제1부가 '재기'. 시대가 다시 드골을 불렀다. 프랑스는 드골을 필요로 했고, 드골은 다시 일어섰다.

6. 1958년 봄, 프랑스에서는 내전에 대한 예측이 현실화됐다. 군 내부의 일부 세력이 정부를 장악하고자 음모를 꾸몄다. 4월에는 매우 불안정했던 제4공화국 내각이 무너졌다. 이때부터 드골에게 어떤 조건으로 정부를 꾸릴 수 있을지 요청이 들어왔다. 드골은 시기상조라며 이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며칠 안 되어 폭도들이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에 있는 총독 사무실을 짓밟았다.

"드골은 정치적 외줄타기를 계속하면서 조국이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자 소리칠 때까지 기다렸다."(<드골>)

1958년 5월 15일 오후 5시, 드골은 때가 왔다고 결론 내렸다.

"일전에 조국은 깊은 심연으로부터 이 나라를 구원으로 이끌 임무를 저에게 맡겼습니다. 현재 이 나라를 향해 밀려오는 새로운 시련 앞에서, 저는 공화국의 정권을 인수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같은 책)

7. 5월 19일 오르세 호텔에서의 첫 기자회견. 드골은 현시국의 주인공으로서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국가의 권위를 다시 세우며 국민의 신임을 받도록 하고, 항상 국가를 위해 일할 준비가 돼 있음을 강조했다.

이때 파리대학교 교수이자 <르 몽드> 논설위원, '뒤베르제의 법칙'((1) 소선거구제는 여야 1개씩의 유력 정당으로 몰리는 양당체제를 낳는다, (2) 비례대표제는 다수 정당체제를 낳는다.-편집자 주)으로 널리 알려진 정치학자이자 법학자 모리스 뒤베르제(Maurice Duverger)는 회견에 참석해 "당신은 독재자가 되려는 것인가?" 하고 물었다. 드골은 격노해 "내 나이 지금 몇인데 독재자의 길을 택하겠나!"하고 사납게 받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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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골>(마이클 E. 해스큐 지음, 박희성 옮김, 플래닛미디어 펴냄). ⓒ플래닛미디어
8. '정당론' 전공에다 사민주의자인 뒤베르제의 눈에 지극히 비민주적인 방식의 드골의 재기는 얼마나 불편했을까. 드골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우리 시대의 봉건집단들은 정당, 금권, 노동조합, 언론을 말한다." 이뿐 아니다. 회고록 구석구석에는 정당정치에 대한 지독한 불신이 박혀있다.

"오늘도 정당정치에 의해 한심한 상태에 빠진 우리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드골, 희망의 기억>)

이미 드골이 그런 성격인 줄 알고 있었음에도 또한 회고록이라 당연히 그러려니 했지만, 이 책은 철저히 1인칭이거나 한편으론 드골 혹은 드골 장군이란 이름으로 철저히 3인칭이다. 탁월한 저술가답게 1인칭과 3인칭을 현명하게 교차시켜가며 상징과 자부심을 극대화한다. 자존심 혹은 자기 확신, 자칫 독단에까지 이를 수 있는, 스스로 직조해내는 '양해할만한' 영웅주의다.

전쟁사 전문지 의 편집자 마이클 E. 해스큐의 평가도 유사하다.

"1962년부터 1968년까지 샤를 드골의 정부는 자비심 많은 독재자 정부와 많은 면에서 유사했다. 드골은 항상 대중으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았다고 생각했다."(<드골>)

9. 드골 스스로 반론을 예상했을까.

"나에게 우리 국민은 귀를 기울여 주었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나는 국민에게 물을 것이다. "내가 한 일이 옳은 일이었는지, 그른 일이었는지." 이 물음에 대한 국민의 대답은 나에게 있어서 신(神)의 소리가 될 것이다."

"(대신) 국사를 처리함에 있어서 내가 게을리 하거나 독단적으로 처리하는 분야란 있을 수 없다."

"물론 나는 전체적으로 보아 특히 중요한 문제는 각별히 몰두하기도 한다. 정치적인 면에서 우선 국민의 단합에 관계되는 문제, 즉 알제리와 과거 식민지 국가와의 관계에서 생긴 '프랑스 연맹'을 각국과 동맹의 관계로 바꾸는 일이라든가."(<드골, 희망의 기억>)


그랬다. 이 시대의 과제가 알제리 문제였다. 회고록 <드골, 희망의 기억>의 2부와 3부가 해외영토, 알제리이고, 4부 경제를 제외하곤 유럽, 세계, 국가원수 편이다.

10. 군부를 비롯한 우파들은 드골이 프랑스의 해외영토를 지키고, 알제리의 독립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드골은 세계의 흐름이 바뀌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직접 식민제국의 종결을 선포했다. 프랑스령 식민지들과의 관계를 종속이 아니라 연합국, 동맹 등으로 바꾸어나갔다. 수많은 식민지 중에서 알제리만큼은 132년간의 프랑스 식민 지배를 거쳤던 관계로 여러 문제를 낳았는데, 기대와 달리 드골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알제리 독립을 주장했다.

11. 1962년 7월 1일 최종적으로 알제리 문제가 국민투표에 부쳐졌다. "당신은 1962년 3월 19일 선언에 명기된 조건에서 알제리가 프랑스와 협력하는 독립국가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유권자 중 90퍼센트 이상이 투표를 했고 투표인 가운데 99퍼센트 이상이 찬성표를 던졌다.

7월 3일 드골은 알제리 임시행정부 수반에게 편지를 써 "프랑스는 알제리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라고 했다.

"8월 22일 운명의 날 그날 나의 아내와 사위 그리고 운전사와 함께 차를 타고 빌라쿠블레 비행장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프티클라마르를 지나려는 순간, 여러 대의 기관총이 일제사격을 가해왔다. 차를 탄 사격수가 이어서 우리를 추적해왔다. 우리를 겨눈 약 150발의 탄환 중 14발이 우리 차에 박혔다. 믿기 힘든 우연이지만 우리 중 아무도 총에 맞은 사람이 없었다. 드골은 자신의 길과 사명을 위해 계속 전진해야 한다!"(같은 책)

마지막 문장의 느낌이 회고록의 전편을 관통한다. 자칫 객관주의를 넘어선.

12. 드골의 지휘 아래에서 프랑스 정부는 일련의 주요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의 정치적·군사적 그리고 방어결정권한과 정책에 대한 (특히 미국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이 그 중 하나였다. 프랑스의 핵능력 보유나 NATO 및 유럽에 있는 본부에 대한 프랑스의 참여종결도 포함됐다.

드골의 프랑스는 독자적인 핵능력을 개발하여 미국과 소련이 유럽에서 군비경쟁을 하는 데 있어 프랑스를 중요한 행위자로 의식할 수밖에 없게끔 유도했다. 또한 드골은 구소련을 유럽중심주의의 일원으로 인정하여, 대서양에서 우랄에 이르는 대유럽, 유럽인에 의한 유럽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얄타 체제에 대한 극복이 과제였다.

프랑스는 영국이 대서양주의를 앞세워 대륙의 이익을 침해할 때, 이에 대한 굴복하지 않는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영국이 유럽자유무역지대(EFTA)를 앞세워 로마 조약에 가입하고자 할 때, 드골은 영국이 미국의 '트로이의 목마'라 비판하였고, 미국의 경제력이 영국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것을 경계하였다. (전재성 논문 '프랑스 드골 대통령의 자주외교' 요약)

책을 읽는 내내 유럽 현대사, 특히 프랑스사에 대한 무지에 시달렸다. 미국사나 중국사 읽듯이 이 책을 읽었더라면 했다. 그래서 이 책이 유럽과 프랑스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됐으면 하고 줄곧 생각했다.

13. 독일과의 관계 정상화도 드골의 몫이었다. 1958년 9월 14일과 15일 독일 콘라트 아데나워 수상과 드골은 콜롱베에 있는 드골의 집에서 만났다. 아데나워 수상은 독일이 현재 좌절 상태이고 강대국에 저당 잡혀 있는 형편이라 프랑스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드골의 답변.

"수상은 우리에게 많은 요청을 했지만, 우리 프랑스는 독일 국가에 대해 국토 통일, 국가의 안전, 국제적 지위 등에 관한 한 아무것도 요구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프랑스는 세기적 침략자였던 독일이 재건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니 그 점은 믿어 주십시오. 프랑스는 우리 두 국민간의 이해를 키워나가기 위해, 유럽의 평화와 통합과 균형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이 얼마나 훌륭한 일입니까?"(같은 책)

1962년 중반까지 드골과 아데나워는 서로 40여 차례나 서한을 교환했다. 그리고 15차례 만났고, 100시간이 넘는 회담을 진행했다. 1962년 7월 드디어 독일 정부 수반이 파리의 광장과 연도에 모인 대중 앞에 그 모습을 나타냈다. "거기서 드골 장군은 프랑스 국기를 앞세우고 콘라트 아데나워 수상을 공식적으로 맞이했다." 여기서도 '내'가 아니라 '드골'이 아니라 "드골 장군"인 점에 유의해 달라.

14. '국가원수'로서 드골의 일과는 단촐했다. "(드골은) 엘리제궁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 1층 가운데 방의 내 집무실, 나는 9시 반에 집무실에 들어선다. 조간신문과 기타 뉴스를 훑어본 다음이다. 오전에는 국내외 정치와 관련된 전문을 보고, 여기저기 지적할 것을 관계자에게 전하도록 한다. (…) 저녁 8시에 나는 책상에서 일어난다. 다음날이 돌아올 때까지 책상에 다시 앉는 일은 드물다." 회고록에 나타난 드골의 하루 일과다.

더하자면, 드골은 대중매체를 적절히 활용할 줄 알았다. 그는 연설에 매우 능했으며, 전쟁 중에는 라디오를 적극 이용했다.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텔레비전을 이용했는데, TV와 라디오의 차이를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민과 대화하듯 해야 한다고 생각해, 안경도 쓰지 않고 원고도 보지 않았다. 드골은 정기적으로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회견에는 정부 고위각료들이 대부분 참가했고 기자들은 객석에 앉았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텔레비전으로 송출됐다. 드골의 정확하고 고풍스러운 프랑스어로 이루어진 연설은 국민을 설득하기에 충분했다.

회고록 제1권이 출간된 지 보름 남짓 뒤 11월 9일 드골은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죽음으로 집필 중에 있었던 회고록 제2권은 중단되었고, <드골, 희망의 기억>은 그의 마지막 회고록이 되고 말았다.

군인이자 정치가로서 드골의 정체성을 드러내주는 두 가지 글로 서평을 마무리하고 싶다. 사관학교 교수 시절 드골이 한 강의 내용.

"역사는 운명론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소수의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결정론을 깨부수고 새로운 길을 여는 순간은 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받을만한 만큼의 역사를 갖게 됩니다. 여러분이 불행을 한탄하고 최악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공포를 느낄 때 사람들은 당신에게 말할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의 법칙이다. 이것이 진화 의지다.' 그들은 이러한 것들을 매우 명쾌하게 설명할 것입니다. 일어나십시오, 제군. 영리한 비겁함에 대항하십시오. 이는 멍청한 것보다 더 나쁜 것입니다. 이는 성령에 반하는 범죄입니다." (<드골>)

"국민이 나를 지지한다는 사실이 나의 갑옷이었으며, 가치 있는 길을 꿋꿋이 걸어간다는 사실이 나의 칼과 같은 것이었다."(<드골, 희망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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