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발의 총, 죽지 않은 사람, 당신은 뭐라고 묻겠는가
6발의 총, 죽지 않은 사람, 당신은 뭐라고 묻겠는가
[프레시안 books] 휴버트 드레이퍼스·숀 켈리의 <모든 것은 빛난다>
2013.09.06 19:34:00
6발의 총, 죽지 않은 사람, 당신은 뭐라고 묻겠는가
'삶에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은 물론 진부하다. 어떤 질문이 진부하게 느껴진다는 것은 그 질문이 너무 많이 던져졌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어떤 질문이 그토록 많이 던져져야 했다면 그것은 그 질문에 답을 찾기가 그만큼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진부한 질문일수록 가장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니 진부한 질문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무시해야 할 것은 진부한 물음이 아니라 진부한 답일 테니까. 휴버트 드레이퍼스와 숀 켈리가 함께 쓴 <모든 것은 빛난다>(원서 2011, 한국어판 김동규 옮김, 사월의책 펴냄, 2013)는 저 진부하지만 불가피한 질문을 정확하게 던지고, 근래 나온 것들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논증을 제시하는 책이다.

▲ <모든 것은 빛난다>(휴버트 드레이퍼스·숀 켈리 지음, 김동규 옮김, 사월의책 펴냄). ⓒ사월의책
이 책의 구조는 이렇다.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조건과 그 난관을 보여주고(1~2장), 지금과는 사뭇 달랐던 그리스 시대의 삶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한 다음(3장), 그리스적 삶에서 현대적 삶에 이르는 긴 과정을 일종의 추락의 역사로 정리하고(4~6장), 그리스적 삶의 방식을 우리 시대에 복원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하기(7장). 우리가 병들었음을 섬세하게 진단하는 대목(1~2장)과 우리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가를 문학사와 철학사를 아우르며 되돌아보는 대목(4~6장)도 물론 읽을 만하지만, 역시 이 책의 핵심은, 저자들이 생각하는 건강의 본질(3장)과 그것을 회복하기 위한 방책(7장)이 무엇인지를 논한 대목에 있다.

우리가 걸린 병은 '무의미에 이르는 병'이고 더 짧게 말하면 '허무주의'다. 이를테면 이런 상황이다. "현대 세계의 특징은 우리들 대다수에게 그 이전보다 선택―어떤 사람이 될지, 어떻게 행동할지, 누구 줄에 설지―의 폭이 더 넓어졌다는 바로 그 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이런 종류의 실존적 선택에 직면했을 때, 저것 아닌 이것을 선택하게끔 해주는 참다운 동기가 없다는 점에 있다."(20쪽) 이 "참다운 동기"만 있다면 삶은 의미를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삶의 의미'는 "그것들이 자유롭게 만들어진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또한 자유롭게 취소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의미는 제작자를 넘어서는 권위를 갖지 못한다."(252쪽)

우리 모두를 집합적으로 조율할 수 있는 권위 있는 지침이 없다는 것.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의미 있는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33쪽) 먼저 기각해야 할 것은 '일신주의'의 어떤 맹목이다. 그들에게 삶의 의미는 고민할 가치가 없이 명백한 어떤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물음을 해결한 것이 아니라 폐기한 결과에 가깝다. 그래서 저자들은 말한다. 기독교 일신주의와 현대적 허무주의 사이에서 제 3의 길을 찾아야 한다고. 그들이 주목하는 것은 그리스 시대의 '다신주의'다. 그러나 이것은 서양 학자들이 자주 유토피아인양 찬미하는 그리스 시대를 향한 노스탤지어가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적 삶의 방식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잊어버렸다. 잊어버린 것이므로 복원할 수 있다. 그 핵심은 신'들'과의 관계다.

사례 하나. 전철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몸을 던져 구한 사람이 있다. 그런 영웅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자신은 특별히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그야말로 무언가에 이끌리듯 그리 했노라고. 이것은 겸양의 포즈가 아니라 사실의 고백일 것이다. "그 행동이 행동의 담지자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그를 통과해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32쪽, 강조는 원저자) 이런 사례들은 무엇을 알려주는가. 현대의 사상적 리더들이 선언한 것과는 달리, 나 자신이 내 행동의 유일한 원천은 아니라는 것. 이런 감각은 그리스인들에게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들에 따르면 여러 신들은 그들이 대표하는 각각의 상이한 정조(mood, Stimmung)를 인간에게 부여하는데, 인간은 그 정조 속에서 그것이 이끄는 대로 행동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신들과 동조(sync) 관계를 이루는"(114쪽) 그리스적 삶의 방식이다.

사례 둘. 여섯 명이 창을 던졌지만 그중 어느 것에도 맞지 않은 오디세우스처럼, 자신을 향해 여섯 발의 총알이 발사됐는데도 목숨을 건진 사람이 있다. 이것은 단순히 '확률적 행운'일 뿐인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 존재의 '신성한 배려'인가.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은 쉽지 않기도 하거니와 딱히 중요하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둘 중 특정한 한 방향으로 생각하기를 선택할 때 우리에게 삶의 의미가 달라지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오디세우스의 경우에 대해 호메로스는 그것이 '아테네 신의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그리스적 삶의 방식이다. 인생의 경이로운 일들이 행운과 불운의 불안정한 조합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사람보다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 신들의 보살핌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인생은 더 의미 있는 것으로 다가온다는 것.

두 사례를 합쳐 정리하면 이렇다. 나는 누군가에게 경이롭도록 영웅적인 행위를 할 수도 있고, 내게 일어나는 경이로운 일을 체험할 수도 있다. 그 일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물음은 신들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하는 물음과 같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아레테(arete) 개념, 즉 삶에서의 탁월성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 호메로스 세계에서의 탁월성이란 결정적으로 감사와 경외의 느낌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다."(115쪽) 그렇게 신들에게 감사할 때 삶은 성스러워진다. 이와 같은 상태를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삶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은 애초에 떠오를 수조차 없을 것이다.

요컨대 그리스적 삶의 핵심은 이것이다. 그들은 하이데거적인 의미에서 '퓌시스', 즉 '성스러움이 출현하는 순간'을 경험했고 그것에 자신을 겸허하게 내맡기면서 '아레테'의 상태, 즉 의미로 충만한 탁월한 삶의 상태 속에 머무를 수 있었다는 것. '퓌시스'와 '아레테'의 삶, 저자들이 말한 제3의 길은 결국 이 두 단어로 요약될 수 있다.

"호메로스가 그려낸 올림포스의 신들은 그리스인들에게 성스러움에 대한 감각을 부여해준다. 진정으로 의미 있는 실존의 기쁨과 슬픔을 보증해주는 성스러움 말이다. 이 호메로스의 신들을 다시 불러내는 것이야말로 신이 죽은 이 시대에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다. 그것이야말로 일신주의의 몰락에서 우리를 살아남게 하는 방법이며, 허무주의적인 실존으로 추락하는 것을 막아주는 방법이다."(114쪽)

이것으로 이 책의 핵심을 어지간히 요약한 셈이다. 이들의 논변에 대해서는, 어느 편이냐 하면, 반박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치밀하다기보다는 기꺼이 동의하고 싶어지도록 호소력이 강하다고 해야 적절할 것이다. 그래서 읽다 보면 삶에 대한 애정이 새삼스레 뜨거워지는 대목들이 많지만, 차가워지기로 마음먹자면 시비를 걸만한 구석도 꽤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저자들 스스로가 이런 식으로 자문하고 있는 터다. 저 퓌시스의 체험은 칸트가 말한 미성숙 상태로의 퇴행과 얼마나 다른가. 이런 성스러움이 집단적 층위에서 체험된다면 그것은 파시즘의 황홀과 어떻게 구분될 것인가. 간단히 말해, 우리는 그리스인이 되는 데 실패한 것인가, 그리스인이 되지 않는 데 성공한 것인가.

어쩌면 우리는 딜레마에 부딪친 것도 같다. 한쪽에는 자유롭지만 무의미한 삶이 있고, 다른 쪽에는 의미심장하지만 혐오스러운 삶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혐오스러운 퇴행의 소지가 있다면 그것을 피하면서 호메로스의 신들을 다시 불러내는 방법은 없는가. "우리 문화 속에 무아경의 퓌시스가 아닌 또 다른 성스러운 의례가 있는지 찾아보는 것"을 목표로 하는 7장이 이 난관을 헤쳐 나간다. 무아지경의 퓌시스와는 다른 성스러운 의례의 사례로 저자들이 우선 제시하는 것은 '포이에시스'(제작/창작)의 심오한 체험이다. 이를테면 '기술'이라는 것이 오늘날의 '테크놀로지'와는 다른 의미를 가졌던 시절에 장인(匠人)들의 기술은 그들을 자신의 삶의 터전에 깊이 뿌리박게 하고 대상의 성스러움과 교감할 수 있게 했으며 그를 통해 자기 삶의 의미를 육성할 수 있게 했다는 것. "장인과 기술 사이에는 일종의 피드백 관계가 만들어진다. 양자는 상호 이해와 존경을 통해 서로를 함양해 준다."(361쪽)

목질의 미세한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장인에게 이 세계는 의미심장한 차이들의 축제이고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이에게 삶은 더 큰 의미를 갖게 되리라.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그와 같은 장인이라고 해서 히틀러의 선동에 휩쓸리지 말라는 법도 없으니까. 그러므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포이에시스의 심오한 체험 속에서 우리는 위험한 무아지경의 퓌시스와 진정한 성스러움의 퓌시스를 구별할 수 있는 기술을 상정하고 습득해야 한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이 세속적 허무주의 시대에서 잘 살아가려면, 열광하는 군중과 하나가 되어 일어나야 할 때가 언제이고, 발걸음을 돌려 그곳에서 재빨리 빠져나와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알아차리는 차원 높은 기술이 필요하다."(362쪽) 이 "차원 높은 기술"을 저자들은 "메타 포이에시스"(362쪽)라고 명명한다. 그것은 퓌시스의 성스러움을 회복하여 허무주의에 맞설 수 있게 하고, 동시에, 퓌시스의 광적인 측면에도 거리를 둘 수 있게 해주는 기술이다.

모든 요약이 그렇듯이 이상과 같은 요약은 저자들의 주장을 생기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잘못 읽은 게 아니라면(아마 잘못 읽은 것이겠지만), 확실히 이 책의 결말부에서 저자들의 목소리는 다소 추상화·관념화된다. 성스러움의 회복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경탄스러울 정도로 구체적이고 실감나는 예시들과 함께 돌파해 나가던 저자들의 장점이 약화된다는 뜻이다. 위 두 단락의 요약이 얼마간 동어반복이나 순환논법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내 책임만은 아니라고 나는 주장하고 싶다. 그래서 이 책이 "이 현대적 다신주의의 세계는 성스럽게 빛나는 것들로 이루어진 놀라운 세계일 것이다."(378쪽)라는 희망에 찬 선언 혹은 요청으로 끝날 때 나는 조금 서먹서먹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처음부터 없지는 않았던 의문이 그제야 슬그머니 솟아올랐다. 이 의문을 제기해야 할 대상이 하이데거인지 저자들인지 판단하기가 어렵지만, 여하튼 그것은 이런 종류의 의문이다.

이 책의 저자들이 '현대인'과 '테크놀로지'와 '삶의 무의미함'을 말할 때 거기에는 지역적·계급적 차이에 대한 섬세한 고려가 별로 발견되지 않는다. 오늘날의 세계인들은 똑같은 '현대인'들이 아닐 것이다. '테크놀로지'에 접근할 수 있는 역량도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져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삶의 무의미함을 체감하는 맥락도 많은 차이들로 인해 분화돼 있을 것이다. 대형 아파트에 거주하는 기업인의 '허무'와 고용 없는 성장 속에서 잉여적 존재가 되어버린 어느 젊은이의 '허무'는 똑같이 '현대적인' 것일까. 이것들은 촌스럽지만 불가피한 반문이다. 이런 물음들에 답할 수 있어야만 우리가 기대하는 "성스럽게 빛나는 것들로 이루어진 놀라운 세계"가 차별 없이 경험될 가능성도 커질 테니까.

. ⓒFree Press
이 책의 마지막에는 책 전체의 취지를 압축적으로 제시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용적'이라고 할 만한 에필로그가 붙어 있다. 마지막 문장이다. "모든 것들이 빛나는 건 아니라네. 다만 빛나는 모든 것들이 존재하는 것이지."(379쪽) 원문은 이렇다. "All things are not shining, but all the shining things are." 더 딱딱하게 직역하면 이 정도가 되겠다. '모든 것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빛나는 모든 것들은 있다.' 삶이 언제 어느 때나 늘 의미로 충만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삶이 성스러워지는 순간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 그 순간을 어떻게 삶 전체로 확장시킬지는 각자의 몫이라는 취지일 것이다.

아마도 저자들은 바로 이런 잠정적인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이 책의 제목을 'All things shining'이라 붙였을 것이다. 'All things are shining'도 아니고 'All the shining things'도 아니다. 그러나 한국어로는 이 애매함을 살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어판은 '모든 것은 빛난다'라는 제목을 달고 나왔지만, 이 제목은 에필로그의 마지막 문장과 모순될 뿐만 아니라, 이 책이 세상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을 설파하는 종류의 책으로 오해될 소지도 아주 조금은 만든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이 뿜어내는 빛에 비하면 이것은 지적하기조차 쑥스러운 사항에 지나지 않는다. 이 책은 심오한 질문을 정확하게 던졌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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