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직된 문과-이과 구분이 '황우석 사태'낳았다"
"경직된 문과-이과 구분이 '황우석 사태'낳았다"
[교육과정 논란] '문과-이과 구분부터 없애자' <1>
오는 2월 말 최종 확정되는 초ㆍ중등학교 교육과정 개편안을 놓고 논란이 뜨겁다.

교육과정 개편은 권력투쟁?

교육부 홈페이지에는 지금도 특정 교과를 필수과목으로 정해야 한다거나, 혹은 수업 시간을 늘려야 한다는 등의 주장이 속속 올라오고 있다. 해당 교과 교사들, 그리고 사범대 교수와 학생들이 올린 글이다. 대부분 해당 교과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런 글을 올리는 이들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제자 혹은 후배들의 교직 진출 기회가 줄어드는 것, 그리고 해당 교과 교사들의 입지가 약해지는 것에 대한 불안이 도사리고 있다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다.

교육과정 개편을 둘러싼 이런 갈등은 온라인 공간을 넘어 집단행동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지난 23일에는 전국지리교사모임 소속 교사들이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명의로 받은 표창장을 모아 교육부에 반납하겠다고 밝혔다.

하루 전인 22일에는 사회 교사 및 관련 학과 교수 10여 명이 교육부를 항의 방문했다. 이들은 "정부가 중1~고1의 일반사회 수업시간을 주당 3.5시간으로 잡고 있는데 최소 4시간은 돼야 사회 과목이 산다"고 주장했다.

음악, 미술, 체육 교사들도 마찬가지다. 이들 과목 교사들은 새로운 교육과정에서 예·체능 교과의 내신반영 비율을 현행대로 유지해야 한다며 집단행동도 불사할 조짐이다.

김신일 교육부총리는 지난 16일 교육과정 개편을 둘러싼 이런 갈등을 가리켜 '교육계의 권력투쟁'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지난 12일 열린 공청회에서 교육부가 교육과정 개편 시안을 발표한 후, 교육계의 반응만 놓고 보면 '권력투쟁'이라는 말이 그다지 어색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중앙일보> 등 일부 언론은 지난 24일 이런 갈등을 "내달 교과개편 앞두고 교육계는 지금 '권력투쟁' 중" 등의 제목으로 1면 머릿기사로 다루기도 했다.

교육과정 개편, 원점에서 다시 논의하자…"학문 간 통합 지향해야"
▲ '황우석 사태'는 문과와 이과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그래서 인문·사회과학자들과 자연과학자들의 대화가 잘 이뤄지기 힘든 문화가 가진 맹점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뉴시스

하지만 교육과정 개편을 둘러싼 갈등을 이해당사자 간의 '권력투쟁'이라는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것은 생산적이지 못 하다는 시각도 있다. 어차피 다원화된 사회에서 갈등은 필연적이다. 오히려 이런 갈등을 현행 교육과정의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되짚어보는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원점에서 되짚어보는 시각을 얻기 위해서는 교육계 내부의 논의만으로는 부족하다. <프레시안>은 교육계 안팎의 비판을 모아, 현행 교육과정을 원점에서 되짚어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이처럼 원점에서 돌아보는 작업은 현실에 바로 대입하기에는 무리가 따를 수 있다. 그러나 해방 이후 반 세기 이상이 흐르는 동안 큰 틀에서의 변화는 없었던 채로 유지돼 온 중등 교육과정에 대해 한 걸음 떨어져 살펴볼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교육과정 개편 논의가 보다 생산적으로 흐르는 것을 돕는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이런 취지에서 첫 번째로 소개하는 주장은 일제 시대 이후 계속 유지돼 온 문과-이과 구분의 틀을 허물어 학문 간 소통의 토대를 닦자는 것이다. 이런 목소리는 대학 교육의 혁신을 고민하는 쪽에서 주로 나오고 있다.

실제로 서울대 기초교육원은 지난 29일 교양교육 개편안을 내놓으면서 필수이수 교양학점을 늘리고 인문·사회 계열 학생들이 자연계열 수업을 듣게 하는 내용을 포함시켰다. 당시 서울대는 "사회가 다변화될수록 폭넓은 교양의 중요성이 커진다"며 이를 위해서는 학생들이 소속 계열을 넘어서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또 소광희 서울대 명예교수는 지난해 10월 '서울대 6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우리는 한때 전문화란 기치를 내걸고 학문의 세분화 경향으로 치달았지만 오늘날은 세분화됐던 분야들이 유사성을 찾아 통합되는 과정으로 돌아섰다"며 "인문대, 자연대, 사회대로 나뉘어진 문리과대학을 다시 복원해 학생들이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을 두루 접할 수 있도록 할 것"을 주장했다.

한국과 일본에만 남아 있는 문과-이과 구분, 이제 허물자

그런데 이처럼 소속 계열을 넘어서 폭넓은 교양을 쌓는 데 결정적인 걸림돌로 작용하는 게 고교 시절의 문과-이과 구분이다.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면서 문과를 선택한 학생들은 어지간하면 자연과학에 관심을 갖지 않으려 하고, 반대로 이과를 택한 학생들은 인문사회과학을 꺼린다는 것이다.

실제로 고교 교육과정에서 이런 구분이 적용된 나라는 한국과 일본 정도에 불과하다. 일본을 통해 이식된 교육과정에 대해 해방 이후 반세기가 지나도록 제대로 되짚어볼 기회가 없었다는 것에 대해 안타까와 하는 이들이 많다. 고교 교사들도 이런 안타까움에 공감하는 편이다. <매일경제신문>이 지난해 9월 전국 고교 교사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55.3%가 "문과-이과 구분이 없어져야 한다"고 답했고, "현행대로 유지되어야 한다"고 답한 교사는 32.1%로 훨씬 적었다.

특히 경직된 문과-이과 구분이 낳는 문제는 과학기술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더욱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다. 물신화된 과학기술에 대한 인문학적인 성찰이 이뤄지려면 인문·사회과학자들이 과학기술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쏟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과학기술자들 역시 자신들의 연구 성과에 대해 사회적 맥락에서 조망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해 한국사회를 혼란에 빠뜨린 '황우석 사태' 역시 경직된 경직된 문과-이과 구분과 무관하지 않다. 인문·사회과학자들이 황 전 교수의 연구가 갖는 인문학적 의미, 사회적 영향에 대해 꾸준히 비판적인 성찰을 해 왔더라면, 혹은 과학자들이 폐쇄적인 연구 공동체를 벗어나 사회와 보다 폭넓게 소통해 왔더라면 '황우석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으리라고 지적하는 이들이 많다.

'황우석 사태'는 문과와 이과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그래서 인문·사회과학자들과 자연과학자들의 대화가 잘 이뤄지기 힘든 문화가 가진 맹점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이다.

서울대 동양사학과 김영식 교수는 1990년대 초부터 이런 주장을 해 왔다. 김 교수는 <역사와 사회 속의 과학>이라는 책에서 고교 교육과정에서의 문과-이과 구분이 낳은 폐해를 지적한 이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제 경직된 문과-이과 구분을 넘어설 때"라고 주장해 왔다. 김 교수가 지난해 한 포럼에서 문과-이과 구분에 대한 평소 생각을 담아 발표한 글을 보완해서 기고했다. 김 교수의 글을 2회에 나눠 싣는다. <편집자>


우리나라의 학문과 교육에서는 이른바 '문과'(文科)와 이과(理科)의 구분이 유난히 심하다. 고등학교 상급반이 되면 모든 학생이 예외없이 '문과'나 '이과'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일단 선택한 후에는 줄곧 자신이 선택한 '과'(科)의 테두리에 갇혀서 반대 쪽 '과'(科)로부터는 차단된 채 엄격한 구분과 차별 속에 생활하도록 제약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분은 실체에 바탕을 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인위적이고 임의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 구분은 우리의 교육과 학문에 많은 폐단을 빚고 있다. 이 글은 주로 이런 경직된 문과, 이과 구분이 빚어내는 폐단에 대해 다룰 것이다.

편의적인 문과-이과 구분, 평생의 테두리

우리나라의 학생들에게 문과, 이과의 선택은 예외 없이 누구에게나 때가 되면 찾아오는 것이기 때문에 학생들은 성인이 되는 필수적 과정의 일부로서 결국은 닥치게 될 이런 선택을 미리 예상해서 그에 대비하게 된다. 모든 학생들이 고등학교에 들어간 후 자신이 문과, 이과 중 어느 쪽에 속해야 할 것인가, 어느 쪽이 더 자신의 적성에 맞는가 등 근본적인 문제들뿐만 아니라 어느 쪽이 더 공부하기 쉬우며 대학입시 준비에 유리할 것인가 같은 보다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학생들은 아예 부모에게 이 선택을 맡겨버리거나 별 생각 없이 가벼운 결정을 내려 버리지만, 이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는 학생들에게는 이 선택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 된다.

이런 선택을 하도록 강제한다는 것은 그 나이의 학생에게는 퍽 가혹한 일이다. 문과-이과의 구분이라는 것 자체가 근본적으로 임의적일 뿐 아니라, 설사 그와 같은 구분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적성이 문과나 이과 어느 한쪽에 뚜렷이 기우는 사람은 아주 드물며, 또 이런 '기울음'을 판정하는 일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반드시 한쪽을 선택해야 하며 일단 선택한 후에는 그 선택이 학생 자신의 앞날에 굉장한 제약을 가하는 테두리로서 작용하게 된다.

이런 문과 이과의 구분은 일단 그 구분이 이루어진 뒤에는 매우 경직된 상태가 된다. 모든 학생들이 같은 시점에서 일제히 문과-이과의 선택을 하고 그 후 대학에 진학하여 그 구분의 틀 속에서 생활하는 성장 과정을 거치는 동안, 그들은 당초 정도의 차이는 있을 망정 어느 정도의 고민과 고통 속에 자신들이 스스로 선택하여 속하게 된 한 쪽에 완전히 속해 버리게 되고, 문과-이과 간의 경계는 그들에게 명확한 실체가 되어 견고한 장벽으로 작용하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 그 속에서 자라났고 학교와 사회로부터도 공인된 것이기에 문과-이과의 이 구분은 학생들의 머리 속에 완전히 고정된 관념으로 자리잡는다. 그리고 이에 따라 그들은 학문과 관련된 모든 것을 문과와 이과로 구분하는 버릇에 철저히 젖게 된다. 모든 학문 분야나 학과, 교과목 등이 그들의 머리 속에서 문과와 이과로 나뉨은 물론 이들 분야의 교수, 학생, 책, 시험, 심지어는 과외활동까지도 그에 따라 같이 나뉜다. 이런 버릇은 학생 때로 끝나지 않고 그 후로도 그들의 일생을 통해 계속 이어지며 더욱 심해지기도 한다.

학문 외의 영역에서도 견고한 이분법

또한 이런 일은 학문 사회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며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문과-이과 구분이 훨씬 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때로 현대의 학문적 현실과 부합되지 못하는 이 구분의 폐단이 인식되기도 하고 이 구분을 받아들이지 않는 제도가 시도되는 일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는 이 구분을 맹신하는 사람들로부터의 거센 반발에 접하고 결국은 현실을 이 구분의 틀에 억지로 맞추거나 맞추어지지 않는 부분은 외면해버리는 식으로 끝나고 말게 된다.

가장 두드러진 예가 1993년에 처음 실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 대학 수학능력시험의 경우다. 이 시험이 처음 시행된 1993년에는 문과-이과의 구분 없이 모든 수험생들이 같은 문제를 풀도록 했고, 그 결과 문과-이과를 구분하여 교육시키는 현행 제도 속에서 어느 한 쪽 학생들에게 유리하고 다른 쪽은 불리한 문제점들이 노정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교육당국의 대응은 이런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 더욱 균형 잡힌 고교교육을 모색하는 방향이 아니라 이 제도에 문과-이과의 구분을 다시 도입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문과-이과의 임의적 구분이 문제의 원인임을 보지 못하고 그 구분을 절대적인 전제로서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상 교사, 학부모, 교육행정가, 정치인 등 우리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학문과 관련된 모든 것을, 때로는 학문 외적인 것들까지를 문과와 이과로 나누는 것을 철칙으로 신봉하고 그 철칙에 맞지 않는 상황에는 맹목적으로 저항하기까지 하는 버릇에 젖어 있는 것이다.

문과-이과 기계적 균형에 매달릴 필요없어…공부의 폭 제한말아야

또한 우리 사회는 문과와 이과를 구분할 뿐만 아니라 이 둘이 서로 엄격하게 대칭과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초, 중등 교육이나 대학의 교양 교육에 있어 사회 교과목과 과학 교과목 (심지어는 국어 교과목과 수학 교과목)이 절대적으로 균형을 이루고 똑같은 비중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교육계에서 이 두 쪽이 평등하게 똑같이 다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은 남녀가 평등하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생각보다 더 철저히 지켜지고 있었다.

이를테면 '문과 교과목'인 사회 교과목을 한 시간 늘리거나 줄이면 '이과 교과목'인 과학 교과목도 한 시간을 늘리거나 줄여야 하는 것을 당연한 철칙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과학기술이 사회와 문화 속에서 점점 중요해 져 가는 현 상황을 고려하여 모든 학생들에게 과학기술의 교육을 더 강화하자는 주장, 혹은 점점 더 복잡해지는 사회 상황을 고려하여 의사소통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글쓰기를 비롯한 인문 소양을 기르는 교육을 더 강화하자는 주장은 모두 당연히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굳이 양 쪽의 기계적 균형을 고집할 게 아니라 한 쪽을 더 강조하는 교육을 유연하게 선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당연한 주장은 지금과 같은 구도 하에서는 논의조차 하기 힘들다. 현재의 문과 영역과 이과 영역 중 한 부분을 더 강화하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이 평등해야 하는 것처럼 문과-이과 교육 내용 역시 평등한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생각이 견고한 고정관념을 이루고 있는 한 이런 주장은 설 자리가 없어진다. 문과-이과의 기계적 균형은 사실 그것의 획일적인 구분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고등학교 단계에서의 문과-이과 구분에 대한 나의 이런 문제 제기가 학생들로 하여금 언제 자신의 전공을 정하도록 해야 하는가, 즉 대학 입학 이전 고등학생 때인가, 대학에 입학하여 몇 년을 수학한 이후인가에 대한 문제제기인 것은 아니다. 인생의 어느 시기에 자신의 진로 혹은 미래에 전공할 학문 분야를 택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의 문제는 또 다른 문제이다.

학생에 따라서는 고등학교 시절에 혹은 그보다 더 어린 시절에 이미 장래 자신이 경제학, 경영학, 전산학, 또는 해양학 등 어느 한 분야를 전공하겠다고 정할 수 있다.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이 분야들을 문과나 이과 어느 한쪽으로 구분해 줌으로써 학생들의 공부의 폭을 좁혀 버리는 데에 있다.

미래의 경제학자가 문과라는 이유로 수학을 등한시한다면?

예를 들어 경제학 전공을 희망하는 학생은 '문과'라고 해서 경제학에 필요한 수학을 등한시하고, 여러 면에서 경제학과 비슷한 방법을 많이 쓰는 물리학을 무시하게 되며, 경영학 전공을 희망하는 학생 역시 '문과'라고 해서 장래 자신의 분야에서 필수적으로 요구받게 될 공학, 기술에 대한 관심마저 차단당한다.

반대로 전산학이나 해양학을 전공하겠다는 학생들은 그 분야들이 '이과'라고 해서 인문학, 사회과학 분야들을 무시하게 된다. 이렇게 될 경우 해당 분야의 연구가 갖는 사회적 의미와 영향에 대한 관심이 차단될 뿐 아니라 장래 해당 분야의 업무를 담당할 때 필수적으로 요구될 문장력, 독해력 등을 훈련할 기회를 얻기 어려워 진다.

고등학교 과정에서 극히 임의적으로 형성된 문과와 이과의 구분은 학문 분야의 구분으로만 그치지 않고 그에 속하는 사람의 구분으로 이어지면서 더 큰 문제를 낳는다. 마치 '문과인'과 '이과인'이 따로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문과인'과 '이과인' 양쪽은 상대방에 대해 매우 배타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들은 자신이 속한 쪽이 아닌 쪽과 자신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명확한 경계에 의해 자신의 쪽과 격리된 다른 쪽이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있을 수가 없다는 생각인 것이다.

게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명확하게 문과-이과를 구별하여 다른 반을 편성함으로써 인간관계 역시 배타적으로 형성된다. '문과인'은 '문과인'끼리만 어울리고 '이과인'은 '이과인'끼리만 어울리게 되는 것이다.

무미건조한 이과인, 말장난에만 능한 문과인? … 편견을 깨자

이런 과정에서 이들은 상대 쪽 분야의 내용에 관해 무지할 뿐 아니라 그 활동이나 종사자들의 성격에 대해서도 무지하게 되며 이런 무지는 결국 서로에 대한 편견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를테면 이과에 속한 사람은 무미건조하고 기계적인 까닭에 매사에 맹목적이고 정확하기만 할 뿐 인간과 사회의 복잡하고 다양한 문제들에 무감각하거나 무지할 것이라는 편견이 형성된다.

또 문과에 속한 사람들은 두루뭉수리하기만 한 까닭에 매사에 명확한 기준이 없고 정확히 아는 것은 없이 잡다한 지식만 섭취하며 말장난에만 능하다는 편견이 형성된다.

물론 이런 편견의 이면에는 서로 자신들에게 부족한 능력을 지닌 상대 쪽에 대한 경외심과 콤플렉스도 존재하지만 그 역시 임의적인 문과-이과 구분에 따른 교육과정에서 형성된 무지와 편견이기는 마찬가지다. 결국 문과와 이과에 속한 사람들의 상대 쪽에 대한 이같은 무지와 편견은 일생을 두고 큰 제약으로 작용하게 된다.

문과-이과 이분법 속에서 과학기술에 대한 신비화 심화돼

그러나 우리 사회 전체를 두고 더 심각한 것은 이같은 상호 무지와 편견이 과학기술의 일반 문화로부터의 유리 상태를 크게 심화시켰다는 점이다. 과학기술에 대한 '신비화'와 '무관심'이 동전의 양 면처럼 서로 맞물려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유리 상태는 한국 사회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19세기 이래 급격히 심화된 과학기술의 전문화 과정을 거치면서 현대의 모든 사회에서 과학기술의 뚜렷한 특성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고등학교 단계에서 형성된 문과-이과 간의 장벽과 그 이후 쌓여간 상호 간의 무지, 편견 때문에 이런 유리 상태가 유독 심해진 것이다.

그 결과 과학기술이 사회의 다른 요소들과 분리되어 별도로 존재하며 발전하는 것이라는 생각, 따라서 과학기술자가 아닌 일반인들은 과학기술에 관심을 갖지 않아도 되고 이해할 필요는 더욱 더 없다는 생각이 우리 사회에는 특히 널리 퍼져 있다.

'황우석 사태'…자연과학에 무관심한 인문학도, 인문학적 소양 없는 자연과학도의 재앙

마찬가지로 과학기술자들이 자신들의 분야가 사회와 문화의 여러 요소들로부터 초연한, 완전히 격리된 분야이며 따라서 자신들은 사회의 제반 요소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하는 일도 우리 사회에서 특히 심하다.

심지어 이과에 속한 자신들은 자신들이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사회와 문화 일반에 대해 무지해도 좋고 오히려 그것이 정상이라는 생각까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문과-이과의 장벽이 일반인들의 과학기술에 대한 장벽을 더욱 두껍게 만든 것이다.

지난해 한국 사회를 큰 혼란에 빠뜨렸던 '황우석 사태'도 문과-이과의 엄격한 구분 속에서 형성된, 과학을 신비화하는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 사회에 인문학적 소양과 사회과학적 안목을 지닌 과학기술자, 과학기술에 대한 소양과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있는 인문사회과학자가 많이 있었다면 아마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언론 역시 황우석의 연구에 대한 맹목적인 열광에 앞서 다양한 측면에서 성찰할 수 있었을 게다.

인문학적 소양과 사회과학적 안목을 지닌 과학기술자, 과학기술에 대한 소양과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있는 인문사회과학자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필요는 문과와 이과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풍토를 바꿔야만 해결할 수 있다. '황우석 사태'가 남긴 교훈 중 하나다.

- '문과-이과 구분, 이젠 없애자"
"경직된 문과-이과 구분이 '황우석 사태'낳았다"
"문과-이과의 차이는 제도가 만든 허상에 불과"
'하얀 거탑' 속에는 무엇이 있나?
'핀란드 교육'이 부럽다고요?
과학수업이 FTA를 만났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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