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입양은 아동복지인가, 아동학대인가?
해외입양은 아동복지인가, 아동학대인가?
[해외입양, 그 잊혀진 역사④ㆍ끝]"아동에 대한 국가 폭력"
필자는 지난 해 11월 재외동포재단이 주최한 해외입양 사후사업 관련 세미나에서 "해외입양은 아동복지(child welfare)이기보다는 아동학대(child abuse)일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던졌다. 이 말은 그 모임에 참석했던 해외입양기관에서 일하는 사회복지사들에게 충격으로 다가간 듯 했다. 회의가 끝나고 나서 몇 분이 내게 와서 항의와 분노를 표했다. 부모와 가정이 필요한 요보호 아동에게 인종과 문화를 초월해서 가정을 찾아 주는 해외입양사업의 고결성을 그렇게 폄훼해도 되냐는 것이었다.
  
  누가 내보내졌는가…"인종청소에 버금갈 만한 일"
  
  우리나라가 해외입양을 시작한 것은 6·25전쟁 직후였다. 반세기를 넘어서 국민소득 2만 달러에 진입하고 있고 세계경제 10위권을 넘보는 경제대국이 된 오늘에도 우리나라는 자기 땅에 태어난 어린이를 해외로 내보내는, 지구상에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나라가 되었다. 해외입양아동 수는 보건복지부의 통계에 의하면 1953년부터 2005년까지 총 15만8703명이었다. 이 중 혼혈 어린이는 1955년부터 1973년까지 내보내졌고, 총 5546명이었다. 정부의 또다른 통계에 따르면, 1958년부터 지금까지 입양 보낸 아동 중 비혼모아동은 9만8178명, 결손가정아동이 2만8823명, 버려진 아동이 2만9950명이었으며 전체 숫자 가운데 장애아동은 3만7216명이었다.
  
▲ 한 입양기관에서 입양을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 ⓒ연합뉴스

  이 통계는 우리 사회가 해외입양을 통해 주로 혼혈아동·장애아동·비혼모출산 아동· 결손가정 아동· 기아들을 우리 사회 외부로 대거 격출(隔出)시킨 사실을 보여준다. 그 근원적 성격에 있어서 인종청소(Genocide)에 버금갈 만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물론 이 일에 대해서는 성장과 교육의 과정을 통해 우리 사회가 주는 혜택을 입은 필자 스스로도 공범의 혐의를 벗을 길이 없다는 전제를 가지고 하는 말이다.
  
  해외입양이 아동복지가 아니라 아동학대일 수 있다는 주장의 근거를 대기 전에 한 가지 점을 전제하고 싶다. 해외입양은 미시적 차원에서는 아동복지적 성격을 충분히 담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요보호 아동을 따뜻하게 돌보는 사랑의 수고에 대해서 필자 역시 무한한 존경과 감사를 가지고 있다. 요보호 아동이 최초로 출현하는 장소인 길가와 골목, 시청 사회복지과와 파출소, 조산원이나 산부인과, 아동일시보호소와 입양기관의 아동보호시설과 부설병원 등에서 일해 온 입양기관 설립자들과 그 종사자들, 사회복지사들과 위탁모들의 눈물겨운 사랑과 수고는 충분히 아동복지에 헌신한 명예로운 이름을 얻어 마땅하다. 더구나 인종과 혈통이 다른 아이들을 가족의 성원으로 받아들여 차별 없는 사랑으로 아이들을 키우는 입양부모의 '자애로운 사랑(philanthropic love)'에 대해서는 깊은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필자는 가지고 있다. 필자가 문제 삼는 것은 이렇게 해외입양의 미시적 차원이 아닌 거시적 차원, 즉 우리 시대의 사회적 현상과 정교한 국제 사회적 체계의 한 부분으로서의 해외입양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1)생태체계론적 관점에 비춰 볼 때 해외입양은 아동을 향한 국가폭력이라는 점 2)해외입양이 한국 사회의 경제개발전략의 일환이었을 개연성이 높고 그런 점에서 해외입양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자들의 부와 번영을 위한 희생이었다는 점 3)해외입양은 결국 서구사회의 유럽중심주의 혹은 백인 우월의 인종차별주의에 의해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는 일이라는 점 4)우리 사회에서 태어나는 아동을 사회의 성원으로 자라갈 수 있도록 사회 변혁을 추구하는 대신 해외입양을 중단하는 것이 마치 아동의 행복권을 침해하는 일일 수 있다고 간주하는 단순한 관찰자적 의식의 수준 등에 대한 비판적 고찰 등을 다루고자 한다.
  
  해외입양은 강제 격출 행위
  
  생태체계론적(eco-systems theory) 관점에 기초해서 볼 때, 해외입양은 아동이 자기가 미래에 살기로 하고 태어난 사회로부터 강제 격출을 당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아동을 향한 사회적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생태체계론적 관점은 미국의 학자들에 의해서 소위 '개방입양(open adoption)'의 이론적 근거로 제시된 것이다. 생태체계이론이란 개인은 하나의 커다란 생태체계의 한 부분으로 존재한다는 주장에서 출발한다. 어린아이의 출생은 생태체계로의 출생이라는 것이다. 이 생태체계는 유전적, 가족적, 그리고 사회적 경제적 그물망이며 그 어린아이를 받아들이게 될 생물적 사회적 환경체계 전체를 일컫는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어린아이가 태어날 때 그는 자기가 미래에 귀속될 가족과 사회에 어울리는 유전적 사회적 코드를 지니고 태어난다고 할 수 있다.
  
  '개방입양(open adoption)'에서는 바로 이 생태체계이론에 기초해서 볼 때, 타고난 생부모 생태체계는 말살되거나 부인될 수 없는 것이므로, 성장과정을 통해 생부모 생태체계에 대한 정보를 제공받고 상호교류의 기회까지 주고 입양어린이가 통합적 자기정체감을 형성해가도록 도와야 한다는 주장을 전개했다.
  
  이 생태체계이론에 비추어 볼 때, 해외입양이란 어린아이를 그가 자연스럽게 귀속될 생태체계로부터 강제로 격리하는 일인 동시에 아이가 지니고 태어난 유전적 사회적 체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다른 생태체계에 강제로 접합하는 일이다. 이 강제격리와 강제접합의 상흔은 입양아동과 생부모 가족, 입양부모 가족 전반에 걸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한국의 해외입양은 백인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미국과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한국 사이에 정교하게 제도화된 장치에 의해 아동이 원래 귀속될 생태체계로부터 격출돼 귀속이 쉽지 않은 사회로 진입하는 것을 뜻한다. 특히 이러한 완전히 상이한 생태체계로의 '강제적' 입양은 체계적 학대 또는 제도적 폭력으로 볼 수 있다.
  
  부와 번영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아동 격출
  
▲ 한국을 방문한 해외입양인들을 위한 민간비영리단체인 '뿌리의 집' 전경. ⓒ프레시안

  또 한국의 해외입양이 경제성장제일주의 혹은 경제개발 전략과 암암리에 연루돼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해외입양은 아동학대로 해석될 수 있다. 자기 사회 내부에서 출현한 아동을 해외로 격출하는 과정을 통해 자기 사회의 부와 번영이 암암리에 추구됐다고 한다면, 이를 어떻게 아동복지로 이름할 수 있겠는가?
  
  해외입양에 관한 보건복지부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의 해외입양은 70년대와 80년대 20년 동안 최고조에 달했다. 1953년부터 1968년까지는 매해 1000명에 훨씬 못 미치는 어린아이들을 해외로 입양보냈다. 그러나 1969년 1192명, 1970년 1932명, 1971년 2725명 등 그 숫자가 가파르게 상승해 1985년에는 8837명에 이르기까지 한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해외입양이 국제적으로 강력한 비판에 부딪히게 되고 1991년부터 해외입양은 매해 2000명을 약간 웃도는 숫자로 조정될 때까지 강력한 추동력을 가지고 실천된 것이다. 70년대와 80년대에 내보내진 숫자는 11만3568명으로 지난 54년 동안 나간 해외입양아 중 3분의 2가 넘는 다수가 이 20년 동안 보내진 것이다.
  
  70년대와 80년대는 우리 사회에서 경제개발의 이데올로기가 가장 지배적으로 작동하던 시대였다. 그런 점에서 경제 이데올로그의 전횡은 심지어 아동복지조차 경제발전의 하위 수단으로 동원했다. 1988년 미국 <프로그레시브(The Progressive)> 지의 기자 매튜 로스차일드(Matthew Rothschild)는 한국의 해외입양에 관한 르포기사에서 한 아이가 해외로 입양되는 댓가로 입양기관에 유입되는 돈이 5000달러라고 썼다. 2005년 방영된 KBS <추적 60분>에서는 2000년대에 이르러 이 금액이 약 1만 달러에 이른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로스차일드 기자의 보도를 감안해 추정해보면 70년대와 80년대에 우리나라는 해외 아동입양으로 매년 2000만-4000만 달러가 유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 100만 달러 수출을 달성한 기업에게 정부 차원에서 포상과 명예를 줘 수출산업을 전방위적으로 독려하던 시대, 달러가 몹시 요긴하던 시절에, 부가가치가 순수하게 국내에서 만들어진 연간 2000만-4000만 달러는 정부 입장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모국을 방문하는 입양인들이 들고 오는 입양관련 서류뭉치 속에는 70년대 유럽 국가들에 주재하고 있던 한국대사들이 입양부모에게 보낸 감사편지가 발견되곤 한다. 일국의 대사가 한 아이를 입양한 가정에 감사편지를 보내는 일은 외교적 관행으로 봐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필자는 이를 우리나라가 70년대에 해외입양을 국가적 시책으로 드라이브했던 흔적으로 해석하고 싶다.
  
  16만 명에 이르는 아동들을 위한 복지와 교육을 국내에서 감당하려고 했을 때 필요했을 정부 예산의 절감효과 또한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결국 해외입양은 이 땅의 정부에게는 무시할 수 없는 양의 달러의 유입과 국내 사회복지 및 교육비용절감이라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국가는 해외입양을 제도화하고 보호대상 아동에 대한 책임을 회피했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아동을 경제개발의 수단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요보호 아동에 대한 제도적 폭력을 행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창출된 재원은 이 땅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오늘 우리의 부와 번영은 간접적인 형태로나마, 해외입양을 가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고난에 찬 삶을 살고 있는 많은 입양인들에게 빚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해외입양은 물질적 보상 대가로 정체성 훼손하는 제도
  
▲입양인 예술가들이 직접 참여한 사진 작품. 입양인들이 직면하는 정체성 문제를 보여주는 작품. ⓒ프레시안

  해외입양은 한국 어린이에게는 미국과 유럽의 주류 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백인 가정으로의 입양을 의미한다. 그런데 미국과 유럽의 백인 주류 사회는 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의 피식민지 인종에 대한 인종차별주의의 유산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필자가 만난 대부분의 입양인들은 입양으로 인해 입양국가의 백인가족의 성원으로 받아들여지고 식량과 의료와 교육을 보장받는 대신, 백인 중심의 인종차별주의를 받아들이면서 성장해야 했다. 이는 불가피하게 아시아인으로서의 자기 열등성을 내면화해 자기 존엄을 무너뜨리고 내면의 깊은 상흔을 안고 살아가도록 했다. 이는 결국 해외입양이 물질적 보상을 대가로 아동의 내면적이고 근원적인 가치 혹은 정체성의 훼손을 허락하는 제도일 수 있음을 말해 준다.
  
  스웨덴에서 이뤄진 사회인구학적 연구는 한국계 입양인들이 백인 가정의 자녀들에 비해 자기존엄성 수준에 있어서 얼마나 취약한지를 명백히 보여준다. 자살과 자살시도, 정신적 장애와 알콜 오남용 및 마약 오남용, 그리고 중범죄율에 있어 입양인들의 노출 정도가 다른 이들에 비해 높았다.
  
  이 지점에서 해외입양기관들이 종종 해외입양 중단의 목소리에 반대해 주장하는 '보호가 필요한 아동에게 가정을 찾아주는 일만큼 소중한 일이 어디에 있냐'는 주장에 대해 '아동은 가정으로만 입양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로도 입양이 되는 것이라는 점, 그리고 그 사회가 아동의 성장에 있어서 공격적이고 해악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회라고 했을 때 해외입양을 쉽게 아동복지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박하고 싶다.
  
  한국계 입양인으로서 스웨덴의 한국학 학자 토비아스 휘비네트(Tobias Huebinette/한국명 이삼돌)는 그의 책 <고아의 나라를 위로하라(Comforting Orphaned Nation)>에서 해외입양을 "식민지시대의 현대적 프로젝트"라고 주장하면서 해외입양과 식민지시대의 노예제도 사이의 충격적 유사성을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1) 노예무역과 해외입양은 둘 다 소비자(서구인)의 수요, 사적 시장의 관심, 씁쓸하기 그지없는 이익 창출, 건강한 노예가 비싼 가격으로 거래되었던 것처럼 어리고 건강한 아동일수록 비싼 가격 체계에 기반하고 있으며,
  
  2) 노예무역이나 해외입양이 공히 출생국 출신의 부르조아 중개인 혹은 전문인에 의존하고 있는 사업이자 효과적인 선박해운 혹은 항공해운에 의존하고 있는 사업이라는 점,
  
  3) 노예와 입양아동, 두 경우 모두에게 부모와 형제와 친족 혹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사람들과 분리가 일어나며, 원래의 문화와 언어의 박탈이 일어나며, 도착하는 나라의 항구와 공항에서 재출생하며, 기독교화되며, 그 주인의 이름을 따라 세례를 받으며, 오직 마지막에 남는 것은 인종차별주의에 노출되는 비백인의 몸, 그것도 케이스 넘버로서의 번호가 매겨진 몸뿐이라는 점,
  
  4) 노예나 입양아동이나 다 같이 주인의 가정에 영원히 그리고 법적으로 귀속되며 그들의 가구와 가정의 일원이 된다는 점,
  
  5) 두 경우 모두 그 가정으로 들어서는 순간 물질적 상황이 엄청나게 좋아진다는 얄팍한 주장에 의해서 이 일이 정당화된다는 점,
  
  6) 마지막으로 두 경우 모두 '선한' 구매자나 주인의 필요와 요구와 욕망을 기쁘게 충족시키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점 등이 노예제도와 해외입양의 유사점들이다.

  
  휘비네트의 이 같은 주장은 입양부모와의 긍정적인 관계 가운데 있는 입양인들에게는 커다란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지만, 그 묘사된 특질의 기본적 성격마저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런 점에서 미시적 관점에서 해외입양이 아동복지의 차원을 담지하고 있음에도 거시적 관점에서 해외입양은 리콜(recall)돼야 할 제도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결함 있는 자동차와 부작용이 나타나는 약품의 리콜이 당연하다면 30% 이상의 당사자들에게 정체성의 혼란을 야기하고 자기 존엄에 심각한 훼손을 가하는 해외입양의 아동학대(child abuse)적 성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해외입양제도의 중단을 주장하는 것이 너무 지나친 일일까?
  
  해외입양이 아동의 '행복추구권'이라고?
  
  마지막으로, 우리 사회의 동태적이고 변혁적인 관점에서 해외입양이 아동복지인지, 아동학대인지를 판별해가야 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하고 싶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 아이들이 그렇게 해외입양을 갔으니까 선진국으로 가서 혜택을 누리며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들이 만약 국내에서 자랐다면 고아나 국내입양아로서 더 큰 차별과 냉대를 받으면서 자라고 그래서 더 불행한 삶을 살게 되지 않았을까요?'라고 묻는다. 이 같은 생각을 기초로 사람들은 해외입양을 마냥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 해외입양제도를 폐지하는 것은 부모의 돌봄이 제공되지 않은 채로 이 땅에 태어나는 아이들의 미래의 행복을 가로막고 나서는 일이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우리사회의 이런 차원의 변혁을 가져올 수 없다는 무책임한 의식에 기반한 것이다. 변혁을 추구하는 참여자로서가 아니라 관찰자로서만 바라보는 것이다.
  
  1950년대와 60년대에 우리나라는 혼혈어린이들을 해외로 입양보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인종차별이 너무 심한 나라이니까 혼혈어린이들은 입양을 간 것이 아이들 자신들에게 참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들 말했다. 그러나 혼혈어린이들이 우리사회의 새 생명으로 태어났을 때, 우리사회가 그들의 삶에 대해 공격적이고 해악을 끼치는 인종차별주의에 젖어 있었다면, 보다 올바른 선택은 우리의 인종차별주의를 치유하고 혼혈어린이들이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것이었다. '부모인 내가 악하니까 너는 다른 집에 가서 사는 것이 낫다'는 말과 다름이 없는 생각이다. 인종차별주의를 정리하고 혼혈어린이에게도 따뜻한 사회를 만들어 가야했을 우리의 의무는 방기한 채로 그들을 해외입양 보낸 일이 옳았다고만 말하고 있는 것은 관찰자의 입장에서만 바라보고 있음을 의미한다.
  
  오늘날도 이 일은 반복되고 있다. 비혼모의 자식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지난한 삶이겠는가, 차별과 소외와 물질적 결핍을 겪는 대신 차라리 해외로 입양을 가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주장을 도처에서 듣는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우리사회가 비혼모의 자식들도 따뜻하게 받아들여서 우리사회 안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편견없는 사회'로 바꿔나가 해외입양도 중단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해외입양 가서 선진국의 좋은 가정 만나서 좋은 교육 받고 영어도 잘 할 수 있게 되어서 얼마나 좋으냐?'는 질문을 받았던 한 입양인이 '그러면 당신 아이를 해외입양 보내지 그랬느냐?'고 맞받아치는 모습을 보았다. 우리는 우리사회를 가꾸어서 아이가 해외입양 가지 않아도 될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지, 해외입양 가면 더 행복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해외입양을 지속해야 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나는 어린아이들을 향한 가해자적 차원에서 계속 서게 되는 것이며, 바로 그런 점에서 해외입양은 아동학대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땅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 떠나야 했던 아이들
  
  생태체계이론적 관점에 비추어 볼 때, 그리고 경제성장제일주의 혹은 경제개발전략의 일환으로서의 해외입양이 실천되었을 개연성이 높다고 하는 점에서, 그리고 해외입양인들이 유럽중심주의의 가치규범에 의해서 끊임없이 상처와 훼손에 내어 몰리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나아가 우리 사회가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어린이들을 따뜻하게 키워가려고 하는 노력을 외면하는 관찰자적 관점에 붙들린 채로 해외입양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해외입양은 어린이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모토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해외입양을 허용하고 능동적으로 추진했던 모든 사람들의 이익추구의 과정에 불과했을 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해외입양은 보호가 필요한 아동을 존엄성을 지닌 주체로서 받아들이는 일이었다기보다는 이 땅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복리를 위한 객체로 끊임없이 대상화됐을 뿐인 것이다.
  
  부산에서 태어나 길에 버려졌다가 미국으로 입양 가서 현재 워싱턴 디시에 살면서 통신원으로 일하고 있는 입양인 나비야(Nabiya)가 쓴 한 편의 시를 덧붙임으로 이 글의 마무리하고자 한다.
  
  우리는 현대의 노예들
  세금감면과 정부교부금을 위해 고아원으로 수집된
  자동차들이나 컴퓨터 칩처럼 세계 시장으로 팔려 나온
  우리가 더 이상 고향이라 부를 수 없는 나라의 GDP를 위해
  
  우리는 내 동족의 손으로 팔아넘겨진 일용품
  서양인의 면전으로 서양인들의 가치체계에로
  우리는 우편으로 주문된 상품
  우리는 귀여워야만 하고 이국적이어야 하고 기분을 좋게 해야 한다
  우리는 주인인 서양인들의 인형놀이감들로 행동해야 한다
  
  우리는 백인들 세상의 장식품
  그들의 부요와 관용의 전시물들
  우리는 백인 남성들의 무거운 짐의 표지
  우리의 이주는 그들의 자비를 표상
  그들의 세계적 차원의 삶을 그들의 가족들과 친구들에 드러내는 것
  
  우리의 언어는 제거되었고
  우리의 찢어진 눈과 둥근 얼굴 모양은 조롱거리가 되었으며
  이 운반을 통해서 우리의 정체성은 말소되었다
  마치 우리의 한국인됨이 문드러져 없어지고 말았듯이
  그리고 우리 안에서 작은 백인 아이가 다시 태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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