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뤤지' 발음하면, 영어 잘 한다?"…'NO'
"'오뤤지' 발음하면, 영어 잘 한다?"…'NO'
[다시 읽는 책] 번역가 안정효가 본 '한국인의 영어 공부'
2008.02.05 09:48:00
"'오뤤지' 발음하면, 영어 잘 한다?"…'NO'
"선생님들한테 속았다."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3월 어느 날, 칠판에 가득한 알파벳을 보며 소년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소년은 대개의 한국인들이 그렇듯 아주 어린 시절부터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언어"라고 배웠다.

그런데 맙소사. '한글 자·모음으로 표현할 수 없는 발음이 이렇게 많다니….' 소년이 당황한 게 당연하다. 하지만 세상에서 통용되는 언어체계 가운데 인간이 낼 수 있는 모든 발음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프레시안>은 '오뤤지', <한겨레>는 '오린지'?

따라서 다른 언어의 발음을 모국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약간의 차이가 생기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런 배움을 거치며, 소년은 어른이 된다. 그리고 이런 배움을 통해 자신이 속한 언어권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 다른 언어권에 속한 사람과 대화하려면 성실한 공부와 함께 조심스러운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다른 언어로 대화할 때 약간의 오해가 빚어질 가능성에 대해서는 관대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것 등을 깨닫는다.

그런데 이런 깨달음을 생략하고, 어른이 된 이들 가운데 간혹 억지를 부리는 경우가 있다. 외래어인 오렌지를 영어권 사람들의 실제 발음에 최대한 가깝게 적기 위해 오뤤지, 혹은 오린지 등으로 표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표적인 사례다.

지난달 30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마련한 '영어 공교육 완성을 위한 실천방안 공청회'에서 이경숙 인수위원장이 이런 주장을 했다. 당시 이 위원장이 '오렌지'를 표현하기 위해 입으로 낸 소리를 정확한 우리글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똑같은 소리를 듣고, <프레시안> 기자는 '오뤤지'라고 적었는데 <한겨레> 기자는 '오린지'라고 적었다. 둘 중 하나가 실수한 게 아니라면, 이 위원장이 입으로 낸 소리는 정확한 우리글로 옮길 수 없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자연스런 현상이다. 입으로 내는 모든 소리를 한글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그리고 이런 한계는 영어든, 일어든, 중국어든 모두 갖고 있는 것이니 특별히 안타까워 할 필요도 없다.

외래어와 외국어를 헷갈린 이경숙 총장

그런데 당시 이 위원장은 엉뚱한 주장을 했다. 외래어 표기법을 바꾸자는 게다. 이 위원장이 입으로 낸 소리를 '오뤤지'로 표현하면, '오린지'로 들은 <한겨레> 기자가 납득하지 못할 게다. '오린지'로 적으면, '오뤤지'로 들은 <프레시안> 기자가 당황할 게다. 어차피 어떻게 적어도, 정확한 발음을 옮길 수는 없다. 외래어 표기법을 도대체 어떻게 바꾸자는 것인지 막연해진다.

게다가 이 위원장은 외래어 표기법에 대해 이야기하며, 영어 단어인 'friendly'의 표기까지 문제 삼았다. 외래어와 외국어의 차이를 헷갈린 것일까.

외래어는 다른 나라의 말이 우리에게 들어와 쓰이는 가운데 사회적으로 널리 인정된 것이다. 그래서 국어사전에서 찾을 수 있다.

반면 외국어는 글자 그대로 다른 나라 말이다. 그래서 국어사전이 아닌 해당 언어 사전에서 찾아야 한다. 요컨대 '오렌지'는 국어사전에 있지만, '프렌들리' 혹은 '후렌들리' 등은 국어사전에 없다.

"영어는 발음이다!" 과연?

물론 박사 학위를 소지한 대학 총장인 이 위원장이 이런 사실을 몰랐을 리는 없다. 실수로 빚어진 사고였을 게다. 그런데 이런 작은 사고는 영어에 대해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오랜 통념 한 가지를 잘 보여준다.

"영어는 발음이다"라는 통념이다. 좀 더 풀어서 적으면, "발음이 좋아야 영어를 잘 한다"라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좀 어색한 방식으로 혀를 놀려서 소리를 내는 연습을 하는 게 영어를 잘 하는 길이라 여긴다. 이런 통념을 굳게 믿는 부모들이 어린 아이를 수술대 위에 올리는 일도 간혹 벌어졌다. 미국인처럼 혀를 놀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수술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통념은 과연 옳은 걸까. '한국에서 영어를 제일 잘 하는 사람'을 꼽을 때면 거의 빠지지 않는 이를 찾아 이런 질문을 던졌다. 최근 인수위 주변에서 영어교육을 둘러싸고 나오는 이야기들에 대한 생각도 함께 물었는데, 그는 답변을 거부했다. "영어교육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할 말이 너무 많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다 풀어 놓기에는 지금 너무 바쁘다"라는 이야기가 뒤따랐다. 우리 사회의 영어교육에 대한 통념 대부분이 영 못마땅하다는 투였다.

기자의 질문을 받은 이는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안정효 씨다. 그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시작으로 총 150여 권의 번역서를 남겼다. 그리고 그는 한국번역문학상의 첫 수상자였으며, 이화여대 통역대학원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적어도 영어 실력만큼은 영어교육정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인수위 관계자들보다 훨씬 윗길이다. 대답을 듣지 못한 대신, 그의 책을 펼쳤다. 손꼽히는 번역가답게 그는 영어 학습 및 번역에 관한 책도 여럿 남겼다.

"'뚜 쁘라스 뚜리 쁘라스 뚜리"…반기문도 영어 못한다?

안 씨가 지난해 출간한 <뒤집어지는 영어 : 영화로 배우는 영어>도 영어 공부를 위한 책이다. 이 책을 펼치니, 앞서의 통념에 관한 이야기가 여러 곳에서 나왔다. "영어는 발음이다"라는 통념에 대한 영어 전문가의 비판은 신랄했다. 조금 길지만, 인용해본다.

"언제부터 사람들은 언어배우기의 과정에서 어휘의 습득이 아니라 아름다운 발음이 생명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게 되었을까? 그리고 왜 그런 생각을 할까?

하지만 발음을 기준으로 삼아 공식적으로 영어 실력을 평가하고, 일꾼을 채용하는 기관이나 단체나 기업이 있다면, 도대체 어떤 곳에서 그러는지 참으로 궁금해진다.


전 세계에서 발음이 좋다고 영어 실력을 인정받고 유명해진 사람의 예를 필자는 본 적이 없다.

예를 들어 2006년 한글날, 북한이 핵실험을 벌여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날에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지를 생각해 보자.

같은 날 대한민국의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은 유엔 사무총장 단일 후보로 공식 추대되어 내외신 기자들과 회견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반 장관은 질문을 받고, 우리말로 대답하다가 '뚜 쁘라스 뚜리 쁘라스 뚜리(2+3+3)'라는 영어 표현을 썼다. 반 장관의 영어 발음은 헨리 키신저만큼이나 이상해서 누가 들어봐도 그리 '유창'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발음이 나쁘다며 반 장관을 사무총장에 앉히면, 안 된다고 반대한 사람은 유엔본부나 우리나라에 단 한 명도 없었다. 그것은 반 장관이 피력한 얘기의 내용이 중요하지, 그 내용을 표현하는 어휘를 어떻게 발음하느냐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뒤집어지는 영어 : 영화로 배우는 영어>, 34~35p)

"혀 꼬부라진 영어는 국내용"


하지만 우리는 영어 공부에 쏟는 시간 가운데 상당 부분을 발음 교정에 할애한다. 그리고 영어 발음이 나쁘면, 영어로 말할 때 주눅드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안 씨의 책 내용을 조금 더 살펴보자.

"그리고 우리말에서도, 어떤 사람의 실력을 평가할 때는 어휘력이나 문장 구성력 따위는 비중을 크게 주지만, 방송국 아나운서 이외에는 취직 시험에서 우리말 발음을 따지는 곳이 별로 없다.

쫄깃쫄깃한 알맹이가 없이 발음만 좋은 영어는, 좀 가혹하게 평가하자면, 사기꾼의 뛰어난 말솜씨와 비슷하다. 듣기에는 좋지만, 공감과 논리로 설득하지 못하는 그런 영어는 가장무도회나 더덕더덕 화장한 얼굴과 같다.

인간의 감성과 지성을 설득할만한 내용은 없고 소리만 좋은 영어라면, 비슷한 꺼풀 실력을 갖춘 우리나라 사람끼리의 면접에서는 멋진 영어로 통할지 모르지만, 외국에 나가서는 대한민국의 평균치 지성이나마 대표하는 인물의 언어로서 행세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오 예!'는 물론이요, '워러water'니 '웨이러waiter'니 해가며 '유창'한 억양과 혀 꼬부리기를 열심히 과시하는 회화체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만나지만, 듣기에 좋은 발음이란 명품 의상처럼 남을 의식해서 걸치는 겉멋일 따름이지, 지적인 내면을 투영시키는 실력의 척도로 간주하기에는 무리가 생긴다.

그보다는 오히려 고지식한 '예스'와 '워터'와 '웨이터'가 정작 고상하고 점잖은 발음으로서, 화자의 품격을 훨씬 더 높여준다고 필자는 개인적으로 오래 전부터 생각해 왔다." (같은 책, 35~36p)

영어 잘 하는 수술?…"관상 바꾸려 성형수술 하는 것과 같다"

안정효 씨의 책에는 영어 발음을 위해 자식을 수술대 위에 올리는 부모들을 향한 이야기도 있다.


"말은 혓바닥이나 입이 아니라 마음과 머리가 한다. 마음이 느끼는 바를 머리가 정리하여 표현하는 것이 말이고, 입은 그런 내용을 전달하는 심부름밖에 하지 않는다. 입은 사고나 표현을 할 줄 모르며 그냥 전달만 한다.

영어를 잘 하라고 자식의 성대를 수술하는 사람은 주어진 운명을 바꾸기 위해 성형수술을 한다는 사람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스스로 실력을 쌓아 운명을 바꿔보려는 노력 대신, 얼굴을 수술하여 관상을 속이려는 그들의 속임수는 명당과 길일(吉日)에만 매달리고 실제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행위만큼이나 어리석다
" (같은 책, 283p)

"제1과에서 맴도는 영어 조기교육 대신 평생학습 강화해야"

인수위 측은 영어교육정책을 발표하며 "기러기 아빠들의 고통을 덜기 위해"라고 설명했다. 영어 조기교육을 위해 자식을 외국으로 떠나보내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뜻이다. 국내에서도 영어 조기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 그런데 손꼽히는 영어 전문가인 안정효 씨는 영어 조기교육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요즈음 너도나도 국제화 시대에 발맞춰 살아간다면서 영어학원에 보낸다. 초등학교를 마치기 전에 미국과 캐나다로 영어 조기유학을 보내 수많은 기러기가 생겨나기도 했다.

…대부분이 제1과에서 맴돌고 머물다 말 작정이라면, 조기 영어교육을 위해 왜 우리는 돈을 마구 쏟아부어가며 불쌍한 아이들의 천국을 만들어야 하는가?

…언어학습은 학원에서의 조기교육이 아니라 보수적인 만학(晩學)에 의해서 평생에 걸쳐 이루어진다.…너도나도 와당탕 조기교육에만 바쁘고, 뒷감당을 하지 않아서는 좋은 언어를 배우지 못한다."
(같은 책, 120,121p)

"영어를 함부로 하는 사람은 서툰 영어가 훌륭하다고 믿는다"

'실용'을 내세워 대권을 거머쥔 이명박 당선인은 영어교육에 대해서도 '실용'을 강조한다. "어! 유아 베리 웰캄(you're very welcome)"처럼 어법에 맞지 않는 표현이 '이명박 식 실용영어'의 사례로 꼽히기도 했다.

이런 사례는 많다. 1일자 <중앙일보>에 따르면, 1999년 당선인과 8개월간 미국에 체류했던 홍준표 한나라당 의원은 "어느 날 의류 할인매장에 갔는데 규정을 읽은 당선인이 '우리는 해외 여행자에 속하니 10% 깎아 달라'고 영어로 한 시간이나 논쟁을 해 결국 옷값을 깎았다"라는 기억을 소개했다. 당시 홍 의원은 "당선인의 영어는 투박하지만 누구와도, 어떤 상황에서도 대화할 수 있는 100% '실용영어'"라고 단언했다고 <중앙일보>는 전했다. 이 신문은 '실용영어'에 대한 당선인의 생각을 '한글 애용 시민단체들의 반발에 부딪혀 좌초되곤 했던 오랜 신념'으로 묘사했다.

"어! 유아 베리 웰캄" 수준의 표현을 동원해 한 시간 동안 논쟁한 끝에 물건 값을 깎는 이른바 '실용영어', 어떻게 봐야 할까.

"무속인에게 신명이 내리듯 엄청난 영감을 받아 하룻밤 사이에 세계명작을 써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필시 글을 쓸 줄 모르는 사람이다. 아무렇게나 쓰면 글쓰기 또한 쉽기 때문이다.

영어도 예외가 아니다. 영어가 쉽다는 사람은 영어가 어렵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고, 그래서 함부로 영어를 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자신이 하는 영어가 틀린 영어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어수선하고 서투른 영어가 훌륭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영어를 못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영어를 잘 한다는 착각이 심하다." (같은 책, 251p)


"'안녕하세요'만 할 줄 알면, 우리말 잘하는 것인가?"

이명박 당선인 외에도 '실용영어'를 강조하는 이들은 많다. 이런 이들의 공통점이 대개 회화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인에게 길을 묻고, 음식을 주문하는 요령을 모든 사람이 배워야하는지는 의문스럽다. 또 이런 회화 능력이 뛰어나면, 영어를 잘 한다고 볼 수 있는지도 궁금하다.

"더그가 처음 한국으로 나왔을 때, 그는 열심히 한국말을 공부했고, 식당이나 미용실이나 하다못해 만두피를 사러 동네 가게로 나가면 그는 한국인들에게 '안녕하세요'라고 늘 우리말로 인사를 했다. 그러면 한국인들은 열 명 가운에 열 명이 당장 탄성을 질렀다고 한다. '한국말 참 잘하시네요!' 당시 더그의 우리말 실력은 '안녕하세요'와 '캄사합니다' 두 마디가 고작이었다.

한국인들은 영어에 대해서도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그래서 텔레비전에 나온 연예인이 '오 예' 한 마디만 입에 올려도 '영어 실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연예인 자신은 그렇게 믿는다. 우리말이나 영어로 회화 한두 마디를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실력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될 일이다." (같은 책, 213p)


"소화불량 외국어, 착각과 오해의 두뇌 만든다"

'실용영어'를 중시하는 이들은 흔히 대화의 결과로 영어 실력을 판단하곤 한다. 요컨대 결과적으로 물건 값을 깎는데 성공했으면, 영어를 잘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화 과정에서의 작은 오해들은 무시해도 되는 것일까. 이런 이들은 영어 문장을 읽을 때도, 세부적인 내용과 문맥에 따른 분위기의 차이 등은 건너뛴 채 '대략적인 의미만 파악할 수 있으면 된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과연 그럴까.

"'며칠 전에 옆집으로 이사를 온 젊고 씩씩한 여자가 오늘 아침 어린이 놀이터에서 나를 보고 @#$%를 주었다.'

위 문장에서 우리는 @#$%라는 네 글자짜리 단어 하나를 모르면 전체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다. 따라서 하나의 단어만 몰라도 우리는 그 문장 전체를 모른다고 셈한다.

하지만 우리는 영어 문장에서 어떤 단어 하나를 모르면, 나머지 아는 단어들만 대충 꿰어맞춰 제멋대로 해석하고는 그 문장을 이해했다고 착각한다.

그리고 이미 '아는' 단어들도 사실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궁색하게 대충 절반쯤만 알아듣는 경우가 허다하다.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는 언어를 대충 짐작만 하면서 꿰어맞춰 대화를 이끌어간다면 그것은 허공에서 헤엄을 치는 격이고, 그래서 double talk(겹대화, 서로의 이야기를 엉뚱하게 이해하면서 진행하는 대화)이 발생한다.

…첨단의 시대에 막연하고 애매한 개념만 가지고 세계화를 꿈꾼다면 그것은 시대착오요 계산착오다. 잘못된 가짜영어로 말하고 상대방의 얘기도 가짜 기호로 해석하는 현실에서라면, 소화불량의 외국어로 포화된 사람의 두뇌는 착각과 오해의 체계를 따로 만든다." (같은 책, 125~126p)


영어를 한국어보다 더 잘한다?…"부끄러워해야 할 욕이다"

이른바 'double talk',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사실은 서로의 이야기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는 현상이 벌어지는 배경에는 영어 실력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스스로의 영어 실력을 냉정하게 돌아보고, 조심스럽게 대화를 나눈다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영어 실력을 자랑하고 싶어 할까. 그리고 이런 현상은 정상일까.

"식민지 시절에는 친일파와 식자층이 과시하던 일본말에 대한 지식이 그렇게 숭상을 받았고, 호텔 양식부를 드나드는 귀족층이 탄생했을 즈음에는 영어가 그 영광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래서 한때는 영어를 한국말보다 잘 한다는 말이 대단한 칭찬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참으로 불쌍하고, 가엾은 우리말의 수난은 이렇게 계속된다. 한국인이 한국어보다 영어를 잘 한다는 말은 부끄러워해야 마땅한 욕(辱)이다" (같은 책,123p)


"우리말 어휘가 풍부해야 영어도 제대로 한다"

영어 실력이 의사소통을 위한 실용적인 기능이 아니라 사회적 신분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통하는 사회에서 모국어는 홀대받는다. 그런데 안정효 씨는 한국어를 홀대해서는 영어도 제대로 익힐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어차피 모든 외국어는 모국어를 바탕으로 삼아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외면한 이들이 구사하는 영어는 매우 빈곤한 어휘만으로 이뤄져 있기 일쑤다.

"…한국인에게라면, 조기유학이나 언어연수보다 앞서야 하는 과정은 당연히 제대로 된 우리말 공부다. 지식의 흡수력이 가장 왕성한 어린 나이에 우리말이 아니라 외국어부터 배워야 한다는 생각은 사대사상이다.

…영어뿐 아니라 모든 외국어는 어차피 모국어를 바탕으로 삼아서 배운다. 앞에서 필자는 tramp나 character라는 단어가 저마다 얼마나 다양한 뜻을 거느리는지 잠시 언급했고, 우리말 단어 '바보' 하나에 걸리는 영어 단어는 또 얼마나 많은지도 예시했었다. 하지만 그 수많은 바보 단어들이 우리말로는 정말 '바보' 한 단어에만 걸리는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우리말에도 '바보'를 위시하여 '멍청이', '백치'. '등신', '병신', '머저리', '똘아이', '돌대가리', '저능아' 등 비슷하면서 서로 다른 유사 어휘가 여기저기 웅덩이처럼 군(群)을 형성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우리말로 '바보'라는 대표 단어 하나만 배우고는 다른 동류의 어휘를 전혀 사용하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일이 없다. 그렇게 빈약한 어휘만을 가지고는 살아가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같은 책, 123~124p)


'모든 사람의 어설픈 영어' 대신 '영어 기술자의 정확한 영어'

안정효 씨의 책을 읽다보면, 영어를 잘 하는 게 참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어려운 영어를 모든 사람이 다 잘 할 수 있을까. 또 그럴 필요가 있을까.

"국제화라는 관념적 사치에 휘말려, 억지로 외국어를 배우느라고 고생하는 다수의 집단은 학습을 힘겨워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영어를 배우지 않아도 되며, 차라리 안 배우는 편이 개인의 복지와 사회의 미래를 위해 보탬이 되리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만인이 모두 영어를 해야 한다는 인식은 필요성에 대한 착각이며 국력의 낭비를 초래한다. 쌀을 수출하기 위해 농부가 영어공부를 하느라고 소모해야 하는 노력과 정력은 쌀의 품질 개량이나 다른 농업 기술을 익히는데 들여야 한다.

언어는 기능이기 때문에, 영어로 상담을 벌여 외국에 쌀을 파는 일은 영어의 달인에게 심부름을 시키고, 농부는 다른 기술을 키워야 한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환기 장치나 축전지나 내영기관이 고장날 때마다 모두 스스로 고쳐야 할 필요가 없이 다른 기술자에게 의존하듯이, 언어 기능은 언어 기술자에게 맡기면 그만이다.

대신 국제적인 활동을 위해 영어 기술을 꼭 습득해야 하는 사람은 공부를 제대로 해야 한다. 이것은 분업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다."(같은 책, 26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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