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전선(戰線)이다"
"다시 전선(戰線)이다"
[기고] 노 대통령과 정운찬 씨의 '세력화' 언급을 보며
2007.05.03 09:08:00
"다시 전선(戰線)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청와대브리핑>에 기고한 글에서 "정치의 요체는 대의명분과 세력, 그리고 전략인데 대의명분이 뚜렷해도 세력이 없으면 일을 이룰 수 없다"고 했다. 개헌발의를 유보한 데 대한 설명이었다. 바로 그 다음날 정운찬 씨는 "정치세력화 활동을 통해서 지도자로서 자격을 인정받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동안 신중하게 가꿔 온 원칙을 지키면서 동시에 정치세력화를 추진해 낼만한 능력은 부족하다"면서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가 가꿔온 원칙이 무엇인지 그 원칙을 지키면 정치세력화가 왜 어려운지는 알 수 없으나 정치판에서 세력을 결집하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점은 분명한 듯하다.
  
  맥락이 다르기는 하지만 두 사람이 약속이나 한 듯 '정치세력화'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했다는 사실은 범여권의 정치세력화에 무언가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겠다.
  
  한국정치에서 '세력화'에 성공한 몇 가지 사례들
  
  세력화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40여 년 전 박정희는 쿠데타를 일으킨 후 김종필을 시켜 '5ㆍ16혁명 주체세력의 결집'을 추진했는데 밀실에서 추진된 이 세력화 작업의 결과 민주공화당이 탄생했다. 민주공화당은 그 후 20년 가까이 독재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한 끝에 전두환에 의해 흡수, 해체됐는데 그 대부분의 잔존세력이 민정당과 민자당을 거쳐 지금의 한나라당에까지 이어지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가 하면 김영삼, 김대중의 세력화는 자기들이 깃발을 세우고 추종세력들을 헤쳐 모이게 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창당기록으로는 아마도 김대중 씨를 능가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 두 사람이 깃발만 꽂으면 당이든 국민회의든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강력한 지역기반과 어떤 경우에도 그들을 추종해 따르던 국회의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쿠데타도 아니고 양김과 같은 카리스마와 지역기반도 없으면서 세력화에 성공한 사례가 있을까? 우리 정치사에 단 한 번의 기적 같은 성공사례가 있다. 열린우리당의 창당이 그것이다. 열린우리당의 성공비결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정치개혁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대의명분과 국민적 지지,
  
  둘째, 사즉생(死卽生)의 각오로 지역기반을 버리고 창당을 감행한 40여 국회의원들의 집단행동,
  
  셋째, 노무현의 승리에 이어 열린우리당도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에 입각한 당당하고 일관성 있는 정치행보.
  
  한마디로 정치개혁전선을 구축하고 죽을 각오로 밀어붙였던 것이 열린우리당 성공의 비밀이었던 셈이다. 열린우리당의 사례에서 보듯이 약자가 세력화를 이루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전선을 공격적으로 운용하는 것이다.
  
  '세력화'의 전제로서의 '전선'…그 성공과 실패의 사례들
  
  평화·통일전선이건 또는 민생개혁전선이건 전선만 제대로 운용하면 세력화는 부수적으로 따라온다. 역으로 아무리 강한 세력도 전선 운용을 등한히 하면 위축되고 밀려나게 된다. 지난 3년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보여준 정치적 부침이 이를 잘 보여준다.
  
  양당은 지난 3년간 각각의 전선을 운용해 왔다. 한나라당이 줄기차게 운용해 온 전선은 반노(反盧) 전선이었다. 설명이 따로 필요 없을 만큼 간단명료한 이 전략으로 한나라당은 지지율 50%라는 초유의 기록을 세우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지나친 반노전선 드라이브가 일시적으로 탄핵 역풍을 가져오기도 했지만, 재보선 40:0의 스코어는 전적으로 한나라당이 일관성 있게 밀어붙인 반노전선 덕분이었다.
  
  반면 열린우리당은 총선승리에 도취했던지 총선 직후부터 전선에서 손을 떼다시피 했다. '개혁이냐 실용이냐'는 소모적 논쟁을 시작으로 열린우리당은 사사건건 대통령과 부딪치고 당내 분파로 갈라져 싸웠다. 심지어는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 문제나 4대 개혁입법 처리 문제 같은 당의 정체성과 관련된 핵심적 의제를 두고서도 최소한의 일관성도 보여주지 못하고 우왕좌왕 했다.
  
  정치개혁전선을 대체할 새로운 전선구축에 대한 의지가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전선에 서 있다는 긴장감도 없었다. 전선을 주도해야 할 집권당으로서의 책임성도 없고 최소한의 규율도 지키지 않았다. 정치개혁전선에 모였던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이 흩어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 않은가?
  
  새로운 전선은 형성되고 있는가?
  
  한나라당은 작년 상반기부터 전선을 바꿨다. 어차피 대선 국면에서 주공격 타겟이 되지 못할 노무현을 옆으로 제쳐놓고 여권 전체를 좌파로 규정해 공격하는 반좌파 전선으로 전환한 것이다. 반노 전선으로부터 반좌파 전선으로의 전환에는 신우파를 표방한 정치낭인들도 한몫 단단히 했다. 범우파의 총궐기였고, 반좌파 전선의 총결집이었다.
  
  그 소재는 널려 있었다. 사학법 재개정, 대북정책, 부동산정책에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재보궐선거까지. 모르긴 해도 한나라당 지지자들에게 반좌파 전선은 정권탈환의 의지를 북돋우는 정서적 감응효과까지 가져왔을 것이다. 이들이 주도한 사학법개정촉구궐기대회에 수십만 명이 모인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여권이 보여주고 있는 일견 한가해보이기까지 하는 모습은 무엇인가. 실효성 없는 신당논의의 와중에 여권은 벌써 두 명의 유력한 대권주자를 힘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흘려보내고 있으니 말이다.
  
  역사적 현실을 반영하는 새로운 전선은 무엇인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불리한 전선을 인물로 돌파했던 예는 없다. 전선에 대항해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더 위력적인 전선을 구축해 밀어붙이는 것뿐이다. 신당도 좋고 통합도 좋지만 여권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한나라당이 밀어붙이고 있는 반좌파 전선에 대항할 새로운 전선을 구축하는 일이다.
  
  아닌 말로 그래야 대선에 져도 남는 게 있고 2008년 총선에서 기댈 언덕이라도 만들어 낼 수가 있다. 이 길이 철지난 지역연합을 다시 만지작거리는 것 보다 백번 천번 나라에도 좋고 자신들에게도 유리한 길이다.
  
  그러므로 후보가 아니라 전선에서 시작해야 한다. 정치공학이 아니라 엄중한 역사적 현실에서 다시 시작해야 비로소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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