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도 훈장
고생도 훈장
[한국에서 살아보니]<1> "버스에서 춤추는 아주머니를 이해하게 된 까닭"
2009.04.02 09:44:00
고생도 훈장
오랫동안 여기저기 외국을 떠돌며 살다가 마침내 한국에 안주하게 됐다. 한국은 변화의 속도가 빨라서 나에게는 아직 낯선 것이 많다. 어쩔 수 없이 외국생활과 비교되는 것도 많다. 시간이 흐르면 이런 느낌은 둔해져서 나도 매사에 '그러려니' 하고 살게 될 것이다. 아직 낯선 눈길이 남아있을 때, 눈에 띄는 것을 말해보고 싶었다. 내가 사는 과천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사실 한국의 어느 지역이나 비슷한 문제가 있다는 생각에서다. <필자>

서울이 그렇게 많이 개발이 되고 아파트가 들어섰어도 미처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곳이 있다. 좁은 골목, 그 안에 찌그러져 가는 한옥이 남아 있는 동네. 이른바 후진 동네다. 그곳에 사는 사람이 들으면 욕할지 모르지만 이상하게도 이런 곳이 이제는 정겹다.

하지만, 이런 건 나의 감상일 뿐 그 동네의 집주인들은 아마 개발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개발이 돼서 지금 있는 동네를 싹 쓸어버리고 번듯한 초고층아파트가 올라가기를, 그래서 집값이 다락같이 뛰기를 목이 빠져라 기다릴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되면 그 일대는 서울 여느 곳처럼 거대한 시멘트 덩어리 단지가 될 것이다.

▲ 한옥 골목. ⓒ뉴시스
물론, 후진 동네답게 구부러진 골목길이며 낮은 집들이 초라하다. 아마 1960년대 말이나 1970년대 초에 지었을 집들이 이제 낡을 대로 낡아있다. 이곳을 개발은 하되 다른 형식으로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골목이며 집들의 형태는 유지하면서 '질을 높이기'로 말이다.

'지나간 시간의 흔적을 살려내면서도 현대적 주거의 편리함을 덧붙이는 개발이라….' 나는 속으로 상상을 해본다. 초고층으로 개발하는 것에 비하면 당장 눈앞의 이익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길게 본다면 그 이익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것이다.

어쨌든 이 후진 동네가 주는 일종의 정겨움에 걸맞게 골목 안쪽 찌그러진 한옥의 비좁은 방 한 칸이 사랑방 구실을 하는 데가 있다. 주로 연세가 지긋하신 아주머니들이 모여든다.

그들의 화제는 음식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서 집안의 대소사, 가족. 병 이야기 등 끝이 없다. 한사람이 몸의 아픈 증상 토로하면 그에 대한 갖가지 처방이 쏟아진다.

하루는 그들이 얼마나 고생을 하면서 살아왔는지가 화제가 되었다. 그 중에 할 말 없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저마다 돌아가며 젊어서 고생한 이야기들을 했다. 어쩌면 그렇게 조곤조곤 이야기들을 잘하는지 신기하기도 했다.

"남편은 돈 벌러 나가서 소식은 없고 조롱조롱 달린 아이들 데리고 먹고는 살아야겠고…." 안 해본 일 없이 다 해봤다는 이야기, 모진 시집살이 하면서 말썽꾸러기 시동생들 거둔 이야기, 젊어서부터 시부모 병수발 든 이야기, 혼자서 억척스레 농사짓다가 밭에서 까무라치던 이야기, 겨울에도 일손을 못 놓고 십자 수를 놓아서 내다팔던 이야기. 명절에도 일만 하던 이야기, 집이 없어져서 떠돌던 이야기….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 생을 지내고 이제 나이가 들어 고생담을 이야기 삼아 늘어놓고 있는 그들을 보며 문득 그들의 고생이 마치 인생의 훈장처럼 여겨졌다. 인생의 훈장이 있다면 이 아주머니들이 살아오면서 이겨낸 고생이야 말로 훈장이 될 터였다.

"아이구 열 명 식구들 날마다 밥해 대느라고…. 돌아서면 밥이고 돌아서면 밥이고…. 그때 시누이가 있었어…. 시누이 학교 늦을까봐 새벽에 일어나서 먼저 보골보골 냄비 밥을 딱 한 사람 분 한단 말이지. 그래가지고 학교 보내놓고 그 다음에 큰 무쇠 솥에 밥을 해…. 검정 고무신 흰 고무신 열 식구 고무신을 매일 하얗게 씻어서 널어놓아야 했어…. 그래서 가게 문을 열었지. 가게 문 열라문 얼마나 힘든지 몰라. 그게 짝이 있는데 왜 그렇게 안 떨어지는지. 일 년에 딱 하루 놀러가는 날이 있어. 버스 타고. 그러면 나는 스트레스 풀려고 처음부터 끝까지 노래 부르고 춤 춰….버스에서도 춤추고 노래 부르고."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관광버스에서 춤추고 떠드는 사람들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리던 일이 생각났다. 나는 속으로 좀 부끄러워졌다. 그런 사연이 있었구나. 그이들의 노래와 춤을 누가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앞으로 버스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사람들을 보면 달리 볼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고생에 겨워 그야말로 스트레스 푸는 사람도 있을 테니 말이다.

("덴마크에서 살아보니" 연재를 진행했던 김영희 씨가 "한국에서 살아보니" 연재를 새로 시작합니다. 외국에서 오래 지내다 돌아오면, 누구나 한국이 낯설게 여겨집니다. 이런 낯선 느낌은, 때로 우리가 알면서도 잊고 지내는 한국 사회의 진실을 비추는 거울이 되기도 합니다. 새로운 연재가 낯선 눈길에 담긴 익숙한 진실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편집자>)

○ "덴마크에서 살아보니"

- 직업과 학벌에 따른 차별이 없다

"명문대? 우리 애가 대학에 갈까봐 걱정"
의사와 벽돌공이 비슷한 대접을 받는 사회
"덴마크도 40년 전에는 '서열 의식'이 견고했다"
모두가 승리자 되는 복지제도
비정규직 임금이 정규직 임금보다 더 많은 나라

- '암기가 아닌 창의, 통제가 아닌 자율'을 장려하는 교육

"아이들은 숲 속에서 뛰노는 게 원칙"
"노는 게 공부다"
"충분히 놀아야 다부진 어른으로 자란다"
1등도, 꼴찌도 없는 교실
"왜?"라는 물음에 익숙한 사회
"19살 넘으면, 부모가 간섭할 수 없다"

- "아기 돌보기, 사회가 책임진다"

"출산율? 왜 떨어집니까"
"직장인의 육아? 걱정 없어요"

- "덜 소비하는 풍요"

"에너지 덜 쓰니, 삶의 질은 더 높아져"
"개인주의를 보장하는 공동체 생활"
'빚과 쓰레기'로부터의 자유
"장관이 자전거로 출근하는 나라"
"우리는 언제 '덴마크의 1979년'에 도달하려나"

- "낡고 초라한 아름다움"

"수도 한 복판에 있는 300년 전 해군 병영"
인기 높은 헌 집
"코펜하겐에 가면, 감자줄 주택에 들르세요"
도서관,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곳

- 덴마크 사회, 이모저모

한국에서 덴마크로 입양된 사람들
"크리스마스' 대신 '율'이라고 불러요"
아이와 노인이 함께 즐기는 놀이공원, 티볼리
"저 아름다운 건물을 보세요"
구름과 바람과 비의 왕국
"체면 안 따져서 행복해요"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사람이 만나면
잘난 체하지 마라, "옌틀로운"
"긴 겨울 밤, '휘계'로 버텨요"

- 덴마크 사회의 그늘

"덴마크는 천국이 아니다"
"덴마크 사회의 '관용'은 유럽인을 위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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