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판을 하나만 주는 식당
메뉴판을 하나만 주는 식당
[한국에서 살아보니] 취향보다 서열이 앞선 문화
2009.04.21 07:52:00
메뉴판을 하나만 주는 식당
먹는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어쩔 수 없이 매식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예외겠지만 가족이나 친지들과 함께 식당에 가는 것도 먹는 즐거움을 더 크게 하는 일이다.

식당에 가서 자리를 잡고 앉으면 흔히 종업원이 물과 함께 메뉴판을 가져다 준다. 대부분의 경우 몇 명이 앉아있든 메뉴판은 하나다. 친구나 동료들이 함께한 경우는 메뉴판을 돌려가면서 보고 각자 주문을 한다. 각자 주문을 한다지만 먼저 사람을 따라하는 경우가 많아서 사람이 많아도 결국은 두세 가지 메뉴로 귀착이 되기 일쑤다. 각자 메뉴판을 볼 필요도 없이 앞 사람을 따라서 "나도 그거" 하는 경우도 많다. 혹은 메뉴 결정을 일행 중 한사람에게 일임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아무거나 괜찮아. 맛있는 것 시켜 봐" 하는 식으로 말이다.

식당에서 손님들이 자리에 앉고 나서 음식을 주문하려할 때 가장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무거나" 다. 특히 한 사람이 음식 값을 부담하는 경우 "뭐 먹을까" 혹은 "뭐 드실래요" 혹은 "뭐 좋아 하세요" 하는 물음에 상대방의 대답은 "아무거나 먹지" "아무거나 괜찮습니다"로 이어지고, 이에 대한 대꾸도 "나도 아무거나 괜찮은데" ("저도 아무거나 괜찮은 데요") 하는 식으로 계속 "아무거나"를 연발한다.

주문 받으려 서 있는 종업원은 기다리다 못해 "우리 식당에는 아무거나 메뉴는 없는 데요" 하고 끼어들기도 한다. 이처럼 "아무거나" 먹어도 상관이 없으니 메뉴판을 자세히 볼 필요가 없다. 흔히 가는 일반식당에서는 사실 메뉴가 복잡하지 않다. 벽에 크게 써 붙인 곳도 많다. 메뉴판을 들여다 볼 것 없이 그냥 벽을 쳐다보고 주문을 해도 상관이 없을 지경이다.

어쩌다 특별한 날, 가족들과 함께 이른바 고급식당을 갈 때가 있다. 음식 값이 만만치 않은 만큼 음식에 대한 기대도 크게 마련이다. 이에 걸맞게 가짓수가 많은 세트메뉴며, 특색 있는 개별메뉴, 술 메뉴, 음료와 차 메뉴, 그리고 디저트 메뉴도 따로 있다. 메뉴판은 두툼하고 겉표지도 매우 고급스럽다. 그런데 이런 식당에서도 사람 수에 상관없이 메뉴판은 달랑 하나를 가져온다.

세트 메뉴인 경우, 대개는 가족 중의 연장자 혹은 음식 값을 지불하는 사람이 먼저 메뉴를 훑어보고 의견을 말하면 나머지 가족들은 대개 그대로 따르게 된다. 다른 가족들은 메뉴판을 들여다 볼 여지가 별로 없는 셈이다.

세트 메뉴가 아닐 경우는 가족의 서열대로 가장이나 그에 해당하는 사람이 먼저 사람이 메뉴판을 들여다보고 있는 동안 다른 가족들은 멍하니 기다리게 된다. 그러다가 메뉴판이 넘어오면 다른 가족들이 기다린다는 압박감에 자세히 들여다 볼 여유가 없다. 그래서 나중에 메뉴판을 들여다보는 가족은 대개 이미 앞에서 정한 메뉴를 되풀이하기 십상이다.

흔히 가는 동네 식당도 아니고 특별한 날 큰 마음먹고 가는 비싼 식당에서까지 메뉴판을 달랑 하나 내미는 것을 보면 좀 이상한 생각이 든다. 손님 수대로 가져오기에는 식당에 있는 메뉴판이 모자라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외국의 식당에서는 패스트푸드점이 아니면 어디를 가도 종업원이 손님 수대로 메뉴판을 가져온다. 손님들은 각자 메뉴판을 들고 마치 공부라도 하는 양 꼼꼼하게 들여다본다. 메뉴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서로 토론하듯 의견을 주고받는 손님도 있다. 메뉴판에 잘 모르는 음식이 있으면 종업원을 불러서 물어보기도 한다. 그럴 경우 종업원은 재료가 무엇인지, 어떻게 나오는지를 신이 나서 설명해준다. 주문할 음식을 고르는 모습이 어찌나 진지한지 무슨 의식을 치르는 듯 자못 엄숙하기까지 하다. 그러자니 메뉴판을 받아서 주문하기까지 여간 시간이 걸리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보면 식당에 가는 것이 단순히 음식만 먹는 것이 아니라 메뉴판에서 음식을 고르고, 기대하고, 나온 음식을 맛보면서 즐거움과 만족감(혹은 실망감)을 느끼는 일련의 과정도 포함되어 있는 듯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마침내 손님들이 메뉴판에서 얼굴을 들면 음식 고르기가 끝났다는 신호다. 대개는 선택한 메뉴가 모두 다르다. 같은 메뉴도 있을 테지만 음식에 대한 취향이 같기 때문이라고 봐야한다.

한국의 식당에서는 바로 이 메뉴 고르기 과정은 거의 생략이 된다. 왜 그럴까.

일반식당에서는 손님들이 그곳의 음식에 대해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라 추측할 수 있다. 식당을 정할 때 대략 음식의 종류도 정해지기 마련이다. 칼국수 집이라면 두세 가지 종류의 칼국수가 있고 한식집이라면 찌개 몇 가지 그리고 비빔밥이 있고 하는 식이다. 식당마다 그 집에서 시킬 수 있는 음식이 뻔한 것이다. 술은 빤히 보이는 냉장고에 들어있고 메뉴는 벽에 써 붙여 있으니 메뉴판을 들여다보고 오래 생각해서 고를 필요가 없다.

반면 비싼 식당이나 약간 고급스러운 식당에서는 상당수의 손님들이 그곳의 음식을 잘 모르기 때문에, 따라서 메뉴판을 봐도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양식당이라면 우선 용어가 낯설다. 양식당이 아니라도 어쩌다 가는 식당이라면 무엇을 시켜야 할지 잘 모른다.

그렇다고 체면상 종업원에게 물어보기도 내키지 않는다. 메뉴판을 들여다보기 보다는 앞사람이 시키는 것을 따라 시키는 것이 안전하다. 혹은 "이 집에서 제일 잘하는 것으로"하고 주문하는 것이 더 편하다.

한편 손님들이 주문하는 방식도 역시 메뉴 고르기와는 거리가 멀 때가 많다. "나도 그거"하면서 다른 사람이 선택한 것을 따라 한다든지 "아무거나 괜찮아" 하고 옆 사람에게 선택권을 맡긴다든지 또는 손님 중의 한 사람이 "이걸로 하지" 하고 대표로 선택권을 행사하는 경우다.

"나도 그거" 할 때에는 은연중에 "상대방의 선택이 좋아 보여서 나도 같은 것을 먹고 싶다" 또는 "상대방을 존중해서 나도 같은 것으로 먹겠다" 혹은 "나만 별난 것을 시키지 않겠다, 즉 분위기에 맞추겠다" 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아무거나 괜찮다"는 말은 "내 취향을 내세우지 않겠다. 상대방에게 맞추겠다"는 뜻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은 내 취향대로 선택을 분명히 해서 행여나 상대방이나 전체로부터 내가 튀어 보이지 않도록, 그래서 내가 상대방이나 그룹전체와 비슷한 사람이라는 것일 알리고자 하는, 혹은 일체감을 느끼고자 하는 메시지가 숨어있는 것이다.

"이걸로 하지" 하고 선택권을 행사하는 사람은 그 그룹에서는 서열이 높은 사람이기 쉽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은 서열에 따른 권위를 별 이의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한국인들이 식당에 가서 음식을 주문할 때에 물론 취향에 따라 분명한 선택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상당수는 음식보다 가족이나 친구 동료들 사이의 서열 및 관계를 의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식당에서는 앞으로도 계속 메뉴판이 하나만 나올까. 지금처럼 서열 및 인간관계를 의식해야하는 분위기라면 그럴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나타내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그리고 그것이 서열이나 인간관계와는 상관없는 분위기라면 바뀔 수도 있는 일이다.

○ "한국에서 살아보니"

<1> 고생도 훈장
<2> 피곤한 사람들
<3> 불우 이웃을 도웁시다?
<4> 청계산이여, 안녕
<5> "석유 안 나는 나라에서 기차를 홀대해서야…"
<6> "기억 속 푸른 하늘, 다시 볼 날은 언제쯤?"
<7> "침 뱉을 일 많아도, 길에서는 참읍시다"
<8> "아빠, 빨리 들어오세요"
○ "덴마크에서 살아보니"

- 직업과 학벌에 따른 차별이 없다

"명문대? 우리 애가 대학에 갈까봐 걱정"
의사와 벽돌공이 비슷한 대접을 받는 사회
"덴마크도 40년 전에는 '서열 의식'이 견고했다"
모두가 승리자 되는 복지제도
비정규직 임금이 정규직 임금보다 더 많은 나라

- '암기가 아닌 창의, 통제가 아닌 자율'을 장려하는 교육

"아이들은 숲 속에서 뛰노는 게 원칙"
"노는 게 공부다"
"충분히 놀아야 다부진 어른으로 자란다"
1등도, 꼴찌도 없는 교실
"왜?"라는 물음에 익숙한 사회
"19살 넘으면, 부모가 간섭할 수 없다"

- "아기 돌보기, 사회가 책임진다"

"출산율? 왜 떨어집니까"
"직장인의 육아? 걱정 없어요"

- "덜 소비하는 풍요"

"에너지 덜 쓰니, 삶의 질은 더 높아져"
"개인주의를 보장하는 공동체 생활"
'빚과 쓰레기'로부터의 자유
"장관이 자전거로 출근하는 나라"
"우리는 언제 '덴마크의 1979년'에 도달하려나"

- "낡고 초라한 아름다움"

"수도 한 복판에 있는 300년 전 해군 병영"
인기 높은 헌 집
"코펜하겐에 가면, 감자줄 주택에 들르세요"
도서관,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곳

- 덴마크 사회, 이모저모

한국에서 덴마크로 입양된 사람들
"크리스마스' 대신 '율'이라고 불러요"
아이와 노인이 함께 즐기는 놀이공원, 티볼리
"저 아름다운 건물을 보세요"
구름과 바람과 비의 왕국
"체면 안 따져서 행복해요"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사람이 만나면
잘난 체하지 마라, "옌틀로운"
"긴 겨울 밤, '휘계'로 버텨요"

- 덴마크 사회의 그늘

"덴마크는 천국이 아니다"
"덴마크 사회의 '관용'은 유럽인을 위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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