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의 '시간 끌기'…해결책은 배심제
법원의 '시간 끌기'…해결책은 배심제
[박동천의 집중탐구] 증거의 논리학
2009.07.25 14:21:00
법원의 '시간 끌기'…해결책은 배심제
제6부 절차적 민주주의와 사회적 자유주의
제5장 사법제도 개혁의 방향
제2절 증거의 논리학

모든 재판은 과거에 일어난 일에 관해서 그 일의 진상에 직접 접하지 못한 사람들이 물증과 증언을 종합해서 사실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직업이 판사, 검사, 변호사인 사람이 우연히 사건 현장에 있었을 수는 있겠지만, 보통법 체계에서 그런 개인적인 경험이 법정의 판결에 대해서 어떤 영향을 미치려면 우선 증언대에 올라 증언을 해야 하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증언의 한 조각으로 취급을 받을 뿐이다. 물론 내용상으로 호소력이 있다면 그만큼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모든 증언이 다 마찬가지다.

다음으로 주목할 점은, 보통법 체계에서는 특별한 전문가가 아닌 보통 사람들이 실체적 진실에 관한 판정을 내린다는 사실이다. 배심원은 유권자 명단이나 운전면허소지자 명단과 같은 정상적인 시민의 집합에서 무작위로 추출되는 것이 보통인데, 정치인, 경찰, 사법부, 소방관, 의사 등과 같은 직업에 속한 사람들은 직업영역이 재판내용과 직접 관련이 되기 때문에 배제된다. 또 검사 측과 변호인 측에서 특정 배심원 후보를 기피할 수도 있다. 어쨌든 배심원 선임과정에는 일정한 여과장치가 있지만, 보통사람들이 배심원을 맡는다는 사실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제3자의 입장인 보통사람들이 재판에서 실체적 진실에 관해 판정을 내리는 관행이 영국,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등, 보통법 체계의 나라에 정착되어 있다는 사실은 한국 사회의 사법 현실에 대해 대단히 심중한 의미를 가진다. 우리사회에서는 사법의 영역이라는 것을 법률 전문가들이 독점하는 분야로 치부해서 일반 시민들은 마치 발언할 자격이 없다는 듯한 분위기가 과거에 비해서는 옅어졌다고 하겠지만, 아직도 몹시 무겁고 두껍게 덮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문단에서 2008년에 있었던 표절 논란 하나를 예로 들어서 논의를 진행해보자.

▲ 광주지법에서 실시된 배심재판에서 배심원들이 선서를 하는 모습. ⓒ연합뉴스

조경란이 장편 <혀>를 2007년 출간하자, 동아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에 응모했다 낙방한 주이란이 조경란을 표절혐의로 저작권위원회에 고소했다. 자기가 2006년 말에 완성해서 동아일보사에 보낸 단편 <혀>와 모티브가 너무나 비슷한데, 조경란이 신춘문예 예심 심사위원이었다는 정황을 보면, 심사위원으로서 그 작품을 읽고 나서 장편으로 확대재생산한 것 같다는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저작권분쟁조정위원회에서는 조정을 시도하느라 조경란을 불렀지만 조경란이 응하지 않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석 달 동안 세월만 보내다가 조정이 결렬되었다고 판정했다. 이 일에 관해서는 저작권분쟁조정위원회만이 아니라 한국의 지식인사회, 문단, 출판계 등에서도 소극적인 대응으로 일관했다. 나아가 지식인들 중에서 이 문제에 관해 공개적으로 입장을 밝힌 사람은 홍세화를 비롯해서 손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주이란의 남편 김태환이 2008년 11월 7일 세계출판인 포럼-동아시아 출판인회의 서울대회가 열리고 있던 세종호텔에서 1인 시위를 벌이자, 현장에 있던 강맑실 한국출판인회의 부회장은 "조만간 실행위원회를 소집해 이 문제에 관한 입장을 발표하겠다"고 말했다는데 (☞「한국출판인회의, "'혀' 표절 공방 입장 발표하겠다"」), 그 후 어떤 입장이 발표되었는지는 들어보지 못했다.

주이란이 제기한 의혹을 말이 아예 되지 않는다고 볼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주이란의 <혀>와 조경란의 <혀>는 문장이 송두리째 겹치는 대목은 없지만, 맛보고 사랑하고 거짓말하다가 잘려서 요리되는 혀라고 하는 모티브가 완벽하게 일치한다. 물론 이런 문제는 언제나 우연의 일치에 불과할 수가 있다. 즉, 주이란의 작품과 아무 상관없이 조경란이 독자적으로 똑같은 모티브를 구상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문장이 겹친다면 표절 여부를 가늠하기는 비교적 쉽지만, 아이디어가 비슷한 경우는 훨씬 까다롭다.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과 일반 시민들이 이 문제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까닭은 일단 이런 문제는 잠시 불거졌다가 흐지부지 끝난다는 문화적 전통에 너무나 익숙하게 길들여져 있다는 사실이 가장 큰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뿌리에는 문외한인 자기가 끼어들어봤자 도움 될 일이 없다는 무력감이 작용하는 것도 분명하다. 이 때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보면서도, 끼어들었다가 망신이나 당할까봐 신중한 구경꾼의 역할로 만족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논쟁을 줄기차게 덮기만 하는 사회는 진실이나 정의에 대해 지독하게 무감각한 사회다. 이 문제가 사소해서 덮어도 좋다고 보는 사람이라면, 과연 우리 사회에서 중대한 문제에 관해서는 진실이 밝혀져서 여한 없는 정의가 실현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는지 자문해보기 바란다. 진실이란 언제나 잘못한 편, 거짓말한 편에게 대단히 성가신 사항이므로, 그들은 가능하기만 하다면 잘못과 거짓말을 은폐하기 위해 악착같이 버티는 게 인지상정이다. 우리 사회처럼 이런 관행이 아주 뿌리를 깊게 내린 곳에서는 폭력적인 저항까지도 예상하고 대비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신중한 구경꾼들에게는 더더욱 진상을 캐내는 일이 부담스러운 일이 된다. 악인들에게 표적이 되어 보복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다수 시민이 진상에 대해서 신중한 구경꾼 노릇에 만족하는 한 이런 관행은 절대로 고쳐지지 않고, 따라서 권력은 사악한 자들의 사유물로 전락하고 그런 권력을 등에 업은 악인들이 설치는 세상은 바뀔 수 없다. 삼성의 검찰에 대한 떡값 의혹을 밝히는 일에 비하면, 조경란의 표절 의혹을 밝히는 일은 공동체에게 부담이 훨씬 가벼운 일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소한 일일수록 양식 있는 시민이라면 구경꾼의 노릇에 만족하지 말고 적극적인 의견을 개진해야 하는 것이다.

제3자가 전문가도 아니면서 이런 일에 무슨 의견을 개진할 수 있을까? 이것은 정확히 보통법 체계에서 제3자이며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이 배심원으로 실체적 진실에 관한 판관 노릇을 할 수 있는 이치와 똑같다. 배심원이란 번역어에서부터 오해로 말미암아 보좌할 배(陪) 자가 들어가서 마치 들러리 정도의 인상을 풍기기 쉽게 되어 있지만, 앞 절에서 밝힌 바와 같이 보통법 체계에서 사실심리에 관한 재판관이 곧 배심원단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어떻게 전문가도 아닌 제3자가 사실심리를 재판할 수 있을까? 증거의 논리학은 상식에 입각한 것으로서 일반인 누구든지 평소에 가지고 있는 공정성의 감각만을 상기한다면 쉽게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B가 아이디어 면에서 A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네 가지 요건이 필요하다. ① 두 사람의 아이디어가 비슷해야 한다. ② A가 B보다 먼저 문제의 아이디어를 공표했어야 한다. ③ B가 A의 아이디어에 접했을 개연성이 있어야 한다. ④ 이 아이디어가 워낙 독특해서 B가 홀로 창안해냈거나 A 이외의 원천으로부터 영감을 받았을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충분히 낮아야 한다. 이 네 가지 요건은 모두가 문학이나 법률에 관한 전문지식이 전혀 필요 없이 판단이 가능한 사항들이다. 주이란(A) 대 조경란(B) 사건에서 ①과 ②는 의문의 여지없이 명백하다. ③은 객관적인 개연성은 충분하지만, 조경란 자신은 그 작품을 읽은 기억이 없다는 주장을 장외에서 흘렸다. ④에 관해서는 전세계 소설의 역사에서 저런 모티브를 사용한 작품이 전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지만 (나도 문학사 전문가는 아니다), 전공자들에게서 전례가 있는지를 문의해서 확인할 수가 있다.

나는 2008년 말에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에서 이 문제에 관한 진상을 파고들어갈 수 있는 유일하고도 대단히 효율적인 길을 알린 바 있다 (☞「조경란이 저작권위원회에 출석해야 하는 이유」). 표절한 것이 아니라면, 즉 맛보고 사랑하고 거짓말하다가 잘려서 요리되는 혀라는 모티브가 10년 전부터 구상한 자신의 창안이라면, 왜 지난 10년 사이에 집필을 못하고 있던 작품을 공교롭게도 주이란의 단편을 읽어볼 수도 있었던 기회를 가진 다음인 2007년의 몇 달 동안에 그렇게 신속하게 써내려 갈 수가 있었는지를 일인칭 경험자의 생생한 육성으로 증언하면 된다는 제안이었다. 그 증언을 듣고 주이란 측에서 본인 또는 대리인이 반문을 제기하면 조경란이 답하는 식으로 몇 회만 주고받는다면, 누가 억지를 쓰고 있는지, 또는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가 상당한 정도까지 밝혀질 것이라는 얘기였다. 나는 지금도 이 점에 관해서는 전혀 흔들림 없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제3자 비전문가들이 이런 종류의 일에서 누구의 말이 더 사실에 부합할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증거의 논리학에 관해 아주 기본적인 소양만 갖추면 충분하고도 남는다. 그것은 누구에게 불확실성의 혜택(benefit of the doubt)을 부여하고 누구에게 입증책임(burden of proof)을 부과할 것이냐는 갈림의 판단이다. 불확실성의 혜택이란 그럴지도 모르고 안 그럴지도 모르는 일에 관해서 상대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생각해 주는 것을 가리킨다. 반대로 상대에게 불확실성의 혜택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곧 그에게 나름대로 근거를 제시하라고 입증책임을 요구하는 셈이 된다. 물론 입증책임이란 단번에 모든 의문의 여지를 다 없애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서로 주장과 반박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상대의 주장을 부인하려면 부인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는 뜻이 된다.

주이란은 단순히 표절 의혹만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모티브의 유사성, 조경란의 심사위원 경력, 그리고 조경란의 <혀>가 출판된 시점의 공교로움 등이라고 하는 근거를 제시했다. 이것은 의혹을 합당한 것으로 만들기에는 충분하지만, 표절을 확정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그런데 이 일에 관해 주이란의 입장에서는 더 이상 내놓을 수 있는 증거가 있기 어렵다. 왜냐하면 조경란이 어떻게 유사한 모티브를 구상할 수 있었는지를 주이란이 알아내기는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조경란은 표절을 했다면 그 점을 분명하게 밝힐 수 있는 입장이고, 표절을 안 했더라도 자신이 어떻게 그 작품을 구상해서 집필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에 어떤 정서적 기복이나 정신적 위기가 있었는지, 그 과정에 어떤 기쁨을 느꼈고 어떤 심리적인 카타르시스를 경험했는지 등을 생생하게 말할 수 있는 사연이 거의 무한정으로 있을 것이다. 이런 사연이 없이 그냥 구상이 떠올라 아무런 내적 감흥이나 굴곡이 없이 기계적으로 원고를 써내려 갔을 뿐이라고 한다면 글쓰기의 상식에서 아주 멀리 벗어나는 예외가 될 것이다.

물론 아무 감흥이 없이 기계적으로 작품을 쓴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과학적인 증거는 없다. 상식적인 차원에서 글쓰는 사람들의 심리상태를 감안할 때 대단히 예외적인 것은 틀림없다. 따라서 만약 조경란이 이런 식으로 집필과정을 말했다면, 판단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불확실성의 혜택을 줄지 말지를 가늠하면 된다. 즉, 그런 식으로 소설 한 편이 나올 수도 있겠다는 편으로 혜택을 준다면 표절이 아니라는 쪽에 한 표를 주는 것이고, 그런 예외는 현실적이기가 어렵다고 본다면 그 증언이 거짓이므로 표절이라는 쪽에 한 표를 주면 되는 것이다.

민사재판이든 형사재판이든 직권주의를 채택하더라도 결국은 어느 정도의 불확실성을 감수하고 어느 편에 혜택을 줄지를 가늠하는 형태로 판결은 내려진다. 삼성에버랜드가 발행한 신주인수권부 전환사채를 주주들이 대거 권리를 포기하는 바람에 이재용이 챙겨갈 수가 있었다고 할 때에도, 그런 일이 어떤 사전 내통이나 묵계나 압력이 없이도 있을 수 있다고 보면 비리가 아닌 것이고 그럴 수는 없다고 보면 비리가 되는 것이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모든 재판에서 사실심리는 사건 현장에 없었던 사람들이 물증과 증언만으로 사건의 실체적 진상을 재구성하는 과정이다. 당연히 불확실성이 게재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직권주의를 택하든 당사자주의를 택하든, 불확실성을 어떤 식으로 배분할 것이냐는 문제가 결정적인 관건이 되는 것이며, 이때 어느 편에게 불확실성의 혜택을 허용하고 어느 편에게 입증책임을 요구할 것이냐는 판단은 법률에 정해진 일이 아니고 주어진 맥락에서 어떤 선택이 더 공정한지를 분별하는 상식에 의해 가늠될 일이다.

물론 상식이라는 것은 사실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분별은 권력에게 일임하기보다는 공론의 영역에서 다뤄져야 사법제도와 공동체 구성원들의 실생활이 일치할 수가 있게 된다. 불확실성의 배분을 권력에게 일임하게 되면 결국 권력이 이현령비현령으로 전횡을 부릴 여지를 활짝 열어주게 된다. 노무현이 합법적인 범위 안에서 열린우리당을 돕고 싶다고 한 말을 "공무원의 선거중립의무 위반"이라고 본 선거관리위원회가, 지방선거 1년전부터 자치단체가 법령이나 조례에 의해서 금품을 수여할 수 있는 경우라고 할지라도 단체장이 직접 그 자리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을 명시적으로 위반한 오세훈 서울시장에 대해서는너무나 너그럽게 지나가는 일이 그래서 가능해지는 것이다.

박연차의 일방적인 진술을 증거로 먼지털기 수사에 나선 경우는 박연차의 진술에 불확실성의 혜택을 전면적으로 부여하면서 고 노무현 대통령에게는 스스로 무죄를 입증하라고 요구한 셈이다. 반면에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를 무시해버리고, 노회찬 전의원에 대해서는 오히려 명예훼손으로 기소해서 유죄를 선고한 삼성 떡값의혹사건의 경우는 삼성과 검찰측에게 불확실성의 혜택을 전면적으로 부여하면서, 의혹을 제기한 측에게 입증책임을 강요한 꼴이 된다.

서울광장이나 청계광장의 집회를 "위험하다"는 이유로 금지하는 것도 똑같다. 아무도 거기 모이지 않는 것에 비하면 집회로 말미암아 모종의 위험이 초래될지도 모르는 것까지는 틀림없이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다면 마찬가지로 평화시위로 끝날지도 모르는 것 역시 틀림없이 맞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런 일을 금지하는 경찰의 처사가 가당한지는 단순히 "위험할 수 있다"는 판단에만 의존할 일이 아니라, "위험할 수 있는" 정도와 "위험하지 않을 수 있는" 정도 사이에서 저울질을 거친 다음에 내려져야 마땅하다. 이 저울질은 경찰이 제멋대로 내릴 일이 아니고, 오로지 공동체를 구성하는 보통 사람들만이 내릴 수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공동체의 시민들이야말로 유사시 위험을 감당해야 할 주체들이기 때문에, 동시에 자기들이 어느 정도의 위험까지를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보통법 체계에서 당사자주의 재판이란 법원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당사자들끼리 알아서 끝내라는 방식이 아니다. 민사사건이든 형사사건이든 분쟁이 발생했을 때 분쟁의 주제를 구성하는 사항에 관해 실체적 진실을 찾아내는 역할(finder of the fact, 또는 trier of the fact)을 재판소는 맡게 된다. 그런데 판사가 실제 탐정의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증거의 논리학에 따라서 어느 쪽이 말해야 할 순서고, 어떤 말을 해야 자신의 입장을 지탱하게 되는지를 정리해서 배심원들에게 알려주는 심판의 역을 담당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누구에게 불확실성의 혜택을 줄 것인지는 배심원단이 결정을 하게 된다.

반면에 위에서 논의한 조경란 표절의혹사건에서 저작권위원회는 실체적 진실을 찾아내는 임무 자체를 포기함으로써, 조경란이 주이란의 문제제기를 일방적으로 묵살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줬다. 나는 주이란이 조정결렬 이후 정식재판을 청구해서 법정투쟁을 계속하기를 바랐지만, 그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 역시 충분히 이해가 된다. 저작권위원회는 자기들이 법정과 같은 소환권이 없다는 핑계로 직무를 포기했지만, 그것은 사실 법정으로 가봤자 별 수 없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주이란에게 보낸 셈과 같기 때문이다. 한국의 민사사건에서 당사자주의란 담당판사가 실체적 진실을 찾아내는 역할을 적극적으로 챙겨서 수행하려고 하지 않는 한, 결국 시간과의 싸움이 되고 만다. 이 세상 누구도 시간과 싸워서는 승산이 전혀 없다. 한국의 법원은 당사자 중 한 편에게 시간과 싸우기를 강요하면서 시치미를 떼는 경우가 너무 많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불평의 근원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보통법 체계의 재판제도를 껍데기만이 아니라 가장 핵심적인 발상의 프레임에서부터 도입해야 할 필요가 대단히 크다.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제1권 제16장)에서 배심재판이 인민주권을 위한 중요한 장치 가운데 하나라고 보면서, 인민을 교육하는 효과가 있다고 보았다. 위에서 논의했듯이 보통법의 재판과정은 법의 본질이라는 것이 결국 불확실성의 배분에 관해 공동체 구성원 개개인이 가지는 분별력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드러냄으로써, 사회평화는 시민 각자가 건강한 판단과 그에 따른 행동으로써 조성하고 지킬 일임을 주지시킨다. 이래야 법이라는 것이 전횡의 도구가 아니고 개인들의 삶을 지켜주는 보호막이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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